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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묘갈명(墓碣銘)
  • 가선대부 한성부 좌윤에 추증된 임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贈嘉善大夫漢城府左尹林公墓碣銘【幷序】)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3 / 묘갈명(墓碣銘)

자료ID HIKS_Z038_01_B00001_001.023.0001.TXT.0006
가선대부 한성부 좌윤에 추증된 임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
부풍(扶風, 부안)은 옛날부터 문사가 많기로 나라 안에 알려졌는데, 조선 건릉(健陵, 정조)가 우문 정책을 펼친 이후로 더욱 빛이 났다. 평택 임씨 가운데 부풍 남쪽 진동주 21)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능히 학문을 쌓고 행실을 가다듬어 널리 명성을 드러내었다. 학사의 경적(經籍), 식량과 땔감과 기름 등 공부하는 일체의 도구를 다 갖추어놓고서 자제들을 권장하였으며, 겸하여 사방의 선비들에게 도움을 주어 해마다 항상 이곳에서 수련하면서 학문에 전념케 하였으니, 학문이 뛰어나 조정에 현달한 자가 또한 그 가운데서 나오기도 하였으며 아울러 문향(文鄕)이라는 이름을 드날리는데 일조를 하였다. 처음 이런 제도를 만든 것은 가선대부 한상부좌윤에 추증된 오위도총부 부총관 휘 도석(道晳) 자 자백(子白)에게서 나왔으니, 그 공이 어찌 위대하지 않겠는가.
공의 시조는 당나라 학사 충절공 팔급(八及)이며 고려 시중 충정공 언수(彦修)가 중시조이다. 6대조는 조선의 직제학 맹의(孟義)의 연산군의 재앙을 만나 옥구로 숨어들어왔으며, 아들 만희(萬熙)가 부풍으로 이주하였다. 3대가 지나 득춘(得春)은 병자호란 때 나랏일로 죽음을 당하여 군자감정에 추증되었으니, 이 분이 조부이다. 부친은 여(汝)이며, 모친은 문과에 합격하여 판결사에 추증된 평산 신씨 백서(百瑞)의 따님으로, 공은 효종 신묘년(1651)에 태어나 숙종 을묘년(1675)에 돌아가셔서 시어산주 22) 서쪽 기슭 자좌(子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정부인에 추증된 여양 진씨로, 군자감정 극성(克誠)의 따님이다. 묘는 같은 언덕에 봉분은 따로 썼다.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은 유곤(有崑)으로 행실이 바르고 점잖았다. 둘째가 유준(有峻)으로 수를 누려 동중추가 되었다. 셋째는 유우(有嵎)이며, 넷째는 유헌(有巘)이다. 막내는 유륜(有崙)으로 효성이 지극하여 《삼강록(三綱錄)》에 실렸다. 다섯 아들에게서 난 자손은 지금 4백여 명이나 된다.
대개 공의 어버이 섬김은 대단히 효성스럽고 자신을 의로서 바로잡았으며 벗을 사귐에는 공손하면서 신의가 있었고 아래 사람을 부릴 때는 너그러우면서도 위엄이 있었다. 선조를 정성으로 받들어 제사를 영원히 지내는 근본을 세웠고 집안을 예로 다스려 자손들에게 아름답고 넉넉한 계책을 남긴 것은 행장의 글과 같으니 참으로 선을 쌓으면 자손에게 경사가 생기는 이치가 있는 것이다. 또한 일찍이 들으니 옛 사람의 말에 "천 사람의 눈을 열어준 자는 반드시 훌륭한 후손이 있다."라고 하였는데, 공이 학사를 세운 한 가지 일은 이미 중대한 일과 관계가 있으며 또한 대중과 공적으로 함께 나눈 것은 더욱 하기 어려운 일이니, 하늘이 후진을 열어준 덕에 보답하여 이처럼 후손을 창대하게 한 것은 당연하다할 것이다.
7대손 양호, 명록, 백록 8대손 낙중 등이 나에게 이르기를 "가까이 살았기 때문에 공의 일을 잘 알 것이다."라고 하여 묘지의 비명(碑銘)을 요구하니, 그 요구가 글을 잘해서가 아니기에 사양할 수가 없었다. 이에 명을 짓는다.

희문의 뜻이며주 23)希文之志
공택의 일이로다.주 24)公擇之事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曠千百年
누가 공과 같으랴.疇若公焉
이산은 울창하고梨山蒼蒼
봉해는 아득하여라.蓬海茫茫
풍치는 오히려 멀리 가니風韻猶長
어찌 그를 잊을 수 있으리오. 其何能忘
주석 21)진동
부안군 행안면 진동리.
주석 22)시어산
부안군 행안면 진동리와 부안읍 경계에 있는 산.
주석 23)희문의 뜻이며
희문(希文)은 송대 범중엄(范仲淹)의 자이다. 인종 때 재상 안수(晏殊)는 각 주(州)와 현(縣)에 학교를 세우면서 범중엄을 그 책임자로 선발하였다.
주석 24)공택의 일이로다
공택(公擇)은 송대 이상(李常)의 자이다. 어려서 여산(廬山) 백석승사(白石僧舍)에서 글을 읽었고, 과거에 급제한 후로는 소장했던 장서(藏書) 1만여 권을 보관하여 이씨산방(李氏山房)이라 이름을 짓고 그 책을 많은 학자들과 함께 보았다. 《송사(宋史)》 권344.
贈嘉善大夫漢城府左尹林公墓碣銘【幷序】
扶風, 自古以多文士, 稱於國中, 而逮夫有韓健陵右文以後, 益彬彬.平澤林氏之居治南眞洞者, 能績學礪行, 以著聞望, 有齋黌經籍, 糧饋柴油, 一應攻業之具, 無不畢備, 旣以獎勸子弟, 兼資四方之士, 歲常藏修以致學, 優而顯於朝者, 亦出其中, 而與有助於文鄕之擅名.其初設置規模, 出於贈嘉善大夫漢城府左尹五衛都摠府副摠管諱道晳字子白, 厥功, 詎不偉哉.公以唐學士忠節公八及爲鼻祖, 麗侍中忠貞公彦修爲中祖.六世祖, 本朝直提學孟義, 遭燕山禍, 遯沃溝.子萬熙轉徙于扶.三世而至得春, 丙子亂死王事, 贈軍資監正, 是爲祖考.考汝, 妃, 贈判決事妣平山申氏文科百瑞女, 生以孝宗辛卯, 卒以肅宗乙亥, 葬于侍御山西麓子坐原.配, 贈貞夫人驪陽陳氏, 軍資監正克誠女.墓同原各兆.有五男, 長有崑, 有行誼.次有峻, 壽同中樞.次有嵎、次有巘.次有崙, 以孝載《三綱錄》.五房之孫, 今爲四百餘人.蓋公之事親克孝, 正己以義, 交友敬而信, 御下寬而嚴.奉先以誠而立享祀永遠之本 ; 治家以禮而貽子孫嘉裕之謨者, 有如狀文, 而固有積善餘慶之理.抑又嘗聞古人之言曰 : "開千人眼者, 必有後." 惟公興學一款, 旣繫大事, 而又與衆公共者, 尢爲難能, 天所以報開牖後進之德者, 宜昌後之若是也.七世孫讓鎬、命錄、百錄、八世孫洛中謂余, "居近而聆公之事." 俾銘于墓.其求也, 不以文, 無可辭.乃爲之銘曰 : "希文之志, 公擇之事.曠千百年, 疇若公焉.梨山蒼蒼, 蓬海茫茫.風韻猶長, 其何能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