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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23
  • 묘갈명(墓碣銘)
  • 만은 황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晩隱黃公墓碣銘【幷序】)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3 / 묘갈명(墓碣銘)

자료ID HIKS_Z038_01_B00001_001.023.0001.TXT.0008
만은 황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
옛날 원릉(元陵, 영조) 시대에 미호 김원행(金元行) 선생은 덕이 높고 학문이 정대(正大)하여 사문의 종주가 되었다. 일찍이 그를 종유하는 만은처사 평해 황공 휘 전(壥) 자 사후(士垕)에 대해서 늙어서도 학문을 좋아한다고 칭송하였으니, 이는 정자(程子)가 여진백을 칭송하였던 말이다.주 38) 지금 선생이 공을 칭송했던 말로 공의 평생을 추적해보면 또한 그 말이 마땅한 것을 알 수 있다. 공은 또한 자신이 좋아한 바를 미루어 그 아들 이재(頣齋) 선생주 39)을 명유(名儒)로 만들었으니, 그 실제 증거를 볼 수 있다.
공은 자질이 매우 영민하였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숙부인 구암공 재중(載重)에게 학문을 배워 문한(文翰)을 일찍 성취하였다. 그러나 일곱 번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모두 떨어져 마침내 포기하고 진실된 학문에 종사하였다. 당시 나이가 노년이었는데도 경전과 주자의 책을 철저하게 읽고 정밀하게 생각하여 몸으로 알고 마음으로 깨달은 뒤에 그만두었다. 드러내지 않고 자신을 수양하며 표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니, 이른바 '쉬지 않고 부지런히 노력하여 나이가 부족한 지도 모르는 자'주 40)에 해당한다. 이에 조예가 깊이 확충되고 두텁게 양성되었으니, 보고 감화를 받은 이들이 믿게 되고 명성이 일어나게 되어 선비들의 많은 기대를 받게 되었다. 두호 조정(趙晸) 공이 고암서원의 강회를 주관해달라고 요청하였으며, 병계 윤봉구(尹鳳九)와 백수 양응수(楊應秀) 등 제현들도 또한 모두 공을 인정하였다.
일찍이 "상수도 비록 성인의 학문 중의 일이지만, 군자는 마땅히 경전을 위주로 삼고 이것을 그 곁에 두고 참고로 삼아야 한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논어》 한 권은 가장 중요하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장자》로 사람들에게 작문을 가르친다는 소식을 듣고서 곧바로 말하기를 "《맹자》 일곱 편은 사람은 고무시키는 변화가 다채로워 사람으로 하여금 발을 구르며 뛰게 만드니, 이 또한 문장을 배우기에 충분한데 하필이면 《장자》이겠는가. 율곡의 《격몽요결》은 사람을 만드는 책이며, 우암은 주자의 정맥(正脈)이다."주 41)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식견의 올바름이요 학문의 힘이다.
어버이를 섬길 때는 살아계시거나 돌아가시거나 예로써 섬겼으며, 멀리 지내던 두 누이를 맞이하여 재산을 함께 공유하였다. 흉년에는 고을에 그의 도움을 받아 살아난 자가 많았다. 과거를 보러갈 때 분경(奔競)주 42)을 끊어버리면서 "출신이 올바르지 못하면 어찌 임금을 섬기겠는가."라 하였다. 조정에서 갑오 이후의 배향하는 사원에 대해 훼철하라고 명령하자 구암사도 또한 그 안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사임(祠任)이 연수(年數)를 고쳐서 서원을 유지하려고 하자, "임금을 속이지 말라."라고 하였다. 이것은 모두 젊었을 때의 올바른 행실로 본래 자질의 돈후하고 질박함이 이와 같았다.
신묘년(1771)에 돌아가시게 되자 조동 앞 산기슭 모좌(某坐)의 언덕에 장사지냈으니, 향년 68세였다. 시조는 고려 참찬 휘 숙경(淑卿)이다. 부호군 뉴(紐)가 춘천에서 남쪽으로 이주하여 흥덕에 거주하였으니, 이 분이 6대조이다. 고조는 안촌 이후(以厚)로, 갑정(甲丁)의 두 난리주 43)에 의병을 모집했던 일이 《모의록(募義錄)》에 실려 있다. 조부는 취은(醉隱) 세기(世基)로, 기개와 절조로 세상이 이름이 났다. 부친은 산촌(山村) 재만(載萬)으로, 사부를 잘 지었다. 19살에 소장을 올려 우암을 구원하려 하였으니, 공의 어짊은 또한 출신 가문과 연계되어 있다. 산촌공의 처음 부인은 울산 김씨 태하(泰夏)의 따님으로 하서 선생의 5대손이다. 계비(繼妃)는 강진 김씨 복초(復初)의 따님으로 공을 낳았다. 공의 부인은 강진 김씨로, 통덕랑 백형(伯衡)의 따님이다. 익찬 윤석(胤錫)은 장남으로 곧 이재(頣齋)이다. 주석(冑錫)은 형과 함께 미호를 스승으로 섬겼으며, 문장과 행실이 뛰어났으니, 바로 차남이다. 풍천 노엽(盧燁)은 옥계(玉溪)의 후손이며, 참봉 울산 김익휴(金益休)는 하서(河西)의 후손인데, 이들은 사위들이다.
오호라! 공의 학문으로 벼슬로 현달하여 세상에 이름을 날리지 못하였으니 비록 아쉬울 것 같지만, 그러나 큰 스승이 높이 평가하고 어진 아들이 몸을 세워 이름을 드날렸으니 절로 영원히 빛 날 것이다. 어찌 다만 한 시절 높은 벼슬주 44)에 비교하겠는가. 또한 일찍이 도에서 추천하여 능관(陵官)에 의망되었으며, 이재가 입대(入對)하던 날에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로다.'라는 임금의 칭송을 받았으니, 그러므로 세상과 후세에 떳떳하게 할 말이 있을 것이다.
8대 사손(嗣孫) 서구(瑞九)가 비로소 묘소의 빗돌을 장만하고서 나에게 글을 요청하였다. 나는 공이 위를 잇고 아래로 전하여 가학을 창대하게 만들었으니 타인의 가문에서는 보기 힘든 어짊에 대해 감탄하였기에 끝내 사양할 수 없었다. 그러나 글이 졸렬하여 다 갖춰 서술하기는 어려워 그 요점을 대략 서술하니, 공의 덕과 학문을 상세히 살펴보고 싶은 이들은 어찌 족보와 행장, 유집에 나아가 고찰하지 않겠는가. 이에 명을 짓는다.

은거하며 뜻을 구하니隱求志
이런 경우 보기 비록 드물지만,見雖鮮
선비는 학문에 대해士於學
마땅히 노력해야 하도다.宜可勉
좋아하여 멈추지 않으며好無已
종신토록 은거하였도다.隱終身
아들이 선(善)을 본받게 하여주 45)式穀子
훌륭한 인물주 46)로 만들었나니,作席珍
이것을 공이 구하였으니是公求
구하매 이르렀도다.求而至
만은이라 편액하니晩隱扁
비로소 부끄러움이 없어라.始無愧
빗돌에 새겨서鑱之石
영원히 밝게 보이노라.永昭示
주석 38)정자가……말이다
진백(進伯)은 여대충(呂大忠)의 자이다. "여진백은 늙어서도 학문을 좋아하여 철저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이에 대해서 정숙이 말하기를 '늙어서도 학문을 좋아하는 자는 더욱 사랑스럽다. 사람이 젊었을 때에는 원래 노력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노년에 이르면 의지와 근력이 쇠해지게 마련인 데다 배워도 미치지 못할 걱정이 있고 배울 햇수도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상태이다. 하지만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성인께서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얼마 배우지 못하고 햇수가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끝내 도를 듣지 못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呂進伯老而好學 理會直是到底 正叔謂老喜學者尤可愛 人少壯則自當勉 至於老矣 志力須倦 又慮學之不能及 又年數之不多 不曰朝聞道夕死可矣乎 學不多 年數之不足 不猶愈於終不聞乎〕"라는 말이 주희(朱熹)가 편찬한 《이정유서(二程遺書)》 권10 낙양의론(洛陽議論)에 나온다.
주석 39)이재 선생
황윤석(黃胤錫)의 호이다. 그도 또한 미호의 제자이다.
주석 40)쉬지 않고……모르는 자
《시경》 〈소아(小雅) 거할(車舝)〉의 "높은 산은 누구나 우러러보게 마련이고, 큰길은 누구나 함께 걸어가게 마련이다.[高山仰止 景行行之]"라는 구절에 대해서, 공자가 "시에서 인을 좋아함이 이와 같다. 사람들은 큰길을 걸어가다가 힘이 다해서 계속 걸을 수 없을 때에야 중도에 그만둔다. 마찬가지로 몸이 이미 늙은 것도 잊고서 앞으로 남은 세월이 얼마 되지 않는 것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날마다 열심히 노력하다가 죽은 뒤에야 그만두어야 한다.[詩之好仁也如此 鄕道而行 中道而廢 忘身之老也 不知年數之不足 俛焉日有孶孶 斃而後已]"라고 평한 말이 《예기》 〈표기(表記)〉에 나온다.
주석 41)《맹자》……정맥이다
글로 보면 《맹자》 부분과 율곡, 우암에 대한 논의가 동시에 말한 것처럼 보이지만, 내용상으로 보면 아마 서로 다른 시기에 한 말로 보인다.
주석 42)분경(奔競)
벼슬을 청탁하기 위하여 세력 있는 집에 분주히 찾아다니며 엽관 운동(獵官運動)을 벌이던 일.
주석 43)갑정(甲丁)의 두 난리
갑자년(1624)에 일어난 이괄(李适)의 난과 정묘년에 후금이 침입한 호란(胡亂)을 가리킨다.
주석 44)높은 벼슬
'청자(靑紫)'는 푸른 인끈[青綬]과 자주색 인끈[紫綬]을 가리키는 것으로, 옛날 구경(九卿)은 푸른 인끈을, 공후(公侯)는 자주색 인끈을 사용하였는데 전하여 고관대작의 뜻으로 쓰인다. 《한서(漢書)》 권75 〈하후승전(夏侯勝傳)〉에 "선비가 경술에 밝지 못한 것이 흠이지, 만약 경술에 밝기만 하다면 고관대작을 얻는 것은 마치 몸을 숙여 땅에 떨어진 지푸라기를 줍는 것처럼 쉬울 것이다.[士病不明經術, 經術苟明, 其取青紫如俯拾地芥耳.]"라고 하였다.
주석 45)아들을……하여
《시경》 〈소완(小宛)〉에서 "너의 아들을 가르쳐서 선(善)을 하는 것을 본받게 하라.〔教誨爾子 式穀似之〕"라고 하였다.
주석 46)훌륭한 인물
'석진(席珍)'은 재덕(才德)을 갖춘 선비를 의미한다. 《예기》 〈유행(儒行)〉에서 "유자는 석상의 진귀한 보배처럼 자신의 덕을 갈고 닦으면서 임금이 불러주기를 기다린다.〔儒有席上之珍以待聘〕" 한 데서 유래하였다.
晩隱黃公墓碣銘【幷序】
昔在元陵之世, 渼湖金先生, 德尊學正, 宗主斯文.嘗稱其從遊, 晩隱處士, 平海黃公, 諱壥字士垕, 爲老而好學, 此程夫子稱呂進伯語也.今以先生稱公者, 迹公平生, 則亦知斯語之爲得當.公又推己所好, 及其子頣齋先生, 俾成名儒, 其實驗可見矣.公天禀穎悟, 少孤, 學于叔父龜巖公載重, 文翰夙就. 然七擧而不中, 遂棄之, 從事實學.時年且老大, 經傳朱書, 劇讀精思, 體認心悟而後已.闇然自修, 不尙標榜, 庶所謂俛焉孜孜, 不知年數之不足者.於是造詣, 深充養厚, 觀感所孚, 風聲所興, 蔚爲儒望.杜湖趙公晸請主考巖講會, 尹屛溪、楊白水諸賢, 亦皆獎許.嘗曰 : "象數雖亦聖學中事, 君子宜主經傳, 而以此旁參." 又曰 : "《論語》一部最要." 聞人以《莊子》敎人作文, 則曰 : "《孟子》七篇, 鼓舞變化, 令人踊躍, 此亦足學文章, 何必《莊子》.栗翁《要訣》, 做人樣子, 尢翁, 朱子正脈." 此識之正, 學之力也.事親, 生死以禮, 邀致二姊, 共厥有無.荒年, 鄕里賴活者衆.赴擧時, 絶奔競曰 : "出身不正, 何以事君." 朝令撤甲午以後享祠, 龜巖祠亦在中, 祠任欲改年限圖存, 則曰 : "勿欺君也." 是皆少日行誼, 而素質敦實又如此.卒于辛卯, 葬于槽洞前麓負■原, 壽六十八.始祖高麗參贊諱淑卿.副護軍紐自春川南居興德, 是爲六世.高祖, 安村以厚, 甲、丁二亂, 募義兵事, 載《募義錄》.祖, 醉隱世基, 以氣節名世.考, 山村載萬, 長詞賦.年十九上疏, 救尢菴, 公之賢, 亦繫世類.山村公初配, 蔚山金氏泰夏女, 河西先生五世孫.繼, 康津金氏復初女, 生公.公之齊, 康津金氏, 通德郞伯衡女.翊贊胤錫其長男, 卽頣齋.冑錫與兄, 同師渼湖, 有文行, 次男也.豊川盧燁, 玉溪后 ; 參奉蔚山金益休, 河西后, 其婿也.嗚呼! 以公之學, 不得仕顯而聞世, 雖若可恨, 然宗師推重, 賢子立揚, 自耀久遠, 豈但一時靑紫比.且曾被道薦擬陵官, 而蒙'是父是子'之聖褒於頣齋入對日, 是可以有辭矣.八世嗣孫瑞九, 始具墓碣, 請余文之.余竊感嘆公上紹下傳, 昌大家學, 爲人門罕覯之賢, 故不能終辭.然文拙難於備述, 畧敘其大致, 欲詳究德學者, 盍就譜狀遺集而考焉.銘曰 : "隱求志, 見雖鮮.士於學, 宜可勉.好無已, 隱終身.式穀子, 作席珍.是公求, 求而至.晩隱扁, 始無愧.鑱之石, 永昭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