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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4
  • 묘표(墓表)
  • 송암 김공 묘표 경인년(1950)(松菴金公墓表【庚寅】)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4 / 묘표(墓表)

자료ID HIKS_Z038_01_B00001_001.024.0003.TXT.0013
송암 김공 묘표 경인년(1950)
근고(近古)에 봉산(蓬山) 아래 부풍(扶風 부안(扶安))에 덕을 숨겨 벼슬하지 않고 의(義)를 행해 세상에 모범이 된 선비가 있으니 송암 김공이 그 사람이다. 공의 말에 "서리와 눈에도 끄떡없이 홀로 서 있는 것은 소나무와 잣나무이니, 이 때문에 하늘 아래 높이 서서 해를 가릴 수 있다."라고 하였는데 공이 호를 취한 것이 여기에 있으며 진실로 공자가 말한 "날씨가 추워진 다음에야 늦게 시든다."주 75)라는 뜻으로 공의 뜻과 행실의 전체를 볼 수 있다.
공이 돌아가시고 부안 하서면(下西面) 석하리(石下里) 경좌(庚坐) 언덕에 장사 지낸 지 지금 거의 백 년인데 증손 김기술(金基述)이 비로소 묘표를 세워 나로 하여금 글을 짓게 하면서 말하기를, "그대는 비록 먼 친족이지만 어려서는 창동(滄東)의 글방을 함께 다녔고 늙어서는 성재(星齋)주 76)에서 함께 거처하여 동당형제(同堂兄弟)처럼 친해 내 증조의 일과 행적에 대해 익히 들어 상세히 알기 때문에 부탁하는 것이네."라고 하였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사람의 글재주를 이유로 청하지 않고 이를 이유로 청하니 내가 어찌 사양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공의 휘는 유성(維聖)이고, 자는 성춘(聖春)이다. 부안 김씨는 가계(家系)주 77)가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태자(太子) 휘 일(鎰)에게서 나왔다. 세대를 전하여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문정공(文貞公) 휘 구(坵)에 이르러서는 문장과 도덕이 당세에 으뜸이었다. 6세를 내려와 고부군사(古阜郡事) 휘 광서(光敘)에 이르러서는 고려가 망하자 팔판시동(八判寺洞)주 78)에 들어갔다가 끝내 관향(貫鄕)으로 돌아갔으니, 일이 《충렬록(忠烈錄)》주 79)과 《송경지(松京誌)》주 80)에 실려 있다. 3세를 내려와 직손(直孫)에 이르러서는 한조(韓朝)주 81)에서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첨정(僉正)을 지냈으며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율곡(栗谷) 이 선생(李先生)이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었다.주 82) 아들 휘 석홍(錫弘)은 군수(郡守)를 지냈고 이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이분은 기묘명현(己卯名賢)주 83)이다. 아들 휘 서성(瑞星)은 문과에 급제하고 검상사인(檢詳舍人)을 지냈으며 외직(外職)으로 나주 목사(羅州牧使)를 지냈다. 아들 휘 만복(萬福)은 봉사(奉事)를 지냈는데 공의 8세조이다. 휘 억귀(億龜)와 휘 몽열(夢說)은 증조와 조부이다. 부친의 휘는 상환(商煥)이고 모친은 해주 오씨(海州吳氏)로 달인(達仁)의 따님이다.
공은 정조(正祖) 신해년(1791, 정조15) 1월 9일에 태어났다.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으며 근검(勤儉)하여 비록 장가들어 분가한 뒤에도 고기 잡고 나무하여 부모와 큰형을 봉양하고, 따로 사는 막내 동생을 보살피고 자신을 돌보는 데는 매우 박하였으나 속으로 원망하는 소리가 없었다. 남은 힘으로 학문하여 일용할 거리로 삼고, 농사에 힘쓰고 집안을 다스려 가계(家計)가 자못 여유로워졌다. 일찍이 성년이 되지 않은 여자주 84)가 물에 빠지자 즉시 손을 잡아 구하는 것을 보고 혹자가 남녀 간에 구별이 없는 것인지 의심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서열이 높은 혐의가 있는 형수도 오히려 손을 잡아 구할 수 있는데주 85) 하물며 성인이 되지 않은 다른 집의 여자이겠는가."라고 하였다.
흉년이 들었을 때는 인근의 의지할 데 없는 사람에게 곡식을 흩어 나누어 주면서 말하기를, "나만 홀로 따뜻하게 입고 배불리 먹으면서 다른 사람의 죽음을 좌시한다면 이것이 어찌 인심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임인년(1842, 헌종8)과 계묘년(1843)에 부친상과 모친상을 연이어 당했는데 당시에 나이가 50이 넘었는데도 상제(喪制)를 지켜 예(禮)을 준수하였다. 상복을 벗고 나서는 자식들에게 이르기를, "나는 기애(耆艾)주 86)인데도 간고(幹蠱)주 87)에 부지런한 것은 자식의 도리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어찌 처자식을 위해 바쁘게 집안일을 돌보겠느냐."라고 하였는데, 이후로는 오직 서적을 가지고 스스로 즐겼다. 간혹 지구(知舊)나 집안의 친족과 함께 서로 만나 화락하게 지냈다.
만년에 노비 두 사람을 불러 이르기를, "하늘이 사람을 냄에 본래 차이가 없다. 나는 너희들이 대대로 노비인 것을 차마 볼 수 없다." 하고는 재산을 넉넉히 주고 보내면서 말하기를, "몸을 닦고 행동을 삼가며 부지런히 힘쓰고 씀씀이를 절약하여 양인(良人)이 되어라."라고 하였다. 철종(哲宗) 기미년(1859, 철종10) 3월 25일에 졸(卒)하였으니 향년 69세이다.
부인은 전주 유씨(全州柳氏)로 기영(基英)의 따님이다. 장남은 우익(友翼)이고, 차남은 우현(友賢)이며, 고부(古阜) 이농술(李瓏述)은 사위이다. 우익의 양자는 세감(世鑑)인데 아들 하나로 기술(基述)을 두었다. 형렬(炯烈), 형면(炯冕), 형삼(炯三), 형창(炯昌)과 김해(金海) 김갑곤(金甲坤), 김해 김용석(金龍錫)은 기술의 아들과 사위이다. 우현은 2남 3녀를 두었는데 세감은 백부(伯父)의 양자로 나갔고, 시감(始鑑)은 아들로 정술(政述), 길술(吉述)을 두고, 전주 이규학(李奎鶴), 해주(海州) 오영권(吳永權), 고령(高靈) 신문구(申文求)는 사위이다.
아, 공은 진실로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는 어진 사람이다. 이웃을 구휼하고 노비를 풀어 준 일이 모두 인(仁)인데 인은 사덕(四德)을 포함하니 모든 행실과 선이 무엇인들 갖추어지지 않았겠는가. 미처 다 기록하지 못한 공의 여러 행적을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또 공이 소나무[松]로 암(菴)에 편액한 것을 보면 평소 숭상한 바는 강하고 굳세며 우뚝히 서는 데에 있을 듯한데 드러난 일이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대개 인자(仁者)는 사욕(私欲)을 극복하니 사욕이 극복되면 항상 만물 위에서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어 강하고 굳셈이 저절로 생겨나 의(義)가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공의 인덕(仁德)이 사욕을 극복한 데서 나왔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 의가 이보다 잘 드러나는 것이 없음을 알 것이다. 그러므로 내 생각에는 공을 어질고 의로운 사람이라 하여도 옳다고 하겠다.
주석 75)
날씨가……시든다:《논어(論語)》 〈자한(子罕)〉에 "나는 날씨가 추워진 다음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알았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也]"라고 한 공자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군자의 지조는 환난을 당한 뒤에 비로소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주석 76)
성재(星齋):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에 있는 김광서(金光叙) 묘의 재실인 취성재(聚星齋)이다. 취성재라는 이름은 명종조(明宗朝)의 문신 임억령(林億齡)이 부안 김씨가 살고 있는 옹정리(瓮井里)를 찾아서 "옹정에는 군자가 많은데 김씨 가문에는 덕성(德星)이 모였다."라고 칭찬한 글의 '취덕성(聚德星)'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1819년(순조19)에 세워진 것이 화재로 소실되고 1826년에 중건하여 지금에 이른다. 예전에는 이 재실에서 사방의 선비들이 모여 들어 학문을 강론하였다고 한다.
주석 77)
가계(家系):원문은 '繼'이다. 문맥에 근거하여 '系'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석 78)
팔판시동(八判寺洞):〈조고 우신재 부군 묘표(祖考又新齋府君墓表)〉과 〈십칠세조 고려 봉정대부 지고부군사 부군 가장(十七世祖高麗奉正大夫知古阜郡事府君家狀)〉 등에는 '팔판동(八判洞)'이라 되어 있다. 아래에 보이는 《송경지》에는 팔판시동이라는 지명을 언급하는데 개성 성거산(聖居山) 아래에 있고 고려 신하 8인이 이곳에 들어와 분신자살을 했다고 한다.
주석 79)
충렬록(忠烈錄):정확히 어떤 책인지는 미상이다. 〈화전 김공 묘표(花田金公墓表)〉와 〈선고 벽봉 부군 가장(先考碧峰府君家狀)〉 등에는 〈충의록(忠義錄)〉이라고 하였다. 다만 〈십칠세조 고려 봉정대부 지고부군사 부군 가장〉에서 《여조충렬록(麗朝忠烈錄)》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채동열(蔡東說)이라는 인물이 두문동 칠십이현(杜門洞七十二賢)과 관련된 기록을 모은 책이다. 이 책의 부록에 김광서의 이름이 있는데, 역임한 직임과 본관 정도의 짤막한 내용만 실려 있다.
주석 80)
송경지(松京誌):1830년(순조30)경에 서희순(徐憙淳, 1793~1857)이 편찬한 개성부(開城府)의 읍지이다. 개성 유수(開城留守)를 지낸 김육(金堉), 이돈(李墩), 엄집(嚴緝), 오수채(吳遂采), 정창순(鄭昌順), 서유방(徐有防), 윤숙(尹塾), 김문순(金文淳), 김이재(金履載), 서희순의 서(序)・발(跋)이 실려 있다. 개성이 고려의 도읍지였기 때문에 고려세기(高麗世紀)를 가장 먼저 편성하였고, 국조기사(國朝紀事)에서는 조선 태조(太祖) 대부터 편찬 당시의 순조 대까지 송경과 관련된 기사를 편집하였다. 유수 조(條)에는 판부사(判府事)를 지낸 정지(鄭地)부터 1829년에 부임한 서희순까지 총 302명의 지방관이 수록되어 있다.
주석 81)
한조(韓朝):보통 조선 시기의 사람이 서술한 글은 조선조(朝鮮朝)를 본조(本朝)라고 하는데 '대한제국(大韓帝國)'의 '韓'을 따와 조선조의 의미로 이렇게 칭한 듯하다.
주석 82)
율곡(栗谷)……지었다:《율곡선생전서(栗谷先生全書)》 권17에 〈정언 증 도승지 김공 신도비명(正言贈都承旨金公神道碑銘)〉이 실려 있다.
주석 83)
기묘명현(己卯名賢):중종(中宗) 14년(1519) 기묘사화로 죽거나 유배 및 파직을 당한 사람과 사림(士林)을 두둔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주석 84)
성년이 되지 않은 여자:원문은 '及笄女'이다. 문맥에 근거하여 '及'을 '未'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석 85)
형수도……있는데:《맹자(孟子)》 〈이루 상(離婁上〉에 보인다.
주석 86)
기애(耆艾):노인을 가리키는 말로, 60세를 기라 하고, 50세를 애라 한다. 《예기(禮記)》 〈곡례 상(曲禮上)〉에, "50세를 애라 하니 관복을 입고 정사에 참여하며, 60세를 기라 하니 사람을 부린다.[五十曰艾 服官政 六十曰耆 指使]"라고 하였다.
주석 87)
간고(幹蠱): 《주역(周易)》 〈고괘(蠱卦) 초육(初六)〉에 "아버지의 일을 주관함이니, 훌륭한 자식이 있으면 돌아간 아버지가 허물이 없을 것이다.[幹父之蠱, 有子, 考无咎.]"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자식이 아버지의 뜻을 잘 계승하여 아버지가 미처 다 이루지 못한 사업을 완성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는 범범하게 집안일을 주관하여 다스린다는 뜻으로 쓰인 듯하다.
松菴金公墓表【庚寅】
近古蓬山之下, 扶風之鄕, 有隱德不仕, 行義範世之士, 松菴金公, 其人也。公之言曰: "傲霜雪而獨立者, 松柏也, 所以能叅天蔽日。" 其取號者在此, 而實孔子所稱歲寒後凋之意, 可見公志行全體矣。沒而葬于扶安下西面石下里庚坐之原者, 今且百年, 曾孫基述, 始樹阡表, 俾澤述文之曰: "子雖遠族, 少而同滄塾, 老共處星齋, 親若同堂昆弟, 於吾曾祖事行, 稔聞而詳知, 故屬之也。" 余曰: "不以人文而以是, 則吾何能辭爲?"公諱維聖, 字聖春。扶寧金氏, 繼・(系)出新羅敬順王太子諱鎰。傳至高麗平章事文貞公諱坵, 文章道德冠一世。六傳至古阜郡事諱光敘, 麗亡, 入八判寺洞, 終歸貫鄕, 事載《忠烈錄》、《松京誌》。三傳至諱直孫, 韓朝文科, 僉正, 贈都承旨。栗谷李先生, 撰神道碑銘。有子諱錫弘, 郡守, 贈吏曹叅議。是爲己卯名賢。有子諱瑞星, 文科, 檢詳舍人, 外守羅州牧。有子諱萬福, 奉事, 公八世祖。諱億龜, 諱夢說, 曾祖若祖也。考諱商煥, 妣海州吳氏, 達仁女。公生以正祖辛亥正月九日。孝友勤儉, 雖析箸後, 漁樵以供父母及伯兄, 周護季弟之異居者, 自奉甚約, 內無怨聲。餘力問學, 以資日用, 明農治家, 調度頗裕。嘗見及・(未)笄女溺水, 卽以手援, 或疑以男女無別。公曰: "嫂之尊嫌, 猶可手援, 况他家女未成人者乎?" 凶年散穀於隣近之無告者曰: "吾獨溫飽, 而坐視其死, 是豈人心哉?" 壬寅癸卯, 連丁內外艱, 時年五十以上, 猶能執制準禮。及至免喪, 謂諸子曰: "吾在耆艾, 猶勤幹蠱者, 子道然也。今則豈可爲妻孥役役營産也?" 自後惟以書籍自娛。間與知舊宗族相會和樂。晩年招謂奴婢二人曰: "天之生人, 本無差異。吾不忍汝等之世爲奴婢。" 資給産業, 而送之曰: "修身謹行, 勤力節用, 以成良人也。哲宗己未三月二十五日卒, 享年六十九。配全州柳氏, 基英女。男長友翼, 次友賢, 古阜李瓏述, 婿也。友翼繼男世鑑, 有一子基述。曰炯烈、炯冕、炯三、炯昌, 金海金甲坤、金海金龍錫, 基述子婿也。友賢二男三女: 世鑑出繼伯父, 始鑑有子政述、吉述, 全州李奎鶴、海州吳永權、高靈申文求, 婿也。嗚呼! 公固孝友仁人也, 恤隣放奴, 無非是仁。而仁包四德, 百行萬善, 何所不備? 公之羣行不及悉書者, 可推而知矣。然又觀公之扁菴以松, 則平日所尙, 似在剛毅特立, 而無所著見何也? 蓋仁者克私, 私克則常伸於萬物之上, 剛毅自生而爲義。人知公之仁德, 出於克私, 則知其爲義也莫著乎此矣。故余謂謂公爲仁義之人, 亦可也云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