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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4
- 묘표(墓表)
- 복재 김공 묘표 병술년(1946)(復齋金公墓表【丙戌】)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4 / 묘표(墓表)
복재 김공 묘표 병술년(1946)
나는 17세에 처음으로 부풍(扶風 부안(扶安))의 성재(星齋) 종중(宗中)에 가서 문미(門楣) 사이에 적힌 문자 하나를 보았는데 선조를 사모하고 종족과 친하고 화목하게 지내라는 뜻을 간곡하게 말하였으니 온화한 군자의 말씨였다. 이는 남원 김씨(南原金氏)로 자가 태숙(泰叔)인 김석균(金錫均)이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주 68) 선생을 모시고 여기에 이르러 쓴 글귀라고 하여 마음속으로 기억하였다.
4년이 지나서 사우(師友)를 따라 남원을 유람하였는데 남원 사람이 "우리 마을의 학문은 복재 김공을 선진(先進)으로 삼습니다."라고 하기에 상세한 내용을 물었는데 왕년에 성재에 글귀를 적은 분이 바로 그 사람이었다. 마침내 목동리(木洞里)에 나아가 공을 알현하였는데 소탈하고 중후하며 위엄이 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공경하게 하였다. 그러나 바쁜 탓에 말씀을 온전히 받들어 공이 간직한 바를 전부 얻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30년 뒤에 다시 목동리를 들렀는데 공은 이미 갑자년(1924)에 돌아가고 옛날에 거처했던 간운정(澗雲亭)은 빈터가 되고 후손은 곤궁하여 스스로 먹고 살 수 없었으니 이 때문에 개탄하고 돌아왔다. 지난가을 공의 차자(次子)인 김문철(金文喆)이 가장을 가지고 와서 묘소에 새길 글을 청하였다. 가장은 김문철의 형 김인철(金仁喆)이 지었는데 내용이 소략하고 군더더기가 많아 근거로 삼아 글을 짓기가 어려웠기에 평소의 저술을 보고 싶었으나 역시 그럴 수 없었다. 이에 "공을 아는 사람에게 좋은 가장을 얻어서 오면 응당 요청한 대로 해주겠습니다."라고 말하자 끝내 얻을 수 있는 길이 없다고 하였으며 김문철은 지금 또 갑자기 죽었다. 아, 슬프다. 두 세대의 생사를 보면 인사(人事)에 대한 감개가 어떠한가. 가장이 완전하지 않다는 이유로 내가 어찌 차마 말 한마디 없을 수 있겠는가. 이에 그 가장 가운데 근거할 만한 점을 근거하고 삼가 나의 뜻을 덧붙여 드러내 논하니 거의 괜찮을 것이다.
가장에 이르기를 "공의 본관은 부안으로 문정공(文貞公) 휘 구(坵)의 후손이며, 충경공(忠景公) 휘 익복(益福)의 12세손이며, 효자(孝子) 휘 병규(炳奎)의 장자이고, 모친은 합천 이씨(陜川李氏)이다. 헌종(憲宗) 정미년(1847, 헌종13) 5월 24일이 공이 태어난 날이고, 전주 이씨(全州李氏)가 부인이다."라고 하였다. 공의 덕과 학문을 서술한 내용으로 말하면 "어버이를 섬김에 뜻을 봉양하니 이웃 마을이 감화되었고, 집안을 엄숙하게 다스리니 내외가 정숙(整肅)하였다. 연재의 문하를 출입하여 마음과 행실이 진실하다는 칭찬을 받았다. 평소 공부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아 경(敬)에 있었다."라고 하였다. 이는 진실로 유자(儒者)에 행실을 단속하고 덕을 증진하는 정해진 법도이니, 전날 뵙고 안 것 외에도 공을 알 수 있는 점이 많았다.
그러나 한 가지 공이 지킨 절조와 들어간 학문의 문로(門路)로 말하면 끝내 상세하지 못한 면이 있었는데 공이 지은 간운정의 원운(原韻)에 "마음을 다스려 도를 듣는 것은 경전을 궁구하는 데 있다네."라는 시구(詩句)를 본 뒤에야 공의 학문이 주자의 글을 읽고 이치를 궁구하며 순서를 따라 점차 나아가는 뜻을 진정으로 얻어, 세속의 단계를 뛰어넘고 하루아침에 갑자기 깨달아 육왕(陸王)주 69)의 뒤를 잇기를 꺼리지 않는 자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는 학계(學界)에 알려 공의 이전 자취를 밟아 폐단이 없게 할 만하다. 이에 써서 김문철의 아들 김옥열(金鈺烈)에게 주어 목동 앞 방사평(防沙坪) 건좌(乾坐) 묘소에 새기게 한다.
- 주석 68)
- 송병선(宋秉璿):1836~1905. 본관은 은진(恩津)이고, 자는 화옥(華玉)이다. 호는 연재(淵齋)이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이다. 회덕(懷德) 출신으로 여러 차례 관직에 기용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국권이 박탈되자 을사오적의 처형을 강력히 건의하고 나서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저서로 《연재집(淵齋集)》 등이 있다.
- 주석 69)
- 육왕(陸王):송(宋)나라 육구연(陸九淵)과 명(明)나라 왕수인(王守仁)을 가리키는데 육구연의 학문을 왕수인이 발전시켰기 때문에 병칭하였다. 주희(朱熹)는 경서 연구에 관심을 기울이고 육구연은 마음의 실체를 깨닫는 것을 중시하였다.
復齋金公墓表【丙戌】
余年十七, 始至扶風之星齋宗中, 見楣間所題一文字, 懇懇言思慕祖先, 親睦宗族之意, 藹然君子人辭氣云。是南原族, 名錫均, 字泰叔, 陪淵齋宋丈席, 到此而題, 心識之。越四年, 從師友遊于南原。原之人言: "吾鄕之學, 復齋金公爲先進。" 問其詳, 往年題文星齋者, 是其人也。遂造謁于木洞之里, 則簡重有威, 令人可敬。顧以凌遽未能穩承論旨, 盡得所存爲恨。後三十年, 又過木洞, 公已以甲子六月觀化, 而舊居澗雲亭爲墟, 後承窮不能自存, 爲之慨歎而歸。去年秋, 公次子文喆, 以狀來請銘墓之文。狀則其兄仁喆撰, 而疎略賸贅, 難可據而爲文, 欲見平日著述, 而亦不得。乃報以更得善狀於知公者以來, 當如請, 則謂竟無可得之路矣, 而文喆今又遽沒。嗚呼悲夫! 兩世幽明, 人事之感, 顧何如也? 吾何忍以狀之未完而無一言乎? 乃據其可據者, 竊附己意而表論之, 庶其可乎! 狀云: "公系出扶安, 文貞公諱坵後, 忠景公諱益福十二世孫, 孝子諱炳奎長子, 妣陜川李氏。憲宗丁未五月二十四日, 其生也; 全州李氏, 其配也。" 至敘德學, 則曰: "事親養志, 隣里化之。齊家以肅, 內外斬斬。出入淵門, 得眞心實行之贊。平生工程, 無速無緩, 在於一敬。" 是固儒者制行進德之定法。知公於前日觀瞻之外者亦多矣。然若乃一副當所主欛柄, 所入門路, 則終有未悉者。及讀公澗雲亭原韻"治心聞道在窮經"之句, 然後知公之學, 正得朱子讀書窮理、循序漸進之意, 與世之欲躐階越梯, 一朝頓悟, 而不憚躡陸、王後塵者異矣。是可以聞之學界, 蹈公之轍而無弊也。於是乎書之, 以授文喆子鈺烈, 刻于木洞前防沙坪坐乾之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