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역/표점
- 국역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3
- 묘갈명(墓碣銘)
- 창유재 소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昌裕齋蘇公墓碣銘【幷序】)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3 / 묘갈명(墓碣銘)
창유재 소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
옛날 간재 선사께서 완산에서 도를 강학하실 때 만재(晩齋) 소휘식(蘇輝植) 공이 있었는데, 선사께서 매우 즐겁게 그와 벗할 때 그 아들 열재(悅齋) 학규(學奎)가 따라왔었다. 만재공은 일찍이 진사에 장원하였으며 문장과 학식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열재도 또한 이른 나이에 성균관에 올랐지만 공부를 더욱 부지런히 하여 명성이 드높았다. 후에 다시 간옹을 스승으로 정하여 우리 유림의 큰 기대를 받았다. 내가 생각건대, 아들이 부친의 덕을 이어받아주 58) 남쪽 지방의 명문가가 된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아마도 그 선대에 은덕과 인을 쌓아서 그 토대가 되는 자가 있었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근래 열재의 조부인 창유재 공의 가장을 얻어서 읽은 뒤에 감탄하면서 "그 원인이 있었도다! 이 분이 그것을 열어주었구나."라고 하였다.
공의 휘는 성술(星述) 자는 군삼(君三)으로, 순조 갑자년(1804) 7월 14일이 태어난 날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자질이 충후(忠厚)하여 순수한 덕과 훌륭한 행실은 천성에서 자연스럽게 나왔다. 부모에 대한 효도를 살펴보면, 어려서부터 사랑하고 공경하였으며 장성하여서는 마음을 다하여 봉양하였다. 병이 나면 대변을 맛보고 하늘에 기도하였다. 상을 당하면 예절에 맞게 슬퍼하였다. 기일에는 스스로 희생과 반찬을 장만하면서 좋은 제수를 바쳐주 59) 제사를 돕는 것을 상례(常例)로 삼았다. 선조를 받든 것을 살펴보면, 고조 이하의 제전(祭田)과 묘소의 의물(儀物) 등을 홀로 수고하여주 60) 마련하였으며, 친척들의 힘을 기다리지 않았다. 우애하는 것을 보면, 담을 사이에 두고 연이어 거처하면서 굶주림과 배부름을 함께 나눴다. 과부가 된 누이를 위하여 집을 지어 거처하게 하고 그 자식을 자신의 자식처럼 사랑으로 대하였다.
친족 간에 화목한 것을 보면, 나이가 장성하여 가난한 자를 시집보내고 장가들였으며, 곤궁하여 재산이 없는 자에게는 밭을 나눠주면서 살게 하였다. 흉년에 종친을 위한 진대(賑貸)를 만들어서 널리 진휼하였다. 벗을 대하는 것을 살펴보면, 베풀기를 좋아하여 인색하지 않았으며, 초상과 장례에 반드시 두텁게 부의하였다. 좋은 때 화창한 날이 되면 술을 차려서 친구들을 불러 모아 온화한 기운이 넘쳐났다. 후진을 가르친 것을 살펴보면, 집의 살림을 다스릴 때부터 좋은 밭은 생각지도 않고 먼저 경적(經籍)을 구해 보관하여 자손들의 학업에 대비하였다. 마을의 자제 가운데 가르칠 만한 자가 있으면 학비를 도와주고 권장하여 성취한 자가 많았다. 일흔여섯의 수를 누리다가 기묘년(1879) 8월 2일 돌아가시니, 전주 봉서산 아래 용흥리 북쪽 산기슭 임좌(壬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오호라! 여러 가지 선이 공에게 갖추어졌지만 가장 훌륭한 것은 효도이다. 사림들은 공이 '종신토록 부모를 사모하는 마음'주 61)을 지녔다고 하여 그 내용을 지방의 감영과 부(府)에 올렸으며, 상국 정범조(鄭範朝)가 도백으로 있을 때 효성과 우애가 뛰어나고 행실이 삼가고 조심스럽다고 특별히 조정에 천거하였으니, 공의 행실이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준 것을 더욱 믿을 수 있다. 대저 효는 온갖 행실의 근원이다. 근원이 있으면 흐름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부모에게 효성을 다한 것 이외에 선조를 받들고 우애하고 화목한 것에서 벗을 대하고 사람을 가르치는 것까지 자신의 마음을 다하면서 재물을 즐겨 사용하였으니, 요컨대 이러한 것은 모두 인후(仁厚)의 실제로 귀결되게 한 이후에야 그만두었다. 대개 공은 충효로 바탕을 삼았으니, 그러므로 실용에 드러난 것도 또한 두텁다.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 두터우니, 그러므로 미루어서 행하는 것이 두텁지 않은 것이 없다. 《주역》에서 "곤의 두터움이 만물을 실음은 건의 끝없는 덕에 합한다."주 62)라 하였는데, 다만 땅이 두텁기 때문에 만물을 실으니, 사람이 두터우면 그 후손이 번창한 것은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공의 자손이 양 대에 걸쳐 지금과 후대에 아름다운 명성을 드러내는 것은 마땅하며, 공의 어짊도 더욱 드러나게 될 것이다. 대개 당시의 여론은 공이 능히 가문을 창대하게 만들고주 63) 후손들에게 넉넉한 덕을 끼쳤다주 64)고 하였으니, 이에 자신의 집을 창유(昌裕)라고 호칭하는 것은 또한 공자가 말한 '기리는 바가 있으면 일찍이 시험하여 보았기 때문이다.'주 65)는 뜻을 얻은 것이다.
소씨는 진주에서 나왔다. 고려 상호군 희철(希哲)이 시조가 된다. 소윤 천(遷)은 포은 정몽주 선생을 스승으로 섬겼으며 만육(晩六) 최양(崔瀁)과 더불어 전주에서 자정(自靖)하였다. 대사간 곤암(困菴) 세량(世良)과 대제학 문정공(文靖公) 양곡(陽谷) 세양(世讓) 형제는 조선에서 현달하였다. 군수 련(連)은 을사사화 때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났다. 주부 호선(好善), 도사 여형(汝衡)은 광해조 때 쫓겨났다. 이분들이 곤암의 아들, 손자, 증손이며, 공의 7대조 윗분들이다. 증조 덕소(德邵)는 효도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조부 원대(元大)는 학문이 뛰어났다. 부친 수광(洙廣)는 호가 담묵재(淡默齋)인데, 경학으로 이름이 났다. 모친은 전주 이씨 경삼(景三)의 따님이다. 공의 어짊은 또한 먼 조상으로부터 기인한 바가 있고 가까운 조부와 부친으로부터 교육 받은 것이 있으니 영지는 참으로 뿌리가 있는 것과 같다.
부인은 문화 유씨 기원(基源)의 따님으로, 단정하며 온순하고 매우 부지런하여 능히 남편을 도왔다. 무덤은 공의 묘소 서쪽 산록 골짜기 뒤에 있다. 아들로 장남은 휘식(輝植), 차남과 셋째는 휘정(輝楨), 휘백(輝栢)이다. 딸은 전의 이석관과 전주 최광욱에게 시집갔다. 장남의 아들로 학규(學奎), 명규(命奎), 상규(祥奎), 승규(承奎), 장규(章奎)가 있는데, 명규는 출계(出系)하였다. 차남의 아들로 택규(宅奎)가 있다. 셋째의 아들로 명규가 후사로 들어왔다. 손녀와 증손, 현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나는 공에 대해 선대 인척(姻戚)의 정의(情誼)가 있다. 열재가 이 때문에 '일이 한 집안이나 마찬가지이니, 다른 사람에게서 글을 구할 필요가 없다.'라고 하고서 나에게 공의 묘소의 비명(碑銘)을 짓게 하였다. 그 요구는 문장으로서 한 것이 아니라 정의로서 한 것이기에 감히 사양할 수 없다. 명은 다음과 같다.
능히 창대한다는 것은 《시경》의 말이고克昌云詩
후손에게 덕을 드리운 다는 건 《서경》의 말이네垂裕稱書
옛날 은나라와 주나라는在昔殷周
선이 쌓여 경사가 후손에 전해졌도다善積慶餘
공은 아름다운 자질을 받아公得美質
행실에 뭇 선을 갖추었으니行備衆善
정성으로 효도와 우애하여孝友以誠
억지로 힘쓰지 않았어라不待强勉
친척에게 화목하고 구휼하며睦恤宗黨
후진에게 학문을 권장하였으니獎學後輩
그 전체를 총괄하자면總厥全體
오직 두터움[厚] 한 글자로다惟厚一字
이로써 몸을 닦고 집을 가지런함에用此修齊
옛날부터 이것을 법으로 삼았으니古先是法
집과 나라는 비록 다르지만家國雖殊
한 이치로 부합하기에一理符合
그 창성하고 넉넉함이 마땅하니宜其昌裕
《시경》, 《서경》의 말과 같도다若詩書言
만일 믿지 못하겠다고 말한다면如謂不信
자손의 어짊을 보시라視子孫賢
아 세상 사람들아嗟世之人
어찌 이를 거울삼지 않으랴胡不鑑玆
빗돌에 새겨서刻之貞珉
후손에게 알리노라庸詔有來
- 주석 58)
- 아들이……이어받아 '제미(世濟美)'는 원래 후손이 전대의 업적을 계승하여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을 뜻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문공(文公) 18년 조에 "선대의 미덕을 계승하여, 그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았다.〔世濟其美 不隕其名〕" 한 데서 나왔다. 여기에서는 아들인 열재가 부친인 만재의 덕을 이어받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주석 59)좋은 제수를 바쳐
- '헌현(獻賢)'은 좋은 제수를 쓴다는 말이다. 《송자대전(宋子大全)》 권78 〈한여석에게 답함〔答韓汝碩〕〉에서 "고례(古禮)에 '헌현(獻賢)'이란 문구가 있다. 대체로 지자(支子)에게 두 희생(犧牲)이 있을 경우에 그중 좋은 희생을 종자(宗子)에게 드려서 제수(祭需)에 쓰도록 하는 것인데 정자(程子)께서 말한 '물질로써 돕는다.'는 뜻이다. 좋은 희생을 드려서 돕는다면 그 성의를 다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 주석 60)홀로 수고하여
- '독현(獨賢)'은 원래 혼자서 나랏일을 위해 고생하며 동분서주한다는 뜻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북산(北山)에 "너른 하늘 아래 어떤 곳도 왕의 땅 아닌 곳이 없고, 어느 땅 물가의 사람도 왕의 신하 아닌 자가 없는데, 대부들을 공평하게 쓰지 않고서, 나만 부려먹으며 홀로 어질다 하는구나.[溥天之下 莫非王土 率土之濱 莫非王臣 大夫不均 我從事獨賢]"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는 홀로 제전과 묘의를 담당하였다는 의미이다.
- 주석 61)종신토록 부모를 사모하는 마음
- 《맹자》 〈만장상(萬章上)〉에서 맹자는 "진정한 효자는 종신토록 부모를 사모하는 법이다. 나이 오십이 되어서도 사모했던 경우를 나는 위대한 순 임금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大孝終身慕父母 五十而慕者 予於大舜見之矣〕"라 하였다.
- 주석 62)《주역》에서……합한다
- 〈곤괘(坤卦) 단전(彖傳)〉에 보이는 말이다.
- 주석 63)능히…… 만들고
- 《시경(詩經)》 〈주송(周頌) 옹(雝)〉에서 "위로는 하늘을 편안케 하시고, 아래로는 그 후손을 창성하게 하셨다.〔燕及皇天, 克昌厥後〕"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후손을 가문으로 바꿔 사용하였다.
- 주석 64)후손들에게……끼쳤다
- 후손에게 덕행을 많이 남겨 준다는 뜻으로, 《서경》 〈중훼지고(仲虺之誥)〉에 "의로 일을 바로잡고 예로 마음을 바로잡아 후세에 덕행을 남겨 주소서.〔以義制事 以禮制心 垂裕後昆〕" 한 데서 나온 말이다.
- 주석 65)공자가……보았다
-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나오는 말이다. 공자께서 "내가 남에 대해 누구를 비방하고 누구를 칭송하겠는가. 만약 칭송하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시험해 봄이 있어서이다. 이 백성들은 삼대 시대에 정직한 도로 행해 왔기 때문이다.〔吾之於人也 誰毁誰譽 如有所譽者 其有所試矣 斯民也 三代之所以直道而行也〕"라고 하였다
昌裕齋蘇公墓碣銘【幷序】
昔我艮翁先師, 講道完山也, 有晩齋蘇公輝植, 先師與之友甚歡, 曁其子悅齋學奎, 從焉.晩齋公, 曾魁進士, 以文章學識著當世.悅齋, 亦早年上庠而學益勤, 蔚有聲譽.後復定師艮翁, 爲吾林碩望.余惟父子濟美, 爲南服名家者, 夫豈偶然.意其先有積功累仁, 以爲基本者, 比得悅齋祖考昌裕齋公家狀讀之, 嘆曰 : "有以哉, 此其啓之." 公諱星述字君三, 純祖甲子七月十四日, 其生也.生而禀質忠厚, 淳德懿行, 蓋出天性.孝親, 則自幼愛敬, 長而忠養.有癠, 嘗糞祝天.遭艱, 哀毁如制.夫日, 自備牲羞, 獻賢助祭, 以爲常.奉先, 則高祖以下, 祭田墓儀, 獨賢勞營備, 不待族親之力.友于, 則隔墻聯居, 與同飢飽.爲寡姊築室居之, 撫其子如己出.睦族, 則年壯而貧者, 嫁娶之, 窮無資者, 分田爲其生.歉歲, 設宗賑而廣賙.待知舊, 則喜施不吝, 喪葬必厚賻.良辰佳日, 置酒會集, 和氣藹然.敎後進, 則自治家時, 不謀良田, 先求經籍藏之, 備子孫學業.鄕黨子弟可敎者, 亦資學費獎勸, 多成就者.壽七十六而卒于己卯八月二日, 葬于全州鳳棲山下龍興里北麓壬坐原.嗚呼! 衆善備於公, 而大焉者孝也.士林以公有終身慕, 幷呈于營府, 鄭相國範朝, 道伯時, 以孝友卓異, 操行謹飭, 別薦于朝, 益信公之行之孚人深也.夫孝, 爲百行之源.有源則有流, 固也.孝親以外, 如奉先友睦, 以至待友敎人, 盡己之心, 而樂用物力, 要皆歸於仁厚之實而後已.蓋公以忠孝爲質, 故其見諸用者, 亦厚也.事親者厚, 故推而無所不厚也.《易》曰 : "坤厚載物, 德合旡疆." 惟地厚焉, 故萬物載, 人之厚者, 其後昌, 亦類是爾, 宜乎公之子孫, 兩世幷著令聞於今與後, 而公之賢愈顯也.蓋當時輿論, 以公克昌門戶, 垂裕後昆, 號其齋以昌裕者, 其亦得聖人所譽有試之意矣.蘇氏, 出晉州.高麗上護軍希哲, 爲始祖.少尹遷, 師事圃隱鄭先生, 與晩六崔公瀁, 自靖于全州.至大司諫困菴世良、大提學文靖公陽谷世讓兄弟, 顯于本朝.郡守連, 乙巳禍罷退.主簿好善、都事汝衡, 光海朝見黜, 困菴子孫曾, 而公之七世以上也.曾祖德邵, 以孝著.祖元大, 有文學.考洙廣, 號淡默齋, 以經學聞.妣, 全州李氏景三女.公之賢, 又遠有所自, 近有擩染, 靈芝信有根矣.配, 文化柳氏基源女, 端順克勤, 克助君子, 葬在公墓西鹿洞後.男, 長輝植, 次輝楨、輝栢.女, 適全義李錫寬、全州崔光旭.長房男, 學奎、命奎出, 祥奎、承奎、章奎.次房男, 宅奎.三房系男, 命奎.孫女及曾玄以下, 不盡錄.余於公, 有先戚誼.悅齋以是, 謂'事同一家, 不必求他人文.' 俾余銘公墓.其求也, 不以文而以誼, 不敢辭.銘曰 : "克昌云詩, 垂裕稱書.在昔殷、周, 善積慶餘.公得美質, 行備衆善.孝友以誠, 不待强勉.睦恤宗黨, 獎學後輩.總厥全體, 惟厚一字.用此修齊, 古先是法.家國雖殊, 一理符合.宜其昌裕, 若詩書言.如謂不信, 視子孫賢.嗟世之人, 胡不鑑玆.刻之貞珉, 庸詔有來."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