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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5
  • 행장(行狀)
  • 일산 손공 행장(一山孫公行狀)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5 / 행장(行狀)

자료ID HIKS_Z038_01_B00001_001.025.0001.TXT.0011
일산 손공 행장
공의 휘는 종순(鍾純) 자는 치성(致誠)으로 일산(一山)은 그의 호이다. 손씨(孫氏)는 계통이 경상도 밀양부(密陽府)에서 나왔다. 신라 시대에 효자 손순(孫順)이 석종(石鐘)을 얻는 기이한 일이 있어서 왕이 집과 쌀을 하사하여 그 효성을 장려하였다. 죽은 뒤에 시호는 문효(文孝)이니, 이 분이 시조이다. 세대가 전해 내려와 광리군(廣理君) 긍훈(兢訓)은 고려 태조를 도와 높은 공적을 세워 밀양에 봉해졌다. 또다시 8대가 지나 문과에 급제한 사공 변(抃)은 청백리에 뽑혔으며 명신에 들어갔다. 또 4대가 지나 밀성군 빈(贇)이 나왔으며, 또 6대가 지나 문과에 급제한 목사 책(策)이 나왔으니, 바로 조선 시대이다. 목사의 현손(玄孫)인 영귀당(咏歸堂) 비장(比長)은 문과와 증시에 합격하여 부제학을 지냈다. 충간했던 뜨거운 마음은 조정에서 으뜸이니주 69) 그 일이 《국조실록》에 실려 있다. 영귀당의 증손 도봉(道峰) 홍적(弘績)은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을 지냈는데, 명종 을사년에 사국(史局)을 담당하여 당시 일을 곧바로 기술하여 여러 임씨들의 무고에 걸려들어 위원(渭原)주 70)으로 귀양 갔다가 돌아가시니, 사림들이 그를 추모하여 부안(扶安)의 옹정(甕井)에 서원을 설립하였다. 이 분이 참봉 승경(承憬)을 낳았는데 승경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양성(陽城)주 71)에서 순국하였으니, 공에게 8대조가 된다. 조부 경엽(景燁)과 부친 철우(哲宇)는 금곡(錦谷) 송능상(宋能相)주 72) 공의 문하에서 종유하였는데, 두 분 모두 효도로 정려를 받았다. 모친은 조양 임씨(兆陽林氏)와 나주 나씨(羅州羅氏)로 모두 맑은 덕을 지녔다. 공은 나씨의 소생으로 다섯 명의 형제 가운데 막내이다.
공은 철종 갑인년(1854년) 5월 23일에 정읍현(井邑縣) 석산리(石山里) 집에서 태어났다. 본성이 영민하여 14~5세가 되기 전에 사서(四書)를 통하여 또래들이 미치지 못하였으며 부로(父老)들이 대성할 것이라 기대하였다. 정묘년(1867년)에 부친상을 당하였을 때 14살이었는데, 어른처럼 상례를 치렀다. 장지를 정할 때 여러 형과 조카들이 한 방에 모여 필점(筆占)으로 구하였으나 모두 영험하지 않았다. 공은 아직 관례를 하지 않았기에 가장 마지막 차례가 되어 붓을 휘둘렀는데 영험함을 얻어 좋은 무덤의 터를 잡게 되니 사람들이 그 정성에 감응한 것을 기이하게 여겼다. 전곡(奠哭)의 여가에 《가례(家禮)》를 읽기를 멈추지 않으니 공의 예학이 정밀하게 되었다. 대개 이 때부터 일찍 부친을 여의어 봉양하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겨서, 항상 찾으려고 하나 찾지 못한 사람처럼 안절부절 못하였다.주 73) 기일을 만나면 눈물을 쏟으며 통곡하고 오열하니 마치 처음 초상이 날 때처럼 하였다.
가난하여 공부를 할 수 없게 되자 집안을 꾸리며 남은 힘으로 책을 읽어 의문이 나면 곧바로 기록하였다가 경연관 운창(芸牕) 박성양(朴性陽)주 74) 선생에게 나아가 질정하였다. 선생은 공을 한 번 보고서 그 마음이 표리여일하다는 것을 알고서 순(純), 성(誠) 일(一)의 세 글자로 이름과 자와 호를 지어주면서 가상하게 여겼다. 공은 선생을 깊이 믿고 종유하였으며, 선생이 타계하자 3개월 동안 가마(加麻)주 75)하였다.
모친을 섬김에 사랑과 공경을 지극히 하였다. 병이 나자 조금도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밤에 허리띠를 벗지 않았다. 이렇게 석 달을 하니 몸이 수척해져 거의 병이 날 지경이었다. 이에 여러 형들이 중도(中道)에 지나치다고 꾸짖자 이에 잠시 침소에 나아가 쉬었다. 모친의 병이 심해지자 손가락을 찢어 피를 입에 흘려 넣어주니 그날은 넘겼지만, 마침내 무자년(1888년) 11월 9일에 돌아가시게 되었다. 공이 예를 지켜 장사를 치룬 것은 이전 부친상에서 이미 그러하였으니, 현재 정과 예를 다하고 그 법도를 엄하게 한 것은 실로 공에게는 힘들지 않은 일이었다.
공은 상을 마치자 종중의 모임에서 의논을 제시하기를 "이처럼 세도가 무너졌으니 영화를 어찌 구하리오. 다만 후생을 교육하여 선대의 업을 실추하지 않는 것이 제일 중요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돈을 갹출하여 계를 만드니, 불어난 재물이 자못 상당하여 집을 세워서 학문을 익힐 장소로 삼고 책을 구매하여 독서할 바탕으로 삼았다. 자질(子姪) 이외에 원근에서 와서 배우는 자들이 매우 많았는데 가르침을 게을리 하지 않으니, 많은 인재가 양성되어 대단하였다. 사람을 상대할 때는 힘써 그들을 기쁘게 하여 조금도 소홀하게 대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본성은 이단을 물리치는데 엄격하였기에 방술(旁術)로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쳐다보지도 않았으니, 저들도 기가 절로 죽어서 감히 자신의 방술에 대해 자랑하지 못하였다. 갑오년(1894년)에 동비(東匪)들의 기세를 올릴 때 호남이 가장 심하였고 그 중에서도 정읍이 더욱 심하였는데, 오직 공이 살던 마을은 침범하지 못하였다.
친족의 자녀 가운데 가난하여 혼사를 치르지 못한 자가 있거든 공이 앞장서서 재물을 내었고 이어서 여러 친족에게서 거둬 도와서 때를 놓치지 않게 하였다. 마을에 공부할 때를 놓친 자가 있으면 밤에 공부하기를 권하여 가르치니, 사람들이 손 선생이라 불렀다. 근처에 고용한 노비들도 또한 정강성(鄭康成)의 집안 노비들처럼 글자를 알았다고 한다.주 76) 공은 조상을 추모함에 정성을 다하여 먼 시대 조상의 분묘의 의물을 험한 길을 찾아가 고생 고생하여 마침내 마련하였다. 평생의 뜻은 다만 선조를 계승하고 후손에 넉넉함 드리우며 자신을 수양하고 남을 성취시키는 것뿐으로, 다른 것은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러므로 자주 굶주리는 근심을 타인은 감당하기 어려웠는데, 공은 편안하게 받아들였다.
물건을 사양하거나 받는 의리에 대단히 엄격하여 만일 마음에 온당하지 않다고 여기면 조금도 취하지 않았으니, 식자들이 만석군(萬石君)주 77)의 자질로 유공작(柳公綽)의 가법주 78)을 행하여서 이 둘을 겸하면서도 자신을 바르게 하는 것은 그들보다 낫다고 하였다. 향도(鄕道)의 선비들이 사실을 기록하여 서로 추천하여 읍영(邑營)에서 상과 물건을 내렸는데, 그런 일이 없다고 하면서 상과 물건을 싸서 돌려보낸 것이 여러 차례였다.
을사년(1905년)에 간재(艮齋) 전우(田愚) 선생을 찾아뵈었는데, 선생이 평소 공의 이름을 듣고서 오래 친한 이처럼 대하였으며 돌아갈 때 글을 써서 장려하였다. 그 후로 공은 자주 편지를 보내 많은 것을 질정하였다. 공은 항상 문생과 자질(子姪)에게 말하기를 "이 마음이 한결같이 바르면 온갖 이치가 절로 밝아져서 천하에 어려운 일이 없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학자는 육행(六行)주 79)에 한 가지라도 흠결이 없는 연후에 바야흐로 학문이라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공의 본령(本領)이니, 정성을 다해 사람을 가르친 것도 또한 이와 같다.
기미년 11월 1일에 집에서 돌아가셨으니, 향년 66세였다. 원근의 많은 사람들이 탄식하면서 "군자가 떠났구나."라고 하였으며, 붕우와 문생 가운데 가마(加麻)한 자들이 상당하였다. 석산(石山)의 뒷 산록 간좌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남양(南陽) 홍씨 신영(信永)의 따님으로, 가난을 편안히 여기면서 집안을 바르게 다스렸으며 한번도 근심하는 기색이 없었으니, 마땅히 군자의 배필이 될 만하다. 두 아들을 낳았으니, 장남은 덕원(德源)이고 차남은 행원(行源)이다. 덕원의 아들로 성하(聖夏)가 있고 사위로는 고광문(高光文)이 있다. 행원의 아들로는 성환(聖桓), 성훈(聖訓), 성근(聖根)이 있고 사위로는 이동열(李東烈)과 고광조(高光晁)가 있다. 성환의 아들로는 기선(淇宣)과 오선(五)이 있다.
오호라! 공은 내 선친의 벗이다. 매번 공이 춘추에 성묘하러 올 때 반드시 길을 둘러서 찾아와 서로 매우 기뻐하였다. 처음에 내가 공에게 절을 올릴 때 나아가 아직 어렸는데, 그러나 공의 청아한 용모는 따뜻하면서도 굳세어 존경함이 일어났고 차분한 말은 도리에 어긋나지 않았으니, 단정하고 장중한 선비임을 알았다. 공이 성묘하러 올 때가 되면 공과 선친이 대화하는 말을 자주 들었으니, 간곡한 진심에서 하는 말에서 학문이 지극하고 덕이 높음을 알 수 있으며 개연히 근심하는 말은 세상의 교화가 풀어지고 도가 사라진 것이었다. 정읍에서 오는 선비들은 대부분 말하기를 '공이 집과 향촌에서 행한 바는 옛날 법도를 따라 지금 세상에 드문 것으로 올바름에서 나오지 않음이 없다.'라고 한다. 이에 공이 마음에 지닌 바와 행한 바가 옛날 법도에 부끄러움이 없음을 알 수 있으니, 이른바 도를 독실하게 믿고 학문을 좋아하는 자라고 하겠다.
지금 다시 공의 종손 성철(聖徹)이 지은 가장(家狀)을 얻어서 읽어보니 부모를 섬기고 상에 거하며 지결을 세워 마음을 전한 자세한 실상을 알게 되었으니, 이에 공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전체(全體)를 잘 알게 되었다고 하겠다. 다만 이 가장은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히 서술하였지만 학문하는 과정에 대해 소략하며 아울러 논저의 요지 한 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기에 학문하는 차례와 조예의 깊음, 귀숙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고찰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가장에서 '성리의 여러 책에 대해 정밀하게 연구하지 않음이 없으며, 《가례》와 《소학》 그리고 《상서》를 대단히 좋아하였다.'라 하였으니, 대저 격물치지의 방법은 성리에서 나오고 제가치국의 정치는 모두 위 세 책에 갖추어져 있으니, 이를 보면 공의 학문이 격물치지에 깊으며 그 아는 바를 미뤄 가정에 행하고 나라에 미친 것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유문(儒門)에서 서로 전하는 정법은 지와 행을 함께 닦는 것이니, 공이 이에 해당하지 않는가.
대개 공의 자질은 원래 아름다운데다가 공부까지 지극하였으니, 세상에 크게 드러난 조상인 영귀당(咏歸堂)과 도봉(道峰)의 덕을 마음에 담고 명현인 운창(芸牕)과 간재(艮齋)에게 의심을 질의하였다. 시와 예를 길이 전하여 안으로 행실이 갖춰지고 학문의 문로(門路)가 올바름을 얻어 아름다운 은혜를 남겼으니, 아아! 훌륭하도다. 이 어찌 기록하여 세상의 입언군자에게 고하지 않으랴. 공의 맡아들 덕원이 나에게 행장을 청하였는데, 내가 비록 못났지만 선대의 깊은 우의를 생각하매 감히 사양하지 못하니 삼가 가장을 서술하고 나의 견해를 붙여 이상과 같이 찬술한다.
주석 69)충간했던……으뜸이니
그 내용은 앞의 〈통정대부승정원우부승지임압손공행장(通政大夫承政院右副承旨笠巖孫公行狀)〉에 보인다.
주석 70)위원
평안북도에 있는 군이다.
주석 71)양성
경기도 안성의 옛 지명이다.
주석 72)금곡 송능상
1710 ~ 1758.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사능(士能)이며, 호는 운평(雲坪)·동해자(東海子)이다. 한원진(韓元震)의 문인으로,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을 쌓아 약관에 명성을 떨쳤다. 윤봉구(尹鳳九)·이재(李縡)·임성주(任聖周)등과 교유를 맺었으며, 문인으로는 조카인 송환기(宋煥箕)가 유명하다. 이른바 호락논쟁(湖洛論爭)이 일어났을 때는 스승 한원진의 설을 좇아 호론의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에 동조하였다. 《주역》을 깊이 연구하였고, 예학에 밝았다. 시문집인 《운평집》이 있다.
주석 73)찾으려고……못하였다
《예기》 〈단궁 하(檀弓下)〉에서 "노(魯)나라의 안정(顔丁)은 부모의 거상(居喪)을 잘하였다. 부모가 죽은 처음에는 황급히 뛰어다니며 아무리 찾아도 부모를 찾지 못하는 것처럼 하였다. 빈소(殯所)를 차린 뒤에는 부모를 멀리 바라보면서도 따라가지 못하는 것처럼 하였다. 장례(葬禮)를 마치고는 마치 부모가 어디 나갔다가 돌아올 시간이 안 되어서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슬퍼하였다.〔顔丁善居喪 始死皇皇焉如有求而弗得 旣殯望望焉如有從而弗及 旣葬慨然如不及其反而息〕"라고 하였다.
주석 74)운창 박성양
1809~1890.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계선(季善), 호는 운창(芸窓)이다. 송근수(宋近洙)의 천거로 1880년(고종 17)에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에 임명되고, 이어 사헌부지평·호조참의·동부승지·호조참판·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주석 75)가마
문인(門人)이 스승의 상(喪)에 심상(心喪)을 입는 표시로 겉옷에 삼베 조각을 붙이는 것이다.
주석 76)정강성의……한다
정강성은 후한(後漢) 때의 학자인 정현(鄭玄)으로, 강성은 그의 자이다. 그의 집안 노비들은 책을 읽을 줄 알아 평상시에 《시경》의 말을 인용하곤 하였다고 한다. 《世說新語 文學》
주석 77)만석군
만석군(萬石君)은 한 문제(漢文帝) 때에 벼슬이 태중대부(太中大夫)가 되고 경제(景帝) 때에 구경(九卿)에 이른 석분(石奮)을 가리킨다. 석분은 본디 공경하고 근신함으로써 임금의 총애를 입었던바, 그의 아들 건(建), 갑(甲), 을(乙), 경(慶) 또한 모두 아버지를 닮아서 착한 행실과 효도하고 근신함〔馴行孝謹〕으로 인하여 각기 이천석(二千石)의 벼슬에 올랐으므로, 경제가 이르기를 "석군 및 네 아들이 모두 이천석이 되었으니, 신하에 대한 높은 대우가 그 가문에 다 모였다.〔石君及四子皆二千石 人臣尊寵乃擧集其門〕"라 하고, 석분을 만석군이라 호칭했던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卷103 萬石君列傳》
주석 78)유공작의 가법
당(唐)나라 하동 절도사(河東節度使) 유공작(柳公綽)에 대해서는 소학 여러 곳에서 언급하였다. 유공작은 동생 유공권(柳公權)과 우애가 깊어 항상 같이 공부하고 생활하였다. 유공작이 죽자 그의 아들 유중영(柳仲郢)은 한결같이 삼촌 유공권을 아버지같이 섬겼으며, 또 아버지의 가법을 받들어 잘 준수하였다. 《小學 善行》 유공작(柳公綽)의 아내 한씨(韓氏)가 고삼(苦蔘)과 황련(黃連)과 웅담(熊膽)을 섞어 환약을 만들게 한 다음 아들들에게 나누어 주고 밤에 공부할 때마다 이 환약을 입에 머금고 부지런히 공부하도록 하였다. 《小學 嘉言》 유변(柳玭)'은 당(唐)나라 유공작(柳公綽)의 손자로, 가풍을 이어 효제(孝悌)와 예법(禮法)을 준수하였다. 자제들을 경계시킨 다섯 가지 조목이 《소학》 권5 〈가언(嘉言)〉에 실려 있는데, 그중에 "내가 보건대, 명문거족은 선조의 충성과 효도와 근면함과 검소함으로 인해 성립되고, 자손들의 완악함과 경솔함과 사치와 오만함으로 인해 전복되었다. 성립하기 어려움은 하늘에 오르는 것 같고 전복되기 쉬움은 터럭을 태우는 것 같다. 이런 말을 하자니 마음이 아프다. 너희들은 뼛속 깊이 명심하도록 하라"라 하였다.
주석 79)육행
육행은 여섯 가지 행실로 효도함[孝], 우애함[友], 동성간(同姓間)에 화목함[睦], 이성간(異姓間)에 화목함[婣], 이웃간에 신실(信實)함[任], 서로 구휼함[恤]이다 《周禮 地官 大司徒》 이 말은 《소학》 〈입교(立敎)〉에도 보인다.
一山孫公行狀
公諱鍾純字致誠, 一山其號也.姓孫氏, 系出慶尙道密陽府.新羅時有孝子孫順, 得石鍾之異, 王賜宅米褒之, 卒謚文孝, 是爲始祖.傳至廣理君兢訓, 佐麗太祖, 有嵬勳, 得是封.又八傳而文科司空抃, 選淸白, 入名臣.又四傳而有密城君贇, 又六傳而至文科牧使策, 則本朝時也.牧使玄孫咏歸堂比長, 文科重試, 副提學, 忠言偉烈, 卓冠朝端, 事在《國朝實錄》.咏歸曾孫道峰弘績, 文科翰林, 明宗乙巳, 掌史局, 直書時事, 爲群壬所構, 謫渭原卒, 士林追慕立祠扶安甕井.生叅奉承憬, 壬辰亂, 起義旅, 殉于陽城, 於公爲八世祖.祖景燁.考哲宇, 從遊錦谷宋文公門, 兩世幷以孝命旌.妣兆陽林氏, 羅州羅氏, 俱有淑德, 公羅氏出, 兄弟五人, 序居末.以哲宗甲寅五月二十三日, 生于井邑縣石山里第.才性穎悟, 未成童, 通四子書, 儕流莫及, 父老望大成.丁卯丁外艱, 年十四, 執喪如成人, 謀葬地, 諸兄若姪, 聚會一堂, 將以筆占求之皆未靈, 公未冠故最後及之, 乃揮筆得靈, 協吉永窆, 人異其誠感.奠哭之暇, 讀《家禮》不輟, 公之禮學致精.蓋自此日, 以早孤未養爲恨, 恒如有求不得之人.當忌辰, 淚哭嗚咽, 如袒括初.貧無以爲學, 餘力劬書, 疑輒記之, 就質于經筵官芸牕朴先生, 先生一見, 知其心事, 表裏如一, 以純誠一三字, 錫名字號而嘉之, 公服信從遊, 及沒加麻三月.事母夫人, 極其愛敬, 有癠, 少不離側, 夜不解帶, 凡三朔, 羸瘠幾生病, 諸兄責以過中, 乃暫就寢處以自扶.至革, 裂指注血, 得甦一日, 竟以戊子十一月九日, 遭艱.公之執禮, 在前喪已然, 則今之盡情禮嚴防限, 實又疏節也.喪畢立議宗中曰: "世降如許, 榮貴何求.惟敎育後生, 毋墜先業爲第一義." 乃醵金樹契, 其蓄頗鉅, 建齋爲肄業所, 購書爲讀書資.子姪外遠近來學者衆, 敎誨不倦, 因材有成多可觀.接人務用歡心, 不少簡忽, 然性嚴於闢異, 故凡以旁術至者, 幷不假顔, 彼亦氣自餒縮, 不敢售辯.甲午東匪之熾, 湖南最甚, 井邑爲尤, 而惟公一洞無汙.族子女貧未婚嫁者, 自公先捐, 繼排諸族而助之, 俾不失時.里人失學者, 勸夜學而敎之, 人謂孫先生.近地雇傭奴婢, 亦識字有如鄭康成家云.誠於追遠, 遠代墳墓儀物, 跋涉勤楚, 終底有成.平生志業, 惟在承先裕後, 修身成物, 他不念及.故屢空之憂, 人所不堪, 而處之晏如.尤嚴辭受之義, 苟係未安, 一毫不取, 識者謂萬石君質, 行柳公綽家法, 兼有而正己過之.鄕道章甫, 摭實交薦, 至有邑營賞物, 而不以自居, 封還以送者累矣.乙巳, 謁艮齋田先生, 先生素聞公名, 視若夙親, 歸則書以獎之.自後公有累度書面, 多所就質.恒語門生子姪曰: "此心一正, 則萬理自明, 天下無難事." 又曰: "學者, 於六行, 無一欠缺, 然後方可謂學." 此實公之本事, 故丁寧敎人者, 亦如是.己未十一月一日, 考終于家, 壽六十六, 遠近莫不嗟惜曰: "君子逝矣." 朋友門生加麻者, 若干人.葬于石山後麓艮坐原.配南陽洪氏信永女, 固窮宜家, 一不見憂色, 宜其爲君子配也.生二男, 長德源次行源.德源男聖夏, 壻高光文.行源男聖桓·聖訓·聖根, 婿李東烈·高光晁.聖桓男淇宣·五宣.嗚呼, 公, 我先人友也.每公春秋楸行, 必迂路而訪, 甚相歡焉.始余拜公, 年尙幼.然見公淸雅之容, 溫栗可敬, 安定之言, 倫脊無差, 心知其爲端人莊士矣.及其省事, 熟聽公與先人語者, 懇然之誠, 學至而德崇, 慨然之憂, 敎弛而道喪. 曁士從楚南來者, 皆言'公家鄕所行, 絶今遵古, 鮮不出乎正者', 知公所存所發, 無愧乎古, 所謂篤信好學者矣.今又得公從孫聖徹所撰家狀而讀之, 幷悉其事親居憂立訣傳心之詳, 於是乎公之全體始終, 可謂備知矣.但是狀也, 細述行治, 而畧於爲學節度, 幷不及論著要旨之一二, 無由考其進修次第, 造詣淺深, 歸宿在何何주 4)也.雖然有云'性理諸書, 無不精鍊, 酷好《家禮》《小學》《尙書》.' 夫格致之方, 出於性理, 家國之政, 具在三書, 卽此而觀公之功深格致, 而推其所知, 行之家而可及於邦國者, 槩可想也.儒門相傳定法, 知行交修者, 非此歟.蓋公天資旣美, 人功亦至, 念德乎咏歸道峰之顯祖, 質疑於芸牕艮齋之名賢, 詩禮永傳而內行備, 門路得正而嘉惠存, 猗歟盛矣.是烏可不書之, 以告世之立言家乎.公之嗣子德源, 請余以狀德之文, 顧雖無似, 念先誼之重, 不敢言辭, 謹按叙家狀, 而略附己見, 撰次如右云爾.
주석 4)
'何'자 한 글자는 衍文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