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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3
  • 묘갈명(墓碣銘)
  • 덕계 최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德溪崔公墓碣銘【幷序】)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3 / 묘갈명(墓碣銘)

자료ID HIKS_Z038_01_B00001_001.023.0001.TXT.0015
덕계 최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
옛날 나는 덕계(德溪) 최공의 문집에 서문을 썼는데, 지금 증손 규정(圭貞)이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공이 지은 행장을 보여주면서 다시 나에게 묘갈명을 부탁하였다. 나는 "사양하네. 스스로 생각하건대, 글을 잘 짓지 못하니 존선(尊先)의 실덕을 드러내지 못한다. 한 차례도 오히려 두려운데 하물며 두 번이나 글을 지으랴."라 하니, 최군이 말하기를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 세상에서 글을 잘한다는 자들은 타인의 묘도 문자에 실상과 판이하게 기술한 경우가 많으니 제 마음에 매우 들지 않습니다. 생각하건대 우리 선조의 실덕을 꼭 맞게 그려낼 사람으로 끝내 문하만한 이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거듭 요청하는 것이니, 글을 잘해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 또한 어찌 감당하리오. 그러나 이미 글을 잘해서만 맡긴 것이 아니라고 하니, 이는 이른바 다른 사람의 구함과 다르다주 69)는 것이니, 어찌 끝내 사양하리오."라 하였다.
공은 우리 고을에서 백 년 전부터 모든 사람들이 한마디로 최효자라고 일컬어지는 분으로, 휘는 찬수(燦秀) 자는 내겸(乃兼) 본관은 전주이다. 고려 문성공文成公) 휘 아(阿)란 분이 시조이다. 조선에 들어와 판관으로 병조참판에 추증된 휘 희정(希汀)은 정암 조광조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나라에 충성을 바쳤으니, 공의 10대조이다. 조부의 휘는 응성(應性), 부친의 휘는 영운(永雲)이다. 모친은 여산 송씨 종찬(鍾燦)의 따님이다.
공은 순조 신사년(1821)에 고부 두지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본성이 지극하여 밤에 이부자리를 봐 드리고 새벽에 문안드리면서 따뜻하고 시원한가를 살폈으니 가르치지 않아도 잘하였다. 부드러운 낯빛으로 뜻을 받들고 항상 몸가짐을 조심하여 말은 입에서 내지 못할 것 같았고 몸은 옷을 이기지 못할 듯하였다. 종일토록 부모님 곁에 있으면서 명을 받아야만 나아가고 물러났다. 수고로운 일을 부모 대신 맡아 봉양하였으며, 맛있는 음식을 빠트리지 않고 올렸다. 이렇게 행하고 남은 힘으로 책에 힘써서 그 뜻을 길렀다. 부모님의 훈계는 죽을 때까지 잊지 않았으며 품속에 적어 놓았다. 부모가 병이 나면 온 마음으로 약을 조제하고 하늘에 자신이 대신 죽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 이외에 다른 일은 하지 않았다. 상을 당해 곡하면 가슴을 치다가 자주 기절하였으며, 장례와 제사의 처음부터 끝까지 슬픔과 예절을 모두 지극히 하였다. 묘소 곁에 집을 지어놓고 초하루나 보름의 제전(祭奠)주 70) 이외에는 한 번도 산을 내려가지 않았다. 무릎이 닿은 곳은 움푹 파였으며, 눈물이 닿은 풀은 시들었다. 아침저녁으로 그리워하는 슬픔에 듣는 이들은 눈물을 뿌렸다. 남쪽으로 온 벼슬아치들은 여막을 지나면서 공경을 표하였고, 마을의 선비들이 관찰사주 71)나 현의 관리에게 서로 추천하니, 공이 듣고 만류하기를 "나의 불효를 덧보태지 말라."라고 하였다. 이상이 대략적인 공의 행적이다.
대개 후대에서 효도를 칭할 때는 반드시 눈 속에서 죽순을 구하거나 얼음 속에서 잉어가 뛰어오르는 일주 72)이 있어야 기이한 일이라고 놀란 이후에 이에 세상에 널리 전한다. 지금 공의 효도는 〈곡례〉와 《소학》을 넘지 않고서 일반적인 도리와 소략한 예절을 다하였는데도 여론은 공을 칭송하였다. 공을 일컬을 때는 성명을 붙이지 않고 단지 "효자"라고 하였으며, 공이 마을을 일컬을 때에는 마을 이름을 부르지 않고 다만 "효자향, 효자리"라고 하였으며, 공이 친척을 일컬을 때는 성명을 부르지 않고 다만 "효자의 아무개 친척"이라고 하였으니,주 73) 이는 어째서 그런 것인가.
공자가 말하기를 "살아계실 때나 죽어서 장사지낼 때나 제사 지낼 때 예로써 하면, 효이다."주 74)라 하였으며, 증자가 어버이를 섬길 때 또한 그 뜻과 존체를 봉양하면서 기이한 일이 없었다. 대저 효도를 공자와 증자 같이 한다면 지극하다고 이를 수 있다. '효제는 신명과 통한다.'주 75)고 하였는데, 공의 효도는 또한 공자와 증자를 뒤따랐으니, 신명은 비록 통할 것을 기필하기 어렵지만, 어찌 사람에게 감동을 주어 통하지 않겠는가. 사람들의 여론이 공을 칭송하는 것은 당연하니, 어찌 반드시 죽순이나 잉어의 기이한 일처럼 한 때 우연한 일 들을 말해야 하는가. 대저 '그의 부모 형제가 그를 칭찬하는 말에 남들이 딴말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대성인에게 '효성스럽구나.'라는 칭송을 받았으니,주 76)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이 다 똑같이 말하는 것에 남들이 딴 말을 하지 않으니 이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공은 고종 정해년(1887) 6월 21일에 돌아가셔서 두지리 뒤쪽 유좌(酉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안동 권씨 석영의 따님으로, 시부모를 효도로 모셨고 남편을 공경으로 대하였으니, 또한 공이 아내에게 모범이 된 것주 77)을 볼 수 있다. 아들은 병식(秉湜)이며, 딸은 김요경(金堯儆)에게 시집갔다. 손자로 첫째 경열(暻烈)은 남의 후사로 출계하였으며, 둘째는 인열(寅烈)이다. 사위 김 서방의 아들은 영중(靈中)이다. 증손으로 규원(圭元)은 일찍 죽었는데, 아내 김씨가 수절하면서 시아버지를 효성스럽게 봉양하였다. 그 외 규형(圭享), 규리(圭利), 규정(圭貞)이 있다.
오호라! 공은 참으로 지극히 효성스러운 사람이다. 효성이 이미 원천이 되었으니, 여러 가지 좋은 점을 다 갖추었다. 덕스런 기운은 안색과 말에 드러나고 위의는 행동거지에 나타났다. 사람과 더불어 말할 때 충효와 자상(慈祥)을 힘썼으며, 자신을 수양함에 인의와 예양(禮讓)을 따랐다. 저술한 글은 대부분 〈육아(蓼莪)〉와 '풍수(風樹)'의 의미주 78)를 담은 것과 윤리를 바르게 하고 의리를 독실하게 하는 말로 사람의 선함을 감발시키고 세상의 교화에 도움이 될 만 하였으니, 효 한 가지로만 명성을 이뤘다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이 또한 분명하다. 이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이에 명을 짓는다.

저 두지의 서쪽 산기슭을 바라보니睠彼斗池西麓
이는 지극한 효자의 무덤이로다是爲純孝眞宅
살아서 은혜로운 명이 없었다고 말하지 마라莫曰生無恩命
자신에게 양귀와 천작이 있나니주 79)自有良貴天爵
정려와 포양이 모두 빠졌다고 말하지 마라莫曰幷闕旌褒
많은 사람들이 풍비주 80)에 비각을 세웠으니萬口豊碑綽楔
천추 만년의 뒷날에有來千秋萬齡
과객이 몸을 굽혀 절을 올리리라過者其躬必鞠
주석 69)다른……다르다
《논어》 〈학이(學而)〉의 "부자는 온화하고 선량하고 공손하고 검소하고 겸양하여 얻는 것이니, 부자가 구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구하는 것과는 다르다.[夫子溫良恭儉讓以得之 夫子之求之也 其諸異乎人之求之與]"라는 말에서 나왔는데, 공자의 구함이 다른 사람과 다른 것처럼 상대방의 부탁이 여타 다른 사람의 그것과 차원이 다름을 이야기 하고 있다.
주석 70)초하루나 보름의 제전(祭奠)
삭망전(朔望奠)을 가리킨다. 상중에 있는 집에서 매달 초하루와 보름날에 지내는 제사이다.
주석 71)관찰사
'도수(道繡)'는 원래 암행어사를 가리키는 말인데, 암행어사에게 추천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여기서는 도백(道伯), 즉 관찰사로 보인다.
주석 72)눈 속에서……일
맹종(孟宗)은 병이 위중한 어머니가 한겨울에 죽순을 먹고 싶어 하자 대숲에 들어가 슬피 울었는데 죽순이 돋아났다고 하며, 왕상(王祥)은 계모 주씨(朱氏)가 겨울에 생선을 먹고 싶어 하자 옷을 벗고 얼음을 깨고 물에 들어가 고기를 잡으려 하였는데 홀연히 얼음이 풀리며 잉어 두 마리가 뛰어올랐다고 하니, 모두 효성이 지극함을 말한다. 《五倫行實圖 孝子》
주석 73)공을 일컬을……하였으니
이 구절은 《소학》 권6 〈선행(善行)〉에 보이는 호원(胡瑗의 내용을 변용하였다. 호원이 호주(湖州)의 교수(敎授)로 있을 때, 많은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뛰어난 학생들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하였다. 학생들의 행동거지도 반듯하여 "묻지 않아도 선생의 제자임을 알 수 있으며, 배우는 자들이 이야기하며 선생이라고 말하면 묻지 않아도 호공을 가리키는 것임을 안다.[不問可知爲先生弟子, 其學者相語稱先生, 不問可知爲胡公也.]"라고 하였다.
주석 74)공자가……효이다
《논어》 위정(爲政)에, 공자가 효(孝)에 대해 대답하면서 "부모가 살아 계실 때에는 섬기기를 예로써 하고, 돌아가시면 장사 지내기를 예로써 하고, 제사 지낼 때에도 예로써 하는 것이다.〔生事之以禮 死葬之以禮 祭之以禮〕"라고 대답하였는데, 이 말을 축약해서 이렇게 표현하였다.
주석 75)효제는 신명과 통한다
정이(程頤)가 찬술한 정호(程顥)의 행장에서 "충성은 금석을 꿸 만하였고 효제는 신명에 통할 만하였다.〔忠誠貫於金石 孝悌通於神明〕"라 하였다. 《二程文集 卷12 明道先生行狀》
주석 76)그의……받았으니
《논어》 〈선진(先進)〉에서 "에효성스럽다, 민자건이여, 그의 부모 형제가 그를 칭찬하는 말에 남들이 딴말을 하지 못하도다.[孝哉, 閔子騫! 人不間於其父母昆弟之言〕"라고 하였다.
주석 77)아내에게 모범이 된 것
《시경》 〈사제(思齊)〉에서 "나의 아내에게 모범이 되어, 형제에까지 그 덕이 미쳐서, 집과 나라를 잘 다스린다.〔刑于寡妻 至于兄弟 以御于家邦〕"라고 하였다.
주석 78)
부모가 살아 계실 때 잘 봉양하지 못한 데 대한 후회를 말한다. 육아는 《시경》 소아(小雅)의 편명(篇名)으로, 효자가 부모를 끝까지 봉양하지 못한 데 대한 슬픔을 읊은 시이며, 풍수는 《한시외전(韓詩外傳)》 제9권의 "나무는 고요히 있으려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봉양하려고 하나 부모가 기다려 주지 않는다.[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也]"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석 79)자신에게……있나니
《맹자》 〈고자 상〉에 "귀하고자 함은 사람의 똑같은 마음이니, 사람마다 자기에게 귀함이 있건마는 생각하지 않아서 모를 뿐이다. 남이 귀하게 해준 것은 양귀(良貴)가 아니다.[欲貴者, 人之同心也. 人人有貴於己者, 弗思耳. 人之所貴者, 非良貴也.]" 그 주에서 주자는 "나에게 있는 귀함은 천작이다.[貴於己者天爵]"라 하였다. '천작(天爵)'은 사람이 주는 작위(爵位)라는 뜻의 인작(人爵)과 상대되는 말로, 아름다운 덕행과 같은 천연(天然)의 작위라는 뜻이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인의충신과 선을 좋아하여 게을리 하지 않는 이것이 바로 천작이요, 공경대부 같은 종류는 인작일 뿐이다.〔仁義忠信樂善不倦 此天爵也 公卿大夫 此人爵也〕"라 하였다.
주석 80)풍비(豊碑)
공적을 기록한 거대한 석비(石碑)를 말한다.
德溪崔公墓碣銘【幷序】
昔余序德溪崔公遺文矣, 今其曾孫圭貞, 示以松沙奇公宇萬所撰狀文, 復請余墓銘.余曰 : "辭.自惟不文, 無以闡尊先實德.一之猶懼, 矧再之." 崔君曰 : "竊觀今世能文者, 多浮實於人家牲石, 甚不滿人意.念可以得中於吾祖實德, 竟無如門下者, 此所以重求之, 非以文也." 余曰 : "是又何敢當.然旣不以文, 是所謂'異乎人之求'者, 其何能終辭." 公, 吾鄕百年以來, 一辭所稱崔孝子也, 諱燦秀, 字乃兼, 貫全州.高麗文成公諱阿, 其始祖.本朝判官贈兵曹參判諱希汀, 學受靜菴, 忠在國朝, 其十世也.祖諱應性, 考諱永雲, 幷有行誼.妣, 礪山宋氏鍾燦女.以純廟辛巳, 生於古阜斗池里.幼有至性, 定省溫凊, 不敎而能.愉婉洞屬, 言若不出, 身若不勝.終日親側, 進退惟命.服勞奉養, 甘旨無闕.餘力劬書, 以養其志.父母有訓, 終身不忘, 爲懷中簡.親癠, 合藥禱天乞代之外, 無他事.丁憂, 哭擗屢絶, 初終葬祭, 情文俱至.築室墓側, 朔望祭奠之外, 一不下山.當膝成坎, 淚著草枯.朝夕哀慕, 聞者揮涕.搢紳之南來者, 過廬而致敬.鄕人士, 交薦于道繡縣官, 公聞而止之曰 : "毋重吾不孝." 此公之大致也.蓋後世之稱孝, 必有雪笋氷鯉, 可驚奇事而後, 乃喧傳于世.今公之孝, 則不踰乎〈曲禮〉《小學》, 常道疏節之是盡, 而輿論公誦之.稱公, 不以姓名而曰孝子 ; 稱公之鄕里, 不以名號而曰孝子鄕孝子里 ; 稱公族黨, 不以姓名而曰孝子某親, 此何以也.孔子有言曰 : "生死葬祭以禮, 孝矣." 曾子之事親也, 亦養志體而無異事.夫孝如孔、曾, 可謂至矣.孝悌通於神明, 公之孝, 亦惟孔、曾是追, 則神雖難必, 豈不可以感通於人乎.宜乎得夫人之輿誦也.奚必笋鯉奇事, 一時適然者之是道哉.夫以不間於父母昆弟之言, 得孝哉之稱於大聖, 則人不間於公共僉同之言者, 何獨不然也.公卒以高宗丁亥六月二十一日, 葬斗池後酉原.夫人, 安東權氏錫榮女, 孝舅姑敬君子, 亦見刑于攸及也.男秉湜, 女適金堯儆.孫長暻烈出后, 次寅烈.金壻男靈中.曾孫圭元早歿, 妻金氏守義, 孝養其舅.圭享、圭利、圭貞.嗚乎! 公, 固純孝人也.孝旣爲源, 衆善畢備.德氣達於色辭, 威儀著乎動止.與人言, 忠孝慈祥是勉 ; 行於己, 仁義禮讓是遵.所著文字, 又多蓼莪風樹之意, 正倫篤義之語, 足以感發人善, 補益世敎者, 其不可斷以一孝成名也, 又審矣.是不可以不知也.爲之銘曰 : "睠彼斗池西麓, 是爲純孝眞宅.莫曰生無恩命, 自有良貴天爵.莫曰幷闕旌褒, 萬口豊碑綽楔.有來千秋萬齡, 過者其躬必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