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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5
- 행장(行狀)
- 공인 허씨 행장 신유년(1921)(恭人許氏行狀【辛酉】)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5 / 행장(行狀)
공인 허씨 행장 신유년(1921)
순조 16년 병자년(1816년) 호남의 선비 통덕랑(通德郞)에 오른 완산(完山) 최공(崔公) 필성(必性)의 부인 공인 허씨(許氏)가 효열로 도신(道臣)에게 글이 올려 도신이 임금에게 계달하여 포상을 받도록 청하였는데, 도신이 비록 매우 가상하게 여겨 장려하였지만 그 일은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 그런데 73년이 지난 뒤에 도유(道儒)들이 다시 춘조(春曹)에 글을 올리니 춘조에서 계문하여 정려를 내리라고 명하였다. 그 때가 바로 고종(高宗) 무자년(1888년)이었다.
이에 오두적각(烏頭赤脚)의 정려문이 높다랗게 솟아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되어 허씨의 행실이 더욱 나라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행실을 기록한 글은 돌아가신 뒤 백 년 동안이나 지어지지 않고 있었는데, 현손 장렬(長烈)이 대군자의 글로 묘지명을 받기 위해서는 행장이 없을 수 없기에 나에게 행장을 부탁하였다. 나는 참으로 중한 일이라 감당할 수 없지만 같은 고을 사람으로 부인의 지극한 행실에 익히 감복한 지가 오래되었기에 삼가 허락하고서 기록을 살펴 다음처럼 서술한다.
허씨는 계통이 하양(河陽)에서 나왔으니, 영의정 조(稠)주 103)가 세상에 널리 알려진 조상이다. 경(璟), 후(垕), 집(鏶)이 그 부친, 조부, 증조이며, 의성 김씨(義城金氏) 계상(啓相)의 따님이 모친이다. 영조 37년 경진년(1760년)에 공인은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천부적으로 효성스러워 부모를 섬길 때 그 마음에 맞게 하였으며, 시집가서 시부모를 봉양할 때 정성을 다하여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하며 맛난 음식을 이바지함에 지성을 다 바쳤다. 선조의 제사를 받들 때 훈초(葷草)를 먹지 말라는 경계를 지켰으며 허름한 채소도 올려주 104) 또한 정성으로 하고 허식으로 지내지 않았다. 남편을 받들어 어기지 않았으나 허물을 보면 반드시 규간하여 그저 따르기만 하지 않았다. 친척 간에 화목한 정의가 넘쳐 한 가문 구족이 모두 화기애애하였다.
시부모가 돌아가시자 반벽(攀擗)주 105)하며 통곡하고 울면서 그 슬픈 마음을 다하였으며, 염할 때의 수의와 관곽에 여한이 없게 하였다. 삼년을 생선과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이를 드러내 웃지 않았다. 기일을 만나면 월초부터 시부모가 평소 즐겼던 음식을 생각하여 온 힘을 다해 미리 장만하였으며, 제사를 지낼 때 슬픔을 다하여 초상 때와 다름이 없었다. 최공이 일찍이 학질을 앓아 여러 달이 지나도 낫지 않았다. 인육이 좋다는 소리를 듣고서 이에 오른쪽 넓적다리를 잘라 육적을 만들어 올리고 피를 약에 타서 주니 곧바로 효과를 보았다. 이윽고 병이 재발하여 목숨에 위태롭게 되자 또다시 왼쪽 넓적다리를 베어 탕으로 적으로 만들어 올리니 소생하게 되어 마침내 함께 해로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이들이 경탄하면서 "뛰어나구나! 허씨의 효열이여. 시집오기 전에 부모를 사랑함이 어찌 이렇게 지극한가. 시부모를 지극한 효성으로 모셨으니 더욱 하기 어려운 일이다. 한번 살을 베어 병이 나았으니 이미 그러한 일 하기도 어려운데, 다시 살을 베어 목숨을 연장하였으니 세상에 어찌 이와 필적할 대상이 많겠는가."라 하였다.
부인은 모년 8월 15일에 타계하여 고부(古阜) 우덕면(優德面) 동역동(東驛洞) 자좌(子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아들로 시창(時昌), 시순(時淳)을 두었는데 시순은 출계하였으며, 딸은 도강(道康) 김규흠(金奎欽)에게 시집갔다. 시창의 아들은 문수(文秀)며 딸은 상산(商山) 김홍기(金弘基)에게 시집갔다. 아! 사람이 사물보다 귀한 것은 삼강(三綱)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으로 삼강의 도리를 능히 행한다면 이에 사람됨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대저 충과 효와 열은 참으로 사람이 모두 함께 받은 이치인데, 다만 태어나기 전에 기질에 구애받고 태어난 후에 형체에 가려져 그 이치를 따르는 자가 드물다. 그러나 공인은 자질이 이미 아름다운데 능히 이치로서 형체를 이겼으니, 그 효와 그 열이 우뚝하게 섰다. 만약 장부로 태어나서 임금을 섬겼더라면 당대는 다스려져 충신이 되었을 것이며 난리를 만났다면 반드시 목숨을 바쳤을 것을 나는 확신한다. 이른바 '그 도를 행하여 부끄러움이 없다.'는 자는 바로 공인이 아닐까한다. 다만 세상에 하기 드문 일을 공인은 능히 하였으니 공의가 오래되어도 더욱 드러나며 성조에서 포상의 은전을 아끼지 않는 것은 마땅하다. 이에 행장을 지어서 빗돌을 세울 자가 채택할 것을 준비한다.
- 주석 103)허조
- 1369~1439. 본관은 하양(河陽), 자는 중통(仲通), 호는 경암(敬菴)이다. 조선 초기 태조·정종·태종·세종 연간 여러 관직을 역임한 문신이다. 특히 왕조의 예제(禮制)와 법전 정비에 큰 공헌을 하였다. 또한 황희(黃喜)·맹사성(孟思誠)과 더불어 세종 대의 명재상으로 꼽힌다. 여러 학문 중 예제에 특히 밝았다. 이에 조선 건국 후 석전의식을 비롯한 각종 예제 정비와 《속육전》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1430년(세종 12)에는 세종의 명으로 《오례의(五禮儀)》를 편찬하였다.
- 주석 104)허름한 채소
- 빈번은 마름과 쑥이라는 뜻으로, 귀하지는 않아도 정성껏 올리는 제물(祭物)을 비유할 때 쓰는 표현이다. 《춘추좌씨전》 은공(隱公) 3년에 "진실로 확실한 신의만 있다면……빈번과 온조 같은 변변치 못한 야채와 나물이라도……귀신에게 음식으로 올릴 수가 있고, 왕공에게도 바칠 수가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 주석 105)반벽
- 원문 '攀擗'은 반호벽용(攀號擗踊)의 준말로, 부모(父母)의 상(喪)을 당하여 너무 슬퍼 부여잡고 울부짖기도 하고, 가슴을 치며 뛰기도 함을 가리키는 말이다.
恭人許氏行狀【辛酉】
純廟十六年丙子, 湖南章甫擧通德郞完山崔公必性之妻, 恭人許氏, 孝烈呈道臣, 請啓達蒙褒, 道臣雖嘉獎之重, 其事不果, 後七十三年, 道儒復呈春曹, 春曹啓聞, 綽楔命下, 時則高宗戊子也.於是烏頭赤脚, 巋然聳瞻, 許氏之行, 益聞于邦國, 惟其狀行之文, 闕於身後者, 且百年, 玄孫長烈將求大君子筆, 銘其墓, 以不可無本狀, 屬于澤述.余固非能任重役者, 而忝在鄕人, 稔服至行,則久矣.敬諾而按敘曰: "許氏系出河陽, 以領議政稠, 爲顯祖.曰璟曰垕曰鏶, 其父若祖曾, 義城金氏啓相女, 其妣也.英廟之三十七年庚辰, 恭人生焉.幼而孝思根天, 事父母稱其意.及適人, 養舅姑盡誠恪, 溫凊之節, 甘旨之供, 俱極其至.其承先祀, 茹葷之戒, 蘋蘩之薦, 亦以誠不以文也.奉君子無違, 然見有過, 必規諫之, 不徒承順爲也.睦婣之誼, 洽於親戚, 一門九族, 咸雍雍如也.及舅姑沒, 攀擗哭泣, 盡其情, 斂禭棺槨, 無餘憾.三年不魚肉, 不啓齒.値忌日, 自月初思其平日所嗜, 極力預備, 行祀盡哀, 無異袒括.崔公嘗患瘧, 積月不愈, 聞人肉爲良, 乃割右股, 肉炙而進, 血和於藥, 輒奏效, 己而疾復作, 危欲就盡, 又割左股, 或湯或炙而用之, 因得回甦, 與之偕老.聞者驚歎曰: "卓哉, 許氏之孝烈.在家愛親, 一何至也, 篤孝舅姑, 更難得也.一割愈疾, 已難其事, 再割延壽, 世豈多儔." 卒于某年八月十五日, 葬于古阜優德面東驛洞子坐原.男時昌, 時淳出系, 女道康金奎欽.時昌男文秀, 女商山金弘基.嗚呼, 人所以貴於物者, 以其有三綱也.人而能行三綱之道, 則斯無愧乎爲人.夫忠孝烈, 固人所同得之理也, 但質拘於前, 形掩於後, 能循其理者鮮焉, 若恭人, 則質旣美矣, 故能以理勝形, 之孝之烈, 所立者卓, 如使身爲丈夫而事君, 則吾知其時平而作藎臣, 臨難而必授命也.所謂'行其道而無愧'者, 非其人耶.惟其世之所鮮, 而恭人能之, 宜乎公議之久而益彰, 聖朝之不靳褒典也.斯可以爲狀, 而備夫立銘者之採擇云爾."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