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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3
- 묘갈명(墓碣銘)
- 동몽교관에 추증된 경재 이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贈童蒙敎官敬齋李公墓碣銘【幷序】)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3 / 묘갈명(墓碣銘)
동몽교관에 추증된 경재 이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
동몽교관에 추증되고 효자로 정려(旌閭)된 경재 이공은 휘가 필(苾) 자는 덕형(德馨)으로, 조선 명릉(明陵, 숙종) 시기에 태어나 원릉(元陵, 영조) 병인년(1746)에 돌아가셨다. 흥덕현 편월리 오른쪽 산기슭 갑좌(甲坐)의 언덕에 장사 지낸 지가 223년이 되는데, 묘지에는 행적을 드러내 새긴 비석이 없다. 7대손 주범(周範)이 장차 비석을 세워 행적을 새기려고 하면서 공의 친족 후손인 종택(鍾宅)이 지은 가장으로 나에게 글을 지어달라고 요구하였다. 내가 일찍이 이재(頤齋) 황윤석(黃胤錫) 공의 문집 가운데 공에 대해 말하면서 "어질면서도 의롭다."라고 한 말을 읽었는데, 지금 가장의 글을 얻어 보매 더욱 자세하니 다행이다. 비록 내가 미천하고 글이 졸렬하여도 존모하는 마음은 깊으니, 어찌 사양하겠는가.
공은 어려서 영민하고 장중하였으며, 성장하여 부모를 섬김에 뜻을 잘 받들고 존체를 잘 봉양하였다. 열여덟 살에 부친의 상을 당하였는데, 곡하면서 우는 슬픔이 옆에 있는 사람들을 감동시켰으며 초상과 장례의 예절은 주자를 따랐다. 때때로 모친을 뵙고서 잘 위로하여 마음을 편히 해 드렸다. 모친의 상을 당하여 이전 부친의 상 때처럼 하였다. 부모의 제삿날에는 죽을 때까지 고기를 먹지 않았고, 초하루와 보름에는 성묘하여 추위나 더위에도 폐하지 않았다. 아우가 세 명 있었는데,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재산이 많거나 적거나 함께 하니, 여러 아우와 제부(弟婦)들이 감화하여 또한 개인적으로 감춰두지 않았다. 둘째와 막내 아우가 일찍 죽자, 여러 조카들을 사랑으로 길러 자신이 낳은 아이들처럼 대하였다. 크고 작은 집안일은 셋째 아우에게 맡겼다. 자식과 조카들을 타일러 과부인 숙모를 섬기기를 최효분(崔孝芬)이 이씨를 받드는 것주 50)처럼 하였다. 종족(宗族)과 마을 사람들에게 한결같이 정성과 신의로 대하였다.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 있더라도 얼굴에 드러내놓고 배척하지 않고 의리로 차분차분 깨우치니 사람들이 모두 복종하였다.
계사년(1713)에 많은 선비들과 동산서원(東山書院)을 창건하여 백강(白江) 이경여(李敬輿)와 서하(西河) 이민서(李敏敍) 두 현인의 영위(靈位)를 모셨는데, 간사한 무리들이 훼철하려고 하면서 온갖 방법으로 헐뜯고 욕을 하였지만 끝내 흔들리지 않았다. 신축년(1721)에 소장을 올려 소재(疎齋) 충문(忠文)주 51) 이이명(李頤命), 몽와(夢窩) 충문(忠獻)주 52) 김창집(金昌集), 한포(寒圃) 충민(忠愍)주 53) 이건명(李健命) 등을 늘려서 배향하기를 요청하니, 모두 남쪽 고을에서 제일 강직한 선비라고 칭송하면서 또한 "충신은 효자의 가문에서 구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에 조정에 추천되어 능관(陵官)으로 의망되었다. 임인년(1722)에 병산(屛山) 이관명(李觀命)이 화를 당하자, 천 리를 찾아가 위로하고 해를 넘기면서 함께 거처하니, 조야(朝野)가 칭송하였다.
공의 선조는 함평 사람이다. 명종과 선조 시기에 대사간 죽곡 선생 휘 장영(長榮)이 세상에 현달하였는데, 둘째 아들 통덕랑 도곡 휘 유(瑜)가 다섯 번째 형 생원 낭곡 휘 억영(億榮)의 후사(後嗣)가 되었다가 정유재란 때 부안에서 순절하였으니, 이 분이 고조가 된다. 증조는 통덕랑 회당 휘 홍의(弘誼)이다. 조부는 미산 휘 시(時)로, 문장과 행실이 뛰어났다. 부친은 월촌 휘 익방(益芳)으로, 효성으로 동몽교관에 추증되었으며 명을 내려 정려를 세웠다. 모친은 여산 송씨 지빈(之彬)의 따님으로 부덕이 높았으니, 대개 공의 어짊은 가문에서 기인한 것이다. 부인은 죽산 박씨 후증(後曾)의 따님이다. 묘는 합부(合祔)하였다. 외아들은 사호(師灝)로, 부친의 뜻을 능히 계승하여 소장을 올려 동산서원에 배향된 인물을 복구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두 딸은 진주 정수탁(鄭守鐸), 수원 백상렴(白尙廉)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진규(震圭)이다.
오호라! 공이 행한 일은 비록 당시에 선비들이 도에 천거하고 본읍 수령이 감영에 보고하여, 순찰사 권혁(權爀) 공이 장계로 조정에 올렸으나 미처 포장(襃獎)까지는 받지 못하였지만, 고종 계사년(1893)이 되어서 그 선고(先考)와 마찬가지로 벼슬이 추증되고 정려가 세워졌으니, 어찌 공론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드러나서 전대 사람보다 더욱 빛나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명은 다음과 같다.
죽곡과 도곡의 후손으로竹桃雲仍
증자와 민자건주 54)의 생각과 마음을 지녔네.曾閔思情
체(體)가 서서 용(用)이 행해지니體立用行
동산서원이 완성되었도다.東山祠成
이름난 공들이 모두 칭송하고名公咸稱
선유는 좋은 평을 하였어라.先儒有評
성대하도다 추증과 정려赫赫贈旌
임금의 은혜 더욱 영광이니,聖恩尢榮
편월리 산기슭의 묘소는月麓之塋
영원토록 밝게 빛나리라.永世光明
- 주석 50)최효분이 이씨를 받드는 것
- 최효분에 대해서는 《소학》 〈선행〉에 그 내용이 나온다. 즉 "효분의 숙부 진(振)이 죽고 난 뒤에 효분 등이 숙모 이씨를 받들기를, 낳아주신 어버이 섬기듯이 하였다. 아침저녁으로 따뜻함과 서늘함을 살피며 집을 나감에 아뢰고 들어옴에 뵈었으며, 집안의 세세한 일을 하나하나 물어보고 결정하였다. 형제가 출행하여 얻은 것이 있으면, 항상 아주 조금의 물건이라도 모두 이씨의 창고에 넣고, 사 계절마다 나누어 줄 때도 숙모 이씨가 결정하도록 하였다."라 하였다.
- 주석 51)충문
- 원문에 '문(文)'자가 없는데, 보충하였다.
- 주석 52)충헌
- 원문에 '헌(獻)'은 '문(文)'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오류로 바로잡았다.
- 주석 53)충민
- 원문에 '민(愍)'자가 없는데, 보충하였다.
- 주석 54)증자와 민자건
- '증민(曾閔)'은 공자(孔子)의 제자인 증자(曾子)와 민자건(閔子騫)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모두 효행이 지극하였다.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서 맹자(孟子)는 증자에 대해 "부모님의 뜻을 받들어 섬겼다고 할 수 있으니, 부모님을 섬길 때는 증자와 같이 하는 것이 좋다.[可謂養志也 事親若曾子者可也]"라는 말을 하였다. 《논어》 〈선진(先進)〉에서 공자는 민자건에 대해 "효성스럽구나, 민자건이여. 사람들이 그 부모와 형제들의 칭찬하는 말에 트집을 잡지 못하는구나.[孝哉閔子騫 人不間於其父母昆弟之言]"라는 말을 하였다.
贈童蒙敎官敬齋李公墓碣銘【幷序】
贈童蒙敎官, 旌閭孝子, 敬齋李公諱苾字德馨, 生于大韓明陵, 卒于元陵丙寅, 而葬于興德縣片月里右麓甲坐之原, 爲二百二十有三年, 而墓闕顯刻, 七世孫周範, 將樹石, 以銘行治, 以公族後孫鍾宅狀, 求文於余.余嘗讀頣齋黃公集中語及公, 謂賢而義, 而今得狀文而益詳, 幸矣.顧雖人微辭拙, 慕之則深, 豈敢辭諸.公幼而穎悟簡重, 長而事親極志體.十八遭外艱, 哭泣之哀, 動傍人, 喪葬之禮, 遵朱子.時見于母.善於慰悅.及丁憂, 一如前喪.考妣夫日, 終身不肉, 朔望展省, 寒暑不廢.有弟三人, 友愛尢篤, 有無共之, 諸弟與婦, 感化亦無私藏.仲季二弟俱夭, 撫育諸姪, 同己出.大小家政, 屬叔弟.詔子姪事募叔母, 若崔孝芬之奉李氏.於宗族鄕黨, 一以誠信.有不可意者, 不顯斥, 以義理諄諄開陳, 人皆服從.癸巳, 與多士創建東山書院, 妥白江、西河兩賢之靈, 奸人輩欲扌+毁撤, 詬罵萬方, 終不動.辛丑, 上疏延額疎齋李忠■公、夢窩金忠文公、寒圃李忠■公, 咸稱南州第一剛直之士, 且曰 : "忠臣求於孝子之門." 於是薦于朝, 擬陵官.壬寅, 屛山李公之被禍也, 千里致慰, 同處經年, 朝野稱之.公之先, 咸平人.明、宣之際, 有大司諫竹谷先生諱長榮, 顯于世, 以仲子通德郞桃谷諱瑜, 繼第五兄生員浪谷諱億榮后, 丁酉亂殉節于扶安, 是爲高祖.曾祖, 通德郞悔堂諱弘誼.祖薇山諱時, 有文行.考, 月村諱益芳, 以孝贈童蒙敎官, 命旌.妣, 礪山宋氏之彬女, 甚有婦道.蓋公之賢, 實世類之自也.配, 竹山朴氏後曾女, 墓祔.一男師灝, 克繼先志, 上疏請復東山院額.二女適晉州鄭守鐸、水原白尙廉.孫震圭.嗚呼! 公之事行, 雖在當日, 章甫道薦, 本倅營報, 巡使權公爀啓聞, 而未及蒙褒, 至于高宗癸巳, 贈官旌閭, 一如其先考, 豈非公論之久而益彰, 有光前人也歟.銘曰 : "竹桃雲仍, 曾、閔思情.體立用行, 東山祠成.名公咸稱, 先儒有評.赫赫贈旌, 聖恩尢榮.月麓之塋, 永世光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