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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4
- 묘표(墓表)
- 열부 유인 이씨 묘표 갑술년(1934)(烈婦孺人李氏墓表【甲戌】)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4 / 묘표(墓表)
열부 유인 이씨 묘표 갑술년(1934)
왕촉(王蠋)이 말하기를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烈女)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주 141)라고 하였으니 진실로 두 사람을 섬기지 않는다면 이미 충(忠)이고 열(烈)이다. 돌아보건대 세상 사람은 꼭 임금을 위해 죽고 남편을 위해 죽는 것만을 가장 뛰어난 일로 여기고 처한 상황의 당부(當否)는 논하지 않으니 이상한 일이다. 만약 왕촉이 군대로 협박을 당하지 않았다면 그는 절대 목을 매어 죽지 않았을 것임을 나는 알겠다. 또 이 점을 통해 남편이 죽으면 곧 하종(下從)하는 것이 꼭 옳지는 않다는 것도 알겠다.
유인 함평 이씨(咸平李氏)는 함성군(咸城君) 극해(克諧)의 후손이고, 탐진(耽津) 안성용(安性用) 공의 아내이다. 시집을 갔을 때 시부모와 동서가 없어서 홀로 집안일을 맡아 여름에는 농사짓고 겨울에는 길쌈하였으며, 죽을 먹으며 지내도 근심하고 슬퍼하지 않았으며, 예로 남편을 받들었다. 어느 날 남편이 100리 밖으로 출타하였는데 흉음(凶音)이 갑자기 도착하니 곡하고 혼절했다가 깨어났다. 초종(初終)이 지난 뒤에 마음에 맹세하여 말하기를, "나의 명운이 박하니 죽느니만 못하다."라 하고는 집 뒤에 있는 큰 나무 아래에 가서 목을 매 죽으려고 하였다. 이때 아직 돌이 되지 않은 어린 아들이 응애응애 울자 선뜻 마음을 고치고 말하기를, "내가 죽으면 이 아이는 끝이고 안씨의 대는 끊어지니 무슨 얼굴로 구천(九泉)에서 남편을 보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더욱 부지런히 집안을 다스렸으니 당시 나이가 23세였다. 고생을 겪으며 정절을 지키고 성실하게 30년을 살다가 임술년(1922, 철종13) 3월 6일에 졸(卒)하였다.
아들 재욱(在旭)은 지금 장년으로 곧 노년이다. 두 아들을 두었으니 병길(炳吉), 병엽(炳葉)이다. 기업(基業)을 세우고 명성을 보존하였으니 사람들이 아무개 집안이 있는 것은 모두 유인의 공임을 안다. 비유하자면 약한 나라의 신하가 선왕(先王)의 부탁에 마음을 다해 수고하여 구업(舊業)을 잇고 복원한 것과 같으니 아, 어질도다.
옛날 조씨(趙氏)에게 난이 있을 때 저구(杵臼)는 죽고 정영(程嬰)은 고아를 보호하였다.주 142) 저구가 죽었기 때문에 정영이 고아를 보호할 수 있었던 것인데도 오히려 죽음을 쉬운 일로 여기고 고아를 보호한 것을 어려운 일로 여겼으니, 하물며 한갓 죽기만 하는 경우이겠는가. 만약 유인이 쉬운 일을 취하고 어려운 일을 버렸다면 안씨가 안씨가 되는 것은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이에 처한 상황을 무시하고 한갓 죽기만 하는 것은 매우 쉽고 또 완전히 좋지는 않다는 것을 더욱 확신한다. 또 집안과 나라를 보호하여 임금과 남편을 위로하지 않는 것을 비록 충렬이 되기에 부족하다고 말하더라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안재욱이 부안 우산(右山) 안 대소(大沼) 북쪽 갑좌(甲坐) 언덕에 유인을 장사 지내고 비석을 마련해 나에게 글을 청하였다. 나는 유인의 정절과 현명함이 드러나지 못할까 두렵고 세상의 논의가 보이지 않는 것을 거듭 탄식하여 특별히 써서 드러낸다.
- 주석 141)
- 왕촉(王蠋)이……않는다:왕촉은 전국 시대 제(齊)나라 화읍(畫邑)의 현인으로, 왕에게 올린 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초야에서 농사하며 지냈다. 연(燕)나라 장수 악의(樂毅)가 제나라를 공격했을 때 왕촉을 연나라 장수로 삼고 만호(萬戶)의 식읍을 주겠다고 제안했으나, 왕촉이 사양했다. 이에 악의가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화읍을 도륙하겠다고 협박하자, 왕촉이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정녀(貞女)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다.[忠臣不事二君 貞女不更二夫]"라고 하고 목을 매어 자결했다. 《史記 田單列傳》
- 주석 142)
- 조씨(趙氏)에게……보호하였다:춘추 시대 진(晉)나라 경공(景公) 3년 대부 도안가(屠岸賈)가 대신 조삭(趙朔)의 집안을 몰살하였다. 이때 조삭의 부인이 임신한 상태로 궁중에 숨어 유복자를 낳았는데 조삭의 벗인 정영과 저구(杵臼)가 조삭의 아이를 보호할 계책을 세웠다. 정영은 조삭의 진짜 아들인 조무(趙武)를 안고 산속으로 달아나 숨고, 저구는 다른 사람의 아이를 조삭의 아이로 꾸며 숨어 살다가 도안가에게 잡혀 살해당하였다. 경공 15년 한궐(韓厥)의 주선으로 조무를 조씨의 후계자로 삼아 조씨의 종사를 다시 계승하게 하였는데, 정영은 조무가 관례를 올리던 날 저구의 죽음에 보답하기 위하여 자살하였다. 《史記 趙世家》
烈婦孺人李氏墓表【甲戌】
王蠋有言: "忠臣不二君, 烈女不二夫。" 苟其不二, 斯已忠烈矣。顧世之人, 必以死君死夫爲其尤, 而不論其所處當否, 則惑矣。使蠋而不遭兵劫者, 吾知其頸必不經矣, 又以是知夫死輒下從者之未必爲是矣。孺人咸平李氏, 咸城君克諧之後, 耽津安公性用之妻。旣歸, 無舅姑娣姒, 獨當家務, 夏畦冬績, 歠粥不戚戚, 奉夫子以禮。一日, 夫子出百里外, 凶音忽至, 哭絶而甦。經初終, 矢之心曰: "吾之薄命, 不若死。" 至家後大樹下, 欲結項而死。時有幼子, 生未期, 呱呱泣, 乃幡然改曰: "吾死, 此兒休矣, 安氏絶矣, 何顔見夫子於泉下?" 自是尤勤治家, 時年二十三。辛苦貞信, 積三十年, 以壬戌三月六日卒。男在旭, 今壯且老。有二子, 炳吉、炳葉。樹立基業, 保存聲名, 人知有某家, 皆孺人功。譬如弱國之臣, 盡瘁付託, 纘復舊業。猗歟賢哉! 昔趙氏有難, 杵臼死之, 程嬰保孤, 杵之死, 所以成程之保孤, 猶易其死, 而難保孤, 况徒死者乎? 向使孺人取其易而舍其難, 安氏之爲安氏, 未可知也。於是乎益信無所處而徒死, 甚易且未善。又以其不保家國慰君夫, 雖謂不足爲忠烈, 不爲過矣。在旭葬孺人於扶安右山內大沼北甲坐原, 伐石而請余文。余旣懼貞賢之未闡, 重歎世論之無見也, 特書而表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