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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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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헌 김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惺軒金公墓碣銘【幷序】)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3 / 묘갈명(墓碣銘)
성헌 김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
성헌처사 김공의 휘는 영우(榮禹), 자는 경범(敬範)으로, 신사년(1941) 12월 2일 남원 백파방 내기리의 자택에서 돌아가셨는데, 태어난 고종 신미년(1871) 5월 7일에서 향년 71세로, 본리 오현의 간좌의 언덕에 장사지냈다.【후에 마을 앞 산기슭 인좌의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6년이 지나 사자(嗣子) 만철(萬喆)이 염와(念窩) 안공이 지은 행장을 들고서 7사(舍, 30리)의 거리를 달려와 나에게 묘갈명을 요청하였다. 나는 실로 글을 잘 짓지 못하니 어찌 감당하겠는가. 그러나 나는 공에게 화수계의 친함이 있으니 금란 같은 사귐주 112)이기 때문에 명을 짓는 것이지 글을 잘해서가 아니니 그렇다면 부끄러울 것이 없다.
삼가 생각건대 부녕(扶寧, 부안) 김씨는 실로 신라 경순왕의 태자인 일(鎰)에서 나왔는데, 위로 역사를 논하는 자들은 '동경의 의열이며 북지의 영풍'주 113)이라고 태자를 칭한다. 고려시대에 들어서 평장사 문정공(文正公) 휘 구(坵)는 문장과 도학이 당대의 으뜸이었는데, 불교를 배척하고 정도(正道)를 붙들어 세웠으며 오랑캐를 물리치고 군주를 높였다. 고려가 망할 때 군사 휘 광서(光敘)는 새나라에 신하가 되지 않겠다는 큰 절개를 지켜 관향인 부안으로 내려와 은거하였다. 조선에 들어와 임진왜란 때 문과에 합격하여 군수로 이조판서에 추증된 충경공(忠景公) 휘 익복(益福)은 임금의 일에 목숨을 바쳤다. 대개 윗대의 조상 이래로 한 줄기 정기가 공에게 전해졌으니, 본성은 강직하고 자질은 곧아서 나약하고 유순하여 남에게 굽히는 모습이 없었으며, 어깨를 웅크리며 아첨하는 것을 보면 차마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였고 그 얼굴에 침을 뱉어주고자 하였는데 참으로 행장에서 말한 것처럼 그러한 일이 있었으니, 어진 이는 집안 가문의 전통과 관계가 없다는 것이 정론이 된다는 것을 나는 믿지 못하겠다.
충경공의 손자로 문과에 급제하여 군수를 지낸 휘 지성(之聲)은, 진사로 교관에 추증된 휘 연(沇)의 아들이며, 백부로 인해 교관에 추증된 휘 유(瀏)의 후손인데, 이 분이 공의 10대조이다. 휘 구감(九鑑), 한석(漢奭), 경상(璟相), 형술(瀅述)이 공의 고조, 증조, 조부, 부친으로, 모두 학문과 행실이 뛰어났다. 모친은 성산 이씨, 흥성 장씨인데, 공은 장씨 소생이다. 어려서 장난을 좋아하지 않았고 꾸미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니, 사람들이 특출하다고 여겼다. 장성하여 부모를 모실 때 그 마음을 매우 기쁘게 해드렸고 아우를 사랑함에 그 화락함을 극진히 하였으며 병든 여동생을 불쌍히 여겨 의식을 절약하여 밭과 집을 주었다. 친구들이 찾아와서 신발이 항상 가득하였으며, 간혹 음식이 떨어지기도 하였지만 집안 식구들도 또한 기쁘게 맞이하였다. 마을 일을 바르게 처리했는데 형편이 좋지 않아 곤욕을 겪다가 살 곳을 잃은 자가 있게 되자, 여론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극력 구제하였다.
정유년(1897)에 입재(立齋) 송근수(宋近洙),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심석재(心石齋) 송병순(宋秉珣) 세 선생을 찾아뵈니, 연재가 이름과 자를 지어주면서 권면하였다. 계묘년(1903)에 보리농사가 흉년이 들어 큰 빚을 지게 되자 몸소 곡식을 사왔으니, 한 마을이 그에 힘입어 소생하게 되었다. 갑진년(1904)과 정미년에 연달아 모친상과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슬픔과 예절을 모두 지극히 하여 거상(居喪)을 잘한다는 칭송을 받았다. 기유년(1909)에 진사 고광수(高光洙)가 의병에 가담하였다가 일은 실패하여 숨어 다녔는데, 일본 병사들이 대대적으로 수색하고 집을 불 질러 버리는 등 그 재앙을 헤아릴 수 없었다. 그의 온 집안 식구들이 와서 몸을 맡기자 공이 받아주니, 사람들이 대단히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공은 끝내 동요하지 않았는데, 마침내 아무 일도 없었다. 병인년(1926)에 여러 친족들과 풍곡(風谷)의 충경공(忠景公) 재실을 중수하여 자못 웅장하였는데, 실제로는 공이 홀로 애써서 완성한 것이다.
임신년(1932)에 금산 단향소(壇享所)의 여러 사람들이 단을 헐어버리고 사원을 건립하려 하였는데, 갹출한 돈이 흘러넘쳐 일이 너저분하고 더럽게 되었다. 공이 편지를 보내 그만두게 하였는데, 따르지 않자 이에 금산으로 가서 충경공의 위패를 가지고 돌아와 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원이 철폐되니 사람들이 공의 밝은 식견과 정밀한 의리에 감복하였다. 병자년(1936)에 돈암서원(遯巖書院)의 향사에 헌관이 되었는데, 제사를 마치자 여러 사람들이 휴정서원(休亭書院)과 충곡서원(忠谷書院)을 중건하자는 의논이 매우 강하게 일어나서 일이 곧 시작하게 되었는데, 공이 정색하면서 "서원을 철폐한 것은 이미 임금의 명이 있었는데, 서원을 설립하는 것은 다만 임금의 명이 없이도 행할 수 있습니까. 사람의 마음이 이미 편안하지 않으면 신도 또한 흠향하지 않으니, 그 이치는 참으로 그렇습니다."라 하였으며, 끝맺으면서 '태산이 임방만 못하는가.'주 114)라는 말을 거론하니, 일이 마침내 수그러들었다.
정축년(1937)에 금강산을 유람하였는데, 태자의 묘가 비로봉 아래에 있다는 소리를 듣고 술과 과일을 마련하여 성묘하고 돌아왔다. 제전(祭田)을 두어 길이 제사지내 후손의 정성을 다하자는 뜻으로 부안의 종중에 가서 상의하였는데, 의논이 통일되지 않아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중년 이후로 때때로 유명한 산과 아름다운 강, 큰 도회지를 유람하며 가슴속의 답답함과 강개함을 풀어내니 티끌세상 너머로 날아오르는 생각이 일었다. 비록 본성이 빈객을 좋아하여 사람들이 동도주(東道主)주 115)라 칭하였지만, 그러나 널리 대중을 사랑해도 어진 이를 더 가까이 했으니, 권탁(權度), 약와(約窩) 정순만(鄭淳萬), 염와(念窩) 안치수(安致洙), 조재(操齋) 양기묵(梁箕默) 등이 막역한 벗이다.
부인은 함안 조씨 감역 인규(仁奎)의 따님으로, 어계(漁溪) 려(旅)의 후손이다. 아들은 만철(萬喆)과 백철(百喆)이며, 딸은 창원 정해수(丁海洙), 전주 이기종(李起宗), 전주 이기돈(李起墩)에게 시집갔다. 만철의 아들은 종수(鍾秀)이며, 딸은 풍천 노상우(盧相佑), 죽산 박환주(朴煥柱), 양천 허즙(許楫)에게 시집갔다. 백철의 아들은 종옥(鍾玉), 종숙(鍾淑), 종우(鍾宇), 종욱(鍾旭)이다. 해수의 아들은 상렬(相烈), 상섭(相燮), 상종(相鍾)이다. 기종의 아들은 강원(康垣), 강훈(康勳), 강현(康鉉)이다. 기돈의 아들은 강화(康化)이다.
오호라! 공은 사람의 사특함을 미워하여 장차 자신을 더럽히는 듯 하며, 사람의 어려움을 급히 도와 화복에 동요되지 않았다. 강포한 이를 억누르고 약한 이를 붙들어 주었으며 억울한 이를 펴주고 원통함을 펼쳐주었으니, 공의 소문을 듣는 자는 유사에게 올바름을 하소연하려 하지 않았다. 공은 돈암서원에서 주장을 제기하여 두 서원의 중수를 저지하였으며, 금산에서 홀로 깨끗하여 선조의 위패를 받들어 돌아왔다. 대개 정직하고 공평하며 정밀하고 확고하니, 총결하건대 공은 의를 숭상하는 사람이라 하겠다. 어진 이를 좋아하여 천리를 멀다 여기지 않으며 선현을 존모하여 아주 먼 세대까지 추급하였고, 대중을 구원하려 가뭄에 몸소 곡식을 사왔으며 손님을 대접함에 자주 쌀독이 비어도 기쁜 마음을 다하였으니, 또한 어찌 그리 마음이 따뜻하고 어진 사람이란 말인가. 내가 그러므로 "한갓 강직하고 굳센 자질만 알고 마음 씀씀이의 어짊을 알지 못하는 자는 공을 깊이 아는 자가 아니다."라고 한다. 이에 명을 짓는다.
오현의 소나무 어찌 그리 우뚝한가 烏峴之松何亭亭
군자의 곧음과 견고함이 함께 하고,君子貞固與幷
백파의 대나무 어찌 그리 무성한가白坡之竹何猗猗
군자의 덕과 선이 그와 같아라. 君子德善如之
내가 비석의 시를 짓나니 我述銘詩
흥이면서 비로다. 興而比而
천백 년 뒤에도有來千百
과객은 반드시 예를 표하리라.過者必式
- 주석 112)금란 같은 사귐
- '금란(金蘭)'은 금란지교(金蘭之交)의 준말로, 지극히 친밀한 교분을 비유한 말이다. 《주역》계사(繫辭)에 "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하니 그 날카로움은 쇠를 끊는다. 마음을 같이한 말이 그 향기가 난초 같구나." 하였다.
- 주석 113)동경의……영풍
- 이전 금강산 유기를 보면 바위에 이 글이 새겨져 있다는 기록이 많다.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동경은 경주를 말하면 북지는 금강산을 가리킨다.
- 주석 114)태산이 임방만 못하는가
- 노(魯)나라 계씨(季氏)가 참람하게 태산에 여제(旅祭)를 지내려 하는데도 그의 가신인, 공자의 제자 염유(冉有)가 말리지 못하자 공자는 "일찍이 태산이 임방보다도 못하다고 생각하는가?〔曾謂泰山不如林放乎〕"라고 하면서 염유를 나무랐는데, 임방이라는 제자가 공자에게 예의 근본을 물은 일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 주석 115)동도주(東道主)
- 정해진 곳에서 정해진 곳으로 다니는 길손을 대접하여 묵게 하는 주인.
惺軒金公墓碣銘【幷序】
惺軒處士金公諱榮禹字敬範, 以辛巳十二月二日歿于南原之白坡坊內基里舍, 距其生高宗辛未五月七日, 壽七十一, 葬于本里烏峴之艮原.【後移窆于村前麓寅坐之原】 越六年, 嗣子萬喆, 抱念窩安公撰狀, 走七舍, 謁墓銘于余. 余實不文, 其何敢焉. 然於公親惟花樹契, 則金蘭以是爲銘, 而不以文, 則可無愧. 窃惟扶寧之金, 寔出新羅敬順王太子諱鎰, 尙論者以東京義烈北地英風稱太子矣. 在麗, 平章事文貞公諱坵, 文章道學冠世, 而斥佛扶正, 劾胡尊主. 麗之亡也, 郡事諱光敘, 守罔僕大節, 歸隱貫鄕. 本朝龍蛇之亂, 文郡守贈吏判, 忠景公諱益福, 死王事. 蓋自上祖以來, 一脉正氣, 傳至于公, 則性剛質直, 而無巽軟骩骳之熊, 見人阿好脅肩, 不忍正視, 欲唾其面者, 誠有如狀文所稱, 而賢者不係世類, 吾不信其爲定論也. 忠景公孫, 文郡守諱之聲, 以進士贈敎官諱沇子, 爲伯父贈敎官諱瀏後, 是爲公十世. 諱九鑑、漢奭、璟相、瀅述, 其高、曾、祖、禰, 俱有文行. 妣, 星山李氏、興城張氏, 公, 張氏出. 幼不嬉戲, 恥冶飾, 人異之. 及長事親, 盡怡愉, 愛弟極湛樂, 矜恤病妹, 縮衣食以給田宅. 知舊來者, 戶屨常滿, 或至匱乏, 家衆亦欣然. 鄕里中, 有事直而勢屈, 及困頓失所者, 以言論風力所及, 極救之. 丁酉, 謁宋立齋、淵齋、心石三先生, 淵翁賜名與字而勖之. 癸卯, 麥凶, 負鉅債, 躬行貿穀, 一里賴活. 甲辰丁未, 連遭內外艱, 情文備至, 有善居喪之稱. 己酉, 高進士光洙赴義旅, 事敗隱避, 日兵大索焚家舍, 禍不測. 其全家來投, 公受之, 人爲之大慴而終不動, 竟無事. 丙寅, 與諸族重修風谷忠景公丙舍, 頗傑構也, 而實賢勞而成之. 壬申秋, 錦山壇享所諸人, 毁壇建祠, 醵金狼藉, 事甚慢瀆. 公以書止之, 不從, 乃往錦山, 奉忠景公位牌而還. 未久, 廢享, 人服公見明義精. 丙子, 爲遯巖院祀獻官, 祀畢, 諸人以休亭、忠谷兩院, 重建議甚壯, 而事將就, 公正色曰 : "撤院, 旣有君命, 則建院, 獨不有君命而行之乎. 旣不安人心, 則神亦不享, 其理固然." 終擧'泰山不如林放'之言, 事遂寢. 丁丑, 遊金剛山, 聞太子墓在毘盧峰下, 具酒果展省而歸. 以置田永祭盡裔孫誠力之意, 往商于扶安宗中, 議不一未成. 自中身後, 時遊名山韻水, 通都大邑, 敘胸中之牢騷慷慨, 飄然有塵表想. 雖性好賓客, 人稱東道主, 然泛愛親仁, 亦有權度、鄭約窩淳萬、安念窩致洙、梁操齋箕默, 其莫逆也. 配, 咸安趙氏監役仁奎女, 漁溪旅后. 男萬喆、百喆. 女, 昌原丁海洙、全州李起宗、全州李起墩. 萬喆男, 鍾秀, 女, 豊川盧相佑、竹山朴煥柱、陽川許楫. 百喆男, 鍾玉、鍾淑、鍾宇、鍾旭. 海洙男, 相烈、相燮、相鍾. 起宗男, 康垣、康勳、康鉉. 起墩男, 康化. 嗚呼! 公疾人之邪而若將浼焉 ; 急人之難而不動禍福, 抑强扶弱 ; 直枉伸屈, 聞其風者, 不欲就直于有司. 倡言於遯巖而折兩院之復設 ; 獨淸於錦山而奉還先牌, 蓋其正直公平精確, 總之爲尙義人也. 至於好賢而不遠千里 ; 慕先而追及遙世, 恤衆而親貿穀於大無 ; 待賓而盡歡情於屢空者, 又何其溫然仁人也. 余故曰 : "徒知天賦之剛毅, 而不知用心之惻怛者, 非深悉公者也." 乃爲之銘曰 : "烏峴之松何亭亭, 君子貞固與幷. 白坡之竹何猗猗, 君子德善如之. 我述銘詩, 興而比而. 有來千百, 過者必式."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