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역/표점
- 국역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5
- 가장(家狀)
- 선고 벽봉 부군 가장(先考碧峰府君家狀)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5 / 가장(家狀)
선고 벽봉 부군 가장
부군의 휘는 낙진(洛進), 자는 치일(致一), 벽봉(碧峯)은 자호이다. 김씨는 신라의 국성(國姓)에서 나왔으니, 경순왕(敬順王) 태자 휘 일(鎰)은 부왕이 나라를 고려에 넘기는 것을 간하다가 들어주지 않자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가 삼옷과 풀뿌리를 캐먹다가 생을 마쳤다. 그 후 휘 경수(景修)는 고려 선종(宣宗) 때 이부 상서(部尙書)가 되었다. 이 분이 휘 춘(春)을 낳으시니, 춘은 부령부원군(扶寧府院君)에 봉해졌다. 2대를 지나 휘 작신(作辛)이 부령군을 이어받아 봉해지니, 이로 인해 관향으로 삼았다. 또다시 2대를 지나 평장사(平章事) 문정공(文貞公) 휘 구(坵)는 불교를 배척하고 정학을 세웠으며 오랑캐를 물리치고 중화를 높였으니, 도덕과 문장이 당대에 으뜸이었다. 이 분이 지포(止浦) 선생으로 형부 상서(刑部尙書) 충선공(忠宣公) 휘 여우(汝盂)를 낳았다. 여우는 원나라에 들어가 공자 사당의 제도를 그려서 가지고 와 강릉(江陵)에 처음으로 세우니, 사림들이 두 부자가 사문(斯文)에 공이 있다고 하여 부안(扶安) 도동(道東)에 사원을 세웠다.
5대를 지나 고부 군사 휘 광서(光敘)는 고려의 국운이 다한 것을 보고서 조선에 신하가 되지 않겠다는 뜻을 지니고 관향인 부안으로 완전히 돌아왔다. 이에 자손들이 대대로 거처하게 되었으니, 이 일은 《충의록(忠義錄)》에 보인다. 이 분이 휘 취(王就)를 낳으니, 취는 조선에서 직장(直長)을 지냈다. 이분 이 휘 보칠(甫漆)을 낳으니, 보칠은 빈과(贇科)에 합격하여 열여섯 고을을 다스렸으며, 역적 이시애(李施愛)를 토벌하여 공을 세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올랐다. 이 분이 휘 숙손(淑孫)을 낳으시니, 숙손은 임실 현감(實縣縣監)이 되어 뛰어난 정사를 펼쳤다. 이 분이 진사 매죽당(梅竹堂) 휘 종(宗)을 낳으셨는데, 노천(老泉) 김식(金湜)주 133) 공이 조정에 천거하면서 "조행(操行)이 돈실하며 물이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선을 따른다."라고 하였다. 기묘사화(己卯士禍) 이후에 은거하면서 학생을 가르치며 조정에서 불러도 나아가지 않았다.
이 분이 휘 경정(景貞)을 낳았으니, 경정은 예빈시 주부(禮賓寺主簿)를 지냈다. 이 분이 죽계 휘 굉(鋐)을 낳으니, 굉은 진사시에 장원하고 생원시에 2등하였다. 모당(慕堂) 홍리상(洪履祥)주 134) 공,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공 등과 도의로 사귀었으며, 학행으로 선릉 참봉(宣陵參奉)에 제수되었다. 유천사(柳川祠)에 제향 되었다. 이 분이 정길(鼎吉)을 낳았으니, 정길 또한 학행으로 군자감 참봉(軍資監參奉)에 제수되었으며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다. 이 분이 휘 숙(潚)을 낳았는데, 숙은 경학에 통달하였으며 선대의 가업을 이었으니, 호는 지와(止窩)이다. 그 아들은 통덕랑(通德郞) 휘 세광(世光)으로 고부(古阜)에 옮겨와 거주하였으니, 이 분이 부군의 7대조이다. 증조의 휘는 인성(麟成)으로, 효성으로 정려를 받았다. 조부의 휘는 석규(錫圭)로, 문장과 행실이 뛰어났다. 부친의 휘는 경순(景淳)으로 또한 효성으로 정려를 받았다. 조부와 손자 두 대의 일은 《삼강록(三綱錄)》에 보이며, 간재(艮齋) 전우(田愚) 선생이 〈이효정려기(二孝旌閭記)〉를 지어주었다. 모친은 영광 김씨(靈光金氏) 통정(通政) 택려(宅麗)의 따님이니 대호군(大護軍) 해(該)의 9대손으로 집안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어서 규문이 정숙하였다.
철종 기미년(1859년) 2월 2일 술시에 창동리(滄東里) 집에서 부군을 낳았다. 부군은 자질이 뛰어나서 2살에 책을 읽었으며 9살에 부친상을 당하여 성인처럼 슬퍼하고 통곡하였으며 스승이 상례를 가르치자 그것을 외웠다. 10살에 이웃 마을에서 학업을 익혔는데, 지나다니는 길이 깊은 숲이라 귀신이 우는 곳이 있었지만 반드시 밤에 가서 책을 읽고 집으로 돌아와 자다가 닭이 울면 곧바로 가서 스승이 일어나기를 기다려 촛불을 밝혀 수업을 받았다. 비록 비바람이 치더라도 멈추지 않으니 문사가 날로 발전하였다. 12살에 과체시를 지었는데 간간이 노련한 사람이라도 미처 표현하지 못한 말이 있었으니, '청전의 흰 학이 날아드네[白靑田鶴來]'라는 말에 대해 사람들이 "이 아이의 시재는 평범한 부류를 뛰어넘었으니, 반드시 크게 성취할 것이다."라고 하고서 인하여 훌륭한 구절이라며 세상에서 널리 외웠다. 14살에 과거시험장에 들어가 스스로 짓고 스스로 써서 제출하였다. 16살에 서울에 과거 보러 가서 여러 선비들과 문예를 다투니, 당시 과체를 잘 짓는 자들이 대부분 앞자리를 양보하지 않음이 없었다.
병자년(1876년)에 큰 흉년이 들었는데, 조부모와 부모를 모심에 집안일을 주관할 사람이 없자 마침내 집안일을 맡게 되니 학업이 중단될 때가 많게 되어 과거도 또한 그만두었다. 기묘년(1879년)에 조모 송씨의 상을 당하여 승중상(承重喪)주 135)을 거행할 때 예서에 정해진 대로 하였다. 경진년(1880년)에 모친이 병을 앓자 논 열 마지기를 팔아 약을 사고 손가락을 찢어 피를 내서 약에 타서 올리니 곧바로 약효가 났다. 모친은 성격이 엄하여 명을 내리기만 하면 정성을 다해 받들어 따랐다. 항상 새벽이면 문안을 드리고 저녁이면 이부자리를 살폈는데 의복을 단정히 하고 절을 올렸다. 초하루와 보름에는 재배를 올렸으며 생신과 설날에는 헌수(獻壽)를 올렸다. 집안이 가난하여도 맛있는 음식을 항상 이바지하였으며 맛있는 음식을 얻으면 몸소 잘 요리가 되었는지 살폈으며 밤이 깊으면 먹을 것을 올리게 하였으며 새벽에도 또한 그렇게 하였다. 겨울밤에는 혼정신성(昏定晨省) 이외에도 자주 나아가 안부를 물었으며, 때로 반찬이 없게 되면 몸소 앞 시내로 나가 통발을 가지고 물고기를 잡았다. 비록 풍설이 몰아쳐도 반드시 잡은 뒤에야 돌아왔으니, 늙어서 머리가 하얗게 새었어도 모친 봉양에 게으르지 않았다. 항상 좋은 삼을 사두었다가 기운이 허해짐을 대비하였으니, 이렇기에 모친은 90살이 되어도 오히려 병이 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천성이 그러한 것으로 억지로 힘써서 그런 것이 아니었으니, 혼정신성할 때 절을 올린 것은 만년의 일이다.
계미년(1883년) 겨울에 증조와 부친의 정려 일로 상경하여 격쟁(擊錚)주 136)하여 어가 앞에서 하소연하니 마침내 은전을 받게 되었다. 무자년(1888년) 큰 흉년이 들자 여러 조카들의 자식과 친족의 많은 노인, 어린이들이 찾아와 먹을 것을 구하자, 자신이 비록 넉넉하지 않지만 조금도 어려운 기색이 없이 죽을 끓여 이바지하니 모든 이들이 이에 힘입어 살게 되었다. 갑오년(1894년)에 동학의 괴수 전봉준(全奉準)이란 자가 부친의 연제(練祭)주 137)를 지내게 되었는데, 방백과 읍재부터 여항의 촌부들까지도 앞 다퉈 부의를 보내며 위로하였다. 그러나 부군은 이웃 마을에 살며 오랫동안 교유했지만 홀로 조문하지 않았는데, 어떤 이가 그 일로 위태로운 일을 당할까 걱정하자 말하기를 "붕우가 큰 잘못을 저지르는데 교유를 끊지 않고 어찌하겠는가. 화복은 물을 필요가 없다."라고 하였다.
병신년(1896년) 마을 남쪽 시냇가에 작은 정자를 짓고 학동들과 학문을 강론하니, 군수인 윤병(尹秉)이 듣고서 '활수(活水)'라는 편액을 주고 아울러 기문을 지으니 주자 시의 뜻을 취한 것이다.주 138) 후에 간재 전 선생이 다시 기문을 지어주었다. 무술년(1898년) 봄에 향교의 색장(色掌)이 되었으며, 가을에 장의(掌議)가 되어 오래 묵은 폐단을 개혁하여 향교의 재정을 정비하고 대성전(大聖殿)을 수리하여 오래 유지할 계책으로 삼았습니다. 경자년(1900년) 가을에 전 선생이 변산(邊山)의 월명암(月明菴)에 머물며 나에게 명하여 찾아가 배알하라고 하니, 선생이 나를 사랑하여 친히 부군을 찾아 주었다. 어떤 사람이 아들의 스승으로 정하라고 권하니, 부군은 집에서 스승을 정하면 정성이 아니며 또한 예도 아니라고 하고서 이에 날을 잡아 폐백을 갖춰 4백 리 길을 가서 천안의 산중에서 절을 올리게 하고 사제(師弟)를 정하였다. 신축년(1901년) 크게 흉년이 들자 토지를 팔아서 사문에 재물을 보냈으며, 매번 나를 보낼 때 반드시 예물을 딸려 보냈다. 간옹이 일찍이 편지를 써서 "성인이 '인에 당해서는 스승에게도 사양하지 않는다.'주 139)라고 하였는데, 스승에게도 사양하지 않거늘 하물며 아들이겠는가."라고 하였다. 부군이 그 말에 감동하여 드디어 이 학문에 온전히 뜻을 두고서 간옹을 모범으로 여겨 반드시 선생이라 칭하고 아무개 어른이라 이르지 않았다.
출입하거나 평소 거처에 항상 큰 삿갓과 넓은 소매의 두루마기를 착용하였는데, 좁은 소매의 두루마기 입고서 책을 읽는 선비를 보면 곧 "선비의 행색은 절로 법복이 있거늘 어찌 세속을 따르는가."라 하였으니, 이로 인해 향당에서 경외하였다. 비록 이웃의 농부라도 관을 쓰지 않으면 다가가서 만날 수가 없었다. 일찍이 두풍(頭風)주 140)을 앓아 백회의 머리칼을 잘라냈는데, 문득 스스로 깨우치고서 "머리칼과 피부를 훼손하지 말라는 것은 성인의 가르침에 보이거늘, 차라리 병을 앓고 말지 어찌 불효를 범하리오."라고 하고는 마침내 다시는 자르지 않으니 두풍도 또한 앓지 않았다. 또한 일찍이 흡연을 즐겼는데, 전재 임 선생의 '흡연이 비록 작은 일이나 실로 큰 덕에 허물이 된다.'라는 말을 보고 곧바로 흡연하는 도구를 내다버리고 다시 피지 않았다. 이에 찾아오는 빈객들은 대부분 밖에다가 흡연하는 도구를 놓고 들어갔다.
아들의 관례에는 반드시 삼가례주 141)를 행하였고, 부모의 상에는 검은 베옷과 삿갓을 사용하였다. 초상에 남은 음식으로 손님을 대접하지 않았으며 타인을 조문할 때 술과 고기를 먹지 않았으니, 연상(練祥)에 술에 취하고 배부르게 먹는 풍습을 금지하는 윗사람이 없는 것을 탄식하였다. 기공(朞功)주 142)에 성복(成服) 전에 관을 벗지 않았는데, 세속을 놀라게 하는 것에 대해 괘념치 않았다. 국상을 당하면 평소 거처에 흰 관을 썼으며 시를 짓지 않고 음악을 듣지 않았으니, 고을 사람들이 대부분 공을 따라 하였다. 책을 읽을 때는 깊은 풀이를 구하지 않고 주된 의미를 잃지 않으려 힘썼으며 매번 마음에 맞는 곳을 표출하여 문득 두어 차례 낭독하다가 이어서 크게 읊조렸으니, 예를 들면 《논어》의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며'주 143) '어질구나! 안회여'주 144)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다.'주 145)는 장과 《맹자》의 진대(陳代),주 146) 경춘(景春),주 147) 웅어(熊魚)주 148) 장 등이 이것이다. 또한 역사를 섭렵하기 좋아하였으니 옛사람의 충효와 큰 절개, 재물을 가볍게 여겨 기꺼이 베푸는 내용을 보면 문득 무릎을 치면서 감탄하였고, 현인군자가 뭇 소인배들의 함정에 빠진 것을 보면 문득 눈물을 줄줄 흘려 간혹 노기를 드러내기도 하였으며, 범려가 오호에 배를 띄우고 떠난 것주 149)이나 방맹이 관을 걸어놓고 떠난 것주 150)처럼 기미를 보고 세상에서 숨는 것을 보게 되면 더욱 좋아하면서 자신이 그렇게 행동한 것처럼 여겼다.
계묘년(1903년) 봄에 거처하는 동쪽에 서실을 지어놓고 만년에 은거하며 수양할 곳으로 삼았다. 이에 간옹이 '낙요당(樂要堂)' 세 글자를 써서 보내주면서 호로 삼게 하고 아울러 명도 주었으니, 옛사람의 '지극한 즐거움은 독서만한 것이 없고 지극히 중요한 것은 자식을 가르침만한 것이 없다.'주 151)는 말에서 취하였다. 병암(炳菴) 김준영(金駿榮)주 152) 공이 그 실상을 기문(記文)으로 지었으며, 간옹이 또한 '벽봉거사(碧峰居士)'라는 네 글자를 써서 보내주어 서당 벽에 걸게 하였다. 무신년(1908년)에 단발령이 내려지자 부군은 편지를 써서 간옹에게 고하기를 "당당한 소중화의 몸으로 만약 오랑캐에게 변화를 당한다면 살아도 어찌 영화이겠습니까."라고 하였으니, 대개 삶과 의리의 분별이 이미 정해졌으니 그 뜻을 알 수 있다.
기유년(1909년) 정월 17일에 병이 깊어졌다. 당시 나는 부안 목리(木里)에서 소식을 받고 20일 이른 아침에 돌아와 인사를 올리니 정신은 평소와 같았는데, 나를 보고서 간옹의 안부를 자세히 물으셨다. 다음날 아침에 병이 위독해졌는데, 관이 혹시라도 비뚤어질까 걱정하면서 자주 머리를 매만졌다. 얼마 뒤에 임종하니, 바로 21일 사시(巳時, 오전 9~11시)였다. 향년 51세로, 고부 달천(達川) 뒷산기슭 선영 아래 병좌의 언덕에 장사지냈다가 후에 ■■로 옮겼다. 부인은 전주(全州) 최씨 학생 석홍(錫洪)의 따님으로 덕촌(德村) 희정(希汀)주 153)의 후손이다. 성품이 인자하고 조심스러웠으니 엄한 시모인데도 오히려 효부로 칭송받았다. 예로써 몸가짐을 하고 공경으로 남편을 섬겼으며 의로써 자식을 가르쳤으니, 여사(女士)의 풍모를 지녀 향리에서 모두들 "마땅히 그 군자에 걸맞은 짝이다."라고 하였다. 부군보다 2년 먼저 태어나 7년 뒤에 타계하셨는데, 처음에는 달천의 부군 묘에 합부하였다가 후에 부안군 부안읍 모산 분재(粉齋) 앞 왼쪽 산기슭 ■좌로 옮겼다.
네 아들을 두었으니, 장남은 불초 택술이며 그 다음으로 봉술(鳳述), 만술(萬述), 억술(億述)이 있고 딸은 광산(光山) 김재봉(金在鳳), 고흥(高興) 유동기(柳東起)에게 시집갔다. 택술은 아들로 형복(炯復) 형태(炯泰), 형관(炯觀), 형겸(炯謙)이 있고 딸들은 전주(全州) 최춘렬(崔春烈), 밀성(密城) 빅진호(朴珍浩)에게 시집갔다. 봉술은 아들로 형귀(炯龜)가 있고 딸들은 김해(金海) 김태현(金泰賢), 청주(淸州) 한행종(韓幸鍾), 전주 최규택(崔圭澤), 경주(慶州) 이상헌(李相憲)에게 시집갔다. 만술은 아들로 형수(炯洙), 형락(炯洛), 형방(炯坊)을 두었고 딸은 창녕(昌寧) 장해초(張海楚)에게 시집갔고 한 명은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억술은 아들로 형식(炯湜), 형주(炯澍), 형호(炯濩), 형부(炯溥)를 두었고 딸은 김해 김인태(金仁泰)에게 시집갔고 다른 한 명은 아직 어리다. 사위 김재봉은 아들로 상현(庠鉉)을 두었고 딸은 탐진(耽津) 안영식(安永植)과 함평(咸平) 이근범(李根範)에게 시집갔다. 사위 유동기는 종태(鍾泰), 종천(鍾千), 종칠(鍾七)을 두었고 딸들은 울산(蔚山) 김택수(金宅洙), 김해 김종연(金鍾淵), 전주 이형구(李亨九)에게 시집갔다. 증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오호라! 부군은 밝고 굳센 자질로 용맹하게 매진하는 힘을 써서 곧고 굳건한 덕을 이뤘다. 그 조목을 대략 말하자면, 정성과 진심을 다하여 부모의 뜻을 받들고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을 다하였으며 손가락을 찢어 피를 내어 매우 위독한 병을 되돌렸다. 그러므로 부군이 타계하자 조모께서 애통해하며 "내가 효자를 잃었구나."라고 했으니, 이는 부모를 섬긴 효성이다. 드러내지 않고 스스로를 닦으며 교유를 즐겨하지 않았는데, 평생 존모한 이는 다만 간옹 한 사람 뿐이었으며 마음을 허여하며 친하게 지낸 이로는 그 문하에 몇 사람뿐이었다. 병암(炳菴) 김준영(金駿榮)이 세 차례 방문하면서 "옛 것을 좋아하고 독실하게 행하는 이를 내가 호남에서 공과 같은 자를 찾아보아도 다시 얻을 수 없으니, 더불어 사귈 만하다."라고 하였다. 겸와(謙窩) 홍주후(洪疇厚) 공이 일찍이 찾아와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매우 기뻐하다가 마침내 서로를 알아주는 벗이 되었다. 이것은 스승과 벗을 신중하게 택한 것이다.
친족 가운데 상을 치르는 중에 며느리를 맞아들이는 자가 있으면 힘써 만류하였는데, 듣지 않으면 집이 서로 이웃하여도 관례나 혼례 하는 날에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이것은 예를 엄격하게 지킨 것이다.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 보면 진심으로 좋아하여 찬양을 마지않았으며, 악을 행하는 사람을 보거든 대단히 미워하여 용서하지 않았다. 흉악하여 인륜을 무너뜨리는 자가 같은 마을에 살게 되었는데 쳐다보지도 않았으며 수재나 화재를 멀리하듯 하였다. 항상 말하기를 "세속의 악행을 하는 자는 내가 악을 미워하니 미워하는데, 오직 도를 배운다고 내세우고서 더러운 유속에 부합하려는 자를 대단히 미워하니, 이런 사람이 세상에 해를 끼침은 짐독보다 심하다."라고 하였다. 또한 "선비가 말세에 살게 되었으니 좋아하는 사람은 적고 미워하는 사람이 많으면 분명 고상한 사람이요, 좋아하는 자가 많고 미워하는 자가 적으면 분명 유속에 부합하는 사람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좋아하고 미워하는 올바름이다.
좋은 자질을 갖춘 사람을 보거든 반드시 속학은 마땅히 버려야 하고 실제 학문을 마땅히 힘써야 한다고 정성을 다해 말해주니, 듣는 이들이 감격하여 성취한 이들이 많았다. 이것이 사람을 가르치는 인(仁)이다. 성시와 관부 등 명성과 이익을 다투는 곳에는 한번도 발을 들이지 않았다. 약관일 때 고을 수령이 예방(禮房)을 보내 안부를 묻고서 뵙기를 청하였는데 가지 않았다. 과거 볼 때에도 또한 한번도 권문(權門)을 찾아가 뇌물을 주지 않았으니, 이것이 지조의 개결함이다. 타인과 이해를 따지지 않았으니, 항상 "내가 조금 손해 보면 타인은 즐거워하니 어찌 이해를 따지겠느냐."라고 하였으며, 또한 "만사를 여유롭게 처리하면 그 복이 오래간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덕을 지닌 도량의 넓음이다. 타인과 논변하다가 의리와 관계된 부분이 나오면 확실한 증거를 이끌어와 엄격하고 명쾌하게 변석하여 상대방이 깨닫고서 감복한 뒤에 그만두었다. 비록 변론을 잘한다고 일컬어지던 이들도 감히 그 재주를 펼칠 수 없었다. 이것이 논의할 때 이치가 지극한 것이다. 시를 지을 때는 조탁을 일삼지 않고 곧바로 자신의 생각을 쏟아내었으나 천부적인 재능을 받았기에 절로 체재(體裁)를 이뤘다. 만년에 이르러 당대와 나라를 걱정하였기에 강개하며 충심에 분격하는 말이 많았는데, 그렇지만 더욱 더 풍격이 청절(淸絶)하였다. 간옹이 원고를 보고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작품마다 모두 아름답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시율의 격조가 높은 것이다.
총괄하건대 마음에 있어서는 자기(自欺)를 버리고 성을 보존하였으며, 학문에 있어서는 세속을 끊고 전아함을 숭상하였으며, 세상에 있어서는 오랑캐를 배척하고 중화를 높였다. 이런 것들이 매우 엄준(嚴峻)하였으니, 본원(本源)의 바탕이 되었다. 세상에 널리 알릴만한 언행으로 모범이 된 것이 많아서 이에 그치지 않은데, 다 말하려면 번거로울 뿐이다. 또한 향리의 사우(士友)들이 직접 보고 입으로 전한 것도 또한 구태여 다 기록하지 않는다. 삼가 살펴보니 세상의 성리를 논하고 예의를 말하며 선비로서 이름난 사람들은 간혹 자신이 한 말을 채우지 못하여 성법(成法)을 어긴 자가 있는데, 오직 부군은 그러하지 않았으니 한 가지 행실 한 가지 일이라도 유자의 법도를 따르지 않거나 당신이 말한 것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찾아보아도 찾을 수 없다. 이런 까닭으로 간옹이 참판 퇴암(退菴) 이성렬(李聖烈)주 154)이 선비를 구하는 편지에 답하면서 부군에 대해 '만년에 학문을 좋아하여 능히 유문(儒門)의 법도를 지켰으며 일에 임하여 의지할 만하다.'는 말로 칭송하니, 이는 참으로 실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만일 수를 누려 마음에 지닌 것을 펼쳤다면 마땅히 세도(世道)에 도움이 있었을 것인데, 그렇지 못하고 외진 향촌에서 지내 명성이 드러나지 못하고 타계하였으니, 이것이 자손들의 끝이 없는 아픔이다. 삼가 편찬하여 가장을 지어 입언 군자가 채택하는 자료가 될 것에 대비한다.
기유년(1909년) 여름에 불초 고자 택술은 피눈물을 머금으며 삼가 짓는다. -35년 뒤 갑신년(1944년) 중하에 첨삭하여 수정하였다.-
- 주석 133)노천(老泉) 김식(金湜)
- 1482~1520. 본관은 청풍, 자는 노천(老泉), 호는 사서(沙西)·동천(東泉)·정우당(淨友堂),시호는 문의(文毅)이다.
- 주석 134)모당(慕堂) 홍리상(洪履祥)
- 1549~1615.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원례(元禮), 호는 모당(慕堂)이다. 임진왜란 때 왕을 서경까지 호종하여 병조참의가 되었으며, 명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헌에 이르렀다. 성혼을 변호하다가 파천되기도 하였다. 광해군 초에 대사간에 소명(召命)되고, 부제학을 거쳐 개성유수에 올랐다.
- 주석 135)승중상
- 장자(長子)가 부모보다 먼저 죽고 그 부모가 나중에 죽으면 장손(長孫)이 죽은 장자를 대신하여 맏상주 노릇을 하는 것을 말한다.
- 주석 136)격쟁
-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임금에게 하소연하기 위해 임금이 거둥하는 길가에서 징이나 꽹과리를 쳐서 임금의 하문(下問)을 기다리는 것을 말한다.
- 주석 137)연제
- 상례(喪禮)의 일종으로, 소상(小祥)을 앞당겨 치루는 것을 말함. 아버지가 생존해 있는데 어머니가 먼저 죽었을 경우, 1년 만에 지내는 소상을 11개월 만에 지낸다.
- 주석 138)활수……것이다
- 주희(朱熹)의〈 관서유감(觀書有感)〉에서 "반 묘의 방당이 거울처럼 트였는데, 하늘 빛 구름 그림자 그 안에서 배회하네. 묻거니 어이하여 그처럼 해맑을까, 근원에서 생수가 솟아나기 때문일레.[半畝方塘一鑑開 天光雲影共徘徊 問渠那得共如許 爲有源頭活水來]"라고 한 시에 그 의미를 취하였다.
- 주석 139)인에……않는다
-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보인다.
- 주석 140)두풍
- 머리 아픈 것이 오랫동안 치유되지 않고 수시로 발작하는 증상을 가리킨다.
- 주석 141)삼가례
- 관례를 행할 때 세 번 관을 바꾸어 쓰고 의식을 가리킨다. 삼가례는 초가(初加)ㆍ재가(再加)ㆍ삼가(三加)로 나뉘는데 초가에는 단령(團領)ㆍ도아(絛兒) 차림에 갓을 쓰고, 재가에는 단령 각대(角帶) 차림에 사모(紗帽)를 쓰고, 삼가에는 공복(公服) 차림에 복두(幞頭)를 쓴다.
- 주석 142)기공
- 기(朞)는 1년 복, 공(功)에는 대소(大小)가 있는데, 대공(大功)은 9월 복, 소공(小功)은 3월 복이다.
- 주석 143)거친……마시며
- 《논어》 〈술이(述而)〉에 "나물밥에 물을 마시고 팔 베고 눕더라도 즐거움이 또한 그 속에 있나니, 떳떳하지 못한 부귀는 나에게 뜬구름과 같다.〔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라고 하였다.
- 주석 144)어질구나 안회여
- 《논어》 〈옹야(雍也)〉에서 "어질다, 안회(顔回)여. 한 그릇 밥과 한 표주박 물을 마시며 누항에 사는 것을 사람들은 근심하며 견뎌 내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 낙을 바꾸지 않으니, 어질도다, 안회여.〔賢哉 回也 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 不改其樂 賢哉 回也〕"라고 하였다.
- 주석 145)기수에서……쐬다
- 하루는 자로(子路)ㆍ증점ㆍ염유(冉有)ㆍ공서화(公西華) 네 사람이 공자를 모시고 있었는데, 공자가 "저마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그 뜻을 말해 보라."고 하였다. 이에 자로와 염유는 나라를 잘 다스려 보고 싶다는 뜻을 말하고, 공서화는 종묘(宗廟)의 제례나 제후의 회동에 집례(執禮)를 맡고 싶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증점의 차례가 되자 그는 슬(瑟)을 타고 있다가 간헐적으로 서서히 연주를 멈추고 쟁그렁 소리를 내며 슬을 놓고는 일어나서 "세 사람이 말한 것과는 다릅니다." 하고 대답하기를, "모춘에 봄옷이 이루어지거든 관자 대여섯 사람과 동자 예닐곱 사람과 함께 기수에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면서 돌아오겠다.〔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하였다. 《論語 先進》
- 주석 146)진대
-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서 진대(陳代)가 "제후를 만나 보지 않는 것은 작은 일인 것 같습니다. 이제 한 번 만나 보시면 크게는 왕자(王者)를 이루고, 작게는 패자(覇者)를 이룰 것입니다. 또 옛 기록에 '한 자를 굽혀 여덟 자를 편다.'라고 하였으니, 할 만한 일일 듯합니다."라고 말하자, 맹자가 "옛날에 제 경공(齊景公)이 사냥할 적에 우인(虞人)을 깃발로 부르자, 오지 않으니, 장차 그를 죽이려 했었다. 공자께서 그를 칭찬하시기를 '지사(志士)는 시신(屍身)이 도랑에 버려질 것을 잊지 않고, 용사(勇士)는 자기 머리를 잃을 것을 잊지 않는다.'라고 하셨으니, 공자는 무엇을 취하셨는가? 올바른 방법으로 부르지 않으면 가지 않은 것을 취하신 것이다. 만일 부르지도 않았는데 간다면 어떠하겠는가."라고 하였다.
- 주석 147)경춘
- 경춘(景春)이 공손연과 장의가 참으로 대장부라고 하자, 맹자가 이 두 사람은 순종을 정도(正道)로 삼았으므로 이는 첩부(妾婦)의 도(道)이기 때문에 대장부라고 할 수 없다고 비판하였다. 《孟子 滕文公下》
- 주석 148)웅어
- 《맹자(孟子)》 〈고자 상(告子上)〉에서 "물고기도 내가 원하는 바요, 곰 발바닥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을진댄 물고기를 버리고 곰 발바닥을 취하겠다.〔魚我所欲也 熊掌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魚而取熊掌者也〕"라고 하였다.
- 주석 149)범려가……것
- 월왕(越王)이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회계(會稽)의 치욕을 당한 뒤로, 범려(范蠡)가 미인 서시(西施)를 오왕에게 바쳐 오왕의 마음을 현혹되게 하여 끝내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나서 이내 월왕을 하직하고, 다시 서시를 데리고 오호(五湖)에 배를 띄워 함께 떠나 버렸는데, 그 후 제(齊)나라에 들어가 치이자피(鴟夷子皮)로 성명을 바꾸고 도(陶) 땅에 살면서 주공(朱公)이라 칭하고 치산(治産)을 잘하여 거부를 이루었다. 《史記 卷129 貨殖列傳》
- 주석 150)방맹이……것
- 후한 때 방맹(逄萌)이 왕망(王莽)이 충간(忠諫)하는 자신의 아들을 죽이는 것을 보고, "지금은 삼강(三綱)이 끊어졌으니, 벼슬을 버리고 떠나지 않으면 화환(禍患)이 닥칠 것이다."라 하고, 관을 벗어 동문에 걸어두고는 떠나 요동(遼東)에 가서 살았다 한다. 《後漢書 卷113 逄萌列傳》
- 주석 151)지극한……없다
- 《명심보감》 〈훈자(訓子)〉에 보인다.
- 주석 152)병암(炳菴) 김준영(金駿榮)
- 1842~1907.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덕경(德卿), 호는 병암(炳菴)이다. 가세가 극도로 곤궁하여 주경야독을 하였으나 워낙 독실하게 공부하여 임헌회(任憲晦)·신응조(申應朝)·송병선(宋秉璿)·박운창(朴芸牕)·김계운(金溪雲) 등 당시 학자들에게 모두 허통(許通) 받았으며 성리학을 더욱 공부하기 위하여 한 살 연상인 전우에게 3번씩이나 찾아가 사제(師弟)관계를 맺었다. 이기설(理氣說)과 예학(禮學)에 특히 주력하였으며 이항노(李恒老)를 중심한 벽문학자(檗門學者)들의 주리설(主理說)과 인물성이설(人物性異說)을 주장하는 한원진(韓元震)계의 학설을 비판, 논변하는 반면, 율곡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과 간재(艮齋)의 학설을 적극 지지하는 학문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
- 주석 153)덕촌(德村) 최희정(崔希汀)
-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정지(汀之), 호는 덕촌(德村)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며, 중종 때 무과에 급제하였다. 여진족 속고내(速古乃)가 침입하자 조광조의 천거로 종성판관(鍾城判官)에 임명되어 종성의 토병(土兵)을 인솔하고 적을 대파(大破)하였다. 이어 갑산(甲山)·강계(江界)·위원(渭原)까지 추격하여 소탕한 공으로 품계가 올랐고, 민전(民田)이 하사되었으나 사양하였다가 그 뒤 고향 근처에 있는 동축산(東竺山)을 특사(特賜)받았다. 스승 조광조가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사사(賜死)되자, 종일 통곡하고《용망호서(龍亡虎逝)》라는 시(詩)를 짓고 난 후 세상일을 잊고 지냈다.
- 주석 154)퇴암 이성렬
- 1865~?. 본관은 예안(禮安), 호는 퇴암(退庵)이다. 1905년(광무 9)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사직하고 여주(驪州)에 은거하여 민종식(閔宗植)·이시영(李始榮) 등과 협의하여 의병을 규합하는 한편 군자금(軍資金)을 전담했다. 그 후 의병명부가 압수되어 많은 동지가 체포되자 이를 비통히 여기고 단식 끝에 자결하였다.
先考碧峰府君家狀
府君諱洛進, 字致一, 碧峯自號也.金氏出新羅國姓, 敬順王大子諱鎰, 諫父王讓國, 入皆骨山, 麻衣草食而終.其後有諱景修, 高麗宣宗朝, 爲吏部尙書, 生諱春, 封扶寧府院君.二傳而諱作辛, 襲封扶寧君, 因爲貫.又二傳而平章事文貞公諱坵, 斥佛扶正, 攘胡尊華, 道德文章冠一世, 是爲止浦先生, 生刑部尙書忠宣公諱汝盂, 入元摹聖廟貌, 創設於江陵, 士林以兩世有功斯文, 立祠于扶安道東.歷五世, 古阜郡事諱光敘, 見麗運訖, 志存罔僕, 大歸貫鄕, 子孫世居, 事見《忠義錄》.生諱[王+就], 本朝直長.生諱甫漆, 贇科歷典十六州, 討賊樹勳, 陞僉知中樞府事.生諱淑孫, 任實縣監, 有異政.生梅竹堂諱宗, 進士, 老泉金公湜薦于朝曰: "操履敦實, 從善若流." 己卯士禍後, 隱居敎學, 徵辟不就.生諱景貞, 禮賓寺主簿, 生竹溪諱鋐, 進壯生二, 與慕堂洪公·月沙李公, 爲道義交, 以學行除宣陵參奉, 享柳川祠.生諱鼎吉, 亦以學行除軍資監參奉, 丙子亂倡義旅. 生諱潚, 通經術, 纘先業, 號止窩.子通德郞諱世光, 移居古阜, 是爲府君七世.曾祖諱麟成, 以孝旌閭, 祖諱錫圭, 有文行, 考諱景淳, 亦以孝旌, 祖孫兩世事, 見《三綱錄》, 艮齋田先生撰〈二孝旌閭記〉, 妣, 靈光金氏通政宅麗女, 大護軍該九世孫, 治家有法, 閨門肅整.以哲宗己未二月二日戌時, 擧府君于滄東里第, 天資穎異, 二歲能讀書, 九歲丁外艱, 哀號如成人, 塾師敎以喪禮成誦.十歲做業隣里, 所經有深林鬼號處, 必夜往而讀, 歸家而宿, 鷄嗚卽往, 待師起寢, 明燭受業, 雖風雨不廢, 文辭日進. 年十二作科體詩, 間有老手所未道語, '白靑田鶴來'語, 人曰: "此子詩才出凡輩, 必將大就." 因以警句誦傳.十四入場屋, 自作自書, 十六赴京試, 與諸士較藝, 當時能者, 皆莫不讓頭.丙子歲大無, 重侍下無人幹蠱, 遂當家事, 學業多間斷, 科行亦廢止.己卯丁王母宋氏憂, 執承重喪如禮.庚辰母夫人病, 欲斥水田十斗種落買藥, 裂指出血和藥而進, 卽奏効.母夫人性嚴, 凡有所命, 一意承順, 每晨昏定省, 冠帶行拜, 朔望則再拜, 晬辰元朝上壽.家貧而甘旨常繼, 得美饌則親檢烹調, 夜久令進食物, 曉亦如之.冬夜則定省外累進問侯, 有時絶饌, 親往前川, 持笱獵魚, 雖値風雪, 必得之而後歸, 老白首不懈.常買置良蔘以備氣虛, 由是母夫人年九十, 尙無恙, 此皆天性然爾, 非出勉强, 而晨昏之拜, 晩年事也.癸未冬, 以兩世旌褒事上京, 擊錚原情于駕前, 竟得蒙典.戊子, 大饑, 諸甥兄妹, 本族老幼, 多來就食, 己雖不給, 少無難色, 饘粥共之, 幷賴以活.甲午, 東魁全奉準者, 行其父練祭, 自方伯邑宰至巷叟村嫗, 爭致賻慰, 府君以隣曲舊交, 獨不問, 人危之則曰: "朋友有大故, 不絶而何, 禍福不須問." 丙申, 構小亭于里南源泉上, 與冠童講修, 知郡尹侯秉聞之, 扁以'活水'幷有記, 取晦翁詩意也.後艮齋田先生復記之.戊戌春, 爲鄕校色掌, 秋爲掌議, 矯救舊弊, 整校財修聖殿, 爲久遠計.庚子秋, 田先生留邊山月明菴, 命不肖往謁, 先生愛不肖親訪府君.人有勸以使子定師, 府君以爲在家定師, 不誠且非禮, 乃擇日具贄, 越四百里, 令拜于天安山中而定分. 辛丑, 大歉, 賣土而資送師門, 每送必隨以禮物, 艮翁嘗有書曰: "聖人云'當仁不讓於師', 師且不讓, 况於子乎." 府君感其言, 遂專意此學, 視艮翁爲模範, 必稱先生, 不云某丈.出入燕居, 恒着大笠濶袖, 見讀書士著狹袖, 則輒曰: "士子行色, 自有法服, 何用隨俗." 由是鄕黨敬畏, 雖隣比農夫, 不冠不敢來見.嘗患頭風, 剪去百會之髮, 忽自解曰: "不毁髮膚, 著於聖訓, 寧可疾苦, 豈犯不孝." 遂不復剪, 而風亦無患.又嘗嗜吸烟, 見全齋任先生'吸烟雖小事, 實累大德'之語, 卽棄烟具不復吸.於是賓客來者, 多戢烟具於外.冠子, 必行三加, 親忌, 用黲布笠, 不以喪餘之薦待客, 吊於人不酒肉, 而嘆練祥醉飽之俗, 在上之人無禁之者.朞功成服前, 不去冠, 不以駭俗爲嫌, 國恤燕居, 著白冠, 不作詩, 不聽樂, 鄕人多慕效之.讀書不求深解, 務要不失主意, 每表出會心處, 輒朗讀數過, 繼以諷咏, 如《論語》飯疏飮水·賢哉回也·浴沂風雩等章, 《孟子》陳代·景春·態魚等章, 是也.又好涉獵往史, 見古人忠孝大節, 輕財喜施, 輒擊節嘆賞, 見賢人君子爲羣小所陷, 輒潛然淚下, 或赫然怒色, 至見見幾高蹈, 如范蠡浮湖, 逄萌掛冠等處, 尤欣然若出諸己.癸卯春, 構書室于所居之東, 爲晩年藏修所, 艮翁書送樂要堂三字, 以錫號, 幷有銘, 取古人'至樂莫如讀書, 至要莫如敎子'語也.炳菴金公駿榮記其實, 艮翁又書碧峰居士四字送之, 令揭諸堂壁.戊申, 剃變, 府君書告艮翁曰: "堂堂華夏之身, 若見化於夷, 則生亦何榮", 蓋態魚之判已定, 而志可見矣.以己酉正月十七日寖疾, 時不肖自扶安木里承報, 二十日早朝歸侍, 精神如常, 見不肖問艮翁安候甚詳, 翼朝疾革, 恐冠或不正, 時常撫頭, 少頃而終, 乃二十一日巳時也.享年五十一, 葬于古阜達川後麓先兆下丙坐原, 後移■■.配, 全州崔氏學生錫洪女, 德村希汀后, 性仁而謹, 姑嚴猶以孝婦稱, 以禮持身, 以敬事夫, 以義敎子, 有女士風, 鄕里咸曰: "宜其爲君子配", 生先府君二年, 卒後七年, 初祔達川府君墓, 後移扶安郡扶安邑芧山粉齋前左麓■坐.四男, 長不肖澤述, 次鳳述·萬述·億述, 女適光山金在鳳·高興柳東起.澤述男, 炯復·炯泰·炯觀·炯謙, 女適全州崔春烈·密城朴珍浩.鳳述男, 炯龜, 女適金海金泰賢·淸州韓幸鍾·全州崔圭澤·慶州李相憲.萬述男, 炯洙·炯洛·炯坊, 女適昌寧張海楚, 一未適人.億述男, 炯湜·炯澍·炯濩·炯溥, 女適金海金仁泰, 一幼.金壻男, 庠鉉, 女適耽津安永植·咸平李根範.柳婿男, 鍾泰·鍾千·鍾七, 女適蔚山金宅洙·金海金鍾淵·全州李亨九, 曾孫以下, 不錄. 嗚呼, 府君以明毅之資, 用勇邁之力, 成貞固之德, 略言其目, 則殫誠竭忠, 盡志物之養, 斮指往血, 回己革之疾, 故府君之沒, 母夫人慟曰: "吾失孝子", 此事親之孝也.闇然自修, 不屑遊從, 終身尊慕者, 惟艮翁一人, 許心相親者, 其門下幾人, 炳菴三度見訪曰: "好古篤行, 吾於湖南, 求如君者而不復得, 可與定交." 謙窩洪公疇厚, 亦嘗來訪, 與語大悅, 遂爲知己友, 此擇師友之謹也. 族人有乘喪取婦者, 力止而不聽, 則屋宇相接, 而冠昏之日, 一不往見, 此守禮之嚴也.見人有善, 實心好之, 贊揚不已, 見人有惡, 痛疾不貸, 凶悖犯常者, 同里而不相見, 絶水火, 常曰: "世俗之惡者, 吾惡則惡矣, 惟名爲學道, 而同流合汙者, 最可惡, 斯人之害世, 甚於鴆毒." 又曰: "士處末世, 好者少惡者多, 必是高尙之人, 好者多惡者少, 必是流汙之人", 此好惡之正也.見人質美, 必諄諄告以俗學當捨, 實學當務, 聞者感激, 多有成就, 此敎人之仁也.城市官府, 凡聲利之場, 一不近跡, 弱冠時, 本倅遣禮吏, 問候請見而不往.擧子日, 亦不一求權門關節, 此志操之潔也.與人不較利害, 常曰: "我少害則得人歡, 何較爲也." 又曰: "萬事從寬, 其福長遠", 此德量之弘也.與人論辨, 有關義理者, 則援引確據, 峻截明快, 得彼悟服而後己, 雖所稱善辯者, 莫敢售, 此言論之理到也.爲詩不事雕琢, 直寫己志, 然得之天分, 故自成體裁.及乎晩節, 志在憫時憂國, 故多慷慨忠憤之辭, 而益復淸絶, 艮翁見稿語人曰: "篇篇佳作", 此詩律之格高也.總之在心而去欺存誠, 在學而絶俗尙雅, 在世而斥夷尊華者, 最嚴且切, 而爲本源田地矣.言行之可表章爲柯則者, 多不止此, 而欲盡之, 則近煩.且在鄕邦士友之目覩口傳, 亦不必盡書也.竊觀世之談性理說禮義, 以儒名家, 或不能充其言而違成法者, 有之矣, 惟府君, 則不然, 求其一行一事, 不循儒規, 不副所言者, 而不可得矣.是故艮翁答退菴李參判聖烈求士之書, 稱府君以'晩而好學, 能守儒門規模, 臨事可仗', 眞實際語也.如得壽祿而展布所蘊, 宜有以裨益世程, 顧乃不然, 僻鄕中身, 聲聞不彰而沒世, 是爲子孫罔極之痛也.謹纂次成狀, 以備立言君子採擇之資焉.歲己酉仲夏日, 不肖孤子澤述泣血謹狀.【後三十五年甲申仲夏, 添刪修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