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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5
- 행장(行狀)
- 두암 최공 행장 갑신년(1944년)(斗菴崔公行狀【甲申】)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5 / 행장(行狀)
두암 최공 행장 갑신년(1944년)
공의 휘는 병현(秉鉉), 자는 처현(處玄), 두암(斗菴)은 호이다. 전주 최씨(全州崔氏)는 고려 시중(侍中) 문성공(文成公) 아(阿)가 시조가 된다. 3대를 지나 월당(月塘) 담(霮)은 본조에 들어와 집현전 제학(集賢殿提學)이 되었는데, 덕과 학문이 세상에 드러났다. 이 분이 전농소윤(典農少尹) 득지(得之)를 낳았다. 득지는 현감(縣監) 자목(自睦)을 낳았으니, 자목이 처음으로 고부(古阜)에 거주하였다. 3대를 지나 덕촌(德村) 희정(希汀)은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선생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중종 병자년(1516년) 선생은 종성 판관(鍾城判官) 판관에 제수되어 여진족 토벌에 공을 세웠다.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으니, 이 분이 12대조이다. 고조는 명후(命垕), 증조는 선성(善性), 조부는 영순(永淳), 부친은 유수(儒秀)로, 부친의 본생(本生) 3대이다. 선비(先妣)는 부안(扶安) 김씨 광진(光鎭)의 따님으로 딸 한 명을 낳았고, 계비는 동복(同福) 오씨 경열(敬悅)의 따님으로 우덕면(優德面) 오공리(五公里) 집에서 공을 낳았으니, 고종 임신년(1872년) 6월 2일이었다.
공은 어려서 몸집이 좋고 크며 남들보다 총명하였다. 장성하여 어질고 자애로우며 공변되고 정직하였으며 부모를 효성으로 섬겨 뜻을 잘 받들고 좋은 물건을 마련하여 드렸다. 갑오년(1894년)에 부친상을 당하여 삼년 동안 매우 애통해 하였으며, 모친을 모심에 더욱 공경하고 여러 아우들을 깊이 사랑하여 교육을 시켜서 학문을 성취하였다. 부친의 묫자리가 좋지 않은 것을 항상 걱정하여 평소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어느 날 밤 꿈에 길지를 얻어 다음날 아침에 가서 보니 전부 꿈에서 본 것과 같았다. 이에 가산을 털어 산을 사서 편안히 모셨다. 부친과 조부로부터 여러 선조의 묘소에 이르기까지 모두 빗돌을 세우고 명(銘)을 기록하여 석물(石物)을 빠트리지 않았다. 선친의 생부모를 위하여 또한 지성으로 길지를 구해 마침내 이장(移葬)의 뜻을 이루었다.
곤궁하고 가난한 이들을 구휼하니 향리에 횃불을 들고 기다리는 자들이 있었다. 친족을 사랑하고 인척간에 돈독히 하였으며, 혼인과 초상의 부의를 더욱 두텁게 하였다. 크고 작은 종친의 일에 공평하게 일을 처리하니 온 가문 사람들이 기뻐하였다. 손님들이 집에 가득하여 공북해(孔北海)의 풍치주 101)가 있었다. 만년에 일을 아들에게 맡기고 고서에 뜻을 붙여 그 속에서 무젖어 스스로 즐겼다.
을해년(1935년) 7월 8일 타계하니 향년 64세였다. 고을 사람들이 앞 다퉈 만사를 지으니 5백여 수나 되었다. 정읍군(井邑郡) 정주읍(井州邑) 삼산리(三山) 뒷산기슭 묘향(卯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밀양박씨(密陽朴氏) 통정(通政) 영휴(永休)의 따님으로 공보다 ■■년 먼저 타계하였으니, 묘는 정읍군 소성면(所聲面) 화룡(化龍)의 묘향에 있다. 계비는 창녕 장씨(昌寧張氏) ■■의 따님이다. 아들은 정렬(錠烈)은 박씨 소생이다. 장씨 소생으로 아들은 승렬(承烈)과 우섭(于燮)이 있고 딸들은 고부 이영균(李永均), 남양(南陽) 홍순무(洪淳武), 함열(咸悅) 남궁한(南宮熯), 고흥(高興) 류유근(柳有根)에게 시집갔다. 승렬은 공의 아우 병■의 후사로 출계하였다. 정렬의 아들로 기홍(基)과 기영(基永)이 있다. 우섭의 아들로 재천(載天), 재■, 재■가 있다.
공은 키가 크고 체격이 크며 행동거지가 차분하고 무거워 바라보면 존경심이 인다. 말과 웃음이 구차하지 않으며 즐거움과 성냄을 바로 드러내지 않았으니 가까이 다가가면 친해질 수 있었다. 내가 일찍이 공의 여막을 지나다가 외모를 보고서 덕을 지닌 사람임을 알았다. 후에 여론을 들으니 과연 그 본 바와 같았으며, 지금 행록을 보니 또 들은 바와 같았기에 어긋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옛날에 '고을에 세 가지로 만 백성을 가르쳐서 빈례(賓禮)로 조정에 천거한다.'주 102)고 하였는데, 공은 말세에 태어나 가르침을 받지 않고도 효도와 우애, 친인척간에 화목함과 벗과의 신의와 가난한 이를 구휼하는 여섯 가지 행실을 잘하였으니 즉 아름다운 자질이 대단히 뛰어나다. 만일 세 가지가 고대에 있었던 것과 완전히 같다면 빈례로 천거하는 것에 버금갔을 것이다. 사람을 살피는 자는 어찌 자질이 뛰어난데 학문이 적은 것을 병통으로 여기겠는가. 이에 행록에 의거하여 행장을 지어 정렬에게 주면서 숨은 행적을 드러내는 작가들이 취사선택할 자료로 삼게 해 달라고 청한다.
- 주석 101)공북해의 풍치
- 북해는 한(漢) 나라 때 건안칠자(建安七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북해 태수(北海太守)를 지낸 공융(孔融)을 가리킨다. 공융은 성품이 너그럽고 거리낌이 없었으며, 선비들을 좋아하고 후생들을 가르치기를 좋아하였는데, 항상 말하기를, "좌상에는 손님이 항상 가득하고 술동이에는 술이 빌 때가 없으니, 나는 걱정할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後漢書 孔融列傳》
- 주석 102)고을에……천거한다
- 《주례》 〈지관(地官) 대사도(大司徒)〉에 "향학(鄕學)의 삼물, 즉 세 종류의 교법을 가지고 만민을 교화하는데, 인재가 있으면 빈객의 예로 우대하면서 천거하여 국학에 올려 보낸다.〔以鄕三物敎萬民而賓興之〕"라 하였다. 《소학》 〈입교(立敎)〉에도 보인다.
斗菴崔公行狀【甲申】
公諱秉鉉, 字處玄, 斗菴號也.全州之崔, 以高麗侍中文成公阿, 爲上祖.三傳至月塘霮, 入本朝, 集賢殿提學, 德學著世, 是生得之典農少尹, 生自睦縣監, 始居古阜, 歷三世至德村希汀, 學于靜菴趙先生門.中廟丙子, 先生薦除鍾城判官, 討女眞有功, 贈兵曹參判, 是爲十二世祖.高祖命垕, 曾祖善性, 祖永淳, 考儒秀, 考之本生三世也.妣, 扶安金氏光鎭女, 生一女, 同福吳氏敬悅女, 擧公于優德面五公里第, 洪陵壬申六月二日也. 幼而形貌豊碩, 聰明過人, 及長仁慈公直, 孝事父母, 志物俱盡.甲午遭外艱, 三年致哀, 奉母益敬, 深愛諸弟, 以敎以成.恒慮考墓靡寧, 寢食不安, 一夜夢得吉地, 詰朝往見, 一如所夢, 乃傾家買山而安厝.自父祖以及諸先墓, 皆樹石記銘, 儀物無闕, 爲先考本生父母, 亦誠求吉地, 竟得遂意緬奉.周窮恤貧, 鄕里有待以擧火者.愛族敦姻, 婚助喪賻, 特致其厚.大小宗事, 公平處置, 一門欣然.賓客滿堂, 有孔北海風致.晩年事聽於子, 寓意古書, 優遊自適.以乙亥七月八日卒, 享年六十四, 鄕人士爭致挽誄, 多至半千, 葬於井邑郡井州邑三山里後麓卯向原, 配密陽朴氏通政永休女, 先公■■年而卒, 墓在井邑郡所聲面化龍卯向, 繼配昌寧張氏■■女.男錠烈, 朴氏出, 承烈·于燮, 女適古阜李永均·南陽洪淳武·咸悅南宮熯·高興柳有根, 張氏出.承烈出爲公弟秉■後.錠烈男, 基洪基永.于燮男, 載天·載■·載■.公幹修體大, 動止凝重, 望之可敬, 言笑不苟, 喜怒不遽, 卽之可親.余嘗過公廬, 見其外, 知爲有德人, 後聞輿論, 如其所見, 今見行錄, 又如所聞, 竊自幸不謬也.古者以鄕三物, 敎萬民而賓興之, 公生乎叔季, 不待敎而能孝友睦婣任恤之六行, 則其天稟之美, 有大異者, 而旣有三物之一如在古代, 庶可列乎賓興流亞矣.觀人者, 豈可以多質少文病之哉.玆庸依錄成狀, 副錠烈, 請俾作闡幽家材擇之資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