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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인 홍씨 묘갈명 병서(宜人洪氏墓碣銘【幷序】)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4 / 묘갈명(墓碣銘)

자료ID HIKS_Z038_01_B00001_001.024.0001.TXT.0007
의인 홍씨 묘갈명 병서
송(宋)나라 속수 선생(涑水先生 사마광(司馬光))이 "며느리는 집안이 이로 말미암아 흥성하거나 쇠락하게 되는 존재이다."주 25)라고 하였는데 논하는 사람들이 지극히 합당한 말이라고 하였다. 천 년 뒤에 건상(巾箱) 안에서 말 한마디를 얻었는데, 속수 선생의 말과 은연중에 부합주 26)하면서도 한층 더 진실하고 절실하였다. 그 말에 "집안의 흥망은 며느리에게 달렸으니, 며느리가 현명하지 않으면 가정교육이 독실하지 못하다. 나는 딸 다섯을 두었는데, 이런 문제를 모두 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그 식견과 행실이 어찌 뛰어나지 않겠는가. 바로 호남 임실현(任實縣)의 유인(孺人) 안동 권씨(安東權氏)가 그 사람이다.
지금 의인 남양 홍씨(南陽洪氏) 휘 교희(敎熙)는 권씨의 장녀이다. 부친은 재기(在祺)이니 호은(湖隱) 연(淵)의 후손이다. 홍씨는 18세에 평해(平海) 죽헌(竹軒) 황종팔(黃鍾八) 공에게 시집을 갔으니, 황공은 이재(頤齋) 선생 윤석(胤錫)주 27)의 5세손이자 한천(寒泉) 재학(在學)의 아들이다.
의인은 일찍부터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들어 자식의 직분에 부지런하였고, 시집가서는 부도(婦道)를 다했다. 집안이 청빈하여 쌀과 보리를 나누어 밥을 지은 다음 쌀밥은 어른에게 올리고 보리밥은 자녀와 달게 먹었다.
시어머니가 오랫동안 병을 앓았는데 의인이 약을 전담하여 잠시도 다른 사람에게 대신 시키지 않았고, 죽을 쑤는 데 쓰는 쌀을 씻느라 손톱이 다 벗겨지니 시어머니의 성품이 엄하였는데도 효부(孝婦)라고 칭찬하였다. 동서 간에 화목하고 공경히 대하니 집안이 절로 엄숙하였고, 비복(婢僕)에게 허물이 있으면 온화한 말로 잘 타일러 기어코 잘못을 뉘우쳐 고치게 하였다.
아들과 조카가 밤에 글을 읽으면 매번 음식을 나누어 주고 이어 "집안의 자손이 독서를 멀리하면 무엇을 하려고 하겠느냐. 재화를 탐하고 의(義)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는 데 불과할 뿐이니 반드시 부지런히 공부하여 아름다운 명성을 버리지 말라."라고 경계하였다.
남편이 손님 만나기를 좋아하여 날마다 수십 사람을 초대하였으나 마음을 다해 음식을 제공하였는데 비록 끼니가 지난 뒤라도 다시 밥을 짓기를 꺼리지 않고 항상 말하기를, "집에 손님이 끊어지면 볼 만한 것이 없다. 진실로 좋은 손님이 있으면 하루에 열 번 밥을 짓더라도 나는 수고스럽게 여기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길쌈에 힘써, 집안에 혼인하는 남녀가 많았으나 베 한 자를 사지 않아도 충분하였고, 시부모를 염습(殮襲)할 때 사용할 수의(壽衣)도 모두 손수 짜서 마련하였다. 대개 근검으로 집안을 다스려, 편안히 자지 못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지 못하고 멀쩡한 옷이 없는 채로 20년을 하루처럼 살아 이에 가계(家計)가 조금 여유로워졌다.
융희(隆熙) 정미년(1907, 순종즉위) 9월 27일 43세에 졸(卒)하였으니, 사람들이 모두 탄식하고 애석하여 말하기를, "어진 부인이 서거하였다."라고 하였다. 정읍군(井邑郡) 소성면(所聖面) 춘수리(春水里) 불등치(佛燈峙) 곤좌(坤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아들은 상익(尙翼), 휴익(休翼), 환익(奐翼), 건익(鍵翼)이고, 딸은 울산(蔚山) 김상태(金相泰), 수원(水原) 백남용(白南用), 나주(羅州) 오영수(吳翎洙), 진주(晉州) 정태환(鄭台煥)에게 시집갔다. 장남의 아들은 영구(榮九), 완구(浣九)주 28)이고, 딸은 전주(全州) 이강언(李康彦)의 아내이다. 차남의 아들은 경구(炅九)이고, 딸은 탐진(耽津) 최순환(崔順煥), 신평(新平) 송익수(宋益洙), 전주 이용▣(李容▣)의 아내이다. 삼남의 아들은 용구(瑢九), 준구(駿九)이다. 사남의 아들은 양구(亮九), 억구(檍九)이고, 딸은 전주 이병연(李秉淵), 울산 김진수(金鎭洙), 창녕(昌寧) 성▣▣(成▣▣)의 아내이다. 사위 백남용의 아들은 상기(祥基), 한기(漢基)이고, 사위 오영수의 아들은 병근(秉根)이고, 사위 정태환의 아들은 재철(在哲), 재홍(在洪)이다. 내외 자손이 모두 30여 명인데 많아서 다 기록하지 못한다.
아, 성대하도다! 이는 하늘이 의인의 현명함과 선(善)에 보답한 것이니 "집안의 흥망성쇠가 며느리에게 달렸다."라는 말이 옳지 않은가. 돌아보건대 지금 세상에서는 윤리가 땅에 떨어져 의인의 아름다운 행실 같은 것은 전혀 볼 수 없다. 한 집이 쌓여 한 세상이 되니 그렇다면 온 세상의 쇠망을 알 수 있다. 속수옹과 권 유인의 말에 또 어찌 감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황건익이 가장을 가지고 나에게 묘갈명을 요청하였는데 나는 의인이 세도(世道)를 바로잡을 현명한 부인임을 이미 믿고 의인이 종신토록 시어머니를 봉양하느라 잠시도 겨를이 없었던 것이 나의 선자(先慈) 최씨(崔氏)와 비슷한 점이 있는 데 거듭 감동하였기에 마침내 사양하지 않고 행적을 서술하고서 명(銘)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으매 母訓是受
남편 집안 번창하였으니 夫家是昌
부인의 도를 다하는 것은 婦道之盡
오히려 의인의 일상이었네 猶是厥常
의로 아들을 면려하고 勖子以義
당에 손님 가득하길 바랐으니 願賓滿堂
이 넓고 큰 도량 보면 見斯遠大
남은 운수 한량없네 餘運未量
울창한 저 불등치는 鬱彼燈峙
여사의 안식처이니 女士攸藏
지나가는 자는 누구든지 疇不過者
공경을 표하고 서성이리 致敬彷徨
주석 25)
며느리는……존재이다:《소학(小學)》 〈가언(嘉言)〉에 보인다.
주석 26)
은연중에 부합:원문은 '合暗'이다. 문맥에 근거하여 '暗合'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석 27)
윤석(胤錫):1729~1791.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영수(永叟)이다.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 1702~1772)의 문인이다. 1759년(영조35) 진사시에 합격하고 1766년에 은일(隱逸)로서 장릉 참봉(莊陵參奉)에 임명되었다. 뒤이어 사포서(司圃署)의 직장(直長)·별제(別提)를 거쳐 익위사(翊衛司)의 익찬(翊贊)이 되었으나, 곧 사퇴하였다. 1779년(정조3) 목천 현감(木川縣監)이 되었다가 다음해 사퇴하였고, 1786년 전생서(典牲署)의 주부를 거쳐 전의 현감(全義縣監)이 되었다가 그 다음해에 사퇴하였다. 처음에는 이학(理學)에 힘쓰고 《주역(周易)》을 비롯한 경서의 연구도 하였으나, 이학과 서구의 새 지식과의 조화를 시도하였다. 저서로는 《이재유고(頤齋遺稿)》, 《이재속고(頤齋續稿)》, 《이수신편(理藪新編)》, 《자지록(恣知錄)》이 있다.
주석 28)
완구(浣九):원문은 '浣'이다. 문맥에 근거하여 '浣' 뒤에 '九'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宜人洪氏墓碣銘【幷序】
有宋涑水先生有言, 曰: "婦者, 家之所由盛衰。" 論者以爲至言。後千載而得一言於巾幃中, 則與之合・(暗)暗・(合), 而更進一格眞切。其言曰: "人家興亡在婦人, 而婦人之不賢, 家庭敎育之不篤, 吾有五女, 皆可免矣。" 此其所見所行, 豈不卓乎哉? 卽湖南任實縣孺人安東權氏, 其人也。
今宜人南陽洪氏諱敎熙, 權氏長女。其考在祺, 湖隱演後。年十八歸于平海氏竹軒黃公鍾八, 頣齋先生胤錫五世孫, 寒泉在學子。宜人早承母訓, 勤於子職, 及歸, 婦道是盡。家力淸貧, 分炊米麥, 米進於所尊, 惟麥, 己與子女甘之。姑久癠, 專擔藥餌, 暫不替人, 淅磨粥米, 爪甲盡禿。姑性嚴而稱孝婦。和敬妯娌, 家內自肅。婢僕有過, 溫言善喩, 期至悔改。子姪夜讀, 每以食物分給, 仍戒之曰: "人家子孫外讀書, 有何所欲? 不過貪貨財、作非義而已。必須勤做, 毋替令名。" 夫子喜賓客, 日致數十, 盡心供饋, 雖飯後, 不憚再炊, 常曰: "家絶賓客, 無可觀。苟有嘉賓, 一日十炊, 吾不勞也。"務紡績, 男女婚嫁多矣, 一尺布不貿而足, 舅姑時月之制, 皆出手織。蓋勤儉治家, 寢不穩, 食不甘, 衣無完, 二十年如一日, 而調度稍裕矣。年四十三卒以隆熙丁未九月二十七日。人皆嘆惜曰: "賢婦人逝矣。" 葬于井邑郡所聲面春水里佛燈峙坤坐原。男尙翼、休翼、奐翼、鍵翼, 女適蔚山金相泰、水原白南用、羅州吳翎洙、晉州鄭台煥。長房男榮九、浣◀(九), 女全州李康彦妻。次房男炅九, 女耽津崔順煥、新平宋益洙、全州李容▣妻。三房男瑢九、駿九。四房男亮九、檍九, 女全州李秉淵、蔚山金鎭洙、昌寧成▣▣妻。白婿男祥基、漢基, 吳壻男秉根, 鄭壻男在哲、在洪。內外子孫摠三十餘人, 而繁不盡錄。嗚虖盛矣哉! 此天所以報宜人賢善, 則所謂"人家興亡盛衰在婦人"者, 不其然乎? 顧今之世, 倫理墜地, 如宜人懿行, 絶不可覯矣。一家之積爲一世, 則擧世之衰亡, 可知已, 又安得不感慨乎涑水翁、權孺人之言也? 鍵翼抱家狀, 要余銘墓, 余旣信其爲淑世之賢媛, 重感其終身奉姑, 不獲暫暇者, 有似乎吾先慈崔氏也, 遂不辭而敘而銘。曰: 母訓是受, 夫家是昌。婦道之盡, 猶是厥常。勖子以義, 願賓滿堂。見斯遠大, 餘運未量。鬱彼燈峙, 女士攸藏。疇不過者? 致敬彷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