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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5
- 전(傳)
- 만취 이공 전 병자년(1936)(晩翠李公傳【丙子】)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5 / 전(傳)
만취 이공 전 병자년(1936)
공의 휘는 광우(廣雨), 자는 복일(復一), 자호는 만취(晩翠)로 한국 호남(湖南) 담양(潭陽)의 월산리(月山里)에 거주하였다. 이씨는 계통이 경주(慶州)에서 나왔으니, 고려 문충공(文忠公)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선생이 세상에 크게 알려졌다. 본조에 들어와 세자 빈객(世子賓客) 석손(碩孫)주 159)은 장릉(莊陵, 단종)의 변란주 160) 때 담양에 은거하였다. 5대조 삼락당(三樂堂) 명석(命錫)은 손재(遜齋) 박광일(朴光一)주 161)을 스승 삼았으니, 학문에 연원이 있었다.
부친은 선비 성종(誠鍾) 공이다. 공은 태어날 때부터 남다를 자질을 지녀 겨우 이를 갈 나이에 이미 성인과 같았으며 스승에 나아가서는 학문이 날로 발전하였다. 집안이 가난하여 집안 일을 도맡아 농사를 지었는데, 이윽고 조금 풍족해지자 종가를 위해 제전(祭田)을 사고 사당을 세웠으며, 또한 의전(義田)을 두어서 가난한 친척의 초상과 장례, 혼인에 보태주었다. 외조와 서당 선생을 위해 돈과 밭을 마련하여 제사를 지내며 영원히 모실 건물을 세웠다. 문을 열어 손님을 맞이하면서 한결같이 정성으로 대하였으며, 궁핍한 이들을 구휼하고 의지할 데 없는 고아들을 거둬 길러서 혼인하여 살림을 꾸리게 하였다. 떠도는 아이들을 교육하여 학문을 이루게 한 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쓰는 것은 대단히 검소하여 몸에는 장물(長物)주 162)이 없었으며, 다만 경사(經史)를 즐겼다.
세상이 변란을 겪은 이후에 도학이 어두워진 것을 마음 아파하여 선왕(先王)과 선성(先聖)이 서로 전수한 옛날의 법칙을 굳건하게 지켜 자질(子姪)이 신학을 가까이 하는 것을 엄하게 금하였으니, 일체의 법문이 확고하여 꺾을 수가 없었다. 오호라! 시운이 한없이 악화되어 변고가 날로 심해져 저들이 우리 백성들의 머리를 깎으려 하니 공은 옛날 지켜오던 머리카락을 지켰다. 마침내 위협을 가하고 시배(時輩)들이 희희낙락하며 도왔으니, 공은 백성들의 모범이 된다고 하여 강요하거늘 공은 더욱 엄격하게 거절하였다. 강요를 할수록 더욱 엄격하게 거절하니, 이와 같은 경우가 여러 번이었다. 공은 이에 면할 수 없음을 알고서 가묘에서 통곡한 뒤 선친의 묘소에 절을 올리고 친척들에게 이별을 고하였다.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모욕을 받으며 사는 것은 의리를 지키다가 죽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고는 드디어 여러 날을 곡기를 끊다가 약을 마시고 타계하였다. 바로 갑술년(1934년) 10월 19일로 나이 67세였으니, 이에 사람들이 모두 공을 절사(節士)라고 칭송하였다. 나는 애당초 공을 알지 못하는데, 백 리를 가서 그 영연(靈筵)에 곡을 하고 두 아들 상운(相運)과 상호(相瑚)에게 조문하였다. 상호는 더욱 전아하고 신중하니, 그 부친의 전형을 볼 수 있다.
다음과 같이 논한다. "맹자가 말하기를 '천하에 도가 없으면 몸을 바쳐 도리를 위해 죽는다.'주 163)라고 했으니, 대개 도 밖에는 몸이 없는데 몸을 지닌 사람이 도를 그 밖에 있다고 여긴다면 사람이라 이를 수 없다. 도는 무엇인가. 몸에 있어서는 예의며 천하에 있어서는 중화이다. 세상이 망극한 때를 만나 중화의 제도를 지킬 수 없다면 이는 몸에 예가 없으며 도의 밖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공이 머리카락을 지키다가 죽은 것이다. 유자(有子)가 말하기를 '근본이 서야 도가 생긴다.'주 164)라고 하였으니, 공의 평소 행실을 보면 죽음으로 절개를 지킴이 이 이에서 근본 하였으며 한 때 비분강개한 것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어떤 이가 성인이 남루한 옷으로 송을 지나간 일주 165)에 대해 도를 다하지 못하였다고 의심하는데, 이는 그렇지 않다. 주자는 '차분하게 하라는 건 참 좋은 말이지만 거기서 나쁘게 한번 변하면 구차한 안일함이 된다.'주 166)고 하였는데, 대개 성인이 아니면 방비해야 할 걱정을 근심하지 않으니, 매우 다급한 일을 겪다가 지켜야 할 바를 잃어버린 자를 나는 또한 많이 보았다. 공이 걱정한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는가."
- 주석 159)이석손(李碩孫)
- 자는 사언(士彥), 호는 돈암(遯菴),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길재(吉再)의 문인이다. 세종 때 좌빈객(左賓客)을 지내고 단종이 손위(遍位)하자 장인 박연생(朴衍生)과 함께 담양(潭陽)의 월산(月山)에 은거(隱居)했다.
- 주석 160)장릉의 변란
-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계유정난(癸酉靖難)을 가리킨다.
- 주석 161)손재(遜齋) 박광일(朴光一)
- 1655~1723.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사원(士元), 호는 손재(遜齋),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송시열(宋時烈)에게 사사하였다. 숙종 때 천거되어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왕자사부(王子師傳) ·세자시강원자의(世子侍講院諮議)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지리산에 들어가 산수를 즐기다가 영조 때 죽었다. 저서에 《손재집(遜齋集)》 《나소변무(羅疏辨誣)》 《진호문답(晉湖問答)》 《만덕창수록(晩德唱酬錄)》 등이 있다.
- 주석 162)장물
- 진(晉)나라 왕공(王恭, ?~398)이 아버지를 따라 회계(會稽)에서 서울로 왔을 때 친한 벗 왕침(王忱)이 그를 찾아갔다가 그가 깔고 앉은 6자 너비의 대자리를 보고는 달라고 하였다. 왕공은 그가 떠난 뒤에 즉시 대자리를 거두어 보내주고 자신은 언치를 깔고 앉았다. 뒤에 왕침이 이를 알고 매우 놀라자 왕공이 "나는 평소에 남는 물건이 없네.〔吾平生無長物〕"라고 하였다. 《晉書 卷84 王恭列傳》. 좋은 물건이 없다는 의미이다.
- 주석 163)천하에……죽는다
-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천하에 도가 있을 때에는 도로써 몸을 따르고, 천하에 도가 없을 때에는 몸으로써 도를 따르나니, 도로써 남을 따른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天下有道 以道殉身 天下無道 以身殉道 未聞以道殉乎人者也〕"라고 하였다.
- 주석 164)유자가……생긴다
- 공자의 제자 유약(有若)이 "군자는 근본을 힘쓰니, 근본이 일단 확립되면 도가 자연히 나오게 되어 있다. 그러니 효제가 바로 인을 행하는 근본이라고 할 것이다.[君子務本 本立而道生 孝弟也者 其爲仁之本與]"라고 하였다. 《論語 學而》
- 주석 165)성인이……일
- 공자가 송(宋)나라를 지나가려 하자 사마환퇴(司馬桓魋)가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죽이려 하므로, '변복을 하고 송나라 땅을 지나갔다.[微服而過宋]'라는 고사이다. 《孟子 萬章上》
- 주석 166)주자는……된다
- 이 말은 주자가 아니라 우암 송시열이 한 말이다. 《송자대전》 권29 〈여이사심(與李士深)〉에 보인다.
晩翠李公傳【丙子】
公諱廣雨, 字復一, 自號曰晩翠, 居韓國湖南潭陽之月山里.李氏系出慶州, 在麗文忠公益齋先生, 大顯于世.本朝世子賓客碩孫, 莊陵之變, 遯于潭.五世祖三樂堂命錫師遜齋朴公光一, 學有淵源.父, 士人誠鍾公, 生有異質, 甫齔己如成人, 就師而學日長.以家貧, 幹蠱服田, 旣而稍饒, 爲宗家置祭田立祠堂, 又置義田, 助給貧族之喪葬婚姻.爲外祖及塾師, 以金以田, 立享祀永遠之具. 開門接賓, 一以誠款, 幷賙其窮乏, 收養無託之孤, 經紀婚産, 敎育流離之子, 以至學成非一二.自奉甚約, 身無長物, 惟以經史自樂.自世變以後, 痛道術晦盲, 益守先王先聖相傳舊規, 嚴禁子姪勿近新學, 一切法門, 有確乎不可拔者.嗚呼, 時運罔極, 變故日甚, 彼欲薙, 守舊人髮, 竟加脅勒, 時輩又樂助之, 以公爲民望强之, 公拒之嚴, 愈强愈嚴, 如是者累矣.公知不可免, 痛哭家廟, 拜省先墓, 行訣族戚, 語人曰: "與其受辱而生, 不若守義而死", 遂絶食累日, 仰藥而逝, 乃甲戌十月十九日也, 而年六十七, 於是人咸稱公爲節士.余初不識公, 越百里哭其靈, 吊其二子相運相瑚, 瑚尤雅飭, 其父典型可見.論曰: "孟子有言, '天下無道, 以身殉道', 蓋道外無身, 身而外道, 不可謂人.道者何, 在身則禮義, 在天下則華夏.世値罔極, 華制不得守, 則是身無禮而外於道矣, 此公所以保髮而殉者也.有子曰: '本立而道生', 觀其生平制行, 足以知終節之本於是, 非出於一時慷慨者流也. 或有以聖人微服過宋之事, 疑其未盡道者, 非也.朱子曰: '從容雖是好題目, 一變則爲苟偸', 蓋非聖人, 則防慮不患, 其過倉卒而失其所守者, 余見亦多, 公之所慮, 不亦宜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