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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5
  • 행장(行狀)
  • 성암 양공의 행장 병술년(1946)(星巖楊公行狀【丙戌】)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5 / 행장(行狀)

자료ID HIKS_Z038_01_B00001_001.025.0001.TXT.0014
성암 양공의 행장 병술년(1946)
대대로 순창(淳昌)에서 살아온 양씨는 실로 남쪽 지방의 유서 깊은 가문인데, 그 집안의 선비 양병철(楊秉哲)은 부안(扶安) 가까운 곳에서 타관살이를 하고 있다. 나와 만년에 교유하여 친해졌는데, 하루는 선친 성암공(星巖公)의 행적 한 두루마리를 기록하고서 찾아와 행장을 청하였다. 나는 생각건대 사람의 행실을 형상하는 것은 사람의 모습을 그리는 것과 같아서 한 터럭이라도 같지 않으면 문득 다른 사람이 되니 이것이 두려워 감히 할 수 없는데, 또한 병든 몸을 부여잡고 눈 속에서 세 번이나 찾아와서 정성스런 말로 청하니 그만둘 수가 없었다. 이에 그 기록을 보니 비록 매우 자세하지만 번잡하거나 어지럽지 않으니, 실상과 어긋나거나 지나치지 않음을 헤아릴 수 있기에 이를 살펴서 서술하면 잘못된 점이 적을 것이다. 이에 잘못된 사실을 바로잡고 문구를 줄이고 다듬어서 다음과 같이 행장을 짓는다.
공의 휘는 원영(瑗永), 자는 치경(致瓊)인데 후에 원옥(爰玉)으로 고쳤다. 심석(心石) 송병순(宋秉珣)주 84) 선생의 문인으로 자를 고친 것은 선생의 명이다. 양씨는 계통이 남원(南原)에서 나왔으니, 고려 시대 군사 휘 경문(敬文)이 시조이다. 9대를 지나 휘 이시(以時)는 집현전 대제학(集賢殿大提學)을 지냈으며, 목은(牧隱) 이색(李穡),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주 85)의 추중을 받았다. 이 분이 직제학 휘 수생(首生)을 낳았으니, 수생이 송경(松京)에서 타계하실 때 부인 이씨(李氏)는 나이가 아직 젊었다. 부모가 그 뜻을 꺾으려고 하니 부인은 다른 곳에 시집가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한림(翰林) 김문(金問)의 부인 허씨(許氏), 진사 송극기(宋克己)의 부인 유씨(柳氏)와 함께 유아(遺兒)를 등에 업고 남쪽으로 내려왔으니, 세상에서 칭하는 '여말 삼부인'이 바로 이 분들이다. 본조 세조 때 정려하고 무덤을 높이 쌓았다.
4대가 지나 휘 배(培)는 은거하면서 의를 행하였는데, 연산군 때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지계사(芝溪祠)에 배향되었다. 문과에 급제하여 좌랑(佐郞)을 지낸 휘 공준(公俊)과 문과에 급제하여 전한(典翰)을 지낸 휘 홍(洪)을 지나 휘 사민(士敏)에 이르러 경서에 밝고 행실이 발라 특별히 천거되어 시강원 익위사(侍講院翊衛司)에 제수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또한 지계사에 제향되었다. 또 2대를 지나 진사 휘 여백(汝柏)이 경서에 밝고 행실이 발라 천거되어 참봉, 익찬, 주부, 현감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이 분이 두 아들을 낳았으니, 큰 아들은 휘 현거(顯擧)이며 차자는 휘 빈거(賓擧)로 중부 휘 여춘(汝春)의 후사로 출계하였으니, 이 분이 바로 공의 8대조이다.
증조의 휘는 필환(弼煥), 조부의 휘는 재화(在華)이다. 선친의 휘는 석규(錫奎), 호는 조은(釣隱)으로 효행과 학문이 뛰어났으니, 심석재가 묘갈명을 지었다. 모친은 장택 고씨(長澤高氏) 경진(慶鎭)의 따님이니,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의 9대손으로 여사(女士)의 행실이 있었다. 꿈에 신인이 은비녀 3개를 주었는데, 후에 세 아들을 두었다. 장남 기영(璣永)은 학행이 사림의 모범이 되었고, 차남 찬영(瓚永)은 과부(科賦)로 과장에서 이름을 날렸으며, 막내가 바로 공이다.
공은 철종 신유년(1861년) 11월 17일에 태어났다. 7살에 큰형 청파공(靑坡公)에게 학문을 배웠는데 번거롭게 가르치거나 감독하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잘하였으니, 날마다 수백 마디의 말을 외웠다. 12~3살에 문리가 이미 성취되어 《춘추》, 《예기》 및 여러 성리서들의 대지를 대략 통달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청파공이 죽자 애통을 견디지 못하였지만 오히려 더욱 각고의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부친 조은공(釣隱公)의 성격이 엄격하여 공이 작은 허물을 보면 용서하지 않았으니, 그러면 즉 온화하고 공손하게 공수(拱手)하고 서서 화가 풀리기를 기다렸다. 또한 부친이 책 읽기를 좋아하여 공과 의문 나거나 잘 알지 못하는 곳을 논할 때면 정성을 다해 모시고 강하였으며 중요한 핵심을 풀이하였다. 모친의 곁에 있을 때는 옛날 어진 여인과 국조의 충신, 효자, 열부 등을 들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여 환하게 웃음 짓게 하였다.
신묘년(1891년)에 모친상을 당하여 대단히 슬퍼하면서도 예를 다하였다. 계사년(1893년)에 연달아 부친상을 당하여 모친상처럼 상을 치렀다. 선조를 받듦에 정성을 다하여 종가의 제사에 참여하여 도왔으며, 조심스레 재계하여 제주(祭主)가 아니라고 해서 소홀하지 않았으며 또한 작은 병으로 제사를 폐하지 않았다. 중형 만포공(晩圃公)을 섬길 때 엄한 부친을 모시는 듯 공경하였으며, 만년에 2~3리 떨어진 곳에 거처하면서 날마다 시운을 수창하였다. 맛난 음식이 있으면 비록 적더라도 반드시 나눠서 드렸다. 자질(子姪)들이 잘못을 저지르면 부드럽게 마주하고서 타이르며 말과 낯빛을 엄하게 하지 않되 사랑과 엄격함을 모두 갖추었다. 심하게 잘못을 저지른 자가 있으면 끼니를 물리치고 자책하다가 그가 뉘우치면서 행동을 고친 것을 본 뒤에야 그만두었다. 안방에 거처할 때는 온화하고 공경함으로 부인을 대하였다. 남들과 사귈 때는 오래되어도 상대방을 더욱 공경하였다.
집 뒤에 바위가 있었는데, 바위 면에 동굴이 뻥 뚫린 것이 마친 신성처럼 환하였다. 공이 그것을 좋아하여 아침저녁으로 찾아 올라가 멈추지 않았는데, 마침내 자호를 성암(星巖)이라 하고서 설(說)을 지어 말하기를 "나는 품부 받은 기(氣)가 혼탁하므로 빛나게 문체가 있는 것을 보면 밝게 될 것을 생각하며, 받은 질(質)이 경부하므로 중후하여 변하지 않는 것을 보면 고요함을 함양할 것을 생각한다. 〈홍범(洪範)〉에 '뭇 백성은 별이다.'라고 하였는데, 나는 백성이다. 몸소 농사지어 참으로 온전하게 살면서 세속에 변화되지 않고 우두커니 홀로 거처하니 머리카락이 희게 새는 줄도 모른다."라고 하였다.
무술년(1898년)에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주 86) 선생을 고암(考巖)에서 찾아뵙고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하였으며, 경자년(1900년)에 다시 원계(遠溪)로 찾아갔다. 이로부터 연재와 심석재 두 사문에 왕래하니 덕망이 날로 드러나 찾아와 배우는 자들이 많아졌다. 학생들의 재목에 맞게 학문을 성취해 주었는데, 싫증을 내지 않고 정성을 다해 가르쳤다. 그렇지만 일찍이 스승으로 자처하지 않았다. 을사년(1905년)에 연옹이 도를 위해 순절한 것을 듣고서 신위를 만들어 곡하고 시를 지어 슬퍼하였다. 장사 지낼 때 다음과 같은 만시를 지었다.

사기가 더욱 불어나니 왜적들 간담이 놀라고士氣還增賊膽驚
태산은 가벼운 홍모(鴻毛)보다 무겁지 않아라.泰山不重一毛輕
참 학문 이어 열은 것 장차 어디에서 보랴繼開眞學將何見
존화양이 남긴 가르침 힘입어 다시 밝으리.尊攘遺謨賴復明
선왕에게 정성을 바쳤는데 외려 자결하니忱獻先王猶自靖
공은 후대에 전해져 또한 형용하기 어려우리. 功存後世亦難名
침문에 통곡하니 한은 끝이 없는데寢門痛哭無窮恨
살아 당시 아껴주신 애정을 저버렸구나.靠負當年眷愛情

이윽고 또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연옹이 타계한 이후로 학자들이 대부분 심석재에게 귀의하니, 공도 또한 마음을 다해 스승으로 섬겨 '충신독경(忠信篤敬)' · '시서예악(詩書禮樂)', '본심은 지키기 어렵고 사의는 제거하기 어렵다.[本心難保, 私意難除]'는 등의 가르치는 글을 받아 벽에 걸어 가슴에 새기고 다만 그렇게 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78세의 수를 누리고 무인년(1938년) 3월 5일에 타계하여 군의 동쪽 적성면(赤城面) 도왕(都王)의 뒤쪽 산기슭 임좌(壬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장연(長淵) 변씨(邊氏) 한용(漢龍)의 따님으로 도탄(桃灘) 사정(士貞)의 후손인데, 일찍 죽어 자식이 없다. 계비는 청주(淸州) 한씨(韓氏) 동화(東燁)의 따님으로 청성군 종손(終孫)의 후손인데, 부덕을 순수하게 갖추었다. 장남이 바로 병철이며, 다음으로 병익(秉益)과 병직(秉直)이 있고 딸은 이찬수(李燦秀)에게 시집갔다. 장남의 아들로 진섭(晉燮), 정섭(貞燮), 도섭(度燮)이 있으며, 차남의 아들은 건섭(健燮), 언섭(彦燮), 만정(萬鼎), 만성(萬成)이 있으며 딸은 최만기(崔萬基)에게 시집갔다. 셋째 아들은 ■■를 두었다. 사위 이찬수의 아들은 병집(丙緝)과 병진(丙縉)이다.
공은 풍도와 위의가 차분하고 장중하며 행동거지는 단정하고 엄숙하며 덕성은 따뜻하고 우아하였다. 규범에 얽매이지 않았지만 절로 법도를 넘지 않았으니, 자질이 참으로 이미 도에 가까웠다. 어려서 가정의 가르침을 받았고 만년에 현인의 문하에 노닐면서 교화를 받은 것이 깊었으니, 즉 의리에 마음을 쏟아 화순한 덕성이 안에 쌓였으며주 87) 자신이 지닌 것은 정명(精明)하고 남을 대할 때는 겸손하고 공손하였다. 이에서 학문의 힘을 속일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평소 학자들을 가르치기를 "뜻이 기운을 통솔하지 못하면 마음이 동서로 내달려서 말과 행동을 돌아보지 못하여 정신이 붕 떠서 돌아올 줄 모른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학문의 도는 다른 것이 아니라 심목(心目)을 열어 밝혀서 행함에 이롭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맹자가 '돌아가서 구하면 남은 스승[餘師]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남은 스승이란 바로 내 본심이다."라고 하였으며, 도한 "책을 읽을 때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하니,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비록 만 마디 말을 외우더라도 상자는 사고 구슬은 돌려주는 격주 88)이다."라고 하였다. 이런 말에서 공이 스스로 힘쓴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평소 힘을 쏟은 것은 다만 심신과 인륜과 일상에 있었으니, 실질을 보고 두터움을 행하였으며 명성을 겁쟁이처럼 두려워하였다. 즉 옛날의 이른바 위기(爲己)의 학문을 하는 자가 바로 공이 아니겠는가.
때로 세상 변화에 마음 아파하여 시로 읊조리다가 팔을 휘두르며 눈물을 닦고서 울분을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거처하는 곳에 산수가 아름다워 친한 벗이 찾아오면 시내와 산 사이에서 소요하고 담소하며 빼어난 시어와 우아한 운치로 마음을 달래고 몸을 편안하게 하였으니, 이는 또한 슬픔과 즐거움을 적절하게 조절하여 성정의 올바름을 얻은 것이다. 오호라! 후대에 공의 풍모를 듣는다면 반드시 거만하고 과장을 중시하는 자는 간략함으로 돌아올 것주 89)이며 허위를 일삼는 자는 진솔함으로 돌아갈 것이다.
주석 84)심석 송병순
1839~1912,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동옥(東玉), 호는 심석재(心石齋)이다.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으로,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순절한 송병선(宋秉璿)의 아우이다. 종형인 송병선과 함께 큰아버지 송달수의 문하에서 성리학과 예학을 수학했으며, 송달수의 사후에는 근수와 외삼촌 이세연(李世淵)의 지도를 받았다. 1912년 일제가 회유책으로 경학원(經學院) 강사에 임명하였으나 이를 거절하고, 대의를 지켜 순국할 것을 결심, 유서를 남긴 뒤 독약을 먹고 자결하였다.
주석 85)척약재 김구용
1338~1384. 본관은 안동, 자는 경지(敬之), 호는 척약재(惕若齋)이다. 1367년(공민왕 16) 성균관이 중건되자 정몽주(鄭夢周) ·박상충(朴尙衷) ·이숭인(李崇仁) 등과 성리학을 일으키고 척불숭유의 선봉이 되었다. 친명파로서 1375년(우왕 1) 삼사좌윤으로 있을 때, 이숭인 ·정도전(鄭道傳) ·권근(權近) 등과 함께 북원(北元)에서 온 사신의 영접을 반대하다가 죽주(竹州)에 유배되었다. 명나라와의 외교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던 1384년에 행례사(行禮使)로서 명나라에 가던 중 요동에서 붙잡혀 난징[南京]으로 압송, 영녕(永寧)현에서 병사하였다.
주석 86)연재 송병선
1836~1905.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화옥(華玉), 호는 연재(淵齋)·동방일사(東方一士)이다.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이며, 송면수(宋勉洙)의 맏아들로, 참의 송달수(宋達洙)와 송근수(宋近洙)의 종질이며, 송병순(宋秉珣)의 형이다. 큰아버지인 송달수에게서 송병순과 함께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두 차례의 「청토흉적소(請討凶賊疏)」를 올렸다. 그 해 음력 12월 30일 국권을 강탈당한 데 대한 통분으로, 황제와 국민과 유생들에게 유서를 남겨 놓고 세 차례에 걸쳐 다량의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유서에서 을사오적 처형, 을사조약 파기 및 의(義)로써 궐기하여 국권을 회복할 것을 호소하였다.
주석 87)화순한……쌓였으며
《예기(禮記)》 〈악기(樂記)〉에서 "화순함이 안에 쌓여서 영화가 밖으로 드러나게 된다.〔和順積中 而英華發外〕"라고 하였다.
주석 88)상자는……격
《한비자》 〈외저설(外儲說)〉에서 "초나라 사람이 정나라 사람에게 그의 구슬을 팔게 되었다. 목란(木蘭)으로 상자를 만들고 계수나무와 산초나무의 향기를 더하였으며 주옥(珠玉)으로 상자를 엮고 옥돌로 장식하였다. 정나라 사람은 그 상자만 사고 그 구슬을 돌려주었다."라 하였다. 형식이 내용을 능가함을 이른다.
주석 89)간략함으로 돌아올 것
《논어》 〈학이〉 4장 집주의 윤씨(尹氏) 설에서 "증자는 지킴이 요약하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자신에게서 구하신 것이다.[曾子守約, 故動必求諸身.]"라고 하였으니, 행동을 자신에게서 구한다는 의미이다.
星巖楊公行狀【丙戌】
楊氏之世居淳昌者, 實南服故家, 而士人秉哲, 近僑扶安.余交晩而契親, 日錄其先考星巖公事行一通, 來請狀文.余惟狀人行同寫人形, 一髮不似, 便是別人, 懼是而不敢爲, 則又扶病, 雪中三踵門, 而請益勤辭, 不獲已, 乃視其錄, 雖甚詳悉而不複不紊, 可揣其無差無溢, 按是而叙之, 庶幾寡過, 檃栝刪略而爲之狀曰: "公諱瑗永, 字致瓊, 後改爰玉, 宋心石先生門人, 而改字師命也.系出南原, 高麗郡事諱敬文, 其鼻祖, 九傳而諱以時, 集賢殿大提學, 爲李牧隱金惕若所推重, 生直提學諱首生, 捐舘松京, 夫人李氏, 年尙少, 父母欲奪志, 夫人矢靡他, 與金翰林問配許氏宋進士克己配柳氏, 負遺兒南下, 世所稱麗末三夫人, 是也.本朝世祖時, 旌閭封墓.四傳而諱培, 隱居行義, 燕山時累徵不起, 享芝溪祠, 歷文佐郞諱公俊文典翰諱洪, 至諱士敏, 經行特薦, 除侍講院翊衛不就, 亦享芝溪祠.又二傳而進士諱汝柏, 經行薦除叅奉翊贊主簿縣監幷不就, 生二子長諱顯擧, 次諱賓擧通德郞, 出系仲父諱汝春後, 公之八世祖.曾祖諱弼煥, 祖諱在華, 考諱錫奎號釣隱, 有孝學, 心石撰墓碣, 妣長澤高氏慶鎭女, 霽峰敬命九世孫, 有女士行.夢神人授銀釵三, 後有三子, 長璣永, 學行範士林, 次瓚永, 科學鳴場屋, 季卽公也. 生以哲宗辛酉十一月十七日, 七歲受學于伯兄靑坡公, 不煩敎督, 日誦數百言, 十二三文理己就, 《春秋》《禮記》及性理諸書, 略通大旨.未幾靑坡公沒, 痛不自勝, 猶益刻勵不輟.釣隱公性嚴, 見公小過而猶不貸, 則溫恭拱立, 以待怒解, 又好讀書, 待公而論疑晦, 則陪講亹亹, 解釋肯䋜.在母夫人側, 擧古昔賢媛, 國朝忠孝烈, 論說備盡, 以供歎笑.辛卯丁內艱, 哀過而禮盡, 癸巳連遭外憂, 一視前喪.誠於奉先, 助奠宗家, 致齊之謹, 不以非祭主而忽, 亦不以微恙而廢.事仲兄晩圃公, 敬如嚴父, 晩年各居數里, 日以詩韻相酬, 有異味, 雖少必分.子姪有過, 諄諄面戒, 不厲言色, 而愛嚴幷至.有甚焉者, 則却食自責, 見悔改而後已.居室之間, 和敬相對, 與人交, 久而尤敬.家後有巖, 面有一竅, 炯然如晨星, 公愛之朝往暮登而不捨, 自號星巖, 爲之說曰: "余稟氣混濁, 故見其煥乎有章, 而思有以光明, 受質輕浮, 故見其厚重不遷, 而思有以養靜, 〈洪範〉曰: '庶民惟星', 余民也, 躬耕苟全, 不與世移, 塊然獨處, 不知鬢髮之星星." 戊戌謁宋淵齋先生于考巖, 講《大學衍義》, 庚子再謁遠溪, 自是往來淵齋心石兩門, 德望日著, 來學者衆, 隨材成就, 用誠不倦, 然未嘗以師道自處.乙巳聞淵翁殉道, 位以哭之, 詩以悲之.及葬有輓曰, 士氣還增賊膽驚, 泰山不重一毛輕.繼開眞學將何見, 尊攘遺謨賴復明.忱獻先王猶自靖, 功存後世亦難名.寢門痛哭無窮恨, 靠負當年眷愛情.旣又操文而祭之.自淵翁沒, 學者多歸心石, 公亦專意師事, 受忠信篤敬, 詩書禮樂, 本心難保, 私意難除等訓辭, 揭壁服膺, 惟恐不及焉.壽七十八而卒于戊寅三月五日, 葬于郡東赤城面都王後麓壬坐原, 配長淵邊氏漢龍女, 桃灘士貞後, 早沒無育, 淸州韓氏東燁女, 淸城君終孫後, 婦德純備.男長卽秉哲, 次秉益秉直, 女適李燦秀.長房男晉燮·貞燮·度燮, 二房男健燮·彦燮·萬鼎·萬成, 女適崔萬基.三房男■■.李壻男丙緝·丙縉. 公風儀凝重, 動止端莊, 德性溫雅, 不拘拘於繩墨而自不失度, 天資固己近道.早襲庭訓, 晩遊賢門, 得之擩染者深, 則潛心義理, 積中和順, 在己者精明, 接人者謙恭, 學問之力, 不可誣也.雅訓學者曰: "志不帥氣, 東馳西鶩, 不顧言行, 游游泛泛而不知返." 又曰: "學問之道, 無他, 開心明目而利於行." 又曰: "孟子曰: '歸而求之有餘師', 餘師卽吾本心." 又曰: "讀書, 先正其心, 心不正, 雖日誦萬言, 買櫝而還珠." 其所以自勉者, 亦可知己.是以平生致力, 只在心身彛倫日用之常, 見實行敦而畏名若㥘, 古所謂爲己之學者, 非公耶.有時傷世, 發於吟咏, 扼腕抆淚, 憤惋不已.然所居有山水勝, 親朋至, 則逍遙談笑於泓崢之間, 逸韻雅致, 會於心適於體, 此又哀樂中節而性情得正者.於虖, 後世聞公之風, 其必有侈夸者反約, 虛僞者歸眞也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