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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4
  • 묘표(墓表)
  • 사복시 부정 최공 묘표 무자년(1948)(司僕寺副正崔公墓表【戊子】)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4 / 묘표(墓表)

자료ID HIKS_Z038_01_B00001_001.024.0003.TXT.0003
사복시 부정 최공 묘표 무자년(1948)
전주(全州)를 본관으로 삼고 고부(古阜)에 명망 있는 최씨는 고려의 시중(侍中)을 지낸 문성공(文成公) 아(阿)를 시조로 삼는다. 이후로 이름을 알린 사람이 계속 나와 족보를 빛냈으니 청수(淸修)하고 염퇴(恬退)한 본조의 집현전 제학(集賢殿提學) 월당(月塘) 담(霮), 기미를 보고 절조를 온전히 지킨 전농시 소윤(典農寺少尹) 득지(得之), 학문과 공훈으로 사우(祠宇)에서 제향을 받는 판관(判官) 증 참판(參判) 희정(希汀), 연원(淵源)이 있는 학문을 한 사헌부 감찰(監察) 농은(農隱) 휴지(休之)주 43) 같은 분들이 있다. 덕촌(德村 최희정의 호)이 조부이고 농은이 증손인 사복시 부정 휘 영우(英佑), 자 수이(秀而)가 있으니, 부사과(副司果) 진홍(鎭洪)의 아들이고, 판서 광필(光弼)의 따님인 공주 이씨(公州李氏)가 모친이다.
대개 공은 위로 계승한 바가 있고 아래로 전해 준 바가 있으니 마땅히 드러내 기록할 만한 덕행이 있을 터인데 족보에 보이는 내용이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대저 아버지가 선성(宣聖 공자(孔子))이고 아들이 복성(復聖)주 44)인 백어(伯魚 공리(孔鯉)의 자)가 평생 동안 수립한 것이 어찌 70제자의 반열에 미치지 못하였겠는가. 그러나 선을 기록한 글이 《논어》에 실리지 않았으니 이는 모두 당시에 글을 엮어 기록할 때 우연히 빠뜨린 것인가 보다. 공의 관직으로 말하면 사복시 부정이라는 중임의 반열에 들었으니 진실로 적임자가 아니었다면 어찌 이런 선발에 응하였겠는가. 이는 천 년 뒤에 공을 상상하기에 충분하다.
부인은 남평 반씨(南平潘氏)로, 생원(生員) 의(猗)의 딸이다. 아들 관(寬)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이고, 식(寔)은 주부(主簿)이고, 굉(宏)도 주부이며, 딸은 사과(司果) 강윤상(姜允常)에게 시집갔다. 관의 양자 득일(得一)은 주부이고, 식의 아들 득일은 양자로 나갔고, 복일(復一)과 덕일(德一)은 진사(進士)이다. 윤상의 아들은 영(穎)이고, 딸은 부사(府使) 김치원(金致遠)에게 시집갔다. 덕일의 이남이 바로 농은이다.
지금 그 후손이 함께 도모하고 힘을 합쳐 분토동(粉土洞) 선영 안 쌍분(雙墳)으로 조성한 묘소에 다시 묘표를 세우면서 나에게 글을 짓게 하였는데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이상과 같이 쓴다.
주석 43)
휴지(休之):원문은 '体之'이다. 문맥에 근거하여 '体'를 '休'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석 44)
아들이 복성(復聖):복성은 안회(顔回)를 가리키는 말이고, 백어의 아들인 자사(子思)는 술성(述聖)이라 부른다. 편찬 과정에서 오류가 있는 듯한데 우선 원문대로 번역하였다.
司僕寺副正崔公墓表【戊子】
崔氏之貫全州望古阜者, 以高麗侍中文成公阿爲肇祖。自後聞人繼出, 光耀譜乘, 有若本朝集賢殿提學月塘霮之淸修恬退, 典農少尹得之之見幾全節, 判官、贈叅判希汀之學勳享祠, 司憲府監察農隱体・(休)之淵源學問, 是也。以德村爲祖, 農隱爲曾孫, 而有司僕寺副正諱英佑字秀而, 副司果鎭洪之子, 公州李氏判書光弼女, 其妣也。蓋公上有所承, 下有所傳, 宜其有德行可表書者, 譜無見焉, 何也? 夫以伯魚之父宣聖而子復聖, 生平樹立, 豈遽不及七十子之列? 而記善之文, 不登《魯論》, 是皆當時編錄之偶爾闕失也歟? 乃若公之官職, 參在〈冏命〉"僕臣正, 厥后克正"之重任, 苟非其人, 豈膺是選? 此足以想像公於千載下矣。配南平潘氏, 生員猗女。男寬僉樞, 寔主簿, 宏主簿, 女適司果姜允常。寬繼男得一主簿, 寔男得一出繼, 復一、德一進士。允常男穎, 女金致遠府使。德一第二男, 卽農隱也。今其後孫合謀協力, 改樹表於粉土洞先塋內雙兆之阡, 俾余文之。辭不獲, 而爲之書如右云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