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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2
  • 비(碑)
  • 이심정 기적비(怡心亭紀蹟碑)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2 / 비(碑)

자료ID HIKS_Z038_01_B00001_001.022.0004.TXT.0005
이심정 기적비
마음은 한 몸의 주인이 되며, 흡족함[怡]은 편안하여 만족스러운 것을 이른다. 사람이 그 마음이 편안하고 만족스러우면 이에 건강을 기를 수 있고,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편안하고 만족스럽게 한다면 이에 부모에 효도함이 된다. 그러나 세상에 이에 능한 자는 백에 하나도 되지 않으니, 이 때문에 부친을 위해 지은 나씨의 이심정(怡心亭)이 어려운 일을 하였다고 여기는 까닭이다. 정자는 정읍군 소성방 공평리에 있는데, 나제봉(羅濟奉), 제윤(濟潤) 군이 자신의 아버지 직재(直齋)가 만년에 휴양하는 장소인 소년봉(少年峰) 아래 초강(楚江)의 위에 지은 것으로, 옛날 시인 상관소용(上官昭容)의 '올라 바라보니 마음이 즐거워졌네.'주 510)라는 말을 취하여 이름을 지었다.
정자의 자리를 보면, 뒤 처마는 푸른 절벽을 어루만지고 앞 다리는 백 척 높이의 깎아지른 벼랑에 꽂혀 있다. 사방을 둘러보면 모두 두 간(間)인데, 남북 간은 8척이고 동서간은 7척으로 합하여 당(堂)이 되는데 사방이 확 뚫렸다. 돌기둥으로 튼튼하게 하였으며, 철 난간으로 위험을 방비하였으니, 자못 웅장한 건물이다. 정서(正西)쪽으로 별도로 건물을 세웠는데 방과 회랑이 갖춰져 있으니, 완전하고도 아름답다고 하겠다. 대개 정자의 위치는 이전 살던 곳과 매우 떨어져 있어서 보이는 것들은 대부분 승경인데, 그 중 가장 뛰어난 것은 초강 일대로 파릉의 동정호와 같아서 올라가 바라보면 주인의 마음은 드넓어지고 정신은 흡족하니, 또한 악양루의 범중엄주 511)과 비슷하다.
이에 옹(翁)에게 있어서는 그 마음이 흡족하며, 아들에게 있어서는 부모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였다. 한 가지 일을 하여 사람에게 어려운 두 가지를 한꺼번에 얻었으니, 어찌 글로 기록하지 않으랴. 그러나 이는 하루아침에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니, 대개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직재는 어려서 가난하였지만 부모님을 모시면서 뜻을 따랐고 근검으로 집안을 다스렸으며 선비를 공경하고 예를 좋아하였다. 비록 아들이 멀리 나가 학문을 배웠지만 만년이 되어서야 조금 여유가 생겼으니, 문을 높게 만들어 손님을 맞아들이고 여비를 마련하여 산수를 유람하면서 집안일은 모두 아들에게 맡겼다. 세상에서 백 가지 일을 하면서 천 가지를 생각하고 천 가지 일을 하면서 만 가지 생각을 하면서 채워지지 않으면 만족하지 않는 자와 비교할 수 없으니, 어째서 그런가? 만족할 줄을 알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세상의 풍조가 새롭게 변하여 이익의 문이 열리고 의의 근원이 막혀 보통 집안의 자제들은 구시대 사람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부형을 기롱하지 않은 자가 드물다. 지금 두 군(君)은 이런 것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자를 짓는 일에 먼저 뜻을 가지고 그 힘을 다하였으니, 비록 '독서가 바탕인 사람이 아니다.'고 하여도 나는 믿지 않을 것이다. 이에 글로 남겨야 할 것을 보태어 이 정자를 보는 이들에게 고한다.
한마디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으니, 옛날에 별장을 만들고서 자손들에게 경계하기를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라도 훼손하면 나의 자손이 아니다."라는 자주 512)가 있었는데, 내가 생각하기에는 별장을 지키는 것은 덕에 있지 경계하거나 맹서함에 달려 있지 않다. 만약 건물을 지은 자가 그 덕을 잘 마무리 짓지 못하고서 허물을 쌓으며 계승한 자가 선조의 덕을 생각하지 않고 잘못을 행한다면, 별장이 비록 보존되어도 숭상할 것이 못되는데, 더구나 어찌 될지 알 수가 없음에랴! 나는 이 정자를 보고서 또한 이 정자에 대해 지금과 후대 사람들이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덕을 지킬 것을 항상 생각하기를 바라니, 이것이 이심정을 지키는데 절실한 것이다. 이에 이름과 실제에 무엇이 중요한가를 알 수 있게 되었으니, 그 정자를 영원히 지키는 원인이 되는 것을 빼버리지 말고 더욱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제봉이 장차 비석을 세워서 그 자취를 기록하려 할 때, 내가 같은 고을 사람이라 그 일에 대해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여 자주 찾아와서 글을 지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그 자취를 갖춰 기록하는데, 이 세 번째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것은 마지막에 실어 강조하였으니, 정자의 자취가 오래 가는 것은 실로 이것에 달려 있지 비석을 세우는 것에 있지 않음을 알게 한다. 직재의 이름은 광용(光鏞)이며, 순공(舜功)은 그 자이다.
주석 510)상관소용의……즐거워졌네
당대 초기 측천무후의 총애를 받아 재상에 오른 여류 문학가이다. 그녀의 〈유장녕공주유배지(遊長寧公主流杯池)〉에서 "바위 골짜기에 마음대로 올라 임하니, 눈이 맑아지고 다시 마음이 즐거워졌네."라고 하였다.
주석 511)악양루의 범중엄
범중엄은 북송 때의 정치가이며 문학가로 사대부의 모범적 인물로 꼽힌다. 그가 등주를 다스릴 때 벗인 등종량(騰宗諒)이 좌천되어 악주(岳州)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악양루를 중수하고서 범중에게 기문을 부탁하자 친구를 위로하는 내용을 담아 써 준 글이 〈악양루기(岳陽樓記)이다.
주석 512)별장을……자
당 무종(唐武宗) 때의 명상(名相)인 이덕유(李德裕)는 평천장(平泉莊)이라는 별장을 지었는데, 대사(臺榭)가 100여 곳이나 되는 데다 천하의 기화이초(奇花異草)와 진송괴석(珍松怪石)이 다 모여 마치 선경(仙境)을 방불케 했다고 한다. 이덕유는 자손들에게 훈계하기를 "이것을 파는 자는 나의 자손이 아니며, 꽃 하나 돌 하나라도 남에게 주는 자는 자손이 아니다."라 하였으나, 뒤에 그곳은 권력자의 손에 들어갔다고 한다.
怡心亭紀蹟碑
心, 爲一身之主, 怡, 是安適之謂.人而安適其心, 斯爲養身, 子而安適親心, 斯爲孝親.然而世之能此者, 百不一焉, 此羅氏怡心亭之所以爲難也.亭在井邑郡所聲坊公坪之里, 羅君濟奉、濟潤營築其大人直齋晩暮休養所于少年峰下楚江之上, 取古詩人上官氏'登臨怡心'語而錫名者也.亭之爲處, 後榮摩蒼壁, 前脚揷百尺斷崖, 四周視之皆二間, 而南北間八尺, 東西間七尺, 合之爲堂, 而四通豁如也.石柱以爲固, 鐵欄以防危, 頗傑構爾.直其西別起屋, 房室廊序具焉, 完且美矣.蓋其所處, 逈絶故所, 觀者多勝狀, 而最是楚江一帶, 若巴陵之洞庭, 登臨之際, 主人之心曠神怡, 又彷彿乎嶽樓之笵公.於是乎在翁而爲怡其心, 在子而爲怡親心, 一擧而幷得人二難, 是烏可以不書也.雖然此非一朝而驀取者, 蓋有由焉.直齋少貧事親順, 勤儉治家, 敬士愛禮.縱子遊學, 晩而得稍裕, 則高門閭延賓客, 贏資斧遊山水, 幷家事聽子, 不與視世之百思千千思萬不充不饜者, 何如也.庶可謂知足者矣.自風潮之變新, 利竇濶, 義源塞, 人家子弟, 不以舊之人無聞知譏父兄者, 鮮矣.今二君, 不惟免夫於是, 又能先意乎此擧而盡其力, 雖曰 : "非讀書根基." 吾不信也.是皆重可書以告觀斯亭者.抑有一焉, 昔有置別庄而遺戒者曰 : "毁一草一木, 非吾子孫." 余謂保庄在德, 不在戒誓.若作之者, 鮮終其德而取累, 述之者, 罔念先德而取愆, 庄雖保, 不足爲尙, 况有未可知者乎.余有觀乎此, 亦願斯亭, 今與後之人, 常思保怡心之德, 切於保怡心之亭也.是乃知重輕於名實, 而所以永保其亭者, 尢爲可書而不但已也.濟奉將立碑, 以紀其蹟, 謂余爲同郡人知其事, 累至而求文.爲之悉書, 此三可書者, 而歸重於末, 俾知亭蹟久遠, 實在此而無待於碑爲.直齋, 名光鏞, 舜功其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