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역/표점
- 국역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5
- 행장(行狀)
- 수산 오공 행장 계유년(1933)(壽山吳公行狀【癸酉】)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5 / 행장(行狀)
수산 오공 행장 계유년(1933)
하루는 벗인 사익(士益) 오해겸(吳海謙)이 자신 선친 수산 거사(壽山居士)의 가장(家狀)을 안고 와 나에게 보여주면서 "내 부친의 덕행은 후세에 전할 만한 것은 그대도 아는 바이다. 그대는 부친과 같은 고을 사람이니 그대에게 그럴 만한 믿음을 주었으니 그대가 행장을 지어주시게."라고 하였다. 내가 생각해보건대 그가 행장을 청한 것은 문장을 잘해서가 아니라 글이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니, 사양할 수 없었다. 마침내 가장을 살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공의 휘는 병호(炳鎬), 자는 경중(景仲), 수산은 호이다. 오씨는 계통이 해주(海州)에서 나왔으니, 해주군(海州君) 현보(賢輔)가 시조가 된다. 대대로 벼슬아치가 나왔으니, 성균관 진사 정열(廷悅)이 우리 조선에 들어와 처음으로 부윤(府尹)을 지냈다. 희철(希哲)은 절도사(節度使)를 지냈으며, 진선(進善)은 참봉(叅奉)을 지냈다. 예부사(禮府使) 승필(承弼), 절도사(節度使) 종우(從禹), 현감(縣監) 윤희(允熙)를 거쳐 학정(鶴亭) 응창(應昌)은 무과에 합격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가 외직으로 의령 현감(宜寧縣監)을 맡았다. 광해군 때 정사가 어지러워지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은둔하였다. 이분의 손자인 명한(嗚翰)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선생을 스승으로 섬겨 학행으로 세자의 스승이 되었다. 희태(希泰) 또한 가학을 이었으니, 이 분들이 공의 7대 이상이다.
조부 성환(聖煥)은 효성과 우애가 깊었으며 강직하였다. 선친은 재기(在基)요, 선비는 풍천 임씨(豊川任氏) 태호(泰灝)의 따님이며 대사성(大司成) 량(樑)의 후손으로, 일찍 과부가 되었으나 절개를 지켰다. 본생조는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 동환(東煥)이다. 생부는 재풍(在豊)이며 생모는 전의 이씨(全義李氏) 병권(炳權)의 따님이며 충경공(忠景公) 정란(廷鸞)주 92)의 후손으로 부덕이 넉넉하였다.
공은 고종 갑자년(1864년) 7월 14일에 고부군(古阜郡) 만수리(萬壽里)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종가 종숙(從叔)의 후사로 출계하여 양부모를 생부모처럼 섬겼다. 생모 또한 후사가 없자 종자(從子) 학호(學鎬)로 후사를 이었으니, 매번 기일을 만나면 처연하게 슬퍼하면서 "우리는 죄인과 같다."라 하였다. 매일 반드시 일찍 일어나 당실과 궤안을 깨끗이 청소하고 정리하여 자리에 먼지 하나 없었다. 몸가짐을 태만히 하거나 저속한 말을 입에 담지 않았으며, 일찍이 다급하게 말하거나 황급한 기색을 지니지 않았으며 타인의 허물과 잘못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집을 다스릴 때는 검약을 앞세우고 이익을 추구하지 않아 항상 마음이 담담하였다. 여러 종제들과 우애가 돈독하여 일을 논할 때 속마음을 말하였으며 맛있는 음식이 있거든 반드시 나눠 먹으며 늙을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사람을 상대할 때는 정성을 다하여 화기(和氣)가 무르익었으며, 상대방이 비록 실수를 하더라도 언성을 높이지 않고 반드시 온화한 말로 달래었다. 비록 혐의스러운 일이 있더라도 마음에 계교하지 않았으며 또한 개의치 않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대부분 승복하고 감화를 받아 화를 낸 자들은 화가 풀리고 사나운 자들은 행동을 조심하였다. 그러나 잡스럽고 올바르지 않은 무리에 대해서는 장차 자신을 더럽힐 듯 여기며 이르기를 "이러한 사람들은 비록 친인척이라도 멀리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가난한 벗과 곤궁한 친족에게는 비록 구휼할 힘이 없더라도 마음으로 항상 돌아보았으니, 불쌍하게 여기는 말이 단지 입으로만 내는 것이 아니라 진심을 담았다. 타인의 혼사와 상사에 부의할 때는 가난한 자들에게 더욱 마음을 다하였으며, 빈객을 대할 때는 입에 있던 음식을 뱉으며 나아가 맞이하면서 진정을 피력하였다. 그러므로 선비들이 문을 가득 채웠는데, 대부분 당대의 중망을 받던 이들이다.
항상 아들을 경계하기를 "차라리 남이 나를 저버릴지언정 내가 남을 저버리지는 말라." "남을 높이면 바로 이것이 나를 높이는 것이다." "한 마디 말을 함에 화복의 기미가 갈린다." "한 일이라도 잘 처리하면 음덕이 자손에게 미친다." "한 사람이 부덕하면 작게는 집을 망치고 크게는 나라를 망하게 한다." "대개 스스로 크다고 하여서 남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자신을 이롭게 하여 남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 "차라리 속임을 당할지언정 자세히 살피려 하지 말고, 차라리 두텁게 처리하다 실수할지언정 박하게 처리하다 실수하지 말라."라 하였으니 그가 평소 하는 말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이교도와 신학에 온 세상이 휩쓸리어 가자 정도(正道)를 지켜 흔들리지 않고 자손들을 검속하였다. 궁달로 지조를 바꾸지 않았으며 아래 사람을 너그럽게 대하고 가혹하게 다루지 않았다. 자손이 잘못을 저지르면 문득 엄하게 꾸짖어 용서하지 않았다. 만년에 집안 살림이 점차 기울어 사람들이 걱정해주자 곧 "차고 기우는 것은 일상적인 것이다."라고 하고 근심하는 기색이 없었다. 고요히 거처하며 일이 없을 때는 문득 책을 뽑아들어 낭랑하게 읽으며 즐거워하였는데, 늙을 때까지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공은 기가 가득하고 마음이 평안하여 일생 동안 건강하였기에 장수를 누릴 것으로 기대하였는데, 문득 을축년(1925년) 7월에 병에 걸려 11월 12일 위독해졌다. 유언을 청하니 말이 없다가 이윽고 장손을 불러 앞에 앉히고서 "사람의 도리는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을 아들다워야 하니, 효도와 공손, 충성과 신의뿐이다."라고 하였다. 세 번 이 말을 반복하고 또 잊지 말라고 세 번 거듭하였다. 이 날 타계하시니 나이 62살로, 난산(卵山)의 등침(嶝枕) 간좌(艮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고령 신씨(高靈申氏) 평구(平求)의 따님으로 귀래정 말주(末舟)주 93)가 유명한 조상이다. 부인은 효성스럽고 자애로우며 어질고 착하여 공의 덕에 짝이 되기 충분하였다. 세 아들을 낳았으니 해겸(海謙), 해승(海升), 해곤(海坤)이다. 정근(貞根), 명근(明根), 그리고 고흥(高興) 유광영(柳光永)의 아내는 장남의 아들과 딸이다. 배근(培根), 이근(頣根), 삼근(三根), 인근(仁根)은 차남의 아들들이다. 정근의 아들로 형탁(炯卓), 명근의 아들로 형철(炯哲)이 있다.
예전 내가 공의 산재(山齋)에서 구산 선사(臼山先師)주 94)을 모셨을 때 처음으로 공에게 절을 올렸는데 공은 헌걸차 키가 컸으며 모습은 살이 찌고 청수하였으며 풍모가 우아하고 중후하니, 장자(長者)임을 알 수 있었다. 이윽고 사익과 함께 구산을 스승으로 섬기게 되어 공의 집에 즐겁게 오가면서 공의 마음 씀과 삶을 절제하는 훌륭함을 자세히 알게 되었으니, 그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바로 덕의 징표임을 믿게 되었다. 총괄하여 논하자면 인후함을 바탕으로 삼아 청수(淸秀)함으로 성취하였다. 그러므로 겸손하게 행동하고 남을 사랑하며 의리를 앞세우고 이익을 멀리하는 덕은 타인이 미칠 바가 아닐 뿐만 아니라 또한 말세에 처하여 사특함을 물리치고 올바름을 지켰다. 이 때문에 안으로는 친족들이 열복하고 밖으로는 고을 사람들이 추중하여, 공이 죽는 날에 모두들 탄식하면서 "군자가 떠났구나."라고 하였으니, 여론의 공변됨이 어찌 그 까닭이 없겠는가.
아! 공의 어짊으로 더욱 거경궁리의 공부에 힘을 쌓고 천인성명의 깊은 이치를 궁구하였다면 능히 도술을 밝혀서 세도(世道)에 도움을 주었을 것인데 그렇게 할 겨를이 없었다. 비록 그러나 공이 마음속에 간직했던 것은 참으로 이에 있었으니, 이미 구옹(臼翁)을 열복하여 그를 따라 배웠으며 이어서 자질을 보내 스승으로 섬기게 하고서 매번 '뜻이 있는 자는 하고자 하는 일이 마침내 이뤄진다.'는 말로 권면하였다. 사우 가운데 공부를 하는 자들은 진심으로 좋아하여 오래 지날수록 더욱 존경하니, 지금도 인가의 후진 가운데 옛 유학의 덕을 따르며 신학문을 좇지 않는 것은 오씨 가문만한 데가 없다. 이는 공의 유운(遺韻)이 아니면 어찌 이럴 수가 있겠는가. 이에 공이 간직했던 실제를 속일 수 없으니, 삼가 아울러 써서 행장을 짓는다.
- 주석 92)이정란
- 1529~1600.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문보(文父)이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왜군이 배티고개[梨峙]를 넘어 전라도로 침입하자 스스로 수성장(守城將)이 되어 부민을 거느리고 전주성을 지켰는데, 군율을 엄히 하고 매일 순시를 하며 방비를 튼튼히 하니 공격의 틈을 엿보고 있던 적은 감히 공격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1597년 정유재란에 다시 왜군이 전주성을 포위하자, 수성의 계책을 제시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전주성을 지키던 명장(明將)은 성을 버리고 도망하니, 성중에서는 크게 혼란이 일어났다. 이에 다시 조정에 읍소하여 전주부윤이 되어 성을 지켰으며 삼도소모사가 되었다.
- 주석 93)신말주
- 1439~?. 본관 고령(高靈). 자 자집(子楫). 호 귀래정(歸來亭). 단종을 축출하고 세조가 즉위하자, 권지정자(權知正字)가 되어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한때 순창(淳昌)에 내려가 은거하였다. 후에 대사간과 전라도 수군절도사를 지냈다.
- 주석 94)구산 선사
- 간재(艮齋) 전우(田愚)를 가리킨다.
壽山吳公行狀【癸酉】
日, 吳友海謙士益, 抱其先君壽山居士家狀, 示余曰: "吾父之德行, 有足以傳後者, 子所知也, 子爲同鄕人, 可以見信, 子其狀之." 余惟其求也, 不以文而以可信, 有不可辭者, 遂按而敘之曰: "公諱炳鎬, 字景仲, 壽山號也.吳氏系出海州, 海州君賢輔, 爲上祖, 世襲冠冕, 成均進士廷悅, 始入我朝歷府尹, 希哲, 節度使, 進善, 叅奉, 自禮府使承弼節度使從禹縣監允熙, 至鶴亭應昌武宣傳出知宜寧縣, 光海政亂, 棄官遯跡.有孫嗚翰, 師沙溪金先生, 學行範世子.希泰亦紹家學, 是爲公七世以上.祖聖煥, 孝友剛直.考在基, 妣豊川任氏泰灝女, 大司成樑后, 早寡全節.本生祖敦寧府都正東煥, 考在豊, 妣全義李氏炳權女, 忠景公廷鸞后, 甚有婦德.公以高宗甲子七月十四日, 生于古阜郡萬壽里第, 幼而出爲宗家從叔後, 事所後如所生, 生庭亦無嗣, 以從子學鎬繼後.每當諱辰, 悽然而悲曰: "吾如罪人." 日必早起, 堂室几案, 明潔齊整, 座無一塵.身不設怠慢之氣, 口不出鄙倍之辭, 未嘗疾言遽色, 談人過惡.治家主儉約而不營利, 常淡如也.與羣從弟友篤, 論事吐懷, 有異味必分, 至老無失.接人款曲, 和氣藹然, 彼雖有失, 不加辭氣, 必溫言喩之, 雖有嫌不與較, 亦不介意, 故人皆承服而感化, 忿怒者釋, 暴悍者斂.至於異雜不正之徒, 則若將浼焉, 曰: "此等人, 雖姻親, 不得不疎之." 貧交窮族, 力雖未恤, 心常眷眷, 憫惻之言, 不啻口出.問人婚喪, 尤致意於孱弱, 待賓客, 吐哺迎接, 披露眞意, 故衣冠盈門, 多一時雅望.每戒子曰: "寧人負我, 毋我負人." "尊人便是尊己." "一言之發, 禍福之機." "一事善處, 蔭及子孫." "一人不德, 小則敗家, 大則亡國." "蓋不自大而輕人, 利己而害人." "寧見欺而不至察, 寧失厚而不失薄," 故其雅言, 類如此.異敎新學, 擧世滔滔, 而守正不撓, 撿束子孫.不以窮通易操, 御下寬而不苛.子孫有失, 輒嚴責不饒.晩而家業漸縮, 人爲之憂, 則曰: "盈朒常也", 無戚戚容.靜居無事, 輒抽卷朗讀而樂之, 老而不倦.公氣充心平, 一生康健, 期以遐壽, 忽以乙丑七月嬰疾, 至十一月十二日而革, 請遺命則無有, 俄而召長孫而前曰: "人之道, 父父子子, 孝悌忠信而已." 三復此言, 又申以勿忘者三, 以是日考終, 壽六十二, 葬于卵山嶝枕艮原.配, 高靈申氏平求女, 歸來亭末舟, 其顯祖, 孝慈仁善, 克配公德.生三子海謙·海升·海坤.曰貞根·明根, 高興柳光永妻, 長房男女.曰培根·頣根·三根·仁根, 次房男.貞根男炯卓, 明根男炯哲.昔余陪臼山先師于公之山齋也, 始拜公, 公頎而長, 貌豊而淸, 儀度雅重, 知其爲長者. 旣而與士益同師, 甚歡往來公家, 得以詳公用心制生之懿, 信其著於外者, 乃德之符也.總而論之, 仁厚爲質, 淸以濟之, 故不惟謙己愛人, 先義後利之德, 人不可及, 亦能處汙世, 而斥邪守正焉.是以內而宗族悅服, 外而鄕黨推重, 公沒之日, 莫不咨嗟曰: "君子逝矣." 輿論之公, 豈無以也. 噫, 以公之賢, 更得積累乎居敬窮理之功, 究觀乎天人性命之蘊, 吾知其能明道術而裨世程, 而不暇及也.雖然若公所存, 亶在乎此, 旣心悅臼翁而從之遊, 繼遣子姪而師事之, 每勵以'有志者事竟成'.士友之有學者, 中心好之, 久而愈敬, 至今人家後進, 食舊德而不歸新風者, 無如吳氏之門, 非公遺韻, 何以及此.是爲公所存之實, 不可誣者, 謹幷書以爲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