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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5
- 전(傳)
- 유인 최씨 전 병자년(1936)(孺人崔氏傳【丙子】)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5 / 전(傳)
유인 최씨 전 병자년(1936)
유인 전주 최씨(全州崔氏)는 부안 김상락(金相樂)의 아내이다. 30살에 남편을 여의고 아들 딸 한 명씩을 두었는데 살림이 곤궁하여 살아가기 힘들었다. 비록 남편의 두 형이 몸소 구휼하여 주고 또한 개가할 생각을 방해하지 않았지만, 유인은 정조를 지키기로 맹세하고 삯바느질을 하며 근근이 생활을 꾸려갔다. 아들이 학질을 앓아 거의 죽게 되었는데도 약을 마련할 방도가 없자 울면서 "이 아들이 죽으면 우리 남편은 영원히 죽게 된다."라 하고는, 손가락을 찢어 피를 흘려 넣으며 국에 타서 마시게 하니 이윽고 조금씩 소생하였다.
온갖 고생을 다 형용할 수 없으니, 부귀한 집에서 자라나 평소 좋은 옷 입고 맛난 음식을 먹다가 갑자기 굶주리고 추위에 시달림을 타인은 감당하기 어려운데 유인은 다만 줄곧 참고 견디었다. 딸이 장성하여 시집가게 되자 사위를 따라 김제(金堤) 야촌(野村)에 거주하면서 자못 편안하게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사위가 또다시 곤궁하게 되자 아들을 이끌고 고부(古阜) 현암리(玄巖里)로 이사하였다.
아들이 장성하여 아내를 두었으나 곤궁함은 이전과 같아서 만년에 창동(滄東)의 옛 집으로 돌아왔으나 또한 편안한 날이 없어서 의식을 마련하느라 분주하여 늙도록 쉬지 못하였다. 갑술년(1934년) 10월 21일 길을 가다다 타지에서 죽으니 관가에서 묻어주었는데, 한 달이 지나서야 아들과 조카가 비로소 알게 되어 선영의 곁에 반장(反葬)하였다.
오호라! 천도는 선한 이를 복 주고 악한 이에게 재앙을 주니 유인은 만 번 죽어도 다행함이 없을 상황에 처하여 한 조각 빙설 같은 절개를 잡았으니, 정자의 '주려 죽은 것은 대단히 하찮은 일이요 절개를 잃은 것은 대단히 크다.'주 184)는 뜻을 들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 정절과 그 선행이 이보다 큼이 없을 것인데 평생 고생스럽게 살아 옷을 너덜너덜 기워 입고 배가 푹 꺼져 도로에서 넘어져 죽게 됨에 이르렀으니, 하늘이 재앙을 내림이 어찌하여 이처럼 가혹한가. 삼가 고인의 말에 의혹이 없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유인에게는 남편의 재종질이 되는데 맨 손으로 사는 처치라 살아서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하였고 죽어도 아무 쓸모없이 슬퍼하니 또한 부끄러울 따름이다.
- 주석 184)주려……크다
- 《소학》 〈가언(嘉言)〉에서 어떤 사람이 정자(程子)에게 외로운 과부가 빈궁하여 의탁할 곳이 없으면 재가해도 되느냐고 묻자 정자가 대답하기를 "다만 후대에 추위에 떨며 굶주려 주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이런 말이 있다. 그러나 굶주려 죽는 것은 대단히 하찮은 일이요, 절개를 잃은 것은 대단히 크다."라고 하였다.
孺人崔氏傳【丙子】
孺人全州崔氏, 扶安金相樂妻, 年三十夫亡, 有一子一女, 窮無以生, 雖有夫之二兄, 躬不恤未及, 且有不妨改適意, 孺人矢心守貞, 傭針線僅活.子病長瘧幾危, 無以爲藥, 泣曰: "此子亡, 吾夫永死矣." 裂指出血, 和羹飮之, 因漸甦復.凡百辛酸, 不可俱狀.生長富豪, 素善衣食, 而猝困飢寒, 人所不堪, 只得一直忍耐已.而女長嫁人, 從婿居金堤野村, 頗得安過, 壻又窮敗, 則挈子移居古阜玄巖里.子壯有室, 然困復如前, 晩年還于滄東舊居, 亦無有寧日, 奔走衣食, 老不休息.甲戌十月二十一日, 旅死路中, 自官瘞之, 越一月子姪始知, 而返葬先塋之側.嗚呼, 天道福善禍滛, 孺人處萬死無幸之地, 執一片氷雪之節, 其非與聞於程先生'餓死極小失節極大'之義者乎.其貞其善也, 莫斯爲大, 而一生困苦, 鶉結枵腹, 以至顚死道路, 天之降禍, 又何若是酷哉.竊不能無惑於古人之言也.余於孺人爲夫之再從姪也, 而赤手爲生, 生不能少爲之地, 死爲此無益之悲, 亦可愧也已.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