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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3
  • 묘갈명(墓碣銘)
  • 지당 강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止堂姜公墓碣銘【幷序】)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3 / 묘갈명(墓碣銘)

자료ID HIKS_Z038_01_B00001_001.023.0001.TXT.0009
지당 강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
옛날 장릉(長陵, 인조)의 병자호란 때 청계 강순(姜恂) 공이 의기를 떨쳐 병사를 모집하여 남한산성의 방비를 도왔다. 성하(城下)의 맹세주 47)가 있게 되자, 곧 남쪽 고창의 운곡으로 내려와 주자의 유상(遺像)을 받들고 강학하면서 의를 행하였다. 그의 셋째 아들 지당공 애(隘)는 자가 여정(汝貞)인데, 시와 예를 이어받고 가업을 계승하였으니주 48) 잘 계술(繼述)한 아들이라고 할 수 있다. 공이 말하기를 "우리 집안은 대대로 한양에서 벼슬하였는데, 하루아침에 떠돌다가 타향에 거처하게 되었으니 농사가 아니면 녹봉을 대신할 것이 없다. 어버이는 연로하신데 한갓 문사만 일삼는다면 자식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몸소 농사를 지으면서 비루한 일을 감당하였는데, 낮에 그렇게 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으며 밤에는 곧 쉬지 않고 책을 열심히 읽었다. 제생들이 모여 강론하는 날에는 바쁜 가운데서도 시간을 내어서 참석하여 경전과 예에 대해 변석하였다. 이윽고 살림살이가 펴져서 맛있는 음식도 풍부해졌는데, 부모를 봉양하고 남은 힘으로 하는 공부도 또한 공부에만 매진하는 자들이 미치지 못하였다.
청계공이 비록 세상에 뜻을 두지는 않았지만 나라의 근심거리나 백성들의 고통에 대해 들으면 안색과 말투에 이따금 어두운 근심을 드러낼 때가 있으면, 공은 기미를 살피고 뜻을 받들어 극진한 위안의 말로 풀어드렸으며, 술을 마련하고 손님을 초대하여 답답함을 풀어드리기까지 하였다. 청계공이 붕우들을 대할 때 잘한다고 칭찬하면서 "내가 막내를 사랑하는 사사로운 마음에서 칭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모친이 병이 나자 근심에 젖어 식사할 겨를도 없었으며, 대변을 맛보고 북극성에 기도하였다. 상을 당하자 슬픔과 예를 모두 극진히 하였다. 삼년이 지나 부친의 상을 당하자 모친상 때처럼 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거상(居喪)을 잘한다고 칭송하였다. 선조의 제사를 받들 때 마치 살아계신 것처럼 정성을 다하였으며, 형을 공경하기를 부친을 섬기는 예와 같이 하였으며, 정성과 신의로 사람을 상대하였으며, 은혜와 위엄으로 아래 사람을 부렸으니, 이것이 대략적인 공의 행실이다.
강씨는 진주에서 나와 나라의 저명한 성씨가 되었다. 고려 공목왕 때 대제학 회중(淮仲)이 이름을 드날렸고, 조선에는 참판 징(澂)과 한림 억(億)이 현달한 분이다. 사은당 명서(命瑞)와 성재 홍제(弘胤)는 모두 학행(學行)으로 명성을 날렸으니, 이 분들이 공의 증조와 조부이다. 유인 밀양 박씨가 모친이다. 공은 영릉(寧陵, 효종) 갑오년(1654)에 태어나 명릉(明陵, 숙종) 계해년(1683)에 돌아가셨으니 나이가 겨우 서른이다. 본현(本縣)의 오서방 사거리 계좌(癸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대구 배씨 문표(文豹)의 따님으로, 공보다 31년 뒤에 돌아가셨다. 묘는 합부하였는데, 봉분은 따로 썼다. 아들은 재상(再尙)이며, 딸은 심봉거(沈鳳擧)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석일(錫一), 준일(俊一), 수일(秀一) 등이며, 손녀는 고일문(高一文), 고천묵(高天默)에게 시집갔다.
오호라! 공의 효도와 공손, 은택과 신의의 덕을 총괄하여 말하자면 인(仁)이다. 어진 자는 반드시 수를 누리는데 도리어 그렇지 못하였으니, 하늘은 참으로 알기 어렵다. 어려서 학문을 좋아하고 장성하여 힘써 행하여 항상 '조심하고 삼감[謹愼]' 두 글자를 외면서 자신을 돌이켜보았다. 평소 "알면서 행하지 않는 것은 바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를 확충하여 나아간다면 큰 성취를 기약할 수 있을 것인데 명수(命數)의 한계가 가로막으니, 이것이 안타깝다. 그러나 후손이 번창하여 문행(文行)을 지닌 이들이 계속해서 나왔는데, 당대에 누리지 못한 보답이 반드시 후손에 돌아왔으니, 하늘의 뜻이 여기에 있는 것인가.
공의 7대손 경흠(冏欽)이 가장(家狀)을 보여주면서 나에게 묘지명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가장은 바로 공의 아들 위촌거사가 지은 것이니, 근거로 삼아서 쓸 수 있다. 이에 명을 짓는다.

행하고 남은 힘으로 학문을 배우라는 건行餘學文
성인이 말씀하신 것이라.주 49)稱自聖人
꽃은 피었지만 열매 맺지 못하니秀而不實
또한 그것이 애석하도다.亦厥攸惜
다만 애석함과 칭송을惟惜與稱
공이 실로 겸하였으니,公實得幷
천백 년 이후로千百其來
어찌 떳떳하게 할 말이 없겠는가.曷不有辭
주석 47)성하(城下)의 맹세
적군이 성 아래에 임하였을 때 압박을 받아 항복한 굴욕적인 맹약을 말한다. 《춘추좌전(春秋左傳)》 환공(桓公) 12년조에 "초(楚)나라가 교(絞)를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성하지맹을 체결한 뒤에 돌아갔다."라고 하였는데, 두예(杜預)의 주에 "성하맹(城下盟)은 제후가 매우 수치스럽게 여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청에게 굴욕적인 맹약을 체결한 것을 말한다.
주석 48)가업을 계승하였으니
'기구(箕裘)'는 키와 가죽옷이라는 뜻으로, 가업(家業)을 비유하는 말이다. 《예기》 〈학기(學記)〉의 "훌륭한 대장장이의 아들은 아비의 일을 본받아 응용해서 가죽옷 만드는 것을 익히게 마련이고, 활을 잘 만드는 궁장(弓匠)의 아들은 아비의 일을 본받아 응용해서 키 만드는 것을 익히게 마련이다.〔良冶之子 必學爲裘 良弓之子 必學爲箕〕"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주석 49)행하고……것이라
《논어》 〈학이(學而)〉에서 공자는 "제자가 들어가서는 효도하고 나가서는 공손하며, 행실을 삼가고 말을 성실하게 하며,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되 인한 이를 친히 해야 하니, 이것을 행하고 여력이 있으면 글을 배워야 한다.〔弟子入則孝, 出則弟, 謹而信, 汎愛衆, 而親仁, 行有餘力, 則以學文.〕"라고 하였다.
止堂姜公墓碣銘【幷序】
粤昔長陵丙子之難, 淸溪姜公恂, 奮義募兵, 助守南漢.及其有城下之盟, 則遂南下高敞之雲谷, 奉朱子像, 講學行義.其第三子止堂公隘汝貞, 襲詩禮業箕裘, 可謂善繼述之肖子也.其言曰 : " 吾家世仕于京, 一朝漂寓, 非耕無以代祿.親老而徒事文墨, 子職闕." 乃躬執稼穡, 幷能鄙事, 日以爲常, 夜輒劇讀不已.諸生會講日, 撥冗參席, 辨釋經禮.旣而調度紓而甘旨豊, 餘力之學, 亦有專門者所不及.淸溪公, 雖無意乎世, 聞國憂民瘼, 往往發幽憂於色辭間, 公察意順旨, 極其慰釋, 至爲之置酒招賓, 以泄壹鬱.淸溪公對朋舊稱善曰 : "吾非愛季之私也." 母癠, 憂不遑食, 嘗糞祈辰, 丁憂, 哀禮俱盡, 越三年, 遭外艱, 亦如之, 人以善居喪稱之.奉先致如在之誠, 敬兄如事父之禮, 待人以誠信, 御下以恩威, 此公之行治大畧也.姜出晉陽, 爲國著姓.高麗恭穆公, 著大提學淮仲, 本朝參判澂、翰林億, 皆其顯者.思恩堂命瑞、惺齋弘胤, 俱以學行著, 是爲公曾祖祖.孺人密陽朴氏, 其妣也.公生于寧陵甲午, 卒于明陵癸亥, 年僅三十, 葬本縣五西坊四巨里負癸原.配, 大丘裵氏文豹女, 後公三十一年而卒.墓附以雙封.男再尙, 女適沈鳳擧.孫男, 錫一、俊一、秀一. 女高一文、高天默.嗚呼! 公孝悌恩信之德, 總言之則仁也.仁者必壽, 而反不然, 天固難諶.幼而嗜學, 長而力行, 常誦謹愼二字, 以自省.雃言 : "知而不行, 是爲未知." 充此而進, 大就可期, 而命限尼之, 此尢可憾也.然後承蕃碩, 文行相繼, 不食之報, 必返之, 天其在斯歟.七世孫冏欽, 示以家狀, 屬余銘墓.狀, 乃公之子渭村居士撰, 可據而書.銘曰 : "行餘學文, 稱自聖人.秀而不實, 亦厥攸惜.惟惜與稱, 公實得幷.千百其來, 曷不有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