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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4
- 묘표(墓表)
- 율와 배공 묘표 임오년(1942)(栗窩裵公墓表【壬午】)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4 / 묘표(墓表)
율와 배공 묘표 임오년(1942)
나는 이해 봄에 만성(晩醒) 정규병(丁奎炳)주 70)의 육위문(六偉文)주 71)으로 인해 율와 배공의 정(亭)에 기문(記文)을 지어주 72) 공의 외증손(外曾孫) 정유진(丁有鎭) 군의 요청에 부응하였다. 1년이 되지 않아 정군이 다시 와서 공의 현손(玄孫) 배창일(裵昌日)의 뜻으로 공에 대한 가장을 가지고 나에게 묘표를 구하였다. 내가 "나는 문장에 솜씨가 없어 이미 율와정에 흠결을 남겼는데 어찌 묘소에 감히 거듭 흠결을 남길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나 정군이 굳게 그치지 않고 요청하였기 때문에 사양할 수 없었고 가장도 간명하고 소박하여 믿을 만하기에 살펴보고 서술한다.
공의 휘는 종철(宗哲)이고, 자는 정서(正瑞)이다. 고려 때 태사(太師)를 지낸 무열공(武烈公) 현황(玄黃)이 이름이 드러난 조상이고 달성(達城)이 본관이다. 증조는 참봉(參奉)을 지낸 재철(再喆)이고, 조부는 동연(東淵)이며, 부친은 성엽(聖燁)이고, 모친은 장흥 고씨(長興高氏)이며, 성담(聖淡)과 광산 김씨(光山金氏)가 본생부모이다. 순조(純祖) 계해년(1803, 순조3)과 고종(高宗) 정축년(1877, 고종14)이 생몰이다.
타고난 성품이 청렴하고 개결하여 평소 자신의 힘이 아니면 먹지 않고 의(義)가 아니면 행하지 않았으며, 명성과 부화(浮華)를 제거하고 성실을 근본으로 삼았다. 항상 자식을 경계하여 "충(忠)과 효(孝)는 하나의 이치이다. 선비가 세상에 살면서 출사(出仕)하여 임금의 녹(祿)을 먹으면 청렴하고 부지런히 직분을 받들어 행해 배운 것을 나라에 행하며, 은거하여 임금의 땅에 농사지어 먹으면 정성을 다해 어버이를 봉양하여 배운 것을 집에 행해야 한다. 나는 녹을 먹을 그릇이 아니기 때문에 너희들과 농사짓고 독서하는 것이다. 비록 매우 곤궁하나 그 사이에 자연히 충과 효를 병행하는 방도가 있으니 너희들은 힘쓰라."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언행의 대략이다.
아, 세도(世道)가 낮아지고 습속이 변해 임기응변의 술수로 기교를 부리고 허위(虛僞)가 풍조가 되었다. 그리하여 명예를 구하고 이익을 편취(騙取)하여 의롭지 않은 짓을 자행하며, 절도를 넘고 분수를 범해 분에 넘치는 부귀를 바라며, 어버이를 속이고 임금을 속여 충도 없고 효도 없어서 예의염치(禮義廉恥)가 무슨 일인지 모른다. 온 동토(東土)가 도도(滔滔)히 모두 이러하여 점점 심해져 끝내 관자(管子)의 "사유(四維)가 펴지지 않으면 나라가 이에 멸망한다."주 73)라는 탄식에 이르고야 말았으니, 공처럼 본성 안에서 근본을 돈독히 하고 뜻을 면려하며, 인륜과 강상 사이에서 처한 지위에 따라 의를 행하는 자가 몇 사람이나 있는가.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사람마다 자신의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면 천하가 평안해질 것이다."주 74)라고 하였으니 만약 사람마다 모두 스스로 자신의 분수를 다했던 공처럼 할 수 있다면 나라와 천하가 평안해지는 데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삼가 감개와 탄식을 이길 수 없기에 공의 행적을 써서 무안군(務安郡) 청계방(淸溪坊) 용흥동(龍興洞) 간좌(艮坐) 언덕을 지나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 글을 읽고 은거하여 실지에 힘썼던 선비가 안장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공의 부인은 밀양 박씨(密陽朴氏)이니 창포(滄蒲) 가 인좌(寅坐)에 따로 장사 지냈다. 아들은 학채(學采), 학수(學洙), 학현(學賢)이고, 딸은 김해(金海) 김방민(金邦珉)에게 시집갔다. 지금 글을 청한 배창일은 배학현의 증손이라고 한다.
- 주석 70)
- 만성(晩醒) 정규병(丁奎炳):1870~1960. 일제강점기 유학자이자 항일운동가이다. 본관은 나주이고, 자는 태첨(泰瞻)이며, 만성은 호이다.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 1728∼1807)를 사사하고 사서오경과 한(漢)․당(唐)․송(宋)나라 학자들의 서적을 두루 익혔다. 1894년(고종31) 갑오경장 이후 은거하였고, 1910년(융희4) 경술국치 이후에는 단발령이 내려지자 끝까지 거부하였으며 일제의 신학문교육에 맞서서 후학들의 유학 교육에 전념하였다. 저서로 《만성유집(晩醒遺集)》이 있다.
- 주석 71)
- 육위문(六偉文):상량문(上樑文)을 말하는데, 상량문에는 아랑위(兒郞偉)라는 말이 여섯 번 들어가므로 이렇게 칭한다.
- 주석 72)
- 율와……지어:《후창집(後滄集)》 권21에 〈율와정기(栗窩亭記)〉가 실려 있다.
- 주석 73)
- 관자(管子)의……멸망한다:《관자(管子)》 〈목민(牧民)〉에 '사유는 첫째는 예, 둘째는 의, 셋째는 염, 넷째는 치인데, 사유가 펴지지 않으면 나라가 멸망한다.[四維 一曰禮 二曰義 三曰廉 四曰恥 四維不張 國迺滅亡]'라고 하였다.
- 주석 74)
- 사람마다……것이다:《맹자(孟子)》 〈이루 상(離婁上)〉에 보인다.
栗窩裵公墓表【壬午】
余於是年春, 因丁晩醒奎炳六偉文, 記栗窩裵公之亭, 而副其外曾孫丁君有鎭之請矣。未一朞, 丁君再至, 以公玄孫昌日意, 抱公家狀, 求余表阡之文。余曰: "僕不文, 旣病于亭, 阡豈敢重之?" 丁君固以請未已, 辭旣不獲, 狀又簡質可信, 乃按而敘之。曰: 公諱宗哲, 字正瑞。高麗太師武烈公玄黃, 其顯祖, 而達城, 貫也。曾祖叅奉再喆, 祖東淵, 考聖燁, 妣長興高氏, 而聖淡及光山金氏, 其所生也。純祖之癸亥, 高宗之丁丑, 生卒也。天質廉介, 平生非其力不食, 非其義不行, 銷聲祛華, 誠實爲基。常戒其子曰: "忠孝一理, 士之於世, 出而食君祿, 則廉勤奉職, 行其所學於國; 處而食君土, 則盡誠養親, 行其所學於家。我則非食祿之器, 故與若曹從事耕讀。雖甚窮約, 其間自有忠孝幷行之道, 汝其勉之!" 此言行梗槩也。噫! 世降俗渝, 機變爲巧, 虛僞成風。釣名騙利, 恣行不義; 踰節犯分, 希覬富貴; 欺親罔上, 無忠無孝, 不知禮義廉恥之爲何事者。環東土滔滔皆是, 而駸駸竟至管子"四維不張, 國乃滅亡"之歎而後已。若公之敦本勵志於性分之內, 素位行義於倫常之間者, 凡幾人哉? 孟子曰: "人人親其親, 長其長, 天下平。" 如使人人皆能如公之自盡其分, 則於國天下乎何有? 竊不勝感歎, 而爲之書, 使人之過務安郡淸溪坊龍興洞艮坐之原者, 讀此文而知其爲隱居務實士藏焉。公之齊, 密陽朴氏, 別葬滄浦上寅坐。男學采、學洙、學賢, 女適金海金邦珉。今昌日, 學賢曾孫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