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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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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묘갈명(墓碣銘)
  • 긍재 김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兢齋金公墓碣銘【幷序】)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3 / 묘갈명(墓碣銘)

자료ID HIKS_Z038_01_B00001_001.023.0001.TXT.0021
긍재 김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
우리 부녕(扶寧, 부안) 김씨는 고려 시대에는 문정공(文正公, 金坵)이 간신을 물리치고 올바른 도를 붙들어 잡았으며, 충선공(忠宣公, 金汝盂)이 공자묘를 설립하였으며, 군사공(郡事公, 金光敍)이 조선에 신하가 되지 않고 자정(自靖)하였다. 이로부터 대대로 바른 학문과 올바른 의리로 선대의 아름다움을 계승하여주 111) 세상에 알려진 사람이 많았다. 가까운 옛날에 이르러서도 또한 학문과 행의로 이름이 드러난 자들이 그치지 않았는데, 긍재거사 휘 방술(邦述), 자 양선(良善)이 그 한 사람이다.
공은 군사공의 증손인 휘 직손(直孫)은 조선에서 현달하였는데, 문과에 합격하여 첨정을 지냈으며 도승지에 추존되었으며, 율곡선생이 신도비를 지었다. 기묘명현인 옹천(甕泉) 휘 석홍(錫弘), 문과에 합격하여 사인을 지낸 청수재(淸修齋) 휘 서성(瑞星), 판결사를 지낸 휘 의복(義福), 장사랑을 지낸 휘 양(壤)은 승지공 아래의 4대이며 공의 10대조 이상이다. 부친의 휘는 낙진(洛鎭)이며, 모친은 의성 김씨 예운(禮運)의 따님이다.
공은 고종 정묘년(1867) 8월 16일에 부안의 조촌(棗村)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물고기 잡고 땔나무하면서 맛있는 음식을 올리고 남은 힘으로 학문에 열중하여 성심으로 깨우쳤다. 갑오년(1894)에 변산에서 학자들에게 가르침을 주고서 내려올 때 동비(東匪)들이 창궐하여 그 세력이 대단히 두려울 정도였는데, 공은 의연하게 올바름을 지켰으며 또한 엄히 배척하니, 사람들이 그에 힘입어 물들지 않았다. 경자년(1900)에 부친의 명을 받고 간재(艮齋) 전 선생에게 폐백을 올리고 배알하니 선생이 그릇으로 여겨 아끼면서 뜻을 세우고 마음을 다스리는 요점을 알려주었다. 이에 공이 스승의 가르침을 받들어 '성인을 배워서 이를 수 있다.'라 생각하고 글을 숙독하고 깊이 생각하였으며, 스승에게 의심난 것을 물어서 깨우치지 않으면 관두지 않았다. 족형인 성암(成菴) 김연술(金淵述), 중당(中堂) 박수(朴銖)와 함께 서로 학문의 도움을 주며 발전하였는데, 강론한 것은 대부분 심성, 이기(理氣)의 오묘함과 수기치인의 방법이었다.
선생이 공의 학문이 깨우친 것이 있음을 알고서 편지로 묻기를 "《중용》 첫머리의 첫 글자인 '천(天)'을 사람에게 있어서 마땅히 성(性)으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마땅히 심의 주재로 보아야 하는가."라 하니, 공이 답서를 올려서 "이 천(天)자는 마땅히 상제(上帝)로 보아야 하니, 하늘의 주재자를 제(帝)라고 하니, 제는 바로 하늘의 신입니다. 위로 리(理)에서 근본하고 아래로 기(氣)를 운용하여 형체를 만드는 자로, 이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심군(心君)과 같은 위분(位分)인데, 지극히 신묘하고 지극히 허령하여 뭇 이치를 오묘하게 운용하여 만물을 주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리를 위주로 한다고 여긴다면 괜찮지만 곧바로 리라고 여긴다면 옳지 않습니다."라 하였다. 선생이 이에 "논한 바가 매우 좋다."라 하였다. 이에서 공의 조예가 깊음을 알 수 있으며 선생에게 인정을 받은 한 가지 예임을 볼 수 있다.
임술년(1922)에 선생이 돌아가시자, 3년의 심상(心喪)을 행하였다. 오진영이란 자가 선생이 일찍이 왜놈에게 인가를 받아 원고를 간행하라는 말씀을 하였다고 거짓을 둘러대니, 공과 많은 선비들이 오진영의 죄를 성토하고 스승의 의리를 밝혔다. 이로 인해 오진영의 무리에게 원수처럼 대우받았으나 후회하지 않았다. 이윽고 세상의 풍조가 더욱 변하고 사람들의 마음이 더욱 투박한 것을 보고 크건 작건 세상의 모든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문을 닫아걸고 손님을 사절하며 자신을 깨끗이 하고 의리를 지켜 문밖으로 나서지 않은 것이 10년이 되었다. 만년에 손수 《사례의절(四禮儀節)》을 정하여 자질(子姪)들에게 주면서 "현재는 갓과 신발의 자리가 뒤집어지고 예의가 땅을 쓴 듯 사라져서 사람이 짐승으로 변하였다. 내가 병을 무릅쓰고 이것을 뽑아내었는데, 그 의도가 어찌 쓸데없이 그렇게 했겠느냐. 너희들은 그 뜻을 잘 알아야 한다."라 하였다.
임신년(1932) 11월 24일에 수를 누리다가 돌아가셨는데, 임종할 때 붙잡아 일으키라고 명하고서 세수하고 머리 빗고 의관을 정제하고서 누웠으니 평소 올바르게 수양함을 알 수 있다. 상서면 남성동의 선영 아래 유좌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전주 이씨 참봉 석환의 따님이다. 외아들을 두었으니, 형직(炯直)이다. 세 딸은 전주 최수홍(崔秀洪), 고부 이병용(李炳湧), 장지평(張志評)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정호(禎虎), 정룡(禎龍), 봉철(鳳喆)이다. 손녀는 전의 이명호(李明鎬)에게 시집갔다. 외손은 최병학(崔秉學), 이 아무개이다.
공은 충후함으로 본성을 삼고 온자하고 너그러움으로 자질을 이뤄 가난함에도 부모가 그의 효성을 편안히 여기고 늙어서는 거상함에 매우 슬퍼하였다. 형을 섬길 때 사랑과 존경을 모두 갖추어 늙어서도 더욱 지극하였다. 친척을 한결같이 성의로써 상대하여 말하기 전에 이미 신뢰가 있었다. 후진들을 이끌어서 차근차근 자신에게 절실하고 가까운 말로 깨우쳐서 쉽게 이해하고 즐겨 따르게 하니 성취한 자들이 많았다. 성정이 탄이(坦夷)하여 일찍이 말을 빨리하거나 낯빛을 갑자기 바꾸지 않았으며, 또한 득실을 개의치 않았다. 일찍이 밤에 솥과 그릇, 취사하는 도구 등을 잃어버렸는데 다음날 아침 가족이 공에게 고하기를 "아시는 것이라곤 강학을 그치지 않는 것으로, 평생 염개(廉介)를 절로 드시니 타인에게 돈을 빌리지 않겠습니다."라 하자, "지금 없어졌다고 해도 후에 어찌 반드시 보답하지 않으리라 확신하겠느냐. 굶주림과 추위를 참는 것이 더 나음만 못하다."라 하였다. 대개 공의 평생을 살펴보면 대단히 명석하고 염결하며 용단이 있는 군자라고 하겠다. 비록 그 자질이 아름다워 참으로 그러한 것이 있지만 이기(理氣)의 변석은 원두까지 보았고 송백의 절조는 만년의 절개가 더욱 매서웠으니, 삼십년 학문의 공을 속일 수 없다. 오호라! 이러한 내용은 모두 기록할 만하니, 묘 옆 비석에 새겨서 형직의 요청에 부응한다. 명은 다음과 같다.

부안의 고을에 維扶之鄕
대대로 군자라 칭한 가문 있었네.世稱君子
공의 어짊은維公之賢
실로 그 아름다움에 부합하여라. 實副厥美
안자는 자주 굶주렸으며 維顔屢空
증자는 실천하였는데,維曾實履
오직 공은 그것을 배웠나니維公學之
이에 어질게 되었도다.斯其賢爾
남성의 골짜기는維洞南星
군자를 모신 곳이라.君子藏只
후대 사람들은維後之人
반드시 이곳에서 예를 취하리라.必式于此
주석 111)선대의 아름다움을 계승하여
승무(繩武)와 '제미(濟美)'는 모두 후손이 전대의 업적을 계승한다는 의미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문공(文公) 18년 조에 "선대의 미덕을 계승하여, 그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았다.〔世濟其美 不隕其名〕" 한 데서 나왔다.
兢齋金公墓碣銘【幷序】
吾扶寧之金, 在麗, 文貞公斥邪扶正, 忠宣公創設聖廟, 郡事公罔僕自靖. 自是以後, 世以正學高義, 繩武濟美, 多聞人焉. 至于近故, 亦以學問行義著名者, 蓋不乏人, 兢齋居士諱邦述字良善, 其一也. 郡事公曾孫, 諱直孫, 顯于本朝, 文科僉正, 贈都承旨. 栗谷先生撰神道碑. 己卯名賢甕泉諱錫弘, 文科舍人淸修齋諱瑞星, 判決事諱義福, 將仕郞諱壤, 承旨公以下四世, 而公之十世以上也. 考諱洛鎭, 妣義城金氏禮運女. 公以高宗丁卯八月十六日, 生于扶安之棗村. 家甚貧, 漁樵以供甘旨, 餘力學文, 以誠得之. 甲午, 敎授學者於邊山, 下時, 東邪猖獗, 勢甚可畏, 公毅然守正而又嚴斥, 人多賴而不染. 庚子, 奉親命, 贄謁艮齋田先生, 先生器重之, 告以立志治心之要, 公自承師敎, 謂'聖人可學而至', 熟讀潛思, 質疑師門, 不得不措. 與族兄成菴淵述、朴中堂銖, 麗澤相長, 所講皆心性理氣之奧, 修己治人之術也. 先生知公學有所得, 以書問之曰 : "《中庸》開首第一字, 在人則當以性看耶, 抑當以心之主宰看耶." 公上答曰 : "此天字, 當以上帝看, 而天之主宰曰帝, 則帝乃天之神也. 上以本於理, 下以運氣而成形者, 此與在人之心君, 同一位分, 則至神至靈, 妙衆理宰萬物者也. 故謂是理爲主則可, 直以爲理則未可也." 先生曰 : "所論甚善." 此爲公造詣之深, 而見許師門之一端也. 壬戌, 先生沒, 行心喪三年. 有吳震泳者, 誣先生以曾有出認刋稿之敎, 公與多士, 討震罪明師義, 以此見讐於震黨而靡悔. 旣而見世風益變, 人心益渝, 知世間一切事, 若大若小, 皆不可爲, 則杜門謝客, 潔身守義, 足不出戶外者, 爲十年矣. 晩年手定《四禮儀節》, 授子姪曰 : "見今冠屨倒置, 禮義掃地, 人化爲獸. 吾之力疾抄此, 其意豈徒然哉. 汝等識之." 以壬申十一月二十四日考終, 屬纊時命扶起, 盥櫛衣冠而臥, 可見平日養正也. 葬于上西面南星洞先塋下酉坐原. 配, 全州李氏叅奉碩煥女. 生一男, 烔直. 三女, 適全州崔秀洪、古阜李炳湧、張志評. 孫, 禎虎、禎龍、鳳喆. 女, 適全義李明鎬. 外孫, 崔秉學、李■■也. 公忠厚爲性, 慈諒成質, 貧窮而親安其孝 ; 耆艾而居喪甚慽. 事兄愛敬俱備, 老而愈至. 處宗族一以誠意, 信在言前. 引接後進, 諄諄諭以切近之言, 使之易入而樂從, 故多所成就. 胸懷坦夷, 曾無疾言遽色, 亦不以得失介意. 嘗夜失食鼎器皿爨具, 明朝家人以告公曰 : "知之講學不輟, 平生廉介自食, 不請債於人." 曰 : "今旣無有, 後安可必報. 不如忍飢耐寒之爲愈." 蓋跡公始終, 可謂善明廉斷君子人也. 雖其資質之美, 固有然者, 而其理氣之辨, 有見於源頭 ; 松柏之操, 彌厲乎晩節. 則三十年學問之力, 有不可誣者矣. 嗚呼! 是皆可書也. 俾刻于墓道, 以副烔直之請. 銘曰 : "維扶之鄕, 世稱君子. 維公之賢, 實副厥美. 維顔屢空, 維曾實履. 維公學之, 斯其賢爾. 維洞南星, 君子藏只. 維後之人, 必式于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