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역/표점
- 국역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5
- 행장(行狀)
- 학생 최공 행장 기사년(1929)(學生崔公行狀【己巳】)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5 / 행장(行狀)
학생 최공 행장 기사년(1929)
하루는 최태일(崔泰鎰) 군이 선친의 가장(家狀)을 지니고 와서 나에게 보여주고 울면서 말하기를 "우리 선친께서 부모를 섬긴 효행은 타인들은 그렇게 할 수 없으며, 집안에 거처한 내행(內行)은 순수하고 독실하며 처세에 의리를 중시하고 올바름을 지켰습니다. 다만 가난하게 살다가 돌아가시니 그러한 사실을 아는 자가 없습니다. 원컨대 글을 지어 널리 선양하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평소에 최군이 단정한 선비라는 것을 알기에 그의 말도 믿을 수 있으며, 또한 예전에 공에게 인사를 드릴 때 순수하고 질실(質實)한 사람임을 알았다. 이에 가장(家狀)을 살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공의 휘는 상현(上鉉), 자는 군칠(君七)이다. 최씨는 계통이 전주(全州)에서 나왔다. 고려 집현전 대제학인 문충공 휘 군옥(羣玉)이 시조가 된다. 시대를 내려가 만육(晩六) 선생 휘 양(瀁)주 80)에 이르러, 도덕과 절의가 한 시대에 으뜸이었으니 이 분이 공의 16대조이다. 직제학(直提學)으로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된 휘 진명(進明), 군수(郡守)로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된 휘 여관(汝寬), 춘추관 한림(春秋舘翰林)인 휘 팔준(八俊)은 만육의 아들과 손자와 증손이다. 공의 증조의 휘는 명경(命憬)이고, 조부의 휘는 수일(守一)이며, 부친의 휘는 재수(在洙), 모친은 경주(慶州) 정씨(鄭氏) 기순(奇淳)의 따님이다. 휘 재우(在佑)와 고흥(高興) 유씨(柳氏) 제두(濟斗)의 따님은 낳아주신 부모이다.
공은 철종 정사년(1857년) 4월 8일에 태어났는데, 17살에 막내 아버지의 후사로 나갔다. 자못 성품이 괴팍한 여동생 하나가 있었는데, 모친의 사랑을 독차지 하였다. 날마다 공을 비방하는 것을 일삼아 모친이 나타나지 말라고 물리쳤는데, 은밀히 극심하게 못살게 굴어 외부인은 알지 못하였다. 공은 성질을 참으며 몸을 부지런히 놀려 더욱 자식의 직분을 부지런히 하면서 힘써 오직 부모의 뜻을 받들었다. 서모의 아우와 재산을 나눌 때, 부모의 뜻은 현격하게 차별하였는데도 또한 온전히 뜻을 받들었으며 죽을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상을 당하여 부장(副葬)하는 물건을 정성을 다해 마련하여 유감이 없게 하였다. 서모의 아우는 성격이 완악하고 오만하여 집안의 애물단지였는데, 한결같이 참고 용서하며 성심으로 깨우쳐 뉘우치고 고치기를 바랐다. 그가 함부로 사치하여 가산을 탕진하자 땅과 곡식을 나눠주어 삶을 꾸려나가게 하였다.
무자년(1888년)에 큰 흉년이 들어 음식이 다 떨어져 3개월을 풀뿌리를 캐 먹었는데도 절대로 사람들에게 돈을 빌리지 않았다. 갑오년(1894년) 동학이 일어나자 여러 고을 사람들이 바람에 휩쓸리듯 쓸려 들어갔다. 같은 마을에 이 아무개는 그 괴수로 위세를 떨쳐 사람들을 두렵게 하였는데, 즉 그는 공의 자형(姊兄)으로 공에게 그를 따르라고 매우 달래고 위협하였으나 끝내 흔들리지 않았다. 정사년(1897년)에 약간의 토지를 사고서 개인 계약서를 받고 관가의 증명서를 받지 못하였다. 후에 옛날 주인이 다시 그 땅을 사니, 어떤 사람이 "법사(法司)에 고발하면 내가 마땅히 증인이 되리라."라고 하였다. 이에 공은 무연(憮然)히 탄식하기를 "그의 나쁜 습속을 혼내려고 살던 곳에 몸을 굽히는 것을 나는 하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다시 백 원의 돈을 주니, 그가 마침내 감동하고 부끄러워하여 땅을 돌려주었다.
을축년(1925년) 4월 17일 돌아가셨으니, 임시로 정토산(淨土山) 아래 산북리(山北里) 앞 산기슭 자좌(子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창녕 조씨(昌寧曹氏) 병민(秉玟)의 따님이니 공희공(恭僖公) 흡(恰)의 후손으로 부덕을 두루 갖추었다. 장남은 태일(泰鎰)이고 차남은 순종(淳宗)이며, 두 딸은 예천(醴泉) 임옥기(林玉基)와 완산(完山) 이창의(李昌儀)에게 시집갔다. 태일은 남양(南陽) 홍재범(洪在範)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창식(昌植), 현식(賢植), 강식(康植)을 두었다. 순종은 언양(彦陽) 김병순(金炳淳)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외손은 임일석(林逸錫)과 임이석(林理錫)이 있다.
공은 천성이 근검하여 가난한 살림에 힘써 농사지어 살림을 꾸렸다. 구차하게 남과 일치하려 하지 않았으며 분수를 편안히 여기고 만족할 줄을 알았다. 자신에 쓰는 것은 매우 박하였지만 곤궁한 사람을 구휼하였으며, 흉년에는 힘을 다하여 넉넉하게 베푸니 온 마을 사람들이 칭송하였다. 항상 친척 가운데 가난하여 살기 힘들 자가 있으면 자신이 병이 난 것처럼 아파하였다. 임종에 미쳐서도 누차 말하기를 '사람에게 재물을 빌려주었더라도 차마 독촉하지 말라.'고 하니, 갚지 않은 자가 반 정도 되었다. 일찍이 이해의 다툼 때문에 입으로 업신여기거나 욕설을 내지 않았으며 발은 송사의 뜰에 이르지 않았다. 평생 몸가짐을 조심하여 깊은 못에 임하고 엷은 얼음을 밟는 듯하였으며 일을 처리할 때는 실수가 있을까 두려워하였다. 사람을 상대할 때는 친하거나 멀거나 따지지 않고 진정을 다하고 피차의 경계를 두지 않았으며, 사람들과 약속할 때는 반드시 먼저 행하고서 후에 허락하였다. 이 모든 것은 공의 자질이 도에 암합한 것인데, 오히려 소소한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만약 공의 평생의 큰일과 어려움을 당한 것으로 말하자면, 후사로 들어간 집에서 어려움을 겪었지만 처함에 부모와 형제 사이에서 도를 잃지 않았으며, 동비(東匪)의 어지러운 세상에서 달래고 협박하며 뜻을 꺾으려 하였지만 올바름을 지켜 기세등등한 인척에게도 뜻을 꺾이지 않았으며, 사는 마을에서 몸을 굽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서 온 세상이 바람에 휩쓸려가는 상황에서 춘추의 의리를 세웠으니, 이는 실로 경전을 궁구하여 도를 아는 사람도 하기 어려운 바이거늘 공은 능히 이것을 하였다. 대개 사람은 본래 밝은 마음을 지니고 사물은 지극히 마땅한 이치를 지녔으니, 공을 비록 "학문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이런 마음으로 이런 이치를 구하였으니 열심히 공부하여 식견을 갖추었다. 자하가 이른바 '내 반드시 학문하였다고 이르리라.'주 81)라고 한 것은 이를 이름인가.
대개 공은 평소 말하기를 "사람이 되어 예의와 염치가 없으면 이는 금수이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하늘 아래 백성들의 선악은 하늘이 환하게 보고 있으니, 어찌 두렵지 않으랴."라고 하였으며, 또한 "사람이 복을 받고 받지 못하는 것은 모습에 있지 않고 마음에 있다. 선을 하면 반드시 복을 받고 악을 하면 반드시 재앙을 받는다는 말을 나는 익숙히 듣고서 마음에 새겨두었다."라고 하였으니, 이에서 더욱 공이 마음에 지닌 바를 알 수 있다.
- 주석 80)만육 최양
-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백함(伯函), 호는 만육(晩六)·장륙당(藏六堂)이다. 외삼촌인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에 나아가 학문을 익혔으며, 1376년(우왕 2) 문과에 급제한 이후 이부 상서와 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392년(태조 1) 포은 정몽주가 순절하게 되자 벼슬을 내어 놓고 진안군 백운면 중대산(中臺山)으로 낙향한 이후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 주석 81)내……이르리라
- 이 말은 《논어》 〈학이(學而)〉에 보이는데, 전문은 다음과 같다. "어진 이를 어질게 여기되 색을 좋아하는 마음과 바꿔 하며, 부모를 섬기되 능히 그 힘을 다하며, 인군을 섬기되 능히 그 몸을 바치며, 붕우와 더불어 사귀되 말함에 성실함이 있으면 비록 배우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나는 반드시 그를 배웠다고 이르겠다.〔賢賢易色 事父母能竭其力 事君能致其身 與朋友交 言而有信 雖曰未學 吾必謂之學矣〕"
學生崔公行狀【己巳】
一日崔君泰鎰, 袖其先公家狀, 示余而泣曰: "吾父事親孝行, 人難能, 居家內行, 淳篤, 處世重義守正.惟是窮約而沒, 人無知者, 願有以闡之." 余素知崔君莊士, 其言可信, 且昔拜公顔, 識其爲淳實人, 乃按狀而敘之曰: "公諱上鉉字君七.崔氏, 系出全州.以高麗集賢殿大提學, 文忠公諱羣玉, 爲鼻祖.傳至晩六先生諱瀁, 道德節義, 卓冠一世, 是爲公十六世.直提學贈都承旨諱進明, 郡守錄原從勳諱汝寬, 春秋舘翰林諱八俊, 晩六子孫曾也.曾祖諱命憬, 祖諱壽一, 考諱在洙, 妣慶州鄭氏奇淳女, 諱在佑及高興柳氏濟斗女, 其所生考妣也.公以哲廟丁巳四月八日生, 年十七, 出爲季父后.有一妹, 性頗乖恃, 慈闈鍾愛, 日以毁公爲事, 使擯不見容, 加以隱禍孔慘, 外人莫知.公忍性勞體, 益勤子職, 惟以順親志爲務.與庶弟析箸, 親意懸有厚薄, 亦一切承順, 沒齒無言.及丁憂, 附身之物, 誠信無憾.庶弟性頑傲, 幾爲家禍, 一幷忍恕, 誠心曉喩, 望其悔悛.及荒侈破産, 割田捐粟, 以資其生.歲戊子, 大歉乏食, 咬菜者三月, 絶不稱貸於人.甲午東亂, 列邑風靡, 有同里人李某, 其魁也, 而威熖懾人, 卽公姊夫, 極其慫慂誘怵, 而終不撓.丁巳, 買土若干, 受私契而無官證, 後舊主再買, 有人曰: "可告法司, 吾當證之." 公憮然歎曰: "爲懲彼習而屈身所閭, 吾不爲也." 復與百圓金, 彼卒感愧歸土.以乙丑四月十七日卒, 權葬于淨土山下山北里前麓子坐原, 配昌寧曹氏秉玟女, 恭僖公恰后, 婦德備至.長男卽泰鎰次淳宗, 二女醴泉林玉基·完山李昌儀.泰鎰娶南陽洪在範女, 有男昌植·賢植·康植.淳宗娶彦陽金炳淳女.外孫林逸錫·理錫也.公天性勤儉, 居貧食力, 不苟合人, 安分知足, 自奉甚薄, 而能賙窮匱, 儉歲尤極力優施, 擧里咸頌.常念宗族貧無資生者, 若疾在己.逮屬纊, 猶累言之, '有貸給於人, 不忍督取.' 不見報者居半.未嘗以利害之爭, 口出慢詈, 足至訟庭.平生謹身, 如臨深履薄, 臨事如恐有失.接人, 無親疎, 用情實, 去畛域, 與人約信, 必先踐後諾.凡此皆公資質之暗合於道者, 猶可謂之疏節, 至若公生平大致遭難言之, 變於所後之家而處之不失其道於父母兄弟之間, 遇誘怵之撓於邪亂之世, 而守正不奪於姻親威熖之際, 恥屈身於所閭, 而立春秋之義於擧世風靡之中, 此實窮經識道者之所難, 而公則能之.蓋人有本明之心, 物有至當之理, 公雖曰未學, 以此心究此理, 煞用工夫, 越有見識也.子夏所謂'吾必謂學'者, 此之謂歟.蓋公雅言曰: "人而無禮義廉恥, 是禽獸也." 曰: "下民善惡, 天鑑孔昭, 可不畏乎." 曰: "人之福不福, 不在貌在於心, 作善必福, 作惡必殃, 吾之熟耳銘心者也." 此尤可知公所存也."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