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역/표점
- 국역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5
- 행장(行狀)
- 정의재 이공 행장 경오년(1930)(精毅齋李公行狀【庚午】)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5 / 행장(行狀)
정의재 이공 행장 경오년(1930)
공의 휘는 기노(驥魯), 자는 덕부(德夫)이다. 이씨는 계통이 영주(瀛洲)주 51)에서 나왔으니, 고려 문헌공 휘 경조(敬祖)가 시조가 된다. 조선에 들어와 집의(執義)로 장릉(莊陵, 단종)을 위해 자정(自靖)한 분은 휘 백첨(伯瞻)으로 중시조가 된다. 집의의 아들인 석지(錫祉)는 사직(司直)을 지냈는데, 강직함으로 세상에 존중을 받았다. 사직의 아들 장손(長孫)은 군수(郡守)를 지냈다. 군수의 아들 일(壹)은 진사(進士)였다. 이 분이 운령(雲齡)을 나으니, 운령은 재주와 행실로 추천되어 참봉(參奉)을 제수 받았다. 이 분이 첨지(僉知) 승종(承宗)을 낳았으니, 또한 행실과 의리로 칭송을 받았다. 3대가 지나 소심재(小心齋) 극수(克守)가 나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선생을 스승으로 섬겼는데, 선생이 그 실학을 자주 칭송하였다. 이 분이 바로 공의 6대조이다. 장춘(長春)과 숭(崇)과 진엽(鎭燁)은 소심재의 아들, 손자, 증손으로 대를 이어 학문과 행실이 있었다. 조부의 휘는 만록(萬綠)으로 효성으로 조정에 알려져 정려를 받았다. 부친의 휘는 동익(東益) 호는 직재(直齋)로 근검하며 효우가 있었다. 모친은 부령 김씨(扶寧金氏) 봉각(奉珏)의 따님이다.
공은 철종 신묘년(1831년) 5월 3일 태어났는데, 어려서 단정하고 엄숙하여 평범한 아이들과 달랐다. 조금 자라 침중하고 과묵하였으며 서적 이외에는 달리 좋아하는 것이 없었다. 처음 삼종숙 산오공(山塢公) 동현(東顯)에게 배웠다가 다시 그의 아들 남강공(南岡公) 태로(泰魯)를 종유하며 학문을 강마하여 약관 전에 이미 근기(根基)를 세웠다. 어버이를 섬길 때는 뜻을 봉양함을 위주로 하였으며 두 형을 섬김에 화락하였다. 병인년(1866년)에 모친상을 당하여 정과 예를 지극히 하였으나 무자년(1888년)에 부친상을 당하여서는 집이 가난하고 흉년이 들어 장사를 검소하게 지낼 수밖에 없었으니 이를 죽을 때까지 한스럽게 여겼다. 하루를 격하여 양친의 묘소에 참배하여 늙었다고 해서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친족의 자제와 고을의 젊은이들을 가르칠 때 총명하거나 둔한 것을 따지지 않고 성심으로 지도하여 자신의 책무로 여겨 수고로움을 꺼려하지 않았다. 본성이 진솔하여 겉치레를 하지 않았으며 평소 거처할 때 빨리 말하거나 황급한 기색을 띠지 않았으며 친하거나 소원하거나 귀하거나 천하거나 따지지 않고 모두 온화한 안색으로 대하였다. 그러나 바르지 않은 자가 있으면 마음 속 깊이 미워하여 멀리하였다. 사람들이 시정의 득실이나 인물의 장단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보면 곧 침묵하고서 대답하지 않았다. 가난이 심하여 자주 밥을 굶었으나 똑바로 앉아 책을 보았으며, 집안사람들이 재물을 빌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서 이르기를 "남의 재물을 갚지 않고 불의한 삶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나의 본분을 지키다가 죽겠다."라고 하였다. 항상 아들들을 경계하기를 "사람이 집에 거처할 때 절로 무한히 좋은 도리가 있어야 하니, 모름지기 이것은 부지런함과 삼감주 52) 가운데서부터 만들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세도가 크게 무너지게 되고 나라가 위태롭게 되어 사특한 말들이 더욱 심해지자 '한후(寒後)' 두 글자로 자신의 당에 편액 하였으니, 대개 날이 추워진 뒤의 송백주 53)으로 스스로 기약한 것이다.
을사년(1905년) 간재(艮齋) 전우(田愚) 선생이 남쪽으로 오자 폐백을 바치고 제자의 예를 행하여 선생에게 나아가 배움을 바르게 하니, 선생이 정의재(精毅齋)란 호를 주었다. 이에 노성(老成)한 덕망은 동문들의 추존을 받게 되었다. 당시 인에 대한 학설이 중구난방이어서 선생이 항상 깊이 걱정하였다. 이에 공이 공자, 맹자가 인에 대해 언급한 여러 가지 말을 모아서 《수사언인록(洙泗言仁錄)》 한 권으로 만들어 독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탐구할 바를 알게 하여 분쟁하지 않게 하니, 대개 남헌(南軒) 장식(張栻)이 편찬한 바를 모방하여 그 옛 이름을 그대로 따라 지은 것이다.주 54) 앉은 자리에 절실하고 중요한 글귀를 걸어놓고 자신을 경계하고 반성하였으며 뜰에 여러 화초를 심어 놓고 마음을 길렀으니, 모두 옛날 현인이 정완(訂頑)의 명주 55)을 짓고 뜰의 화초를 살핀 뜻주 56)과 같다. 속인들이 극심하게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싫어하였고 고단한 백성들이 어렵게 삶을 살아가는 것을 불쌍하게 여겼으며 항상 사람을 대할 때 인의도덕의 말로 반복하여 깨우쳐주었으니, 이는 또한 어진 군자가 순박함으로 되돌리려는 뜻이었다. 공의 학문은 전적으로 내면의 마음공부에 힘을 쏟았기에 문사로 드러난 것은 적지만 5언과 7언으로 영탄하여 읊조린 것은 비교적 많은데, 요컨대 모두 나라를 사랑하고 도를 걱정하는 충분(忠憤)과 염려하는 말이니 또한 변아(變雅)가 남긴 가락인가.
병인년(1926년) 섣달부터 병으로 누웠다가 다음 해 정월 보름 즈음에 상구(喪具)를 장만하라 명하였다. 25일이 되자 아들에게 "오늘은 내가 죽을 날이다."라고 하고는 부녀자들을 물리치고 새 옷을 입고서 염습과 장사할 때의 절차에 대해 다시 명하였는데, 과연 이날 돌아가셨으니 향년 74살이었다. 부안군(扶安郡) 하서면(下西面) 서당동(書堂洞) 정좌(丁坐)의 언덕 선영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의성 김씨(義城金氏) 영황(永璜)의 따님으로 자식이 없었다. 계비는 고흥 유씨(高興柳氏) 환규(煥奎)의 따님으로 부덕을 갖춰 군자의 짝이 충분하였다. 세 아들은 시택(時澤), 시관(時寬), 시헌(時𨯶)으로, 시헌은 중부(仲父)에게 출계하였다. 세 딸은 의성(義城) 김용채(金鏞采), 순창(淳昌) 설인호(薜仁鎬), 연안(延安) 이동녕(李東寧) 등에게 시집갔다. 시택은 부령(扶寧) 김연술(金淵述)의 딸에게 장가들어 종진(鍾珍), 종희(鍾熺) 두 아들을 두었다. 시관은 전주(全州) 이용복(李容馥)의 딸에게 장가들어 종규(鍾奎), 종소(鍾韶) 두 아들을 두었다. 사위 김용채는 정락(鼎洛), 진락(臻洛), 원락(元洛) 세 아들을 두었다. 사위 설인호는 아들 영태(永泰)를 두었다. 사위 이용복은 아들 ■■을 두었다.
오호라! 공의 마음과 행실을 살펴보면 참으로 순고(淳古)하고 청후(淸厚)하며 외유내강(外柔內剛)하는 사람이다. 대개 공은 아름다운 자질을 지니고 훌륭한 선조의 덕을 이어받았으니 참으로 공력은 반이지만 효과는 배가 되듯 쉽게 학문을 성취하였는데, 그러나 보이지 않게 노력하여 늙도록 독실하게 공부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경지에 이르렀겠는가. 공을 두터운 선은 넘치지만 명강(明剛)이 부족하다고 이르는 것은 바로 엄한 스승이 제자를 경계하려고 하여 지나치게 염려한 말인데, 어떤 이들이 실제 부족함을 지적한 정론이라고 여기니,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일찍이 목상리의 집으로 공을 찾아뵈니, 공이 기뻐하면서 "그대가 나를 방문할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네. 나는 학문이 없기 때문에 선비들이 대부분 그냥 지나가고 들어오지 않는데, 그대는 학문을 갖추었는데 도리어 나를 찾아주는구나."라고 하였다. 이는 비록 겸손한 말씀이지만 실로 세인들이 문장으로 사람을 취하는 풍조를 마음 아프게 여긴 것이다. 아! 이에서 또한 공이 숭상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시택(時澤)이 공의 가장(家狀) 한 통을 가지고 와 나에게 보여주면서 "이는 우리 친족 종곤(鍾坤)이 지은 것인데 지나치게 소략한 실수가 있으니, 그대가 내용을 갖춰 거듭 찬술해 주시오."라고 하였다. 내 생각건대 공과 동문이 된 지 20년이니 공을 참으로 잘 안다고 하겠다. 게다가 일찍이 공을 위해 〈한후당기(寒後堂記)〉를 지으면서 그 절조에 대해 탄복하였으니, 지금 덕을 드러내는 일에 어찌 감히 고사하여 정성을 다하지 않겠는가. 돌아보건대 '은미한 것을 드러내고 숨겨진 것을 밝혀주는 것'주 57)은 옛날의 도이다. 그러므로 공의 내강(內剛)을 드러내는 것은 전 선생이 정의재라고 호를 준 것에 어긋나지 않으니, 이로써 세상의 공을 조금 밖에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고한다.
- 주석 51)영주
- 정읍 고부로 고부 이씨를 가리킨다.
- 주석 52)부지런함과 삼감
- 《주자대전속집》 권8 〈큰아들 수지에게 주다.〔與長子受之〕〉에 "'부지런하고 삼간다[勤謹]'는 이 두 글자를 좇아서 올라간다면 좋은 일이 무한히 있을 것이니, 내가 비록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이지만 가만히 너를 위하여 이렇게 하기를 원하며, 두 글자를 등지고 내려간다면 좋지 못한 일이 무한히 있을 것이니, 내가 비록 말하고자 하지 않는 것이지만 너를 위하여 이를 근심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 주석 53)날이……송백
- 《논어》 자한(子罕)에 "날씨가 추워지고 나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듦을 알게 된다.[歲寒然後知松柏之後彫也]"라고 하였다.
- 주석 54)남헌……것이다
- 장식이 《논어》와 《맹자》에서 인(仁)에 대해 말한 내용들을 뽑아서 《수사언인록(洙泗言仁錄)》을 지었던 것을 말한다. 《南軒集 卷14 洙泗言仁序》
- 주석 55)정완의 명
- 장재(張載)가 지은 글이다. 당초에 장재가 서재의 동서 양쪽 창문 위에 폄우(砭愚)와 정완(訂頑) 두 개의 명(銘)을 걸어 놓고서 제생(諸生)을 경계시켰는데, 뒤에 논쟁을 야기할 소지가 있다는 정자(程子)의 말에 따라 폄우를 동명으로, 정완을 서명(西銘)으로 개칭하였다. 《伊洛淵源錄》
- 주석 56)뜰의……뜻
- 《근사록(近思錄)》 〈도체류(道體類)〉에 "천지가 만물을 내놓는 기상을 관찰한다.[觀天地生物氣象]"라는 명도(明道) 정호(程顥)의 말이 실려 있는데, 그 주(註)에 "주렴계(周濂溪)가 창 앞의 풀이 무성해도 베지 않으면서, 저 풀 역시 내 속의 생각과 같을 것이다[與自家意思一般]고 말한 것도 바로 이 뜻이다."라고 하였다.
- 주석 57)은미한……것
-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나오는 말로 "역은 지난 것을 드러내고 올 것을 보여 주며, 은미한 것을 드러내고 숨겨진 것을 밝혀 준다.〔夫易 彰往而察來 而微顯闡幽〕"라고 하였다.
精毅齋李公行狀【庚午】
公諱驥魯字德夫.李氏, 系出瀛洲, 以高麗文憲公諱敬祖爲始祖.以本朝執義, 爲莊陵自靖者, 諱伯瞻, 爲中祖.執義子錫祉, 司直, 以剛直見重於世.司直子長孫, 郡守.郡守子壹, 進士.生雲齡, 才行薦授叅奉.生僉知承宗, 亦以行義稱. 三傳而至小心齋克守, 師事尤菴宋先生, 先生亟稱其實學, 是爲公六世.曰長春曰崇曰鎭燁, 小心子孫曾, 連世文行.祖萬祿, 孝聞表宅.考東益, 號直齋, 勤儉孝友, 妣扶寧金氏奉珏女.以哲廟辛亥五月三日生, 幼而端莊, 異凡兒.稍長, 沈重寡默, 書籍之外, 無他好.始學於三從叔東顯, 復從其子南岡公泰魯講磨.弱冠前, 記주 2)立根基矣.事親以養志爲主, 奉二兄怡怡如也.丙寅丁母憂, 情禮俱盡, 戊子丁外艱, 家貧年凶, 送終儉薄, 以此爲終身恨.間一日拜兩親墓, 不以老而少弛.敎誨族子鄕少, 不問聰鈍, 誠心導率, 視爲己任 不憚勞.性眞率不飾邊幅, 平居無疾言遽色, 無親疎貴賤, 皆接以和顔.然有不正者, 則心惡而疎之.見人語及時政得失, 人物長短, 則嘿不酬答.貧益甚屢至絶火, 堅坐看書, 幷不許家人稱貸曰: "與其逋人財而爲不義之生, 寧守吾本分而死." 常戒其子曰: "人之居家, 自有無限好道理, 須是從勤謹中做去." 及世道一敗, 宗國幾危, 邪說愈恣, 以'寒後'二字, 扁其堂, 蓋以歲寒松柏自期也.乙巳歲, 艮齋田先生之南駕也, 納贄行弟子禮, 就正所學, 先生以精毅齋錫號.於是老成德望, 爲同門所推.時仁說多岐, 先生每深慮焉.公集合孔孟言仁諸說, 幷作一篇, 名曰《洙泗言仁錄》, 使讀者, 知所自究, 而不使紛爭, 蓋倣南軒所編, 而因其舊名也.座揭切要之言, 爲警省之資, 庭列群芳之物, 爲養心之需, 皆昔賢銘訂頑觀庭草之意也.嫉俗輩媒利之酷, 憫殘民保生之艱, 每對人以仁義道德之說, 反覆曉告, 此又仁人君子回淳反朴之志也.公之爲學, 專用心於內, 故著於文辭者少, 其發爲五七言咏歎者較多, 而要皆愛國憂道忠憤惻怛之辭, 其亦變雅之遺調歟.自丙寅臘月寢疾, 翌年正月望間, 令辦喪具, 至二十五日, 謂其子曰: "今日吾符到期也." 屛婦女著新衣, 更命以斂襲營葬之節, 果以是日卒, 享年七十四, 葬于扶安郡下西面書堂洞丁坐原從先兆也.配義城金氏永璜女, 無育, 繼配高興柳氏煥奎女, 有婦德, 克配君子. 三男, 時澤·時寬·時𨯶出系仲父, 三女, 適義城金鏞采·淳昌薜仁鎬·延安李東寧.時澤娶扶寧金淵述女, 二男鍾珍·鍾熺.時寬娶全州李容馥女, 二男鍾奎·鍾韶.金壻男鼎洛·臻洛·元洛.薜壻男永泰.李壻男■■.嗚呼, 跡公心行, 洵淳古淸厚, 外柔內剛人也.蓋公得姿質之美, 先德之懿, 固有事半功倍之易, 然非有闇然自修, 到老冞篤之功, 何以至此.謂公厚善有餘明剛不足者, 乃嚴師戒人之過慮.或者認爲實際定論, 則失之矣.余嘗謁公於木上里庄也, 公喜曰: "不意子之訪我.我無文, 故士多過而不入, 子有文而顧訪我耶." 此雖自謙語, 實病世之以文取人也.噫, 是亦可以見公之所尙也.時澤, 以公家狀一通來示余曰: "此吾族鍾坤撰也, 而有失於太略, 子其重爲備述也." 余惟爲公同門二十年, 知公固悉矣.且曾爲公作〈寒後堂記〉, 贊服其所操, 今於狀德之役, 何敢固辭而不卒誠也.顧'微顯闡幽', 古之道也, 故表章公之內剛, 有不負田先生精毅之錫者, 用告夫世之淺知公者云爾.
- 주석 2)
- 記는 旣의 오자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