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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4
- 묘갈명(墓碣銘)
- 증 숙부인 유씨 묘갈명 병서(贈淑夫人柳氏墓碣銘【幷序】)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4 / 묘갈명(墓碣銘)
증 숙부인 유씨 묘갈명 병서
과거 장릉(長陵) 정축년(1637, 인조15)과 갑신년(1644)주 13) 이후 증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조 참의 의촌(義村) 김남식(金南式) 공이 존주 대의(尊周大義)를 사모하여 고창현(高敞縣)에서 고부군(古阜郡)의 모조리(毛助里)로 이사하여 은거하니, 원근에서 숭정 처사(崇禎處士)라 부르고 공이 거처하는 곳을 모의촌(慕義村)이라고 일컬었다. 공의 부인인 증 숙부인 유씨는 부덕(婦德)을 갖춘 현명한 분으로 공의 청덕(淸德)을 도와 이루었으니, 모조는 숙부인의 기천리(淇泉里)주 14)이다.
유씨는 고흥(高興)의 대족(大族)으로, 가계(家系)는 영밀공(英密公) 청신(淸臣)에게서 나왔다. 건국 초기에 사직(司直) 저(渚)가 정읍(井邑)에서 고부로 이사하였다. 3세를 내려와 처사 호(滸)가 역학(易學)으로 영릉(寧陵 효종(孝宗))의 지우(知遇)를 받았으나 벼슬하지 않았으니 이 분이 유씨의 부친이다. 모친은 진주 강씨(晉州姜氏)로 주(珘)의 따님이다.
유씨는 천계(天啓) 계해년(1623, 인조1) 1월 9일에 태어났다. 아름다운 자질이 있고 가정의 가르침을 받들어 글에 능통하고 예를 배웠다. 장성해서 의촌공에게 시집을 갔는데, 공이 은거하여 스스로 폐인이 되어 독서하고 사람을 가르치는 것 외에는 달리 하는 일이 없었다. 숙부인이 집안일을 다스리면서 항상 내칙(內則)을 준수하여 윗사람을 받들고 아랫사람을 통솔하는 것이 모두 도리에 맞으니 종족이 칭송하였다. 공이 어버이의 상을 당해 여묘(廬墓)하면서 3년 동안 집에 머물지 않을 때는 더욱 삼가고 부지런히 하여 공으로 하여금 애도에 전념하고 집안일에 대한 염려를 끊게 하였다.
숙종(肅宗) 계해년(1683, 숙종9) 남편 상을 당했을 때 이미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였는데 상을 마칠 때까지 고기를 먹지 않았다. 만년에 두 아들이 모두 죽자 과부가 된 며느리와 아버지를 잃은 손자를 잘 보살펴 두 아들이 죽은 뒤의 일을 알맞게 처리하였다. 무인년(1698) 12월 5일에 졸(卒)하였으니, 집 뒤 자좌(子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의촌은 광산(光山)의 세가(世家)로 장영공(章榮公) 진(稹)의 후손이다. 선조의 덕행과 행적은 고창 전불산(殿佛山) 묘문(墓文)에 상세하다. 장남은 이성(履成)으로 호는 시은(市隱)이고, 우암(尤庵) 송 선생(宋先生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며, 효도로 정려(旌閭)되었다. 차남은 이수(履綏)이다. 딸은 함종(咸從) 어이중(魚吏重), 영광(靈光) 정문거(丁文擧)에게 시집갔다. 장남의 양자는 한광(漢光)이고, 딸은 전주(全州) 이명식(李命植), 부안(扶安) 김서(金墅)에게 시집갔다. 차남의 장남은 하광(夏光)이고, 한광은 백부(伯父)의 양자로 나갔다.
삼가 생각건대 옛날부터 임금과 대부(大夫)가 집과 나라를 다스려 종파(宗派)와 지파(支派)가 번창하고 국운이 영구한 데 이른 것은 대부분 후(后)와 부인의 내조로 말미암아 할 수 있었다. 지금 의촌이 살았던 세대와 300년이 떨어졌는데도 자손이 더욱 번창하고 행의(行義)를 서로 계승하여 성대하게 고부 남쪽의 명망 있는 종족이 된 이유가 어찌 숙부인의 선과 아름다움이 공과 나란하여 하늘의 복을 받아서가 아니겠는가. 이는 대서특필하여 세상에 고할 만하다.
나는 김씨와 평소 친한 사람이 많아 숙부인의 행실과 사적(事跡)을 상세히 알고 있다. 지금 묘갈을 세우는 날에 그 현손(玄孫)인 인일정(引逸亭) 김성은(金性溵)이 지은 묘지(墓誌)를 살펴보고 삼가 명(銘)을 지어 일을 돕는 의리를 담는다. 묘갈문을 청한 사람은 9세손 김재봉(金在鳳)과 김재룡(金在龍)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아, 의옹이여! 嗟義翁兮
이런 현처(賢妻)를 두었으니 有是賢齊
백란과 덕요주 15)가 伯鸞德耀
광채를 서로 비추었네 其光相照
옥산의 남쪽은 玉山之陽
명철한 부인의 묘소이니 哲媛之藏
후손이 둘러싸 살면서 雲仍環居
정성으로 제사지낸다오 蒸嘗虔且
산 높고 물 깊으니 山高水深
남은 은택 끊어지지 않았네 餘澤不斬
먼 훗날 천 년 뒤에 有來千齡
어찌 나의 명을 보지 않겠는가 盍視我銘
- 주석 13)정축년, 갑신년
- 정축년은 인조가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청(淸)나라 군대에 포위를 당해 항복하여 삼전도(三田渡)에서 신하의 예를 올린 해이고, 갑신년은 명(明)나라가 청나라에 멸망당한 해이다.
- 주석 14)
- 기천리: 친정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시경(詩經)》 위풍(衛風) 〈죽간(竹竿)〉에 "천원이 왼쪽에 있고 기수는 오른쪽에 있도다. 여자가 시집감이여, 형제 부모를 멀리 하였도다.[泉源在左 淇水在右 女子有行 遠兄弟父母]"라는 구절에서 유래하였다.
- 주석 15)
- 백란과 덕요:백란은 후한(後漢) 양홍(梁鴻)의 자이고, 덕요는 양홍의 아내인 맹광(孟光)의 자이다. 양홍은 벼슬하지 않고 맹광과 함께 패릉산(霸陵山)에 들어가 농사와 길쌈을 업으로 삼아 지냈는데 부부가 서로 공경하여 예가 있었다. 《後漢書‧ 逸民傳 梁鴻》
贈淑夫人柳氏墓碣銘【幷序】
往在長陵丁丑甲申之後, 贈通政大夫、吏曹叅議義村金公南式, 慕尊周大義, 自高敞縣隱居于古阜郡之毛助里, 遠近號以崇禎處士, 稱其居爲慕義村。而其配贈淑夫人柳氏, 內範之賢, 助成淸德, 毛助, 淑夫人淇泉里也。柳爲高興大族, 系出英密公淸臣。國初, 司直渚自井邑移于古阜。三傳而處士滸, 以易學受知寧陵而不仕, 是其考也。妣晉州姜氏, 珘女。生于天啓癸亥正月九日。有美資承庭訓, 通書學禮。長而歸義村公, 則公遯而自廢, 劬書誨人, 外無餘事。淑夫人理家, 動遵內則, 奉先率下, 咸得其道, 宗族稱頌。及公遭艱廬墓, 三年不家, 則益致謹勤, 俾公專哀斷家慮。肅宗癸亥, 當晝哭時, 已望七, 而終喪不肉。晩年, 二子俱歿, 撫寡媳孤孫, 處後事不失宜。卒于戊寅十二月五日, 葬于家後子原。義村, 光山世家, 章榮公稹後。先德事行, 詳在高敞殿佛山墓文。男長履成, 號市隱, 尤庵宋先生門人, 以孝旌閭。次履綏。女適咸從魚吏重、靈光丁文擧。長房繼男漢光, 女全州李命植、扶安金墅。次房男長夏光, 漢光出系伯父。竊惟從古君大夫治其家國, 以致宗支熾昌, 運祚永長者, 多由后夫人內贊而得之。今距義村之世爲三百年, 而子姓彌蕃, 行義相承, 菀爲阜南望族者, 豈非淑夫人之媲善匹美而受天慶福乎? 是可大書而告諸世矣。余於金氏, 多親雅素, 詳淑夫人行治, 今於樹碣之日, 按其玄孫引逸亭性溵所撰誌, 而敬爲銘, 以附相役之義。請文者九世孫在鳳、在龍也。銘: 嗟義翁兮! 有是賢齊。伯鸞德耀, 其光相照。玉山之陽, 哲媛之藏。雲仍環居, 蒸嘗虔且。山高水深, 餘澤不斬。有來千齡, 盍視我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