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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5
  • 행장(行狀)
  • 묵암 김공 행장(默菴金公行狀)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5 / 행장(行狀)

자료ID HIKS_Z038_01_B00001_001.025.0001.TXT.0015
묵암 김공 행장
내가 이미 족제 기술(箕述)을 위해 조부 화암공(華巖公)의 행장을 지었다. 기술이 다시 선고 묵암공(默菴公)의 행록을 보여주면서 행장을 지어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내가 "이미 화암공의 행장에서 공에 대해 언급하면서 '가정의 가르침을 받들어 부친을 덕을 잇고 집안을 잘 다스렸다.〔承襲庭訓, 肖德克家〕'고 칭하였으니, 이 여덟 글자면 충분히 다 서술하였거늘 어찌하여 다시 지으려 하는가."라고 하였다. 기술이 "대개 문장을 지을 때 제목에 따라 서술 내용이 주인과 빈이 있어서 말이 자세하고 간략하다. 부친과 조부도 마찬가지여서 주인은 자세하고 빈은 간략함이 다르니 어찌 마음에 흡족하겠는가. 원컨대 끝까지 잘 지어주기 바랍니다."라 하였다. 내가 "이런 마음을 지녔구나, 그대의 효성이여. 내가 어찌 감히 효자의 지성을 이뤄주지 않으랴."라고 하였다.
예전에 내가 자주 선공(先公)에게 절을 올렸는데, 행동이 장중하고 언사가 차분한 것을 보고서 덕을 지닌 어른임을 마음속으로 짐작하였다. 그런데 지금 이 기록을 보고서 더욱 그 자세한 것을 알게 되니 또한 다행이다. 드디어 기록을 살피고서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공의 휘는 낙항(洛恒), 자는 성천(聲天), 처음 이름은 재학(在鶴), 호는 묵암이다. 선조의 계통은 화암공 행장에 자세히 실려 있으며 가첩의 〈세덕편(世德篇)〉과 및 〈찬장인집(撰狀人集)〉에 잇달아 편찬되어 있으니 이에서 볼 수 있다. 공은 철종 갑인년(1854년)에 태어나 갑자년(1924년)에 돌아가셨으니 71살의 수를 누렸다. 몸가짐이 청고하며 마음이 차분하여 말이 적었으며, 평생에 한결같이 정직함으로 일을 처리하였다. 마흔둘 아내를 잃었을 때 세 아들이 있었는데, 한 명을 장가들고 두 명을 아직 어렸다. 자부(子婦)가 겨우 18세이므로 어떤 사람이 '지금 나이면 다시 장가들거나 측실을 들여도 괜찮다. 자부가 집안 살림을 꾸려가지 못하며 어린 아들을 양육하는 것도 어려우니 어찌 도모하지 않으시는가.'라 하자 공이 말하기를 "알았다. 도모하겠는데, 만일 올바른 사람이 아니라면 자부에 이간하는 말이 있어서 도리어 어린 아들을 양육하는데 해가 되니 그만 두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어린 아들 한 명이 죽자 드디어 다른 어린 아들을 이끌고 남의 집에서 6년 동안 훈장 노릇을 하며 간신히 그 아이를 가르치며 장가보냈다. 살림살이가 조금 펴지자 출계한 아우가 몹시 곤궁하였는데 온 힘을 다하여 도와주니 우애가 더욱 지극하였다. 쉰여섯 살에 장남을 잃게 되자 밖으로 살림을 주관하는 이가 없고 안으로 또 매우 군색하니, 어떤 사람이 "지금 측실을 두게 되면 어찌 편하지 않겠는가."라 하니, 공이 "며느리는 젊어서 과부로 지내는데 나 홀로 편하게 지낸다면 어찌 미안하지 않겠는가."라 하고 끝내 듣지 않았다. 이것이 공의 집안에서의 순독(純篤)한 행실이다. 나머지는 이를 미뤄 종합해보면 청고, 정직하다는 칭송을 상상하여 알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종회의 시제에서 공을 뵈었는데, 하루는 어떤 어른의 말을 하는데 사리에 다 들어맞지는 않자 공이 사리를 들어 명백하게 분별하였으니, 이는 실로 《논어》 〈향당〉에 보이는 뜻에 해당한다.주 90) 공이 비록 자호를 '묵(黙)'으로 하였지만 그러나 말을 해야 할 때는 이처럼 말하였으니, 말하거나 침묵할 상황에 적절하게 대응하였다고 할 수 있다. 기억하건대 예전 갑진년(1904년)에 선친 벽봉공(碧峰公)이 병암(炳菴) 김준영(金駿榮)주 91) 공과 함께 효리(孝里)의 서재로 공을 방문하여 종일 즐겁게 놀다가 돌아왔는데, 벌써 47년이 흘렀지만 어제처럼 눈앞에 선하다. 사람의 일에 대한 감회가 이니 어찌 탄식하지 않으랴.
묘는 탑촌(塔村) 남쪽 산기슭에 있는 선비(先妣)의 묘소 왼편의 을좌 언덕에 있다. 부인은 전주이씨(全州李氏) 병규(炳奎)의 따님으로 공의 묘소 왼편에 합부하였다. 장남은 경술(慶述)이고, 차남은 기술(箕述)【처음 이름은 판술(判述)】로 공의 종형 재덕(在德)의 후사로 출계하였다. 경술의 아들은 형재(炯才), 형렬(炯烈), 형규(炯奎)가 있고, 딸은 의령 남광희(南光熙)에게 시집갔다. 기술의 아들은 형표(炯杓), 형선(炯善), 형유(炯裕), 형균(炯均), 형숙(炯淑), 형종(炯鍾)이 있다.
주석 90)사리를……해당한다
《논어》 〈향당(鄕黨)〉에 나오는 말로 "공자가 종묘와 조정에 있을 때에는 말을 잘하면서도 다만 삼갔다.[其在宗廟朝廷 便便言 唯謹爾]"라고 하였다.
주석 91)병암(炳菴) 김준영(金駿榮)
1842~1907.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덕경(德卿), 호는 병암(炳菴)이다. 가세가 극도로 곤궁하여 주경야독을 하였으나 워낙 독실하게 공부하여 임헌회(任憲晦)·신응조(申應朝)·송병선(宋秉璿)·박운창(朴芸牕)·김계운(金溪雲) 등 당시 학자들에게 모두 허통(許通) 받았으며 성리학을 더욱 공부하기 위하여 한 살 연상인 전우에게 3번씩이나 찾아가 사제(師弟)관계를 맺었다. 이기설(理氣說)과 예학(禮學)에 특히 주력하였으며 이항노(李恒老)를 중심한 벽문학자(檗門學者)들의 주리설(主理說)과 인물성이설(人物性異說)을 주장하는 한원진(韓元震)계의 학설을 비판, 논변하는 반면, 율곡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과 간재(艮齋)의 학설을 적극 지지하는 학문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
默菴金公行狀
余旣爲族弟箕述, 狀其王考華巖公行矣.箕述復示以先考默菴公行錄, 請狀之, 余曰: "旣於華巖公狀, 語及公, 稱以承襲庭訓, 肖德克家, 此八字足以盡之, 何庸復爲." 箕述曰: "凡述文字, 題有主賓, 語有詳略, 父祖一也, 而有主詳賓略之殊, 豈得恔心乎.願終有以成之也." 余曰: "有是哉, 子之孝也.吾豈敢不遂孝子之誠乎." 昔累拜先公, 見其動止莊重, 言辭安定, 心知其爲有德長者, 今獲是錄, 益聞其詳, 亦幸矣.遂按而叙之曰: "公諱洛恒字聲天, 初諱在鶴號默菴.先系詳在華巖公狀, 聯編於家牒〈世德篇〉及〈撰狀人集〉中, 可得以見也.公生以哲廟甲寅二月二十四日, 終以甲子三月十日, 壽七十一.持身淸高, 平心寡言, 平生處事, 一以正直.年四十二喪偶時, 有三男, 一娶二幼, 子婦甫十八歲, 人謂'年可再娶側室亦可, 子婦不能執産, 保養幼穉亦難, 盍圖之.' 公曰: "若.圖之而如非其人, 慮有間言於子婦, 且反害於保幼, 不如己之." 己而一幼化去, 遂率一幼, 舌耕人家六年間, 僅得敎之娶之, 調度亦稍舒, 有出系弟窮敗, 極力周護, 友愛愈至.五十六喪長子, 外無主産, 內亦多窘, 人曰: "今則置一側室, 豈非便乎." 公曰: "婦少寡居, 而吾獨取便, 豈不未安." 終不聽, 此公內行之純篤也.餘可推此綜合, 於淸高正直之稱而想見也.嘗見公於宗會歲祀, 日有長老言未盡善, 公據事理便便辨之, 此實《論語》〈鄕黨〉首章之意也.公雖自號以'默', 然當言而言如此, 其於語默, 亦可謂合節矣.記昔甲辰夏, 先君碧峰公, 與炳菴金公, 訪公於孝里書舘, 終日盡歡而歸, 至今爲四十七年, 歷歷如昨日, 人事之感, 寧不慨然.墓在塔村南麓, 先妣墓左邊乙坐原.齊, 全州李氏炳奎女, 墓祔左.長子慶述, 次子箕述【初名判述】, 出爲公從兄在德後.慶述男炯才·炯烈·炯奎, 女宜寧南光熙.箕述男炯杓·炯善·炯裕·炯均·炯淑·炯鍾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