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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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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家狀)
- 선비 유인 최씨 가장(先妣孺人崔氏家狀)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5 / 가장(家狀)
선비 유인 최씨 가장
선비 유인 최씨는 계통이 호남(湖南) 전주부(全州府)에서 나왔으니, 고려 시중 문성공(文成公) 휘 아(阿)가 시조이다. 조선에 들어와서 월당(月塘) 휘 담(霮)이 제학(提學)으로 있다가 벼슬에서 물러났다. 이 분이 네 아들을 낳았으니, 광지(匡之)와 직지(直之)는 제학(提學)이며 득지(得之)는 소윤(少尹)이며, 덕지(德之)의 호는 연촌(烟村)으로 또한 직제학(直提學)이 되었기에 세상에서 한 가문에 네 명의 제학이 나왔다고 칭하였다. 소윤 공의 아들 현감(縣監) 휘 자목(自睦)이 처음으로 고부(古阜)에 거주하였으니, 자손들이 고부의 명망가가 되었다. 중종(中宗) 때 판관(判官) 휘 희정(希汀)이 왜적을 토벌하여 공을 세워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니, 이 분이 현감공의 증손으로 선비(先妣)의 13대조이다. 휘 광흔(光昕), 재원(在瑗), 석홍(錫洪)은 부친 이상 삼대이며, 선비는 여흥 민씨(驪興閔氏) 성무(聖懋)의 따님이다.
선비는 철종 정사년(1857년) 9월 14일에 장순면(長順面) 양지리(陽池里)에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 효성스럽고 공순하여 부모의 마음을 편하게 하였으며 여공(女工)을 일찍 배워 여스승이 가르칠 필요가 없었다. 18살에 우리 선군에게 시집왔으니, 선군의 휘는 낙진(洛進), 자는 치일(致一), 관향은 부령(扶寧)이다. 시집와서 보니 시조모인 송씨는 81살로 숨이 끊어질 듯하여 앉거나 누울 때 사람의 손이 필요하였다. 이전에 집안사람들은 그 마음을 잘 맞춘 사람이 드물었는데, 선비가 집에 들어오자마자 성심으로 받들어 모셔 몸을 편하게 하는 물건을 모두 이바지하여 6년을 한결같이 하였다. 송씨는 항상 "내가 죽어서 만약 영혼이 있다면 반드시 네 후손을 창성하게 하리라."라고 하였다.
선비는 부도(婦道)를 매우 정성스럽게 행하였으니, 오직 시모의 명은 어기지 않았으며 비록 지극히 하찮은 일이라도 감히 자신 마음대로 하지 않았다. 시모는 성품이 엄격하여 때로 분수 넘치게 화를 내어 사람들이 감당하지 못하였는데 달게 받아들이고 변명하지 않았으며 더욱 공손하게 섬기니 보는 이들이 칭송하였다. 시모는 평소 병을 많이 앓아 약과 죽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정성을 다해 올렸으며, 따뜻함과 시원함을 알맞게 하고 굶주림과 배부름을 때로 살폈다. 선군은 본성이 효성스러워 정성을 다해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여 모셨다. 간재(艮齋) 전우(田愚) 선생 문하에서 노닐게 되자 실제 학문에 종사하여 〈내칙(內則)〉, 〈곡례(曲禮)〉 등 작은 예절에 더욱 마음을 다하였으니, 겨울에는 혼정신성(昏定晨省) 이외에 반드시 한 밤중에 나아가 안부를 물었으며 드시고 싶은 것을 올렸다.
선비는 품부 받은 기가 허약하였는데, 이 당시 50살이 넘어 이미 늙고 병들어 있었는데도 몸소 직접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기 위해 한밤중이라도 자주 일어났지만 싫어하는 기색 없이 기쁜 마음으로 하였다. 선군이 돌아가신 뒤 7~8년 사이에 선비는 몸이 메마르고 기가 고갈되었다. 일어나기도 어려워 우두커니 앉아 있는 병든 노인이었는데도 오히려 같은 방에서 시모를 모셔 전부를 받들어 모셨다. 더구나 시모가 노망이 들어 자주 얼토당토 않는 말이나 그런 행동으로 선비를 힘들게 하여도 온화하게 받아주었으니, 다만 낯빛에 드러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한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았다. 우리 형제들과 여러 며느리들이 민망하게 여겨 다른 방에 거처하라고 청하고서 그 수고를 대신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다시 돌아가 모시면서 "잠시 시모 곁을 떠나니 마음이 불안하구나."라고 하였다. 시모 또한 완전히 인사불성이 되었지만 다만 며느리가 곁에 없으면 불러서 찾으니, 대개 평소 선비의 효를 편안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향리에서 말하기를 "모부인이 백세가 되도록 건강한 것은 효성으로 봉양한 며느리 덕분이다."라고 하였다.
선군이 고조의 종통(宗統)을 이었는데 지친(至親)이 매우 드물었으며 또한 거처하는 곳이 매우 멀어 매번 제삿날이 오면 와서 도와주는 동서(同壻)들이 없었는데, 선비 홀로 그 일을 주관하여 정성을 다하고 온 힘을 기울여 청결한 제수를 마련하였다. 매번 겨울밤에 제수가 비록 이미 요리되었어도 일찍이 잠자리에 들지 않았으며 단정히 앉아 닭이 울 때까지 기다렸다. 여러 자부(子婦)들이 곁에 있게 되어 그 일을 맡길 사람이 없음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는데, 오히려 반드시 몸소 점검하면서 "이는 주부의 책임이다. 감히 나의 정성을 다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항상 친정의 가난하여 선조를 받들 때 의례대로 하지 못함을 한스러워하였는데, 만년이 되자 부모의 기일을 만나면 나에게 명하여 제수를 갖춰 보내게 하였으니, 이를 한 해 해야 할 일로 삼았다. 선군이 젊었을 때 성품이 제법 사나웠는데, 함께 살림을 꾸려갈 때 비록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온 마음으로 뜻을 받들어 따르고 그 가부를 따지지 않았는데, 마침내는 선군이 깨우치게 되었다. 자녀들이 허물이 있으면 온화한 말로 깨우치고 일찍이 화를 내며 매질하지 않았으니 "예에 존귀한 손님 앞에서는 개도 꾸짖지 않거늘주 155) 어찌 감히 자녀를 사사로이 때려서 시모와 남편의 마음을 편치 않게 하겠느냐."라고 하였다. 내가 스승을 좇아 멀리서 공부할 때 조모께서 노자가 넉넉하지 않음을 걱정하니 나아가 아뢰기를 "살림이 가난한 것은 지금의 해로움이지만 자손이 인하고 어진 것은 원대한 이로움입니다."라고 하였다.
진심을 담았지만 말이 어눌하였으니 비록 정이 두터운 사람을 대하더라고 일찍이 웃으며 말하면서 정이 넘치지 않았다. 친정의 친한 형제라도 문안을 묻는 것 이외에는 달리 사사로운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으며, 타인의 장단점이나 시비에 대해서는 그 허실을 논하지 않아 일체 입에 올리지 않았다. 항상 "입으로 욕을 부르는 것은 장부에 있어서도 오히려 덕에 허물이 되거든 더구나 아녀자가 이를 범하여 시비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은 다만 나쁜 행실일 뿐 아니라 대단히 가풍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친척의 집에 출입하는 것을 가려서 혼인이나 상례 등 큰 일이 아니면 가지 않았다. 한 마을에 사는 다른 성씨의 인물에 대해서는 그 집이 어디인지도 모를 정도였다. 세상의 아낙들이 딸을 시집보낸 뒤에 빈번하게 내왕하는 것을 싫어하였으니, 시집간 두 딸의 집을 10년 가까이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내가 일찍이 장 대제(張待制) 부인이 딸을 보러간 일주 156)로 고하니 이에 한두 차례 가서 보았다.
본성이 인후하고 정이 많아 집이 평소 가난하여 살림을 마음대로 하진 못하여 비록 사람들에게 두텁게 베풀지는 못하였지만 그 뜻은 알 수 있었으니, 굶주리는 사람을 보거든 자신은 비록 먹지 못하더라도 반드시 그릇을 비워 주었다. 병술년(1886년)과 무자년(1888년) 두 해에 큰 흉년이 들었는데, 생질 남매들이 찾아와 죽을 먹었는데, 곯고 배부름을 자신의 소생과 똑같이 하였으니 지금도 여러 조카들이 울면서 그 은혜를 말한다. 주곡(晝哭)주 157) 이후로 죽을 때까지 슬픔을 머금고 일찍이 이를 보이지 않았는데, 이로 인해 몸을 많이 상하여 거의 목숨을 보존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항상 나에게 이르기를 "너의 선군의 지극한 효성으로 불행히도 갑자기 세상을 떠나 부모 봉양을 마치지 못하였는데, 지금 내가 또한 이처럼 쇠약하니 만약 조모보다 먼저 하루아침에 떠난다면 나는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병진년(1916년) 2월 29일 병이 나서 3월 16일 축시(丑時, 3~5시)에 세상을 버리셨으니, 실로 시모가 돌아가신 지 3일 뒤이다. 임종할 때 자손이나 후사에 대해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다만 효도를 마치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겼으니, 대개 시모보다 7일 먼저 병이 났으니, 그 사이에 병이 나았다가 다시 심해진 것이 모두 세 차례였다. 말하는 자들이 최 유인이 평소 그 효성으로 신명을 감동시켜서 먼저 발병하였지만 뒤에 타계한 것은 아마도 하늘이 봉양을 마치려는 효성을 이루어 주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달천(達川)의 뒷산기슭 선군의 묘소 왼쪽에 합부하였는데, 후에 부안군(扶安郡) 부안읍(抉安邑) 모산(芧山) 분재(粉齋) 앞 왼쪽 산기슭 ■좌에 이장하였다. 네 아들을 두었으니, 택술, 봉술(鳳述), 만술(萬述), 억술(億述)이 있고 두 딸은 광산(光山) 김재봉(金在鳳), 고흥(高) 유동기(柳東起)에게 시집갔다. 장남의 아들로 형복(炯復) 형태(炯泰), 형관(炯觀), 형겸(炯謙)이 있고 딸들은 전주(全州) 최춘렬(崔春烈), 밀성(密城) 박진호(朴珍浩)에게 시집갔다. 차남은 아들로 형귀(炯龜)가 있고 딸들은 김해(金海) 김태현(金泰賢), 청주(淸州) 한행종(韓幸鍾), 전주(全州) 최규택(崔圭澤), 경주(慶州) 이상헌(李相憲)에게 시집갔다. 삼남은 아들로 형수(炯洙), 형락(炯洛), 형방(炯坊)을 두었고 딸은 창녕(昌寧) 장해초(張海楚)에게 시집갔고 한 명은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사남은 아들로 형식(炯湜), 형주(炯澍), 형호(炯濩), 형부(炯溥)를 두었고 딸은 김해 김인태(金仁泰)에게 시집갔고 다른 한 명은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사위 김재봉은 아들로 상현(庠鉉)을 두었고 딸은 탐진 안영식(安永植)과 함평 이근범(李根範)에게 시집갔다. 사위 유동기는 종태(鍾泰), 종천(鍾千), 종칠(鍾七)을 두었고 딸들은 울산(蔚山) 김택수(金宅洙), 김해 김종연(金鍾淵), 전주 이형구(李亨九)에게 시집갔다.
오호라! 애통하도다. 선비의 효성과 어짊은 마땅히 장수와 편안함을 누려야 하는데 젊어서 늙을 때까지 늙어서 돌아가실 때까지 시모 봉양에 애를 쏟으며 일찍이 하루도 앉아서 자식의 봉양을 받지 못하다가 시모가 돌아가신 뒤에 갑자기 따라서 떠나시니, 이것이 불초의 끝이 없는 한이다. 효부의 칭호를 선비께서 향촌과 친척들에게 얻었는데 감히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없으니 어찌 나의 말이 필요하리오. 다만 규문 안의 평소 말과 일상적인 행동이 발하여 이치에 부합하고 시행하여 옳은 것을 참으로 타인이 알 수가 없으니, 불초가 어찌 감히 숨겨두고 기록하지 않아 불인한 죄를 범하겠는가. 이에 감히 평소 혼정신성 사이에 보고 들은 것과 및 효성으로서 크게 거론될 일을 기록하고서 편차하여 가장을 지어서 문하의 불후의 붓을 빌리고 싶습니다.주 158) 만일 이 가장을 가지고 논한다면 효부라 칭하는 것에 혹 미진할 지는 모르지만 옛날 이른바 여사(女士)에 부류에 견준다면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원컨대 문하는 남의 아들의 사사로운 말이라고 해서 내치지 마시고 취하여 채택하는 자료로 삼는다면 대단히 다행이겠습니다.
병진년(1916년) 9월 14일 선비의 생신일에 불초 애자 택술을 피눈물을 머금으며 삼가 짓는다. -29년 뒤인 갑신년(1944년) 중하에 첨삭하고 수정하였다.-
- 주석 155)존귀한……않거늘
- 《예기》 〈곡례상(曲禮上)〉에 "존귀한 손님 앞에서는 개도 꾸짖지 않는다.[尊客之前不叱狗]"라고 하였다.
- 주석 156)장 대제……일
- 《소학》 〈선행(善行)〉에서 "하루는 딸을 보러 왔는데, 집 뒤에 냄비와 솥 등이 있는 것을 보고서는 크게 언짢아하며, 신국부인에게 일러 '어찌 어린 아이로 하여금 사사로이 음식을 만들게 하여 가법을 무너뜨리는가?'라 하였으니, 그 엄격함이 이와 같았다.[及夫人嫁呂氏 夫人之母 申國夫人姊也 一日 來視女 見舍後 有鍋釜之類 大不樂洛 謂中國夫人曰 豈可使小兒輩 私作飲食 壞家法耶 其嚴如此]"라 하였다. 여기서는 장 대제 부인이 딸을 보러 간 것만을 취하여 모친에게 딸을 보러 가라고 권하였다는 말이다.
- 주석 157)주곡
- 남편의 죽음을 의미한다. 춘추 시대 때 노(魯)나라 재상 문백(文伯)의 어머니 경강(敬姜)이, 남편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낮에만 곡을 하고, 나중에 아들 문백이 죽자 밤낮으로 곡을 했는데, 공자가 이를 두고 경강이 예(禮)를 안다고 논평했던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禮記 檀弓下》
- 주석 158)문하의……싶습니다
- 이 부분의 내용은 즉, 가장을 짓고 나서 묘갈명을 대가에게 받기 위함을 상정하여 한 말이다.
先妣孺人崔氏家狀
先妣孺人崔氏, 系出湖南之全州府, 高麗侍中文成公諱阿, 爲鼻祖.入本朝, 月塘諱霮, 以提學致仕, 是生四子, 匡之直之皆提學, 得之少尹, 德之號烟村亦直提學, 世稱一門四提學.少尹公子縣監諱自睦, 始居古阜, 子姓爲阜之望.中廟時, 判官諱希汀, 討賊樹勳, 贈兵曹參判, 是爲縣監公曾孫, 而先妣十三世, 諱光昕在瑗錫洪其三世, 妣, 驪興閔氏聖懋女.以哲廟丁巳九月十四日, 生于長順面陽池里, 生而孝順, 安父母心, 女紅夙就, 不煩姆敎.年十八歸我先君, 先君諱洛進, 字致一, 姓金氏, 貫扶寧.歸則有祖姑宋氏年八十, 氣息奄奄, 坐臥須人, 前此家人鮮有適其意, 先妣纔入門, 誠心供奉, 便身之物畢給, 六年如一日.宋氏常曰: "我死, 若有知, 必昌汝後." 先妣執婦道甚謹, 惟姑命無違, 雖至細微事, 無敢自專.姑性嚴, 分外之怒時有, 人所不堪, 而甘受無辨, 服勤愈恭, 見者稱賞.姑素多疾病, 藥餌糜粥, 殆無虛日, 專心供進, 適溫冷時飢飽.先君性孝, 忠養備至.及遊艮齋田先生門, 從事實學, 尤謹於〈內則〉〈曲禮〉疏節, 冬節則定省外, 必夜中進候, 供所欲.先妣稟氣虛薄, 是時年五旬餘, 已老且病矣, 而躬親甘旨, 夜中頻起, 欣然無難色.先君沒後, 七八年間, 先妣肉敓氣竭, 艱於振作, 居然一癃老人, 猶侍姑一室, 一應供奉是給, 加以姑昏耄, 累以非理之言非常之擧加之, 怡然受之, 不惟不見於色, 亦不曾作於意. 不肖輩及諸婦憫之, 請處他室而代其勞, 居無何輒復歸侍曰: "暫離姑側, 心事不安." 姑亦渾不省事, 而惟婦不在側, 則呼而覓之, 蓋以平日安其孝也.是以鄕里語曰: "某夫人百歲康寧, 得其婦孝養之力也." 先君爲繼高祖之宗, 而旣是終鮮至親, 居又稍遠, 每當祭祀, 無諸婦女來助者, 先妣獨自管當, 殫誠極力, 務令腆潔.每於冬夜, 饌雖已具, 未嘗就睡, 端坐待鷄鳴.及其有諸子婦在, 則不患無任其勞者, 猶必親檢曰: "此主婦之責, 不敢不盡吾誠." 常恨親家衰貧, 奉先不得如儀, 逮晩年, 當父母忌辰, 命不肖備送祭需, 作歲課.先君少時, 性稍厲, 與之治家, 雖有不諒悉處, 一意承順, 不與辨理可否, 終得感悟.子女有過, 以溫言喩之, 未嘗忿摑曰: "禮, 尊客之前, 不叱狗, 安敢私打子女, 不安姑與夫之心乎." 不肖從師遠遊, 祖妣以盤纏難給爲慮, 則進言曰: "産業窮蹙, 目下之害, 子孫仁賢, 遠大之利." 悃愊訥言, 雖接情厚人, 未嘗笑語款洽, 私親兄弟, 來往寒暄外, 幷無一言私語, 至於人家長短得失, 不論虛實, 一切不掛口, 常曰: "以口取辱, 在丈夫猶爲累德, 况婦女而犯此, 入於是非援引中, 非惟汙行, 玷辱家風大矣." 簡出入族親家, 非婚喪大故不往, 異姓居一里, 至有不知其家者.疾世之婦女嫁女後, 頻頻來往, 兩女適人, 近十年不一往, 不肖嘗以張待制夫人視女事告之, 於是一二次往見.性仁厚惻怛, 家素貧, 且不得自專, 雖未嘗厚施於人, 其志則可見, 見人飢困, 己雖未食, 必傾器與之.丙戊兩歲, 大饑, 甥姪兄妹, 就食饘粥, 飢飽一視己出, 至今諸甥泣說其恩.自晝哭後, 終身銜哀, 未嘗啓齒, 因以致毁, 幾不能保.常謂不肖曰: "以汝先君之誠孝, 不幸遽世, 未終養親, 今吾衰又如此, 若一朝溘然, 先於皇姑, 吾死不瞑目." 以丙辰二月二十九日寖疾, 三月十六日丑時棄世, 實後姑沒三日.屬纊時無一言及子孫後事者, 但以未得終孝爲恨, 蓋病先於姑七日, 而其間己瘳旋欲者凡三次, 說者以爲崔孺人平日孝格神明, 其先病而後沒者, 殆天遂其終養之孝.初袝于達川後麓先君墓左, 後移扶安郡抉安邑芧山粉齋前左麓■坐.四男, 四男, 澤述·鳳述·萬述·億述, 二女光山金在鳳·高興柳東起.長房男, 炯復·炯泰·炯觀·炯謙, 女適全州崔春烈·密城朴珍浩.次房男, 炯龜, 女適金海金泰賢·淸州韓幸鍾·全州崔圭澤·慶州李相憲.三房男, 炯洙·炯洛·炯坊, 女適昌寧張海楚, 一未適人.四房男, 炯湜·炯澍·炯濩·炯溥, 女適金海金仁泰, 一未適人.金壻男, 庠鉉, 女適耽津安永植·咸平李根範.柳婿男, 鍾泰·鍾千·鍾七, 女適蔚山金宅洙·金海金鍾淵·全州李亨九.嗚呼痛矣, 以先妣之孝且賢, 宜享耄期安樂, 而少而老, 老而歿, 勞悴於養姑, 未嘗一日坐受子媳之奉, 姑沒之後, 遽從而歸, 是爲不肖罔極之恨也.孝婦之稱, 先妣之得於鄕黨族戚, 而無敢間然者, 何待乎不肖之言.惟是閨閤間庸言常行, 多有發之合理, 施之當可者, 固非他人之所皆知, 則不肖何敢蔽而不書, 用犯不仁之罪.乃敢摭錄平日定省間所見聞者, 幷與孝行大節, 而撰次成狀, 欲乞不朽之筆於門下.苟執此狀而論之, 竊恐孝婦之稱, 爲未盡, 而擬於古所謂女士之流, 不爲過矣.願門下勿以人子私言而棄之, 取而爲裁擇之資, 幸甚.歲在丙辰九月十四日, 先妣生辰, 不肖哀子澤述泣血謹狀.【後二十九年甲申仲夏添刪修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