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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4
  • 묘갈명(墓碣銘)
  • 유인 최씨 묘갈명 병서(孺人崔氏墓碣銘【幷序】)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4 / 묘갈명(墓碣銘)

자료ID HIKS_Z038_01_B00001_001.024.0001.TXT.0006
유인 최씨 묘갈명 병서
부인이 목숨을 버려 절조를 수립하는 것을 열행[烈]이라 하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수절하는 것을 정절[貞]이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절조를 수립하는 열행만 칭송하고 수절하는 정절이 어려운지 모르며, 사별한 뒤에 수절하는 것이 어려운 줄만 알고 생이별한 뒤에 수절하는 것 역시 어려운 줄 모르니, 요컨대 정론이 아니다.
당(唐)나라 가직언(賈直言)이 영남(嶺南)에 귀양 가자 그 아내 동씨(董氏)가 머리를 비단으로 싸매고서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20년 동안 머리를 감지 않았다.주 22) 이것이 바로 생이별한 뒤의 수절로, 왕 절부(王節婦)주 23)가 《여범(汝範)》 〈정렬(貞烈)〉 편에 이 고사를 실어 목숨을 버려 절조를 수립하는 것과 동등하게 보았으니 오직 이것이 정론이다.
우리 마을에 유인 전주 최씨(全州崔氏)가 있는데 문성공(文成公) 아(阿)의 후손이며 판관(判官)을 지낸 증(贈) 참판 덕촌(德村) 희정(希汀)의 10세손이다. 부친은 영모(永模)이고, 모친은 영광 김씨(靈光金氏)로 통정대부(通政大夫) 김택려(宅麗)의 딸이다. 최씨는 철종(哲宗) 경술년(1850, 철종1)에 태어났다. 어려서 비범한 자질이 있었고 성인이 되어서는 평택(平澤) 임기태(林基兌) 공에게 시집갔다. 시부모를 정성으로 봉양하고 남편을 공경으로 받들어 규문(閨門)이 화목하고 엄숙하니 온 집안이 크게 기뻐하였다.
무자년(1888, 고종25) 봄에 임공이 일이 있어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고 아울러 소식도 없어, 유인이 어린 네 아들을 데리고 남편을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 이에 곡기(穀氣)를 끊고 죽으려 하자 아들이 울면서 "어머니가 죽으면 아들은 어떻게 성장하여 아버지를 찾겠습니까?"라고 고하니, 유인이 선뜻 마음을 돌리고 울면서 아들에게 "네 말이 참으로 옳다. 내가 살아 있으면 네가 성장하여 네 아버지를 찾을 수 있겠지만 내가 죽으면 너는 성장할 수 없고 네가 성장하지 못하면 네 아버지는 영영 찾을 수 있는 길이 없을 것이니 네 말이 참으로 옳다."라고 하였다.
이에 부지런히 길쌈하여 집안의 생계를 꾸렸는데 세시 명절이 되면 남편이 입을 새 옷을 만들어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고, 비록 채소일지라도 맛이 있으면 또한 찬장에 보관해 두고 기다렸다. 매일 조석으로 하늘에 기도할 때마다 목 놓아 슬피 우니 사람들이 차마 보지 못하였다.
찬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면 바람과 눈을 맞으며 뜰에 서서 "이런 때 남편이 객지에서 겪는 괴로움이 어떠할까?"라고 하였다. 평상시에는 따뜻한 곳에 거처하지 않고 배불리 먹지 않아 항상 자신에게 죄가 있는 것처럼 하였다. 남들 대할 때는 후하였고 빈궁한 사람에게는 더욱 마음을 썼으니 객지 생활하는 남편의 곤궁함을 상상하여 남에게까지 은혜가 미쳤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시부모의 기일에는 밤에도 눈을 붙이지 않았는데 몹시 연로해서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이는 진실로 효성으로 봉양하고 남은 정성이고, 또한 남편을 대신하여 공경을 더욱 지극히 한 뜻을 알 수 있다. 남을 만나 볼 때는 정답게 웃으며 이야기한 적이 없고, 본가의 지친(至親)은 만나 보기 드물고 어려운데도 역시 기뻐하는 뜻을 안색과 말에 드러내지 않았으니 이는 대개 남편을 그리워하는 한이 천성이 되어서 비록 기뻐할 만한 일을 보더라도 그것이 기쁜 일인지 스스로 알지 못한 것이다.
만년에 병이 심해지자 손자인 승옥(承玉)에게 말하기를, "옛날에 네 할아버지가 집에 돌아오지 않아 행적을 찾았으나 찾지 못했는데 내가 죽기로 맹세했으면서 죽지 않은 이유는 네 아버지가 장성하기를 기다려 끝내 할아버지를 찾게 하려고 해서였다. 그런데 네 아버지가 장성한 뒤 더욱 부지런히 찾아도 찾기가 더욱 요원해져서 마침내 초심을 저버릴 줄 누가 알았겠느냐. 아득한 천지에 이 한이 어찌 다하겠느냐. 지금 그 나이를 계산하고 타고난 체질을 헤아려 보면 전혀 살아 있을 리가 없다. 또 네 아버지는 이미 죽었고 나도 곧 죽을 것이다. 지금 이후로는 일이 궁하고 희망이 끊어졌으니 네 할아버지를 위해 상복을 입고 제사를 행하라. 또 마을 뒤에 제단(祭壇)을 쌓고서 그 곁에 나를 장사 지내고 세시마다 같은 날에 제사를 지내라."라고 하였다.
병자년(1936) 10월 17일에 졸(卒)하였으니 향년 87세이다. 마을 사람들이 놀라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현명한 부인이 서거하였다."라고 하였다. 정읍군(井邑郡) 고부면(古阜面) 죽산리(竹山里) 뒤쪽 산기슭 모좌(某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임공의 제단은 그 서쪽에 있다.
아, 유인은 이런 사변을 당하여 수절한 정절이 당나라의 동씨와 아름다움이 같았으나 남편이 돌아오고 돌아오지 않은 차이와 행운과 불행의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유인이 조석으로 하늘에 기도하고 몸은 따뜻한 곳에 거처하지 않고 배불리 먹지 않기를 50년 동안 하루처럼 지속한 일은 비단 동씨가 20년 동안 머리를 싸매고 남편을 기다린 것에 견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훗날 《여범》의 속편을 짓는 사람이 있다면 유인의 사적과 행실에 대해 마땅히 기록할 것이고, 고금의 평가 역시 장차 그 사이에서 저울질할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손자에게 일이 궁하고 희망이 끊어졌으니 이후에는 상과 제사를 치르고 부부의 묘소와 제단을 반드시 같은 곳에 마련하라고 명한 것은 변고를 만나 의를 얻고 시의에 따라 예에 부합하였으니 예와 의로 볼 때 유인의 식견 또한 높다. 마을 사람들이 칭한 '현명한 부인[賢媛]'이라는 말도 역시 자연스러운 공론임을 볼 수 있다.
아들은 재호(在鎬)이고, 딸은 김해(金海) 김사범(金士範)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승옥, 승언(承彦), 승연(承衍), 한봉(漢鳳)주 24)이고, 증손은 선동(善東)이다. 임승옥이 장차 묘갈을 세우려 하여 유인의 오빠의 손자인 최민열(最敏烈)에게 가장을 지어 주기를 부탁하고 함께 와서 묘갈명을 청하였다. 유인은 나에게 선군의 이모의 딸이다. 이 때문에 그 일을 익히 들었는데 지금 가장을 통해 더욱 상세한 내용을 알았기에 마침내 가장을 살펴본 다음 글을 완성하고 명(銘)을 이어 쓴다. 명은 다음과 같다.

두악의 서쪽 죽산의 남쪽이 斗嶽西兮竹山陽
현명하고 정절을 지닌 부인 최씨의 묘소라네 賢貞婦兮崔氏藏
후세를 감화하고 인륜과 강상 부지하였으니 風來世兮扶倫綱
사녀가 지나가면 이곳을 서성이리 士女過兮爲彷徨
주석 22)
당(唐)나라……않았다:가직언이 영남으로 귀양갈 적에 아내와 이별하면서 "생사를 기약할 수 없으니 내가 떠나면 당신은 나를 기다리지 말고 속히 재가하시오."라고 하였는데 동씨가 대답하지 않고 머리를 끈으로 묶은 다음 비단으로 감싸고서 가직언에게 "당신의 손이 아니면 비단을 풀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20년이 지난 뒤 가직언이 집에 돌아오니 동씨의 머리에 감싼 비단이 그대로 있었는데 가직언이 그 비단을 풀고 머리를 감으니 동씨의 머리가 모두 빠졌다. 《新唐書‧ 列女傳 ‧賈直言妻董》
주석 23)
왕 절부(王節婦):명(明)나라 때 사람으로 왕정중(王正中)의 아내인 유씨(劉氏)이다. 시집간 뒤 4년 만에 남편과 사별하였으나 평생 개가하지 않고 수절하였다. 《王節婦劉氏碑陰書》
주석 24)
한봉(漢鳳):문맥에 근거할 때 앞에 '外孫'이 빠진 듯하다. 우선 원문대로 번역하였다.
孺人崔氏墓碣銘【幷序】
婦人之損生立節, 謂之烈; 一心守節, 謂之貞。然人皆稱立節之烈, 而不知守節之貞爲難; 知守節於死訣之後者爲難, 而不知守節於生離之餘者亦難, 要非定論也。唐賈直言謫嶺南, 其妻董氏封髮以待夫歸, 二十年不施膏沐, 是乃生離之守節, 而王節婦載之於《女範》之書〈貞烈〉之篇, 與損生立節同科, 惟此爲論定矣。吾鄕有孺人全州崔氏, 文成公阿后, 判官、贈叅判德村希汀十世孫。考永模, 妣靈光金氏, 通政宅麗女。生以哲宗庚戌, 幼有異質, 及笄, 歸于平澤林公基兌。養舅姑以誠; 奉君子以敬, 閨門和肅, 一家大悅。戊子春, 林公有事, 出外而不還, 幷無音信, 孺人率其穉子四, 求不得, 乃絶穀欲死, 其子泣告曰: "母死, 子何以生長求父乎?" 孺人幡然回心, 泣謂子曰: "汝言良是。吾在汝長, 汝父可求, 吾死則汝無以長, 汝不能長, 則汝父永無可求之道, 汝言良是。"於是勤於紡績, 以爲家業, 歲時名節, 裁成夫子新衣, 以待其歸, 雖蔬菜, 有異味, 亦庋閣而待之。每日晨夕祝天, 涕泣悲咽, 人不忍見。風寒雨雪, 則露立于庭曰: "此時夫子, 客苦何如?" 平居不溫處不飽食, 常若罪戾在己。待人則以厚, 貧窮者尤加意焉。可見想像夫子旅瑣之困而惠及於人矣。舅姑諱辰, 夜不交睫, 隆老不解, 是固孝養餘誠, 而亦見代夫子, 益致其敬之意。見人未嘗笑語款洽, 本家至親, 稀見濶逢, 亦無喜意見於色辭, 蓋思念夫子之恨, 習與性成, 雖見可喜, 而自不知其爲喜也。臨年病革, 謂孫承玉曰: "昔年, 汝祖不還, 而求之未得也, 吾誓死而不死者, 欲待長成汝父, 俾竟求得, 夫孰知汝父旣壯, 求之愈勤, 而得之愈遠, 遂負初心哉? 悠悠天地, 此恨曷極? 今計其年壽, 料其稟質, 萬無生存之理。且汝父已亡, 吾將死矣。今焉而後, 事窮望絶, 爲汝祖服喪行祭, 又築壇里後, 葬我其傍, 歲時同日祭之。" 以丙子十月十七日卒, 享年八十七。鄰里驚嘆曰: "賢媛逝矣。" 葬于井邑郡古阜面竹山里後麓某坐原。林公祭壇在其西。嗚呼! 孺人遭此事變, 其守節之貞, 與唐之董氏齊美, 而其夫之歸與未歸、幸與不幸之異也。然孺人之晨夕祝天, 身不溫飽, 五十年如一日, 不但爲董氏封髮二十年之比, 則後有續編女範之書者, 於孺人事行, 宜有所處, 而古今品藻, 亦將有權度於其間矣。不寧惟是, 其命以事窮望絶, 而後行喪祭, 內外墓壇, 必於同所者, 處變而得義, 因宜而合禮, 禮義所在, 其見識亦高。鄰里所稱賢媛之稱, 亦見其爲自然之公論也。男在鎬, 女金海金士範。孫承玉、承彦、承衍、漢鳳, 曾孫善東。承玉將樹墓碣, 託孺人兄孫敏烈爲狀, 而偕來請銘。孺人於余爲先君從母之女, 以是稔聞其事, 而今因狀而益知詳, 遂按狀成文, 而繼之以銘曰: 斗嶽西兮竹山陽, 賢貞婦兮崔氏藏。風來世兮扶倫綱, 士女過兮爲彷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