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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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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묘표(墓表)
  • 효자 서공 묘표 을해년(1935)(孝子徐公墓表【乙亥】)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4 / 묘표(墓表)

자료ID HIKS_Z038_01_B00001_001.024.0003.TXT.0006
효자 서공 묘표 을해년(1935)
증자(曾子)의 효에 대해 정자(程子)는 지극하다고 하였다. 증자가 행한 효는 식사 때 반드시 술과 고기를 올리고 반드시 남은 것을 누구에게 줄지 묻는 사이주 50)에 불과하여, 행하기 어려운 기이한 행실이나 특이한 행적이 있는 후세 사람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극한 효라고 칭송하였으니, 증자에게는 지극하다고 하고 후세의 효에는 지극하다고 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일까.
잠깐 하기는 쉽고 오랫동안 하기는 어려운 것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식사 때 반드시 술과 고기를 올렸다고 한다면 오랫동안 몸을 봉양했다는 뜻이고 반드시 누구에게 줄지를 여쭈었다고 한다면 오랫동안 마음을 봉양했다는 뜻이니, 그 어려움이 후세 사람의 행하기 어려운 효가 혹 한때의 특별한 정성에서 나온 것과는 견줄 수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판단했을 것이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중용(中庸)은 쉽지만 어렵고, 시퍼런 칼날을 밟는 것은 어렵지만 쉽다."주 51)라고 하였으니 비슷한 예가 또한 이와 같다.
근세에 장성(長城) 서씨 가문에 효자 휘 상권(象權)이 있었으니 고려 시중(侍中) 절효공(節孝公) 휘 능(稜)의 후손이며, 본조 생원(生員)으로 율곡(栗谷)과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호)를 변호한 휘 태수(台壽)의 9세손이며, 진사(進士) 휘 한용(漢茸)의 아들이다. 지금 그 종자(從子)인 서문환(徐文煥)이 지은 행록(行錄)를 읽어 보니, "집이 가난하였으나 근심하지 않고, 오직 어버이 봉양을 근심하여 농사짓고 나무하여 몸을 봉양하는 데 빠뜨림이 없었다."라고 하고, 또 "진사공이 술을 좋아하였기 때문에 직접 술을 빚건 사오건 힘을 다해 계속 마련하여 집안 형편이 나빠도 그치지 않았다. 진사공이 비록 가까운 곳에 출타해도 반드시 기다렸고, 중도에 날이 저물면 진사공을 등에 업고 돌아왔다."라고 하고, 또 "모친상을 당하여 장례를 치르는 데 유감이 없었고, 여묘(廬墓)하려고 하였으나 진사공이 힘써 제지하였기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중문(中門) 밖에 여막(廬幕)을 설치해 거처하다가 슬픔으로 건강을 해쳐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하였는데, 진사공의 명으로 슬픔을 절제하여 생명을 손상하지 않았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공이 평소 마음을 봉양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모두 어느 한 집안의 사사로운 말이 아니라 향당(鄕黨)에서 지금까지 공공연히 칭송하고 있다고 한다.
삼가 보건대 공의 효도는 모두 부모를 받드는 간략한 예절에서 나와 행하기 쉬운 듯하고 놀랄 만한 기이한 행실이 없는데 모든 사람이 감복하는 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행하기 어려운 효도보다 깊은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종신토록 오랫동안 마음과 육신을 봉양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공은 또 매우 가난하였는데도 잘 해냈으니 이것이 어찌 쉽지만 어렵고 어렵지만 쉬운 일이 아니겠는가. 대개 듣건대 공은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물어 정밀한 의리를 강구하지 않았는데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한 가지 일은 오히려 옛사람과 합치하였으니, 공의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진실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고종(高宗) 경인년(1890, 고종27) 4월 17일에 54세로 졸(卒)하였으니 진사공보다 1년 먼저 돌아갔다. 아, 효로 어버이를 봉양하는 일을 마치지 못한 것은 하늘의 보답이 잘못된 것이니 이는 또한 어째서인가.
부인은 김해 김씨(金海金氏)로 제홍(濟弘)의 따님이고, 아들 승환(承煥), 증환(曾煥)과 반남(潘南) 박제옥(朴齊玉), 전주(全州) 최원호(崔元鎬)에게 시집간 딸이 있으며, 후건(厚建), 후덕(厚德), 규문(圭文), 규학(圭學), 후인(厚仁), 후찬(厚贊)은 손자이니, 자손이 번성하고 다하지 않는 것이 효도에 대한 보답이다.
공의 자손이 비석을 마련해 정읍(井邑) 덕치(德峙) 서쪽 미좌(未坐) 묘소에 묘표를 세우고 나에게 글을 청하였다. 나는 생각건대 옛날 절효공이 효도로 세상에 알려졌으니 공의 효는 진실로 가문과 관계가 있음을 알겠다. 또 서문환은 미더운 사람이다. 옛날에 나라의 동맹을 믿지 않고 계로(季路)의 말 한마디를 믿은주 52) 고사가 있으니 나 또한 서문환이 지은 행록 한 편을 믿고서 공의 행실을 드러내 논하여 오늘날 효를 말하는 자들로 하여금 어렵고 쉬운 것의 구분을 알게 하고자 한다.
주석 50)
식사……사이:증자 아버지 증석(曾晳)을 봉양할 적에 반드시 술과 고기를 올렸고, 상을 물릴 때에는 반드시 남은 것을 누구에게 주고 싶으신지 여쭈었다. 증석이 남은 것이 있는지 물으면 반드시 있다고 대답하였다. 이 고사는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보인다.
주석 51)
중용(中庸)은……쉽다:《중용장구(中庸章句)》 제9장에 "천하와 국가를 균평(均平)히 다스릴 수 있으며, 작록을 사양할 수 있으며, 시퍼런 칼날을 밟을 수 있으나 중용은 능히 할 수 없다.[天下國家 可均也 爵祿可辭也 白刃可蹈也 中庸不可能也]"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注)에 "세 가지는 어렵지만 쉽고 중용은 쉽지만 어렵다.[三者難而易 中庸易而難]라고 한 구절을 가리키는 듯하다.
주석 52)
나라의……믿은:춘추시대(春秋時代) 소주(小邾)의 대부(大夫) 역(射)이 구역(句繹) 지방을 가지고 노(魯)나라로 도망해 와서 말하기를 "자로(子路)로 하여금 와서 나와 함께 서약하게 한다면 노나라의 맹서는 요구하지 않겠다."라고 한 일을 말한다. 《春秋左氏傳 哀公 14年》 자로는 계로의 다른 자이다.
孝子徐公墓表【乙亥】
曾子之孝, 程子以爲"至矣"。其所以爲孝, 則不越乎必有酒肉、必請所與之間, 非有如後世奇行異蹟之難能者, 顧以至孝稱, 在此不在彼, 何哉? 蓋易暫難久, 常情也。謂之必有, 則養體也久; 謂之必請, 則養志也久, 其爲難不比後世之難能, 容有出於一時特誠者, 故權衡如此歟? 朱子曰: "中庸易而難, 蹈白刃難而易。" 其類例亦若是焉。近世長城徐氏之門, 有孝子諱象權, 麗侍中節孝公諱稜后, 本朝司馬伸捄栗牛兩先生者諱台壽九世孫, 進士諱漢茸子也。今讀其從子文煥所著行錄, 有曰: "家貧不戚戚, 惟以親供爲憂, 耕稼樵採, 養體無闕。" 又曰: "進士公嗜酒, 以釀以酤, 極力繼之, 家落而不輟。進士公雖近出, 必待, 中路日暮, 則背負而歸。" 又曰: "遭內艱, 送終無憾, 欲廬墓, 進士公力止之, 未遂, 廬中門外, 毁幾滅性, 以進士公命, 節哀無傷。" 此可見平日養志也, 是皆非一家私言, 鄕黨至今公誦云。竊觀公之孝, 皆出於奉承疏節若易行者, 而無奇異可驚動, 人人之感服, 深於世所謂難能之孝者, 無他焉, 以養志體終身久之難也。公又貧甚而能之, 玆豈非易而難, 難而易者乎? 蓋聞公未當博學審問, 講究精義, 而孝親一事, 乃與古人合, 其天資純實, 可知已。年五十四以高宗庚寅四月十七日卒, 先進士公一歲。嗟哉! 孝養未終, 天報有錯, 亦曷故焉?金海金氏, 濟弘女, 配也; 丞煥、曾煥, 潘南朴齊玉、全州崔元鎬, 男女也; 厚建、厚德、圭文、圭學、厚仁、厚贊, 孫也。其盛且未艾, 是則孝之報也。公之子孫伐石表于井邑德峙之西負未之阡, 請余以文。余惟昔節孝公以孝聞于世, 吾知公之孝實係世類。且文煥, 信人也。古有不信國盟而信季路一言者, 余亦信文煥一錄, 而表論公行, 欲使今之言孝者知其難易之分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