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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4
- 묘표(墓表)
- 학생 송공 묘표(學生宋公墓表)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4 / 묘표(墓表)
학생 송공 묘표
나의 동문(同門)인 벗 송사익(宋士翼) 우진(宇鎭)은 단정한 선비이다. 나는 그렇게 된 내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근세에 알려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듣지 못하여 매우 의심하였다. 어느 날 송우진이 선대인(先大人)의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표를 청하였다. 내가 받아서 공경히 읽어보니 심지(心志)가 바르고 전일하며, 실천이 과감하고 독실하며, 식견이 높고 원대하며, 의리가 엄정하고 분명하여 유업(儒業)을 전문으로 익힌 사람도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었으니, 진실로 내가 이른바 알려진 사람이었다. 다만 세속에서는 문장을 숭상하는데 공은 문장이 적었기 때문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 실제에 어찌 손상이 있겠는가. 단맛이 나는 샘물에 근원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은 진실로 망언이니, 지금 묘표를 짓는 일에 대해서는 사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바라는 바이다.
공의 휘는 재규(在奎)이고, 자는 자성(自成)이다. 송씨는 홍주(洪州)를 본관으로 삼는다. 상세(上世)에 휘 평(枰)이 있으니 별시위(別侍衛)를 지냈다. 이후로는 대대로 고관(高官)을 지낸 사람이 있었다. 천계(天啓) 갑자년(1624, 인조2) 인조(仁祖) 때에 이르러서 휘 두문(斗文)이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고 연이어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내외의 청현직(淸顯職)을 역임하였으니 공의 8세조이다. 부친의 휘는 덕기(德基)이고, 원배(元配)는 광산 노씨(光山盧氏)로 만권(萬權)의 딸이니 열행(烈行)으로 사림의 추천장이 있었다. 계배(繼配)는 김해 김씨(金海金氏)이니, 이분이 공을 낳았다.
공은 말수가 적고 약속을 지키는 것을 중히 여겼으며 남을 위해 일을 도모하면 자신의 일처럼 마음을 다하였다. 일은 반드시 시작을 삼가고 마무리를 잘하였다. 심력(心力)이 견고하여 한번 행하겠다고 다짐한 일이 있으면 만 마리 소도 되돌릴 수 없었다. 출입할 때 법도가 있어 찻집이나 술집에는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소싯적에 집이 가난하여 품팔이를 하였는데 계집종들과 함께 김매기를 할 때 요염한 모습을 드러내 보이고 추파를 던져 못하는 짓이 없는 계집종이 있는데도 전혀 돌아보지 않으니 동년배들이 돌부처라고 조롱하였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어 학문하지 못한 것을 항상 한스러워 하였는데 아들이 입학한 뒤에는 매번 날이 저물어 돌아올 때마다 그날 배운 글을 물어서 알고는 함께 수차례를 외워, 비록 힘들고 바쁘더라도 혹여 폐한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칭찬하여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는다."라고 하였다. 3년 뒤에 문리(文理)에 통하여 공사(公私) 간의 문서를 막힘없이 볼 수 있었다.
농사에 힘써 좋은 밭을 얻어 경작하였는데 무자년(1888, 고종25)의 흉년 때 유독 수확이 있었다. 과부가 된 손윗누이와 아버지를 여읜 세 조카와 함께 한솥밥을 먹었고,주 97) 쌀을 덜어 별도로 비축하여 몹시 가난한 집이 아이를 낳거나 병이 들었을 때 주급(周急)하는 데 대비하였다. 임진년(1892)에 동향(同鄕)의 김 아무개라는 관리가 와서 공명첩(空名帖)을 주자 고사하며 말하기를, "이씨(李氏)의 백성이 어찌 김씨가 마음대로 주는 벼슬을 받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김 아무개가 말이 막혀 손을 떨었다.
갑오년(1894) 동란(東亂 동학혁명) 때 집안사람과 맹세하기를, "저들의 사술(邪術)이 백성을 미혹하는 것은 우선 따지지 않더라도 왕사(王師)에 저항하고 거스르면 반드시 큰 치욕을 당할 것이니 비록 죽더라도 결단코 사술에 물들지 않고 삼가 피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끝내 강요를 받아 당(黨)에 들어갔는데, 3일 동안 구금하고서 여섯 차례 맹렬하게 구타한 탓에 기절했다가 겨우 소생하였으나 끝내 동요하지 않았고 가산(家産)을 탕진하여 수개월 동안 와병하였다. 을미년(1895) 왕법(王法)이 다시 밝혀지자 집안 살림을 다스려 복구하였다.
무술년(1898)에 모친상을 당하여 마음을 다해 애통해하였다. 무신년(1908, 순종1)에 간재(艮齋) 전 선생(田先生)이 땅을 피해 산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아들에게 명하기를, "세도(世道)의 혼란이 이때보다 심한 적이 없었으나 다행히 대군자(大君子)와 같은 세상을 사니, 따라가 학문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이는 스스로 몸을 버리는 짓이다. 또 네가 《논어》를 읽는 것을 보았는데 거기에 '의탁함에 있어 친애할 만한 사람을 얻는다면 또한 그를 주인으로 섬길 수 있을 것이다.'주 98)라는 말이 있었으니 책을 읽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다면 또한 무슨 보탬이 있겠느냐. 우리 집안이 유리(流離)하여 자손이 쇠잔한 나머지 선세(先世)의 유업(儒業)을 상실하는 데 이르렀으니 이는 내가 가장 한으로 여기는 바이다. 너는 모름지기 부지런히 공부하고 학문하여 나의 한스러운 마음을 네가 뜻을 확립할 부신(符信)으로 삼아 자신과 집안을 이루도록 하라."라고 하고서 마침내 예물을 마련해 익산(益山)의 미륵산(彌勒山)으로 보내 귀의할 곳을 정하였다.
하루는 아들이 《소학(小學)》의 위장공취제동궁득신지매 장(衛莊公娶齊東宮得臣之妹章)주 99)을 읽고 있었는데 공이 묻기를, "말이 어찌하여 번다하고 간결하지 않느냐?"라고 하니, 아들이 상세히 고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아마 정궁(正宮)의 소생이라는 뜻을 보이기 위함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훗날 전 선생에게 질정하니 과연 그러하였다. 경술년(1910)의 변이 일어나자, 나라가 망하고 임금이 없어진 날에 죽지 않았다고 전 선생을 비난하는 자가 있었는데 공이 변론하여 말하기를, "기자(箕子)와 미자(微子)는 주(紂)의 친족주 100)으로, 은(殷)나라가 망한 날에 죽지 않았는데도 공자(孔子)가 어진 사람이라고 허여하였다.주 101) 하물며 재야의 지위가 없는 유자(儒者)이겠는가."라고 하니, 들은 사람들이 모두 승복하였다. 대개 이를 보면 공의 뜻은 언행을 숭상하였으니, "심지가 바르고 전일하며, 실천이 과감하고 독실하며, 식견이 높고 원대하며, 의리가 엄정하고 분명하다."라고 한 나의 말이 참으로 그렇지 않은가.
공은 철묘(哲廟) 신해년(1851, 철종2) 10월 11일에 태어나 정사년(1917) 4월 24일에 졸(卒)하였으니 누린 수명이 67년이다. 정읍군(井邑郡) 산내면(山內面) 양하동(讓賀洞) 해좌(亥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인은 연안 김씨(延安金氏)로 의수(義秀)의 딸이다. 장남은 우진이고 차남은 석진(碩鎭)이다. 딸은 연일(延日) 정대중(鄭大中), 전주(全州) 이병택(李炳澤)에게 시집갔다. 태환(泰煥), 태형(泰衡), 태우(泰釪)는 장남 소생이고, 태섭(泰燮), 태옥(泰鈺)은 차남 소생이다. 증손과 현손은 기록하지 않는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아, 이 양하동의 네 자 높이 봉분(封墳)에 嗚呼 此讓賀洞四尺之墳
이름은 없고 실지가 있는 문인을 안장하였네 好藏無名有實之聞人
- 주석 97)
- 한솥밥을 먹었고:원문은 '同釁'이다. 문맥에 근거하여 '釁'을 '爨'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 주석 98)
- 의탁함에…것이다:《논어》 〈학이(學而)〉에 보인다.
- 주석 99)
- 위장공취제동궁득신지매 장(衛莊公娶齊東宮得臣之妹章):《소학》 〈계고(稽古)〉에 보이는데 《좌전(左傳)》 은공(隱公) 3년 조의 기사를 수록하였다. 《소학》에 실린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위장공이 제(齊)나라 세자 득신의 여동생을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장강(莊姜)이다. 아름다웠으나 아들을 두지 못하였다. 위장공은 대규(戴嬀)에게서 아들을 보았는데 이 사람이 위환공(衛桓公)으로, 장강이 자기의 아들로 삼았다. 또 공자 주우(州吁)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폐인(嬖人)의 자식으로, 위장공의 총애를 받아 교만하고 사치스러웠으며, 병기(兵器)를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하였는데 위장공은 금지하지 않았고 장강은 이를 미워하였다. 석작(石碏)이 위장공에게 주우를 금지하고 단속하지 않으면 화를 초래할 것이라고 간언하는 내용으로 마무리된다.
- 주석 100)
- 기자(箕子)와……친족:기자는 주의 백부(伯父)이고 미자는 주의 서형(庶兄)이다.
- 주석 101)
- 공자(孔子)가……허여하였다:주가 폭정을 일삼자 기자는 노예가 되고 미자는 나라를 떠났는데, 이 둘과 간하다가 죽은 주의 숙부 비간(比干)까지 아울러 공자가 은나라에 세 어진 사람[三仁]이 있었다고 하였다. 《論語 微子》
學生宋公墓表
余同門友宋士翼宇鎭, 莊士也。余意其有來處, 而未聞其近世有聞人, 則甚疑之。日, 宇鎭以先大人家狀, 請表阡之文。余受而敬讀, 其心志正專, 踐履勇篤, 見識高遠, 義理嚴明, 有專門儒業之所不及者, 實余所謂聞人也。但以世尙文而公少文, 故名不聞, 然何損於其實? 人謂醴泉之無源者, 眞妄也。今於表文, 非惟不辭, 乃所願焉。公諱在奎, 字自成。宋氏貫洪州。上世有諱枰, 別侍衛。自後世有簪纓。至天啓甲子仁祖時, 諱斗文中司馬, 連登文科, 歷敭內外淸顯, 公之八世也。考諱德基, 元配光山盧氏, 萬權女, 以烈行有士林薦狀。繼配金海金氏, 生公。公寡言語重然諾, 爲人謀則盡心若己事, 事必謹始而克終。心力堅固, 一有所爲, 萬牛莫回。出入有方, 絶不入茶酒肆。少貧行傭, 與婢輩同耘, 有呈艶獻情, 無所不至者, 頓然不顧, 儕輩以石佛嘲之。常恨早孤失學, 及其子上學, 每於暮歸, 將其當日課文, 問而知之, 共誦數遍, 雖勞且忙, 未嘗或廢。人稱曰: "指穿石。" 三年通文理, 能看公私文簿, 無滯。力於稼穡, 得佃良田, 戊子大無, 特得大有。與寡姊三孤甥同釁・(爨)。捐米別貯, 待極貧家産娩及疾病時周急。壬辰, 同鄕金某官來授空名帖, 固辭曰: "李氏之民, 豈可受金氏擅爵乎?" 金語塞手戰。甲午東亂, 與家人誓曰: "姑勿論彼之邪術惑民, 抗逆王師, 必伏大戮, 雖死, 決不染。當謹避之。" 終被其勒要入黨, 三日拘囚, 六次猛打, 氣絶僅甦, 竟不動蕩, 盡家産累月臥病。乙未, 王章復明, 治産復舊。戊戌, 丁內憂, 哀痛盡情。戊申, 聞艮齋田先生避地入山, 命其子曰: "世道板蕩, 莫甚此時, 而幸得大君子幷世, 不思從學, 是自棄其身。且見汝讀《論語》, 有曰'因不失其親, 亦可宗也', 徒讀而不行, 亦何益哉? 吾家流離殘子之餘, 至失先世儒業, 吾所最恨。汝須勤攻學問, 以吾所恨之心, 爲汝立志之符, 成己及家也。" 遂辦下贄具, 送于益山彌勒山中, 定依歸。一日, 其子讀《小學》衛莊公娶齊東宮得臣之妹章。問之曰: "語何煩而不簡乎?" 其子不能詳告。則曰: "疑示正宮所出之義也歟?" 後質田先生, 則果然。庚戌之變, 有譏田先生以不死國破君亡之日者, 則辨之曰: "箕子微子, 紂之親族, 不死殷亡之日, 而孔子許之以仁, 况在野無位之儒乎?" 聞者咸服。蓋觀乎此, 公之志尙言行, 則吾所謂正專、勇篤、高遠、嚴明者, 不其然乎? 公生于哲廟辛亥十月十一日, 卒于丁巳四月二十四日, 壽六十七。葬于井邑郡山內面讓賀洞亥原。配延安金氏, 義秀女。男長宇鎭, 次碩鎭。女適延日鄭大中、全州李炳澤。泰煥、泰衡、泰釪, 長房出; 泰燮、泰鈺、次房出。曾玄不記。銘曰:
嗚呼! 此讓賀洞四尺之墳, 好藏無名有實之聞人。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