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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3
- 묘갈명(墓碣銘)
- 성균관 진사 구암 이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成均進士龜菴李公墓碣銘【幷序】)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3 / 묘갈명(墓碣銘)
성균관 진사 구암 이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
옛날 맹자가 말하기를 "군자의 은택도 5대가 지나면 사라진다."라고 하면서 공자에게 사숙한 것을 스스로 다행스럽게 여겼다.주 10) 그런데 문경공 일재 이항(李恒) 선생은 5대가 지나 구암공 휘 성익(星益) 자가 익지(益之)인 분을 얻었는데, 역대 조상의 풍치가 남아 있고 어진 자손이 계승하는 성대함이 있으니, 어찌 선철이 이성(異姓)에게 학문을 전한 것보다 더욱 귀하지 않겠는가.
대개 공은 순수(純粹)한 자질과 통달한 재주로 성현의 학문에 전력을 다해 깊이 생각하여 크게 발전하여 원대한 경지에 이를 것을 기약하면서 작은 성취에 안주하지 않았다. 이에 우암 송 선생에게 나아가 학문을 바로잡아 성과 도의 근원에 대해 들었다.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 선생과 막역지우가 되어 학문의 도움을 주며주 11) 서로 발전하였다. 이에 덕과 학문이 고명해지고 명성이 드높았다. 태학의 장의는 유림 가운데 정밀하게 가려 뽑는 자리인데 추천주 12)을 받아 올라갔으며, 문곡 김수항 공은 어진 재상인데 공에게 벼슬하기를 권하였으니, 이를 통해 공을 알 수 있다.
장차 사문(斯文)의 종장과 조정의 재상이 될 날이 있을 것인데, 하늘이 더 이상 나이를 빌려주지 않아 이에 원릉(元陵, 영조) 임자년(1732) 12월 25일에 홍양의 장인 집에서 갑자기 돌아가시고 말았다. 태인 남촌면 대산동 문경공의 묘소 옆 임좌(壬坐)의 언덕에 장사지냈으니, 태어난 명릉(明陵, 숙종) 기묘년(1699) 정월 5일부터 향년 겨우 34세이다.
공의 선조는 성산 사람이다. 5대 이상의 계보는 문경공의 묘갈에 실려 있다. 호조참의에 추증된 직장 수일(守一)은 문경공의 둘째 아들인데, 계부(季父) 별제 상(常)의 후사(後嗣)가 되었으니, 이 분이 공의 고조가 된다. 증조는 식(湜)이며, 조부는 비룡(匪龍)이며, 부친은 통덕랑 효민(孝閔)이다. 모친은 여산 송씨로, 대징(大徵)의 따님이며 교리 세림(世琳)의 현손이다.
계묘년(1723)에 공은 사마시에 합격하였는데, 아우인 칠봉공 성열(星說)도 나란히 합격하여 사람들이 모두 이목을 집중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칠봉공이 돌아가시자, 공은 천륜의 지극한 정으로 그 뛰어난 재주를 매우 애석하게 여기면서 지나치게 슬퍼하고 애통하여 자신도 모르게 절도를 넘어 세상에 더 이상 뜻을 두지 않았다. 노친을 모시고 광주 용산동 선영 아래에서 거처하면서 자호를 구암이라 하고 문을 닫아걸고 교유를 끊고서 오로지 수양에만 집중하였다.
기유년(1729)주 13) 봄에 모부인께서 유행병을 앓으니, 공은 대변(大便)을 맛보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넣어주었으며 자신을 대신 죽게 해달라고 하늘에 기도하였다. 초상이 나자 홀로 산의 빈소(殯所)를 지키며 마음을 다해 곡벽(哭擗)주 14)하였으며, 자신의 몸을 흙이나 나무처럼 여기며 모두 일곱 달이 지나고 나서야 장사를 지냈다. 공이 효성과 우애에 돈독한 것은 천성적으로 그러하였는데, 질병이 찾아온 것은 실로 운명이다.
부인은 평산 신씨로, 생원 명성(命晟)의 따님이다. 아들을 보면, 장남은 대령(大齡)이다. 차남은 대춘(大春)으로 칠봉공의 후사가 되었다. 큰 딸은 윤탁(尹倬)에게 시집갔다. 작은 딸은 찰방 김시서(金時瑞)에게 시집갔으니, 하서 선생의 현손이다. 대령의 아들은 적(迪), 규(逵), 섬(暹), 원(遠)이다. 대춘의 아들은 운(運), 손(遜), 수(邃), 준(遵) 구(逑)이다.
오호라! 만약 공이 수를 누려 그 재주와 뜻을 채워서 마침내 성취하였다면, 다만 가학을 더욱 빛내고 세업(世業)을 드높여서 수암(遂菴)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아울러 스승의 학통도 이어받았을 뿐만 아니라, 비록 대인(大人)에서 현성(賢聖)에 이르는 것주 15)도 사람들이 기이한 일로 여기지 않았을 것이거늘, 기수가 어긋난 것이 애석하니 사람들이 더욱 안타깝게 여겼다. 그러나 공이 경전을 궁구하여 도를 본 것은 〈동정책(動靜策)〉과 〈심경찬(心經贊)〉에 나타나고, 윤리를 바르게 하고 정의(情誼)를 돈독히 한 것은 부모를 섬기고 형제자매를 사랑한 것에 있으며, 엄밀하게 자신을 살펴 사사로움을 이긴 것은 술을 미워하고 색을 멀리함에서 증험하며, 좋아하고 미워함이 공정한 것은 신해년 소장(疏章)에서 따져볼 수 있다. 공처럼 고금의 역사를 살펴보고 치우치지 않게 덕을 이룬 자는 또한 매우 적으니, 어찌 현달하지 못하고 일찍 돌아가신 것을 안타깝게 여기랴. 공자는 "꽃이 피었지만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이 있다."라고 하였는데, 해설하는 자들이 안연을 위하여 말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일찍 죽는다고 하여 삼천 제자 가운데 덕행을 으뜸으로 칭찬하는 것에 무슨 해로움이 되겠는가. 이에 떳떳이 할 말이 있을 것이다.
공의 후손인 희전(喜鈿)과 재석(在錫)이 나에게 묘갈명을 요구하였다. 마음으로 간절히 존모하여 고사할 수 없었는데, 옛날에 행장을 짓지 않았기에 이에 본집에 실려 있는 행록의 초고와 서발 등에 의거하여 글을 짓는다. 그 명은 다음과 같다.
자손이 조상의 업을 계승하는 것은孫承祖緖
술성공주 16)과 비슷하며,似述聖公
나이는 짧으나 덕이 높은 것은年短德崇
안연과 같아라.顔淵是同
한미하거나 현달하거나 마찬가지이니微顯一致
같은 부류가 아닌 것을 비교함이 잘못됐지.擬匪匪倫
크게 써서 빗돌에 새기면서大書鑱石
삼가 평론을 덧붙이네.竊附尙論
- 주석 10)맹자가……여겼다
- 《맹자(孟子) 〈이루하(離婁下)〉에서 "군자가 끼친 은택도 5대가 지나면 끊기고, 소인이 남긴 은택도 5대가 지나면 끊긴다. 내가 공자의 제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나는 그분의 정신을 여러 사람에게서 사숙했다.〔君子之澤, 五世而斬, 小人之澤, 五世而斬. 予未得爲孔子徒也, 予私淑諸人〕"이라 하였다.
- 주석 11)학문의 도움을 주며
- 이택(麗澤)은 벗끼리 서로 도와 학문을 닦고 힘쓰는 것이다. 《주역》 〈태괘(兌卦)〉에 "두 개의 연못이 나란히 붙어 있는 것이 태괘이니, 군자가 이 괘를 써서 붕우 간에 학문을 강습한다.〔麗澤兌, 君子以, 朋友講習.〕"라고 하였다.
- 주석 12)추천
- '천섬(薦剡)'은 추천장을 가리킨다. 섬계(剡溪)는 중국의 지명인데, 그곳에서 생산된 종이가 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옛날에 그 섬지(剡紙)에다 추천하는 글을 적었으므로 섬이 사람을 추천하는 문서의 대명사가 되었다.
- 주석 13)기유년
- 본문에는 을유(乙酉)로 되어 있는데, 성익의 생몰 연대를 본다면 1705년 을유년은 나이가 너무 어려서 내용과 맞지 않는다. 사마시에 합격한 이후로 죽을 때까지 을(乙)이 들어가는 해는 을사년으로 1725년이며, 유(酉)가 들어가는 기유년은 1729년이다. 몰년이 1732년이라면 기유년이 맞을 것으로 보인다.
- 주석 14)곡벽(哭擗)
- 곡을 하면서 가슴을 두드리는 것을 말한다.
- 주석 15)대인에서 현성에 이르는 것
- 《맹자》 〈진심하(盡心下)〉에서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것을 선인이라 하고, 자기 몸에 선을 소유한 것을 신인이라 하고, 선을 충실히 보유한 것을 미인이라 하고, 충실하여 빛남이 있는 것을 대인이라 하고, 대인이면서 저절로 화한 것을 성인이라 하고, 성인이어서 측량할 수 없는 것을 신인이라 한다.〔可欲之謂善 有諸己之謂信 充實之謂美 充實而有光輝之謂大 大而化之之謂聖 聖而不可知之之謂神〕"라고 한 말에서 나왔다.
- 주석 16)술성공
-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를 가리킨다. 원나라 때 기국(沂國)의 술성공에 봉해졌다.
成均進士龜菴李公墓碣銘【幷序】
昔鄒孟氏言, "君子之澤, 五世而斬."而自幸私淑於孔子.若文敬公一齋李先生, 五世而得龜菴公諱星益字益之, 則列祖風韻之存, 賢孫繼述之盛, 豈不尢貴於先哲之異姓相傳也哉.蓋公以純粹之資, 通達之才, 刻意覃思于聖賢之學, 期以大進遠到, 而不安於小成, 乃就正于尢庵宋先生之門, 得聞性道之源.與遂菴權先生, 爲莫逆交, 麗澤相長, 於是德學高明, 聲望藹蔚.太學掌議, 儒林極選也, 而登其薦剡 ; 文谷金公, 賢相也, 而勸之仕, 是可以知公也.斯文宗匠, 朝家碩輔, 將有其日, 而天不假年, 乃以元陵壬子十二月二十五日, 遽沒於洪陽聘家, 返葬于泰仁南村面大山洞文敬公墓側壬坐原, 距其生明陵己卯正月五日年, 僅三十四.公之先, 星山人.五世以上糸, 在文敬公墓碣.直長贈戶參守一, 以文敬公次子, 爲季父別提常后, 是爲高祖.曾祖湜, 祖匪龍, 考通德郞孝閔.妣, 礪山宋氏, 大徵女, 校理世琳玄孫也.以癸卯歲, 中司馬, 弟七峯公星說聯榜, 人皆聳瞻, 無何七峯公不淑, 公以天倫至情, 重惜其奇才, 哀傷慘慟, 不覺過節, 而無意於人世.奉老寓居于廣州龍山洞先壟下, 自號龜菴, 杜門息交, 專意進修.乙酉春, 母夫人患癘, 公嘗糞割指, 祈天願代.及喪, 獨守山殯, 盡情哭擗, 視身如土木, 凡七閱月而葬, 公之篤於孝友, 天性則然, 而疾病之來, 實命也.配, 平山申氏, 生員命晟女.男, 長曰大齡.次曰大春, 爲七峯公後.女長適尹倬.次適察訪金時瑞, 河西先生玄孫.大齡男, 迪、逵、暹、遠.大春男運、遜、邃、遵、逑.嗚呼! 使公享壽充其才志, 而卒其成就, 不惟增光家學, 隆其世業, 比肩遂翁, 幷接師統, 雖大而至於賢聖, 人不是異事, 惜其氣數之差, 人猶有所憾也.雖然公之窮經見道, 著於〈動靜策〉、〈心經贊〉 ; 正倫篤誼, 在於事父母愛弟妹 ; 省克嚴密, 驗於惡酒遠色 ; 好惡公正, 質於辛亥一疏.歷觀今古, 成德不偏, 如公者, 亦絶少矣, 何憾於早世不顯也.孔子曰 : "秀而不實." 說者謂爲顔淵而發.然顧何傷於首稱德行於三千乎.是可以有辭也.公之後孫喜鈿、在錫, 徵余銘墓, 心切景慕, 不能固辭, 而舊無狀文, 乃據本集所載行錄草及序跋而敘之.銘曰 : "孫承祖緖, 似述聖公.年短德崇, 顔淵是同.微顯一致, 擬匪匪倫.大書鑱石, 竊附尙論."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