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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3
  • 묘갈명(墓碣銘)
  • 기산 황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箕山黃公墓碣銘【幷序】)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3 / 묘갈명(墓碣銘)

자료ID HIKS_Z038_01_B00001_001.023.0001.TXT.0018
기산 황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
호남 지방의 문헌 세가를 헤아린다면 흥성(興盛, 고창) 구동의 황씨를 손에 꼽을 수 있다. 익위사 익찬 이재(頤齋) 선생은 학문이 높고 덕이 넉넉하여 명성이 나라 안에 널리 전해졌으니, 앞에서 가문을 선도한 공이 있었다. 비록 지금 세상의 풍조가 크게 변하였지만 후손의 면모를 접하면 순수한 기운이 있고 그 집에 들어가면 예다운 습속이 있어서 고가(故家)의 여운을 잃지 않았다. 또한 황씨 가운데 이름이 드러난 자가 있으니, 근래의 고(故) 경기전참봉 기산공(箕山公)으로 몸을 닦고 의를 행하여 이재의 후대에 가문을 수성한 인물이다.
공의 휘는 종윤(鍾允), 자는 여집(汝執)으로 본관은 평해(平海)이다. 계보는 고려 참찬 의정부사 휘 숙경(淑卿)에서 시작되었으니, 이 분이 휘 길원(吉源)을 낳아 본조에 들어와 선공감정을 지냈다. 5대가 지나서 부호군 뉴(紐)가 춘천에서 남쪽으로 내려왔다. 또 7대가 지나 휘 윤석이 태어났으니, 이분이 바로 이재 선생이다. 이재 선생의 위로 3대를 보면, 취은(醉隱) 휘 세기(世基), 산촌(山村) 휘 재만(載萬), 만은(晩隱) 휘 전(㙻)이 어진 덕으로 그 앞을 열었다. 이재 아래로 수촌(壽村) 휘 일한(一漢), 단옹(檀翁) 휘 수경(秀瓊), 시와(晦窩) 휘 중섭(中燮), 국포(菊圃) 휘 재렴(在濂) 및 그 아우 한천(寒泉) 휘 재학(在學) 등 4대가 문과 행으로 그 뒤를 이었다.
공은 국포공의 아들로 모친은 유인 장흥 고씨 학진(鶴鎭)의 따님과 남원 윤씨 우현(禹鉉의 따님이다. 한천공과 연일 정씨 생원 계량의 따님인 한천공의 부인이 바로 공의 생부모이다. 공은 자질이 정성스럽고 성실하며 그릇이 넓고 두터웠다. 자신을 다스릴 땐 겸손하고 남을 대할 땐 온화, 공경하였다. 일찍이 말을 다급하게 하거나 얼굴빛을 바꾸지 않았다. 난처한 일을 만나도 마음만은 편안하여 두렵거나 꺼리는 빛이 없었으며 천천히 이치로 다스려 마침내 합당한 방법을 획득하였다. 언행은 질박함을 숭상하여 꾸미지 않았고 학문에 대해서도 입과 귀로 얻는 것주 93)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필획은 단정하여 비록 급한 상황이라도 초서로 휘갈겨 쓰지 않았다. 문을 닫아걸고 몸가짐을 조심하였으며, 일은 구차하게 이루지 않았고 사람과 구차하게 영합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그 행실의 대략이다.
계사년(1893)에 국포공이 돌아가시자 공은 한천공의 명을 받들어 그 후사를 이었다. 그 이듬해 갑오년에 동비(東匪)들이 마을을 습격하여 약탈하자 사람들이 다투어 피하고 숨으면서 공에게 함께 가자고 권하였다. 하지만 공은 "나는 괜찮으니, 내가 궤연을 버리고 장차 어디로 가겠는가."라 하면서 여막을 굳건히 지켜 떠나지 않았으니 슬프게 곡하며 우는 모습이 사람을 감동시켰다. 동비들도 또한 공경하고 존모하여 침범하지 말라고 서로 경계하였다. 경자년(1900)에 한천공이 병을 앓았는데 공은 얼굴에 근심스런 기색을 띠고서 낮에는 쉬지 않고 밤에는 잠자지 않으면서 지극 정성으로 하늘에 기도하였다. 그러나 끝내 돌아가시게 되자 예에 맞게 상복을 입었다.
병인(1926), 무진년(1928)에 정 유인과 윤 유인이 서로 연이어 돌아가셨는데, 공은 나이가 이미 칠십이 되었는데도 오히려 기운을 내서 젊은 날처럼 예를 행할 때면 절도를 다하였으며, 제사에는 힘써서 정갈하고 깨끗함을 다하여 비록 노복이라도 옷을 빨아 입지 않으면 문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재계하고 목욕한 뒤 옷을 갈아입었으며 촛불을 밝게 켜고 밤을 지새웠는데, 강신제가 되면 더욱 공경을 다하였다. 살아 계실 때 즐기던 음식을 구하여 올렸는데, 만일 시기가 빠르거나 늦어서 구할 수 없게 되면 오랫동안 죄송한 마음을 지녔다. 집안 식구 중에 누가 제사에 참여하지 않으면, 책망하기를 "이러한 때 깊이 잠들면 너의 마음이 편안하더냐."라고 하였다. 여러 대의 묘소 석물(石物)을 전부 다 갖춰 빠트림이 없었는데, 오히려 대단히 좋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겼다.
무신년(1908)에 단발령이 내려졌는데, 본 고을 수령이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탐문하기 위해 편지로 공에게 물었다. 공은 죽기를 맹세하고 머리카락은 깎을 수 없다는 뜻으로 답하니, 본 고을 수령이 그의 굳건한 절조에 경탄하였다. 평소 거처할 때 안정되고 차분함으로 스스로를 닦고 형세와 이익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책을 보기 좋아하였는데, 매우 중요한 곳이 있으면 뽑아 기록하여 앉은 자리에 내걸어 아침저녁으로 보고 자신을 돌이켰으며 아울러 아들과 손자에게 보여주었다. 아들과 손자가 허물이 있으면 고금의 사적을 끌어와 보여주며 차분하게 깨우쳤으니, 비록 매질을 하지 않더라도 모두 두려워하고 복종하여 다시 범하지 않아 집안이 항상 엄숙하였다. 이웃 마을에 사교(邪敎)의 교주 소굴이 있었는데, 어리석은 백성들이 바람에 휩쓸리듯 미혹되어 돈과 비단을 전부다 갖다 바치니 집안 살림을 박살낸 자까지 있게 되었다. 공이 마을 사람들을 불러 그 이치에 맞지 않음을 지적하고 마을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도록 하였다. 본성이 어질고 베풀기를 좋아하였으니, 곤궁하게 떠돌아다니며 병들어 혼자 힘으로 앉지도 눕지도 못하는 자가 있었는데, 음식과 용변을 공이 직접 거들고 치웠으며 백방으로 침을 놓고 약으로 치료하여 오랜 뒤에 병이 나았다. 그 사람은 죽을 때까지 은덕으로 여겼다.
기유년(1909)에 불이 온 마을을 덮쳤는데, 공은 화염을 무릅쓰고 선대의 신주와 《이재집(頤齋集)》의 목판을 꺼내왔지만 《세고(世稿)》와 서적은 모두 재로 변해버려 공이 대단히 애통해하였다. 남아 있는 것도 또한 보존하기 어려울까 두려워 경술년에 《이수신편(理數新編)》을 정사(淨寫)하여 간행을 도모하였으나 힘이 부족하여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만은공을 용계사에 추향하자고 말하는 자가 있었는데, 공이 말하기를 "이미 조정의 명령으로 사원이 훼철되었으니, 사원에 제단을 쌓는 것도 오히려 불가하거늘 더구나 다시 만들어서 추향을 한단 말인가. 어른의 신령이 계신다면 어찌 기꺼이 흠향하겠는가."라 하였다. 병인년(1926)에 순종이 승하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탄식하기를 "지금 이후로는 다시 희망이 없다."라고 하고는 곧바로 한양으로 올라가 인산(因山)의 곡반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슬픈 감회를 풀어내었다. 대개 경술년 이후로 풍천의 감회주 94)를 견딜 수가 없어서 마을 뒤 높은 산등성이에 기산정을 지어서 임금을 그리는 마음을 의탁하였다. 항상 금옹(錦翁) 김원중, 회봉(晦峰) 고제규(高濟奎) 등 여러 벗과 진솔회를 만들어 간혹 산에 오르고 강가를 노닐거나 혹은 기산정에서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울적한 기분을 풀어내었으니, 지금 《기산고(箕山稿)》를 살펴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갑술년(1934) 3월 29일에 집에서 수를 누리다가 편안히 돌아가시니 위로 태어난 철종 무오년 10월 11일부터 향년 77세이며, 왕륜산(王輪山) 아래 치동(雉洞)의 선영 안 ■좌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전주 이씨 병사 원의(瑗儀)의 따님으로 올해 88세인데도 아직 병이 없고 건강하다. 다섯 아들과 딸 한 명을 두었으니, 아들은 효익(孝翼), 내익(來翼), 진익(璡翼), 용익(龍翼), 오익(五翼)이고 사위는 고령 신재휴(申宰休)이다. 효익의 아들은 서구(瑞九), 욱(旭), 진익의 후사로 출계한 현구(鉉九), 언구(彦九), 성구(聖九)이고 사위는 풍천 노병(盧秉), 울산 김귀수(金龜洙), 함평 이용근(李龍根)이다. 내익의 아들로 헌구(憲九)와 봉구(鳳九)가 있고 사위는 성주 이희영(李喜榮)이다. 진익의 후사로 들어온 이는 현구이다. 용익의 아들은 연구(演九)와 항구(杭九)이며, 사위는 김해 김학규(金鶴奎)이다. 오익의 아들은 황(熀)과 일구(鎰九)이며, 사위는 행주 기세인(奇世寅)이다. 증손 이하는 많아서 다 기록하지 않는다.
오호라! 공은 타고난 자품이 아름다운데다가 어진 조상들의 가르침에 무젖었다. 그러므로 비록 정신을 몰두하여 공부하거나 사우간에 강마하지 않아도 용모와 말투에서 드러나는 것은 절로 덕을 갖춘 기상이 있었으며, 평생 한 바가 도리에 맞지 않은 것이 적었기에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어 사람들이 모두 모범으로 삼았다. 집안을 바르게 하는 방법은 또한 말하지 않아도 믿었으며 엄하지 않아도 외복(畏服)하게 됨을 몸으로 가르쳤다. 그러므로 오늘날에서 여전히 유풍이 남아 있게 되었으니 어찌 훌륭하지 않으랴. 죽음을 맹세하고 머리카락을 지킨다는 답서와 고을의 사원에 선조의 제향을 허락하지 않음에 이르러서는 중화의 대의를 지키고 선조를 받드는 대의가 세상의 논의보다 월등하며 후대에 떳떳이 할 말이 있음을 볼 수 있으니 더욱 존경하고 탄복하게 된다.
사손(嗣孫) 서구가 나에게 〈행록(行錄)〉 한 통을 보여주고 빗돌에 새겨 세상에 드러낼 글을 요청하면서 '이것은 여러 숙부들의 의견이다.'라고 하였는데, 나는 그에 걸맞은 사람이 아니라고 사양하였으나 그 요청이 더욱 간절하였다. 내가 일찍이 한번 공에게 인사를 올린 때를 생각해보매 그 외모를 보고 곧바로 그 내면을 알았었는데, 지금 이 〈행록〉을 통해 더욱 그러함을 믿게 되었다. 공을 존경하기에 끝내 사양할 수 없어서 드디어 글을 살펴보고 서술하면서 명을 붙인다.

혁혁한 이옹이여赫赫頣翁
공은 대대로 전해 온 것을 계승하였네.公承世傳
아! 아름다운 자질이여猗嗟美質
이미 공경하고 또 온화하도다.旣敬且溫
평소 덕을 삼가하며庸德之愼
실질을 숭상하여 꾸미지 않았어라.伊實匪文
집안은 교화되고 위엄은 길하며家化威吉
고을에 원망하는 말이 없었노라.鄕無怨言
두 일의 높은 견해를二事高見
말하면 듣기에 흡족하도다.주 95)言足聽聞
실제 학문이 여기에 있나니學實在玆
어찌 한 가지만 잘한다고 기필하리오.豈必專門
치동의 산기슭에雉洞之麓
그 봉분이 높으니,有崇其墳
내가 빗돌에 새겨我銘于石
후대 천 년에 알리노라.用詔千春
주석 93)입과 귀로 얻는 것
구이지학(口耳之學)을 가리킨다. 《순자(荀子)》 〈권학(勸學)〉에 "소인의 학문은 귀로 들어가서 입으로 나간다.[小人之學也 入乎耳 出乎口]"라고 하였으니, 그저 도청도설(道聽途說)하는 것 같은 천박한 학문을 가리킨다.
주석 94)풍천의 감회
'풍천(風泉)의 감회'는 《시경》 〈비풍(匪風)〉과 〈하천(下泉)〉을 이른다. 모두 제후의 대부가 주나라 왕실이 쇠미해진 것을 탄식해 읊은 시인데, 망한 왕조를 그리는 뜻으로 쓰인다.
주석 95)말하면 듣기에 흡족하도다
《서경(書經)》 〈중훼지고(仲虺之誥)〉에 "더구나 우리 탕왕(湯王)의 덕(德)이, 말하면 사람들의 들음에 흡족함에 있어서이겠습니까.[矧予之德, 言足聽聞.]"라고 하였다.
箕山黃公墓碣銘【幷序】
維湖以南, 數文獻家, 指屈於興城龜壽之黃氏者. 以翊衛司翊贊頣齋先生, 學崇業富, 名達邦國, 有以創之於前, 雖今之世, 風潮大變, 然接其貌有淳氣 ; 入其家有禮俗, 不失故家餘韻. 亦惟黃氏見焉者, 以近故慶基殿參奉箕山公, 有以躳修行義, 而守成於後也. 公諱鍾允字汝執平海人. 譜自高麗參贊議政府事諱淑卿始, 是生諱吉源, 入本朝繕工監正. 五傳而副護軍諱紐, 自春川而南. 又七傳而有諱胤錫, 則是爲頣齋先生. 上三世, 有醉隱諱世基、山村諱載萬、晩隱諱㙻之賢德而啓之. 下有壽村諱一漢、檀翁諱秀瓊、晦窩諱中燮、菊圃諱在濂及其弟寒泉諱在學, 四世之文行而繼之. 公, 菊圃公之子, 其妣孺人長興高氏鶴鎭女、南原尹氏禹鉉女. 寒泉公及孺人延日鄭氏生員季良女, 其本生也. 公禀質慤實, 器宇寬厚, 處己謙遜, 接人和敬, 未嘗有疾言遽色, 遇事難處, 意度晏閒, 無畏憚色, 徐以理裁, 竟得其當. 言行尙質而不以文, 於文字亦不屑口耳得. 筆畫端正, 雖急遽不潦草. 杜門飭躳, 事不苟就, 人不苟合, 此其槩也. 癸巳, 菊圃公卒, 公奉寒泉公命, 繼其後. 翌年甲午, 東匪暴掠閭里, 人爭避匿而勸公偕去, 則曰 : "人則可也, 吾舍几筵, 將安之." 堅不離廬. 哭泣之哀, 有足動人, 匪類亦敬慕, 相戒勿侵. 庚子, 寒泉公有疾, 憂形于色, 晝不息夜不寐, 至誠祈天, 竟無幸, 持服如禮. 丙寅戊辰, 鄭孺人、尹孺人相繼而喪, 則公年已七十, 猶以筋力爲禮盡節如少日, 祭祀務盡蠲潔, 雖婢僕不著澣衣者, 不許入門. 齋沐易服, 明燭達夜, 及灌而益致敬. 求薦生時所嗜物, 如時期早晩而未然, 則久抱缺憾. 家衆或不叅祀, 責之曰 : "此時熟睡, 於汝心安乎." 累世墓儀, 誠備無闕, 猶以未盡善爲恨. 戊申, 剃髮之令, 本倅欲探物議, 書問於公, 公以誓死髮不可斷之意答之, 本倅對人敬嘆其固執. 平居恬靜自修, 不以勢利經心. 好看書, 有切要處, 拈出揭座, 朝夕觀省, 幷示子孫. 子孫有過, 引古證今, 諄諄諭誨, 雖不加榎楚而皆畏服不復犯, 門庭常肅然. 隣里有邪敎主窟, 愚民風靡迷惑, 銷盡金帛, 至有傾家者. 公招里人, 斥其非理, 使勿入里中. 晏然性仁惠, 有窮旅病不能坐臥者, 其飮食便尿, 公親自扶護, 百方針藥, 久而後瘳, 其人終身德之. 己酉, 火燒一里, 公冒炎奉出先主、《頣齋集》板, 《世稿》與書籍, 盡入灰燼, 公深痛之, 恐存者亦難保, 庚戌繕寫《理藪新編》營刋, 而力綿未果. 人有以追享晩隱公於龍溪祠爲言者, 公曰 : "旣以朝令撤院, 則壇祠猶不可爲, 况復設而追享乎. 先子有靈, 豈肯享之." 丙寅, 聞純宗昇遐之報, 痛哭而嘆曰 : "今焉而後, 更無望矣." 卽上京叅因山哭班. 因入金剛山, 以洩悲懷. 蓋自庚戌以後, 不勝風泉之感, 築箕山亭於里後高岡, 以寓倚斗之情. 每與金錦翁源中、高晦峰濟奎諸友, 爲眞率會, 或登山臨水, 或引酒賦詩於亭上, 以吐壹鬱之氣, 今觀乎《箕山稿》, 可知矣. 以甲戌三月二十九日, 考終于家, 上距其生哲宗戊午十月十一日, 壽爲七十七, 葬于王輪山下雉洞先塋內■坐原. 夫人全州李氏兵使瑗儀女, 今年八十八而尙無恙. 擧五男一女, 男孝翼、來翼、璡翼、龍翼、五翼, 高靈申宰休, 壻也. 孝翼男, 瑞九、旭、鉉九, 出爲璡翼后, 彦九、聖九, 壻, 豊川盧秉、蔚山金龜洙、咸平李龍根. 來翼男, 憲九、鳳九, 壻, 星州李喜榮. 璡翼系男, 鉉九. 龍翼男, 演九、杭九, 壻, 金海金鶴奎. 五翼男, 熀、鎰九, 壻, 幸州奇世寅. 曾孫以下, 多不盡錄. 嗚呼! 公得天姿之美 ; 染賢祖之澤, 故雖不極意問學, 講劘師友, 然見於容貌辭氣者, 自有有德之象, 而一生所爲, 不合道理者, 蓋寡矣, 故孚及于人, 人皆矜式. 其正家之方, 則又自有不言而信, 不嚴而畏之身敎, 故致得尙有遺風於如今之日, 詎不偉哉. 至於誓死保髮之答書, 祀祖鄕祠之不許, 則見得守華之大義 ; 尊先之正禮, 卓出世論, 而有辭來許者, 尢可敬服也. 嗣孫瑞九示余行錄一通, 請以顯刻之文, 而謂'是諸父意,' 余辭非其人, 則其請愈勤. 念余亦曾一拜公, 見其外, 已知其中, 而今因是錄而益信矣. 其在景仰, 不能終辭, 遂按而叙之, 系之以銘曰 : "赫赫頣翁, 公承世傳. 猗嗟美質, 旣敬且溫. 庸德之愼, 伊實匪文. 家化威吉, 鄕無怨言. 二事高見, 言足聽聞. 學實在玆, 豈必專門. 雉洞之麓, 有崇其墳. 我銘于石, 用詔千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