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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3
  • 묘갈명(墓碣銘)
  • 위재공 김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危齋金公墓碣銘【幷序】)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3 / 묘갈명(墓碣銘)

자료ID HIKS_Z038_01_B00001_001.023.0001.TXT.0020
위재공 김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
옛날 우리 선사 구산 전 선생의 문하에는 국중에서 배우러 온 선비들이 무려 천으로 그 수를 헤아렸는데, 다들 순수하고 진실되며 성실하고 근면하다는 똑같은 말로 위재 김공을 칭송하였다. 선생께서도 또한 일찍이 "문백(文伯)은 대단히 정성스럽다."라고 하였으며, 또다시 "문백은 이치를 공변되고 올바르게 보아 마음 씀이 진실되니 여러 제자들에게서 찾아보아도 많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 하였으니, 이 말에서 공을 알 수 있다.
공의 휘는 병주(炳周)로, 문백은 자이다. 경주 김씨는 고려 말 충신 판서 충한(沖漢)이 현달한 조상이다. 본조에 들어와서 순절하여 참판에 추증된 효남(孝男)이 공의 10대조이다. 증조는 치태(致泰)인데, 효성으로 교관에 추증되었다. 조부는 홍두(洪斗)이다. 부친은 석환(錫桓)이며, 모친은 벽진 이씨 의준의 따님이다. 고종 기사년(1869) 11월 20일에 임실현 도인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정성스럽고 독실하게 부모를 섬겨 뜻과 존체를 잘 받들어 봉양하였다. 계사년(1893)에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대단히 슬퍼하면서도 예절에 맞게 하였다. 10년이 지나 부친상을 당하여서도 또한 그러하였는데 슬픔은 더욱 심하여 수염과 머리카락이 모두 하얗게 새었다. 서른 살에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실제 학문에 종사하였다.
신축년(1901)에 처음으로 전 선생을 배알하였는데, 살림이 대단히 어려워 농사를 지으면서 책 읽기를 3년 하였는데 더욱 분발하고 감내하니, 선생이 가상하게 여겨 그 집을 위재(危齋)라고 명명하고 〈위설〉주 106)을 지어 주었다. 그 내용은 인심(人心)은 지극히 위태로우니 항상 위태롭게 여기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였다. 일찍이 선생이 묻기를 '야기(夜氣)는 무엇인가.'라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기질로 본래 청수한 기입니다."라 하니, 선생이 그렇다고 하였다. 인하여 기를 밝히는 것이 이치를 밝히는 뜻에 대하여 말하면서 권면하니, 공이 깊이 체득하고 힘써 행하였다. 선생이 평소 말한 소심(小心)으로 성(性)을 받든다든 것과 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배척한다는 말 등 수 백 마디를 기록하여 《문사록(聞斯錄)》이라고 명명하고 때때로 보면서 자신을 돌이켜보았다. 스승 섬기기를 부모님 섬기는 것처럼 하였으니, 정미년(1907) 겨울에는 10사(舍, 30리) 거리인 공산까지 쌀을 짊어지고 날랐으며, 기유년과 경술년에는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절해의 고도에서 선생을 모셨다. 선생이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심상(心喪)을 하였으며, 설날에는 신위를 차려놓고 곡하였다.
스승 원고의 간행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자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 영남에 모였는데, 마침 호남에 인가를 받아 간행할 수 없다는 논의가 일어나니, 공은 기꺼이 호남 쪽의 편을 들었다. 동문에 오진영이란 자가 있었는데, 영남의 주장을 주도하여 인가설(認可說)을 내어서 말하기를 "선사께서 일찍이 인가를 받을 뜻이 있었다."라 하였으며 "헤아려서 하라고 하셨다."는 말을 날조하여서 선생이 그렇게 하였다고 속였다. 공이 변론하기를 "선사가 남긴 편지에 분명하게 말하기를 '간행하여 배포함을 요청하는 것은 결단코 스스로 욕보이는 것이다.'라 하였으니, 그 의리가 해와 별처럼 밝은데, 어찌 아주 조금이라도 인가를 받을 뜻이 있었겠는가. 저들이 반드시 사사로이 이기려고 마음을 세우려 한다면 마땅히 '선사께서 원래 인가를 받을 뜻이 없었는데, 지금 우리의 형세상 어쩔 수 없이 인가를 받아 간행해야 한다.'라고 해야 하니, 이는 선사에게 스스로 죄를 얻는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고 이에 선사를 끌어다 무함하고서 선사를 절조를 잃은 구덩이에 빠지게 한다면 이는 '사슴을 쫓다가 태산을 보지 못한 것'주 107)에 해당한다."라 하고서 마침내 동지들과 성토하였다. 일찍이 증조부의 묘도 문자를 오진영에게 받았는데, 이에 이르러 물리치면서 "스승을 속인 자의 글을 어찌 쓰겠는가."라 하였다.
공의 모든 동정(動靜)은 학문에서 힘을 얻었기에 규모가 정연하고 엄정하여 일찍이 거칠거나 어긋나지 않았으니, 술을 비록 많이 먹었더라도 조금도 실수하지 않았고, 관례와 혼례에 반드시 삼가(三加)주 108)와 친영을 하였다. 여러 차례 참척(慘戚)주 109)을 만났지만 이치로 자신을 다스려 마음을 누그러뜨렸으며, 집안이 항상 온화하면서도 엄숙하였다. 선조의 제삿날에는 비록 고단하여도 반드시 재계하고 목욕한 뒤에 제사를 지냈다. 여러 사촌들과 재산을 내고 애를 써서 10대로부터 부모의 묘소까지 모두 묘갈문을 마련하였는데, 모두 유명한 사람의 손에서 나왔다. 고을의 길흉과 경조사에 반드시 부조를 보냈다. 벗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한 끼 정도 먹지 않았으며 매우 친한 경우에는 3일 동안 거친 밥을 먹었다. 마을에 이치에 맞지 않는 일로 대드는 자가 있어서 집안의 자제들이 화를 내면서 따지려고 하니, 공이 만류하였다. 친지 가운데 세력에 붙따르는 자가 있었는데, 공은 자신을 더럽히는 듯 여겨서 그 집을 지나도 들어가지 않았었다.
어떤 이가 '저들의 은사금을 받을 것입니까.'라 물으니, 공은 시로써 답하였다.

이익이 비록 이롭지만 또한 해도 되니利雖爲利亦爲害
분별없이 으레 껏 받을 수 없도다.不可無分一例收
아주 조금이라도 염치를 손상하면 오히려 부끄러운데 毫髮傷廉猶有恥
더욱이 오랑캐보다 더 심한 원수임에랴. 况乎夷狄更深讐

마을에 돈을 받은 자가 있었는데, 공은 그가 살았을 때 절을 하지 않았으며 죽었을 때 곡을 하지 않았다. 동향에 정재(靜齋) 이석용(李錫庸)이 체포되었는데, 왜놈 경찰서에서 공이 함께 모의했다고 의심하여 엄하게 심문하여도 공은 안색이 변하지 않았다. 서명유(徐明儒)란 자는 수의지본실(守義之本實)주 110)인데, 그 자 또한 경복하였다.
강당을 고덕산(高德山) 선영 아래에 지었는데 전 선생이 종율재(宗栗齋)라고 명명하였으니, 율곡을 종사로 삼으라는 뜻이다. 원근에서 와서 배우는 자들이 많았는데, 반드시 법복을 입고서 예를 익히고 의를 강론하였다. 두어 고을의 동지들과 존양계를 만들어 스승이 전한 가르침을 미뤄 밝혔으며 사문을 진작시켰다. 매번 달이 밝고 바람이 시원하며 꽃과 새가 난만할 때면 원림에서 노닐면 흉금이 상쾌하고 맑으며 정신이 밝고 환하여졌다. 제자들을 불러 줄지어 앉아 각각 한 편의 논설이나 의의(義意)를 외면 그 즐거움이 흘러 넘쳐 절로 만족스러웠으니, 상상해보면 맑은 경치, 온화한 기운과 서로 흘러 통하는 것이 있었을 것인데, 보고 듣는 이들이 열복하였을 것이다.
만년에 풍증으로 오랫동안 고생하였는데, 운명을 편안히 받아들여 슬퍼하지 않았다. 병자년(1936) 11월 13일 돌아가셔서 고덕산(高德山) 간좌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전주 이씨 헌영(憲榮)의 따님이다. 아들은 학중(學重), 성중(性重), 일중(一重), 길중(吉重)이며, 딸은 안동 권이호(權彛鎬)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용희(鏞希), 용준(鏞峻), 용기(鏞琪)이다.
공의 행동은 관대하고 본성은 솔직하고 올발라서 말을 듣고 행위를 보면 덕기(德氣)가 절로 드러난다. 대개 '순수함과 참됨, 정성과 부지런함[淳眞誠勤]' 네 글자는 학자들이 덕을 쌓는 기반이다. 공의 기반은 참으로 산을 만들어 집을 짓는 것과 같았으니 어디 간들 성취하지 않겠는가. 마땅히 대체(大體)를 세울 만하며 작은 행동도 충분히 모범이 될 만하였다. 동문들이 앞자리를 양보하고 선생이 인정하였으니, 어찌 그 까닭이 없겠는가. 내가 공을 살펴보건대 외면으로는 혼후하고 온화하며 내면으로는 총명하고 굳세고 엄하니, 이것은 순수함과 참됨, 정성과 부지런함이 밖에 드러난 공으로 여겨진다.
옛날 내가 공의 사랑을 받은 터라 스승이 돌아가신 뒤에 편지에서 '어버이가 돌아가시고 형제만 남았다.'라는 말씀하니, 그 지극한 마음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었다. 지금 만약 공이 살아계신다면 마땅히 서로 더욱 깊이 알고 은혜를 크게 받았을 것인데, 그렇지 못해 한스럽다.
학중이 예순이 넘은 나이로 멀리서 찾아와서 흠재(欽齋) 최병심(崔秉心)이 지은 행장을 보여주면서 나에게 빗돌에 새겨 드러낼 글을 요청하였다. 나는 사안이 중요한데 사람이 미천하다고 사양하였는데, 그 요청을 더욱 정성스럽게 하면서 모두 네 번이나 나를 찾아와 요청을 그치지 않으니 어찌 끝내 사양하겠는가. 삼가 행장을 살펴 서술하고 논하면서 평소 존경했던 마음을 부친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머리 회전 빠르고 약아 빠진 무리들은 便儇皎厲
도에서 멀어졌어라.去道遠而
공은 이와 반대로라公反乎此
너그럽고 듬직하며 온화하고 평온하도다. 厚重和夷
화려한 꽃만 따다 쓰니掇英摘華
비루하도다, 그 문장이여.陋矣文詞
공은 그렇지 않아서公則不然
뿌리를 북돋아 가지가 번창하였도다.培根達枝
곧 도에 가까우니則近乎道
오직 공의 자품이 그러하였고,惟公天資
이치가 뛰어나 글을 이루니理勝章成
또한 공의 문사로다.亦公之辭
임실현이라任實有縣
실제 학문과 부합하고,實學符玆
고덕산이라高德有山
덕이 그처럼 높으니,德高如之
천년 뒤에도有來千祀
이 비명을 볼 지어다.視此銘詩
주석 106)〈위설〉
《간재집》 권14 〈잡저〉에 있다.
주석 107)사슴을……것
이는 작은 욕심을 탐내다가 큰 것을 잃는다는 의미로, 불가의 책인 〈허당록(虛堂錄)〉에 보이는 말이다.
주석 108)삼가
관례 때 치르는 초가, 재가, 삼가의 절차를 이른다.
주석 109)참척
아들 딸이나 손자 손녀가 자신보다 먼저 죽는 것을 이른다.
주석 110)수의지본실
미상. 일본식의 이름으로 보인다.
危齋金公墓碣銘【幷序】
昔我先師臼山田先生之門, 國中從學之士, 無慮千數, 而其淳眞誠勤一辭, 稱危齋金公. 先生亦嘗曰 : "文伯悃愊." 又曰 : "文伯見理公正, 用意眞實, 求之諸子, 不多見." 斯可以識公矣. 公諱炳周, 文伯其字也. 慶州金氏以麗末忠臣判書冲漢爲顯祖. 本朝殉節, 贈參判孝男, 其十世. 曾祖致泰孝, 贈敎官. 祖洪斗. 考錫桓, 妣, 碧珍李氏義峻女. 高宗己巳十一月二十日, 生于任實縣道仁洞. 自幼謹篤事親, 志體備養. 癸巳, 丁內艱, 情文俱至, 後十年, 外憂日亦然, 而哀愈甚, 鬚髮爲白. 三十廢擧, 從事實學. 辛丑, 始謁田先生, 生事剝落, 耕且讀三年, 益奮勵忍耐, 先生嘉之, 名其室曰危齋, 贈以危說, 言人心至危, 無時不用危之之功也. 嘗問'夜氣何如.' 公對曰 : "氣質本淸之氣." 先生然之. 因言明氣所以明理之義而勉之, 公深體力行. 記先生雅言小心奉性、尊華攘夷數百言, 名曰《聞斯錄》, 時自省之. 事師如事親, 丁未冬, 躬負米十舍於公山, 己酉庚戌, 間關陪護於絶海諸島. 其沒也, 心喪三年, 元朝設位而哭. 師稿刋議之發, 衆初會嶺南, 適湖南有不認可刋之階, 公右湖而樂之. 同門有吳震泳者, 主嶺出認而曰 : "先師曾有認意", 造出"料量爲之"等語, 以誣先生. 公辨之曰 : "先師遺書明明言, '請願刋布, 決是自辱' 其義炳如日星, 安有毫髮認意. 彼必欲立好勝之私, 則當曰 : '先師元無認意, 在我勢不得不認刋.' 是自得罪於先師也. 不此之爲, 乃援誣先師, 使陷於失節坑塹, 所謂逐鹿而不見泰山者." 遂與同志聲討. 嘗得曾祖墓文於吳, 至是退斥曰 : "焉用誣師者文乎." 公之一動一靜, 皆得力於學問, 故規模井井, 未嘗荒錯. 酒戶雖寬, 靡或有失. 冠昏, 必行三加親迎. 累遭慘戚, 以理自寬, 門戶嘗和而肅. 先忌雖憊, 必齊沐行祭. 與羣從捐財拮据, 自十世至親墓, 幷有碣文, 皆出名人. 鄕黨吉凶慶吊, 必遺以物. 聞友之喪, 一時不食, 親厚者, 三日行素. 里人有加以非理者, 門子弟恚欲辨之, 公禁之. 親知有趨時者, 若將浼焉, 過門不入. 或問'以彼恩金受否.' 公以詩答曰 : "利雖爲利亦爲害, 不可無分一例收. 毫髮傷廉猶有恥, 况乎夷狄更深讐." 里中有受金者, 公生不拜, 死不哭. 同鄕有李靜齋錫庸, 被逮, 自彼署疑公同謀嚴詰之, 公神色不變. 徐明儒者, 守義之本實, 彼亦敬服. 築講舍于高德山先塋下, 田先生命名宗票齋, 言宗師栗谷也. 遠近來學者衆, 必使著法服, 習禮講義. 與數郡同志, 設尊陽契, 推明師傳, 振起斯文. 每値月朗風淸, 花鳥爛漫, 逍遙於園林, 胸次灑落, 神精昭曠, 引從者列坐, 各誦一篇論說義意, 其樂融融自得意, 想有與淑景和氣, 若相流通者, 觀聽悅服. 晩以風痺積苦, 安命不慽, 丙子十一月十三日卒, 葬高德山艮原. 配, 全州李氏憲榮女. 男, 學重、性重、一重、吉重. 女, 適安東權彝鎬. 孫, 鏞希、鏞峻、鏞琪. 公儀形寬大, 性度坦直, 聽言觀儀, 德氣自著. 蓋淳眞誠勤四字, 學者積德之基也. 公之基本, 固爲山築室, 安往不成. 宜樹立之大致, 細行足爲柯則也. 同門讓頭, 函席與之, 豈無其以. 以余觀公, 外而渾厚和柔 ; 內則精明剛嚴, 斯爲淳眞誠勤之顯功也歟. 昔余荷公親愛, 山頹後書, 有'親沒兄弟之喩', 其至意感涕. 今公而在者, 當相知益深, 受惠滋大, 恨其未也. 學重耆年遠顧, 示崔欽齋撰狀, 而請顯刻文. 余以事重人微辭, 則其請愈勤, 凡四踵門而未已, 何敢終辭. 謹按狀敘論, 寓平日景仰之意. 爲之銘曰 : "便儇皎厲, 去道遠而. 公反乎此, 厚重和夷. 掇英摘華, 陋矣文詞. 公則不然, 培根達枝. 則近乎道, 惟公天資. 理勝章成, 亦公之辭. 任實有縣, 實學符玆. 高德有山, 德高如之. 有來千祀, 視此銘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