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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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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갈명(墓碣銘)
- 삼우당 강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三友堂姜公墓碣銘【幷序】)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3 / 묘갈명(墓碣銘)
삼우당 강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
고창군 갑평리의 강씨 문중에 형제 세 사람이 있는데 형은 우애하고 아우는 공손함이 뛰어난 자들로 큰 형의 이름은 철흠(喆欽)이며, 둘째의 이름은 상흠(尙欽)이며, 막내의 이름은 윤흠(潤欽)이다. 품평하는 이주 96)들이 서로 칭송하였으며, 그 당(堂)을 편액하고 실상을 기록하기를 큰 형은 '삼우(三友)'라 하였고 둘째는 '효우(孝友)'라 하였고 막내는 '우우(友于)'라고 하였다. 어릴 때 엿을 조금 사서 형제들이 서로 양보하여 먹지 않다가 마침내 다 녹고 말았으니, 마을에서 미담으로 전한다. 조금 자라서는 날마다 서로 모여 화락하게 지냈으며 매우 부득이한 일이 아니면 잠시도 서로 떨어지지 않았다. 각자 부인을 맞이하여 다른 집에서 거처할 때도 내 것 네 것의 재산이 없었으며 형이 거름을 내면 아우는 밭을 갈고 아우가 김을 매면 아우가 파종하였다. 여러 자매들도 또한 이처럼 하였으니, 이런 경우는 거의 없거나 겨우 한두 예가 있을 뿐이다.
삼우공이 가장 마지막으로 돌아가셨는데 묘소 주변의 나무가 12년이 되어 한 아름으로 자랐다. 사자(嗣子)인 채영이 친척 아우인 호영이 지은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묘갈문을 요청하니, 나는 통가(通家)의 정의(情誼)를 지녀 덕을 상세히 알고 있으니 사양할 수 없었다.
공의 자는 사길이며 본관은 진산(晉山, 진주)으로 신라와 고려 시대에는 대단히 현달한 가문이다. 고려 말에 대제학 휘 회중(淮仲)은 조선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는 절개를 지켜 포은, 목은과 이름이 나란하였다. 3대가 지나 휘 징(澂)은 연산군 때 부제학이었는데 직간으로 쫓겨났다가 중종 반정 이후에 예조참판에 제수되었다. 두 차례 명나라 사신으로 갔는데, 풍의(風儀)와 문장이 중국 선비들의 찬탄을 자아내었다. 아들 휘 억(億)은 한림지제교를 지냈다. 다시 2대를 지나 청계일인 휘 순(恂)은 병자년의 난리 뒤에 남쪽으로 은거하여 고창 사람이 되었으니, 바로 공의 8대조이다.
부친의 휘는 달중(達重)이며, 모친은 평택 임씨 문환(文煥)의 따님이다. 공은 철종 을묘년(1855) 7월 10일에 태어났다. 6살에 부친을 여의고 모친의 집에서 자랐다. 외삼촌이 일찍이 어떤 일로 감옥에 갇혔는데, 공의 나이 겨우 7~8세인데도 한겨울에 눈이 내려도 날마다 두 번씩 때를 어기지 않고 식사를 전달하니 서리들이 기특하다고 감탄하였다. 병자년(1876)에 모친을 모시고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짓고 땔나무하며 맛있는 음식을 올렸다. 어느 해 크게 흉년이 들어 때때로 밥을 짓지 못하게 되었는데도 공사간의 구휼을 조금도 받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염결하다고 칭송하였다. 두 아우와 약속하기를 "우리 집은 하늘이 돕지 않아서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늙으신 어머니가 계시니 편히 봉양할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는 자식이 아니다."라 하였다. 이에 서로 힘쓰고 대단히 노력하니 점차로 가세가 펴져 맛있는 음식이 떨어지지 않아 모친이 편안하게 지냈다. 어려서 부친을 여읜 것을 통한으로 여겨 무덤을 쌓고 석물과 제전의 마련에 온 정성을 기울여서 제향을 길이 지내게 하였다. 제삿날에는 그전에 재계하고 목욕하며 여러 제구(祭具)를 전부 직접 점검하면서 "이와 같이 하지 않고서는 제사 지낼 수 없다."라 하였다.
기해년(1899)에 어머니 상을 당하여 기절하였다가 다시 깨어났으며 장사를 지내는 예에 부족함이 없게 하였으며 피눈물을 흘리면서 상제에 맞게 하였으니 옛날 거상(居喪)을 잘하는 자와 같이 하였다. 외삼촌이 돌아가시자 재물을 마련하여 상례와 장사를 치렀으며 남긴 혈육을 거두 키우고 밭과 집을 마련하여 주었다. 막내아우가 이상한 질병에 걸리자 간호하고 위로하면서 극진하게 하지 않음이 없었는데, 병을 치료하지 못하고 죽게 되자 그 자녀들을 사랑으로 길러 자신의 자식보다 두텁게 대하였다. 둘째 아우의 상을 당하여 며칠 동안 식사를 하지 않고 비처럼 눈물을 흘렸는데, 당시 팔십이 이미 지났는데도 지극한 정이 돈독함은 이와 같았다. 자손들로 하여금 나쁜 것을 제거하고 널리 배우게 하여 사류들 사이에 이름을 날리게 하였으니, 이것은 자손들을 잘 인도함주 97)이 진실로 지극한 것이다.
병자년(1936)에 회혼례의 잔치를 허락하지 않았는데, 풍수의 감회주 98)가 얼굴과 말에서 넘쳐나니, 벗인 육봉(六峰) 이종택(李鍾宅)이 시를 지어 위로하였다. 향년 86세로 경진년 정월 28일 돌아가시니, 하갑리(下甲里) 앞 산기슭 모좌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평산 신씨 윤성(允成)의 따님으로, 시모에게 효도하고 남편에게 공경하였으며, 제사를 받들고 손님을 맞이하며 동서를 대하고 비복을 부리는 것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흠잡는 말을 하지 않았다. 평소 거처할 때 말을 급히 하거나 낯빛을 바꾸지 않았으며, 가난하거나 부유하다고 해서 기뻐하거나 근심하지 않았다. 자신이 쓰는 물건은 박하였으며 타인에게는 두텁게 베풀었으니, 친족의 부녀자들이 공정하게 칭송하면서 자신들은 그에 미칠 수 없다고 하였다. 대개 공의 어짊은 내조 덕분이었다. 신사년 11월 8일에 돌아가시니 태어난 정사년에서 향년 85세로, 두 봉분으로 묘소를 만들었다. 한 아들은 채영(采永)이며, 네 손자는 성원(聖元), 도원(道元), 기원(琦元), 희원(希元)이며, 두 손서는 고학주(高鶴柱)와 김형겸(金炯謙)이다. 성원은 3남 2녀를 두었고, 도원은 2남 3녀를 두었고, 기원 1남 2녀를 두었고, 희원은 1남을 두었고, 학주는 2남을 두었고, 형겸은 1남을 두었으니, 난초와 옥이 바야흐로 무성하니 음덕이 다 하지 않았다.
삼가 생각하건대 《서경》에서 "오직 부모에게 효도하며 형제간에 우애한다."주 99)라 하였으며, 《시경》에서 "마음에 따라 우애한다."주 100)라 하였으니, 효도와 우애는 실로 사람 마음속의 본성이다. 그러나 부자는 하나로 통하는 친함이 있지만 형제는 각자 나뉘는 사사로움이 있다. 그러므로 효도는 오히려 쉽지만 우애는 어려우니, 효도하면서 우애가 지극하지 못한 경우는 있기는 하지만, 우애하면서 효도하지 않는 자는 없다. 공이 우애로 이름이 났는데 효도 또한 더 보탤 것이 없는 것을 보면 증험할 수 있다. 대개 공의 심력은 견고하며 덕성은 온화하고 두터우며 흉금은 우아하고 도량은 넓었다. 평생 행한 것이 효성과 우애 이외에도 또한 타인보다 뛰어난 것이 있는데, 기록할 만한 것으로는 근검으로 집안을 다스려 중년 이후로 자못 부유하였음에도 자신이 쓰는 물건은 덧보태지 않았기에 자손들이 지나치게 아끼지 말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눈물을 쏟으면서 "내가 어려서 부친을 여의었는데 모친에게 이바지하는 것도 넉넉하지 못하여 종신토록 한이 되었다. 이것도 넘치는 것인데, 차마 더 보태겠느냐."라 하였다. 다만 손님을 접대할 때 음식을 풍부하게 차리니 집안에 신발이 항상 가득 찼으며, 비록 대단히 가난한 자라도 똑같이 대하였다.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의리를 좋아하여 붕우들이 빚을 내가거든 때가 되어도 갚으라고 재촉하지 않았다. 친구가 늙었는데 봉양하는 이가 없으면 그 문권을 찢어버렸다. 말세의 습속은 남의 재물을 탐하는 것인데, 부유한 이들이 가난한 이를 갉아먹는 것은 소작인들에게 더욱 심하였다. 공의 밭을 소작 낸 자들은 이 도조가 저렴하여 쌀을 조금 바쳤는데도 간혹 해를 연이어 도조를 내지 못하는 자들이 있어도 그 밭을 거둬들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넘겨보고서 도모하는 자가 있었는데, 이치로 타일러서 말하기를 "저들은 도조까지 다 먹어도 오히려 굶주림을 면하지 못하는데 지금 만약 거둬들인다면 이는 구덩이에 밀쳐서 빠트리는 것이 아니겠는가."라 하였다. 젊었을 때 타인으로 인해 화재를 당하여 집안 재산과 기물들이 모두 재로 변하고 말았다. 공이 밖에서 돌아와서 천천히 이르기를 "내가 받은 운명이 기구하여 남은 재앙이 아직 다하지 않았으니, 이는 하늘이 실로 한 일이라 누구를 원망하고 탓하겠느냐. 더욱더 마음을 분발하고 성질을 참는다면 지금의 재앙이 훗날의 복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어찌 확신하겠는가."라 하니, 사람들이 그의 아량에 감복하였다.
만년에 집안의 손자가 타인의 말을 잘못 듣고서 토지를 거의 다 잃게 되었으나, 공은 개의치 않고서 손자를 불러다가 깨우치기를 "내가 재물을 잃은 것에 마음 아파하겠느냐. 재산을 불렸으나 모친을 봉양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는데, 도리어 너희들이 뜻을 잃고 허물을 더할까 걱정하였는데, 지금 과연 그렇게 되었다. 물건은 일정한 주인이 없으니 이것은 아까울 것이 없다. 스스로 힘을 쏟아서 다 해야 할 것은 효도와 우애, 그리고 학문인데, 빈천과 근심 걱정은 너를 옥으로 만드는 것이니, 이로 인해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마땅히 힘쓸 바를 더욱 힘쓴다면 그 득실은 대단히 차이가 날 것이다. 깊이 유념하라."라고 하였다. 이치를 분명하게 보고 정대한 가르침을 내리는 것은 비록 옛날의 어진 군자라도 어찌 이보다 나을 수가 있겠는가.
공은 신체가 약하고 작아서 옷도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는데 그러나 자못 담력과 지략이 있어서 태산이 무너져도 낯빛이 전혀 변하지 않는 기상이 있었다. 일찍이 모친의 병에 약을 구하러 밤에 장령을 넘었는데, 호랑이가 길을 막고 있었다. 공이 기르는 개처럼 꾸짖으니 호랑이가 머리를 낮추고 엄숙하게 듣는 것 같았으며, 길을 호위하여 집에까지 오니, 사람들이 동물들도 감동하였다고 하였다. 말과 웃음은 화락하였으며 온화한 기운이 흘러 넘쳤다. 그러나 일찍이 경기도의 묘사에 참여하였을 때 종회에 벌열임을 믿고서 거칠고 거만하게 행동하는 자가 있었다. 공이 이치를 들어 꾸짖는데 엄준한 말로 거세게 지척하니 그 사람이 두려워하며 복종한지라 좌중의 사람들이 숙연해졌다. 공이 강함과 부드러움을 겸비하고 온화함과 엄격함을 아울러 지님이 또한 이와 같았다. 만일 지위를 얻어 큰일을 맡았다면 넉넉하게 처리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총괄하건대, 말세에 쉽게 얻지 못할 인물이라 하겠다. 명은 다음과 같다.
삼우당이 있으니三友有堂
갑평리라네.于甲之村
노래는 〈상체〉주 101)에 오르고歌登常棣
경계는 〈사간〉주 102)에 있어라.戒存斯干
형제가 화락하고 즐거우면和樂且湛
부모는 마음이 편안하도다.父母順安
자사가 가르침을 두었으니思聖有敎
효도하며 우애하라 하였어라.주 103)歸友于孝
근본이 이미 섰으니本旣立矣
어찌 도가 생기지 않으랴.何道不生
관을 쓴 이후로 팔순이 넘어서도自冠踰耋
많은 선을 다 갖췄어라.衆善畢能
가난할 때 청렴하고貧而廉潔
부자 되어 교만하지 않누나.富不驕盈
공문에 부끄럽지 않나니不愧孔門
자공의 마음이어라.주 104)端木之情
재물의 얻고 잃음은 마음에 담지 않나니忘懷得喪
손자에게 학문을 권했노라.勉孫學問
주자와 뜻과 암합하니주 105)暗合晦翁
필생의 소원이었도다.究竟之願
사나운 호랑이를 꾸짖어 순하게 하니叱馴猛虎
호연한 기운이 발한 것이라.浩氣之發
공에 대한 말은 듣기에 흡족하니言足聽聞
내가 그 전체를 모았도다.我撮本末
아! 지금과 이후에 嗟今與後
지나는 자는 예를 표할 것이라. 過者其式
- 주석 96)품평하는 이
- '월조(月朝)'는 인물평을 이른다. 후한 영제(靈帝) 때 여남(汝南)의 허소(許劭)가 그 종형(從兄) 허정(許靖)과 함께 향당(鄕黨)의 인물을 품평하기 좋아하여 매달마다 그 품제(品題)를 고쳤던 것을 가리킨다. 어느 날 조조(曹操)가 허소를 찾아가 자신에 대해 품평해보라고 강요하자, 허소는 "그대는 치세에는 유능한 신하이고, 난세에는 간교한 영웅이 될 것이다.〔治世之能臣 亂世之姦雄〕"라고 하였는데, 조조가 이 말을 듣더니 기뻐하면서 떠났다고 한다. 《後漢書 卷98 許劭列傳》 《資治通鑑 卷58 靈皇帝中》
- 주석 97)자손들을 잘 인도함
- 식곡은 《시경》 〈소완(小宛)〉에 "너의 아들을 가르쳐서 선(善)을 하는 것을 본받게 하라.〔教誨爾子 式穀似之〕"라는 말에서 나왔다.
- 주석 98)풍수의 감회
- 자식이 부모를 그리는 마음을 말한다. 공자가 길에서 구오자(丘吾子)를 만났을 때, 구오자가 부모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이야기 하면서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멈추어 주지 않고 자식은 봉양하고자 하나 부모가 기다려 주지 않는다.〔樹欲靜而風不停 子欲養而親不待〕"라는 말을 했다. 그 말에서 풍수지탄(風樹之歎)이란 성어가 나왔다. 《孔子家語 卷8 致思》
- 주석 99)오직……우애한다
- 《서경》 〈주서(周書) 군진(君陳)〉에 보인다.
- 주석 100)마음에 따라 우애한다
- 《시경》 〈황의(皇矣)〉에 "이 왕계가 마음에 따라 우애하사 그 형과 우애하여 그 경사를 두터이 하시어 영광을 형에게 주셨다.[維此王季, 因心則友, 則友其兄, 則篤其慶, 載錫之光.]" 하였다.
- 주석 101)〈상체〉
- 형제의 우애를 읊은 시로 《시경(詩經)》 〈소아(小雅)〉에 들어 있다.
- 주석 102)〈사간〉
- 집안이 화평하기를 축원하는 시로, 《시경(詩經)》 〈소아(小雅)〉에 들어 있다.
- 주석 103)자사가……하였어라
- 앞의 《서경》 〈군진〉의 말을 가리키는데, 이 말은 《논어》에서 공자가 인용하였다. 자사의 가르침이란 말은 미상이다.
- 주석 104)자공의 마음이어라
- 단목은 단목사(端木賜)인 자공(子貢)을 가리킨다. 자공의 마음은, 자공이 공자(孔子)에게 "가난하면서도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면서도 교만하지 않는 사람은 어떠합니까?〔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라고 묻자, 공자는 "좋기는 하지만 가난하면서도 즐기며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 못하다.〔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라고 대답한 것을 가리킨다. 《論語 學而》
- 주석 105)주자의 뜻과 암합하니
- 주자의 〈권학문(勸學文)〉에서 "집이 혹시 가난하더라도 가난 때문에 배우는 것을 버리지 말 것이요, 집이 만약 부유하더라도 부유한 것을 믿고 학문을 게을리해선 안 된다."라 하였다.
三友堂姜公墓碣銘【幷序】
維高敞郡甲坪之里, 姜氏之門, 有兄弟三人, 友悌特異者, 長諱喆欽、仲諱尙欽、季諱潤欽. 月朝家交口稱美, 扁其堂而記其實, 長曰三友、仲曰孝友、季曰友于. 幼時買糖若干, 兄弟相讓不食, 竟至消盡, 里傳美談. 稍長, 日聚湛樂, 非甚不得已, 須臾不相舍. 及各娶婦居異室, 物無爾我, 兄糞弟田, 弟耘兄苗, 諸娣姒亦如之, 蓋絶無而僅有也. 三友公最後沒, 而且一紀墓木拱矣, 嗣子釆永以族弟浩永撰狀, 屬余碣銘, 余誼在通家, 知德者詳, 不可辭. 公字士吉, 其先晉山人, 在羅、麗顯甚. 麗末, 大提學諱淮仲守罔僕節, 圃、牧齊名. 三傳而諱澂, 燕山時, 副提學, 以直見黜, 中宗反正, 拜禮曹參判, 再使明朝, 風儀詞藻, 華士嘆賞. 子諱億, 翰林知製敎. 二傳而淸溪逸人諱恂, 丙子難後, 南遯爲高敞人, 是爲公八世. 考諱達重, 妣, 平澤林氏文煥女. 公以哲宗乙卯七月十日生. 六歲而孤, 鞠於母家, 舅氏嘗以事逮獄, 公年僅齠齔, 隆冬雨雪, 日再傳飯不違時, 胥隷嗟異. 丙子, 奉母還鄕, 耕樵供旨. 歲大侵, 有時絶火, 公私周賑, 一無所受, 人稱廉潔. 約二弟曰 : "吾家不天早孤, 而老慈在, 不思所以便養, 是不子." 胥勖勤苦, 漸得紓力, 甘脆不匱, 母夫人安之. 痛早背嚴顔, 盡心封塋儀物祭田, 以永苾芬, 夫日, 先期齋沐, 諸具悉躳檢曰 : "不如此如, 不祭." 己亥, 丁內憂, 頓絶方蘇, 送終無憾, 泣血盡制, 如古之善居喪者. 舅氏沒, 辦備喪葬, 收成遺孫, 資以田宅. 季弟嬰奇疾, 調護慰藉, 靡不用極. 及其不救, 撫成子女, 厚於己出. 遭仲弟喪, 數日不食, 淚如雨下, 時則大耋已過, 而至情彌篤如此. 敎子孫割害縱學, 使知名士流間, 此其式穀誠至也. 丙子, 不許回巹飾喜, 風樹之感, 溢於色辭, 執友李六峰鍾宅, 作詩慰之. 享年八十六, 以庚辰正月二十八日卒, 葬下甲里前麓■坐. 配, 平山申氏允成女, 孝於姑, 敬於夫, 承祀接賓, 處妯娌御婢僕, 人無間言. 平居, 無疾言遽色, 不以貧富爲欣戚, 奉身薄而施人厚, 族親婦女, 公誦以爲不可及, 蓋公之賢, 內助爲多. 辛巳十一月八日卒, 距生丁巳, 爲八十五歲, 墓雙封. 一子, 釆永, 四孫, 聖元、道元、琦元、希元, 二孫婿, 高鶴柱、金炯謙. 聖元三男二女, 道元二男三女, 琦元一男二女, 希元一男, 鶴柱二男, 炯謙一男, 蘭玉方茁, 福蔭未艾也. 竊惟《書》云 : "惟孝, 友于兄弟." 《詩》曰 : "因心則友." 孝友, 實人心之秉彛. 然父子爲一統之親, 兄弟有各分之私. 故孝猶易, 而友則難, 孝而友未至者, 容有之, 未有能友而不能孝者, 觀公之以友著名, 而孝亦蔑加焉, 可驗矣. 蓋公心力堅固, 德性和厚, 襟量雅曠, 平生行治, 孝友以外, 亦可過人, 而可書者勤儉理家, 中身頗饒, 然自奉無加, 子孫請勿過薄, 則泫然曰 : "吾早孤, 而供母亦未充, 終身茹恨. 此而濫矣, 忍益之乎." 惟於待客豊腆, 戶屨常滿, 雖極貧者, 一視之. 輕財好義, 朋舊稱貸, 及期不責報. 親老無養者, 折其券. 末俗貪饕, 富之剝貧, 於佃人尢甚, 而佃公田者, 稅廉斗低, 或有連年逋稅者, 而不收其田. 人有窺而圖之者, 則理諭之曰 : "彼幷稅全食, 猶不免飢, 今若收奪, 是非推納溝中乎." 少時因人被火灾, 家産什物盡化灰燼, 公自外來, 徐曰 : "吾賦命嶮巇, 餘孼未盡, 天實爲之, 伊誰怨尢. 動忍增益, 今日之厄, 安知不爲後日之福乎." 人服其雅量. 晩年家孫, 誤聽人言, 損土殆盡, 公不以介意, 引孫勉諭曰 : "吾病於傷哉. 畧營産業, 而恨不逮養, 反慮汝曹之損志益過, 今果然矣. 物無常主, 此不足惜. 所自盡者, 孝友文學, 貧賤憂戚, 所以玉汝. 因是警惕, 益勉其所當勉, 則得失相萬, 念之." 其見理明達 ; 垂訓正大, 雖古之賢君子, 何以加此. 公體幹弱小, 若不勝衣, 然頗有膽畧, 有泰山崩而色不變底氣像. 嘗慈癠問藥, 夜踰長嶺, 有虎遮路, 公叱之如畜犬, 虎低頭若肅聽, 護行至家, 人謂異感. 言笑樂易, 和氣流動, 然嘗至畿甸墓祀, 宗會有藉其閥閱, 加以悖慢者, 公據理執咎, 嚴辭峻斥, 其人畏服, 一座肅穆. 公之剛柔兼全, 和厲幷至, 又如此. 如使得地而當大事, 則亦所優爲, 可知矣. 總之, 爲衰世不易得之人物也. 銘曰 : "三友有堂, 于甲之村. 歌登〈常棣〉, 戒存〈斯干〉. 和樂且湛, 父母順安. 思聖有敎, 歸友于孝. 本旣立矣, 何道不生. 自冠踰耋, 衆善畢能. 貧而廉潔, 富不驕盈. 不愧孔門, 端木之情. 忘懷得喪, 勉孫學問. 暗合晦翁, 究竟之願. 叱馴猛虎, 折服悖人. 浩氣之發, 言足聽聞. 我撮本末, 俾鑱阡石. 嗟今與後, 過者其式.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