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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2
  • 상량문(上樑文)
  • 둘째 아들 형태가 거처하는 집의 상량문【계유년(1933)】(次子烔泰居室上樑文【癸酉】)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2 / 상량문(上樑文)

자료ID HIKS_Z038_01_B00001_001.022.0003.TXT.0008
둘째 아들 형태가 거처하는 집의 상량문【계유년(1933)】
동우의 제도는 선왕에서 내려왔으니棟宇制自先王
어찌 둥지에 거처하고 굴속에 살까.豈可巢居而穴處
등급별 위엄은 사람 일에서 정해지니等威定於人事
달팽이 집이나 대궐 누각과 다르다네.有異蝸廬與龍樓
위나라 형(荊)이 맑은 마음으로知衛子之淸心
집에 잘 거처함을 알겠고,주 481)善居乎室
하후는 검소한 덕으로見夏后之儉德
허름하게 그 궁실을 지은 것을 보았노라.주 482)卑作其宮
부귀한 처지에도 오히려 그러하거늘在貴富而猶然
빈천하게 살면서 어찌 화려함을 말하랴.處貧賤而奚道
후창거사 김택술은後滄居士金澤述
포의의 곤궁한 선비로布衣寒士
콩잎이나 먹는 가난한 사내라네.藿食窶夫
쑥대로 문을 내고 대나무로 문을 만드니蓬戶蓽門
비루한 마을에서 근심을 견디기 어려우며,難堪憂於陋巷
가지나 잎 같은 손자와 자손이枝孫葉子
외람되이 여러 아들들에게 많다네.猥多口於諸房
이미 지금 재산까지 떨어졌으니旣乏現財
장공예주 483)처럼 함께 살림할 수 없고,計無公藝之共産
각자 자신 힘대로 먹고 사니各食其力
진나라 사람들처럼 분가주 484)할 형편이라네.勢將秦人之出分
이에 둘째 아들 형태가乃爲次子烔泰
창동에 집을 짓게 되었는데築室于滄東之里
능력이 넘쳐서가 아니라非曰能之
어쩔 수 없어서라네.不得已也
마을 안 작은 땅을 얻어 터로 삼았는데得村中隙地爲址
앞이 트이고 시원하니氣像開朗
마치 기다리는 듯하였어라.有待如焉
집안의 재주 좋은 이를 빌려 목공으로 삼으니借門內巧手作工
마음이 서로 기뻐하여情意歡洽
흠 잡을 데가 없었도다.無間然矣
목재는 대부분 선대의 산에서 나왔기에材多出於先麓
많은 돈을 쓰지 않았으며,不費夥金
사방 이웃들이 서로 일을 도와준 덕에役相助於四隣
더욱 힘을 줄일 수 있었도다.更覺省力
융희 27년 계유년以隆熙二十七年癸酉
10월 27일 갑인일 미시에 들보를 올리는데,十月二十七日甲寅未時上樑
겨울인데도 따뜻하고 온화하니冬暖而若和煦
아니 이것은 천지가 도운 것이 아닌가.莫是天地之眷扶
일이 다급한데도 제 때에 마치니事遽而趁定期
마치 신명이 도운 듯하여라.如或神明之助佑
이른바 얼마 걸리지 않아 완성한 것이니是所謂成之不日
또한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할 수 있구나.亦可曰事非偶然
누가 세 가(架)가주 485)의 집을 비루하다 하는가誰言三架之陋卑
거처하는 곳이 무릎이나 들어갈까 하지만所居不過容膝
이미 장생의 경계하는 말을 들었네.已聞張生之箴語
어찌 다만 집이 크고 화려해야만豈獨巨寢之輪奐
이에 친족을 모으기를乃得可以聚族
반드시 진의 장로(張老)의 축송하는 말과 같으랴.주 486)必如晉老之頌辭
돌아보건대 곤궁한 인생길에 남은 생애는顧窮途餘生
자신의 분수를 헤아려 알맞게 처신하여야 하는데,度身分而苟合
더구나 망한 나라의 유민으로况亡國遺庶
의리를 헤아려보면 마음이 편치 않도다.揆義理而未安
이에 밭 갈고 길쌈하면서爰處焉耕織
다만 굶주리거나 헐벗지 않고 사누나.但得喫著之不空
이렇게 살면서 효도하고 자애로우며是居而孝慈
오직 윤리가 실추되지 않길 바라노라.惟望倫常之勿墜
길일을 점쳐서吉日玆筮
하찮은 소망을 써 보노라.微願庸書

들보 동쪽에 떡을 던지세抛樑東
소중한 학문 연원은 회옹에서 나왔어라.珍重淵源有晦翁
인한 마을을 골라 살지 않으면 어찌 지혜롭다 하리오주 487)擇不處仁焉得智
창동주 488)의 마을 이름은 뜻이 무궁하여라.滄東里號意無窮

들보 남쪽에 떡을 던지세抛樑南
아득히 〈주남〉을 생각하며 〈갈담〉주 489)을 읊조리네.遙想周南咏葛覃
묻노니 집안에 무엇이 있는가借問家中何所有
뜰에 가득한 방초는 모두 의남주 490)이라네.滿庭芳草總宜男

들보 서쪽에 떡을 던지세抛樑西
석동산 경치는 눈앞에 희미하네.席洞山光望裏迷
해마다 서쪽으로 성묘 가는 길에歲歲西歸瞻掃路
서리 밟고 슬퍼하며주 491) 글을 짓지 못하네.履霜感愴不堪題

들보 북쪽에 떡을 던지세抛樑北
사방의 뭇 별 북극성을 향하누나.四面群星拱北極
한 집안의 정치주 492)도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니爲政一家當若斯
요컨대 핵심은 내 덕을 쓰는데 있도다.要知樞紐用吾德

들보 위쪽에 떡을 던지세抛樑上
상제가 밝게 임하니 누군들 우러르지 않으랴.上帝明臨孰不仰
아침부터 밤까지 부지런하여 마음을 둘로 하지 않을지니夙夜孜孜毋貳心
인을 실천함은 참으로 그 방심을 구하는데 있도다.爲仁亶在求其放

들보 아래쪽에 떡을 던지세抛樑下
곤궁하여 아래에 있으면 마땅히 들에서 밭 갈아야 하네.窮而在下宜耕野
만약 힘써 농사짓고 다른 것을 탐하지 않는다면苟能力穡無他求
서자의 고풍주 493)이 어찌 다른 것이랴.徐子高風豈別者

삼가 바라건대伏願
들보를 올린 뒤에上樑之後
삼재주 494)가 들어오지 않으며三災不入
온갖 상서로움이 점차로 이르기를.百祥漸臻
자손이 시와 예를 익혀 변하지 않으며子孫服詩禮而不渝
짐승으로 변하는 새로운 풍조로 돌아가지 않기를.無歸新風化獸之類
가도와 세운이 모두 화태하여家道與世運而俱泰
높은 대문에 네 마리 수레주 495)를 볼 날이 있기를.庶見高門容駟之時
주석 481)위나라……알겠고
앞의 〈사경재상량문(思敬齋上樑文)〉에 보인다.
주석 482)하후는……보았노라
공자가 말하기를, "우 임금은 내가 흠잡을 수 없도다. 음식은 박하게 먹으면서 귀신을 섬기는 제사에는 효성을 극진히 하며, 의복은 검소하게 입으면서 제사에 착용하는 불과 면류관은 아름다움을 극진히 하며, 거처하는 궁실은 나직하게 지어 살면서 치수 사업에는 힘을 다하였으니, 우 임금은 내가 흠잡을 수 없도다.[禹吾無間然矣 菲飮食而致孝乎鬼神 惡衣服而致美乎黻冕 卑宮室而盡力乎溝洫 禹吾無間然矣]" 하였다. 《論語 泰伯》
주석 483)장공예
앞의 〈사경재상량문(思敬齋上樑文)〉에 보인다.
주석 484)진나라 사람들처럼 분가
《한서(漢書)》 권48 〈가의전(賈誼傳)〉에 의하면 "진나라 사람들은, 부유한 집 자식은 장성하면 재산을 나눠 주어 가정을 독립시키고, 가난한 집 자식은 장성하면 처가살이를 나간다.〔秦人家富子壯則出分, 家貧子壯則出贅.〕"라고 하였다.
주석 485)세 가(架)
일반적인 집은 다섯 가(架)로 이루어지는데, 세 가라면 그에 미치지 못하는 작은 집이다. 다섯 가에 대해서는 앞의 〈전주최씨종회각상량문(全州崔氏宗會閣上樑文)〉 참조.
주석 486)어찌……같으랴
춘추 시대 진(晉)나라 대부(大夫) 조무(趙武)가 저택을 준공했을 때 다른 대부들이 그 집에 가서 축하를 했는데, 장로(張老)가 "아름답도다, 규모가 큼이여. 아름답도다, 꾸밈이 화려함이여. 제사(祭祀) 때는 여기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상사(喪事) 때는 여기에서 곡읍(哭泣)을 하고, 연례(宴禮)에는 여기에 국빈(國賓)과 종족(宗族)을 모으게 될 것이다."라고 송축(頌祝)의 말을 하자, 주인인 조무가 답사(答辭)에서 "무(武)가 여기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여기에서 곡(哭)하고, 여기에 국빈과 종족을 모아서 연례를 할 수 있다면, 이는 내 목숨을 온전히 누린 다음 선대부(先大夫)가 묻힌 구원(九原)으로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하고, 북면(北面)하여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렸는데, 군자(君子)가 이 일을 두고 평론하기를 "장로는 송축하는 말을 잘했고, 조무는 기도하는 말을 잘했다.[善頌善禱]"고 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禮記 檀弓下》
주석 487)인한……하리오
《논어》 〈이인(里仁)〉에, "공자께서 말씀하기를, '마을의 풍속이 인후(仁厚)해야 좋으니, 잘 가려서 인후한 마을에 살지 않으면 어찌 지혜롭다 할 수 있겠는가.〔子曰 里仁爲美 擇不處仁 焉得知〕' 하였다." 한 데서 온 말이다.
주석 488)창동(滄東)
동쪽의 창주라는 의미로 보인다. 주자는 만년에 창주정사를 지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공자를 주벽으로 모시고 그 외 선현들을 배향하였다.
주석 489)〈갈담(葛覃)〉
《시경》의 편명으로, 주 문왕(周文王)의 비 태사(太姒)가 신분이 귀하면서도 부지런하고 부유하면서도 검소하며 시집을 간 뒤에도 친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는 내용이다.
주석 490)의남
풀이름으로, 훤초(萱草)라고도 하는데, 옛날에 임신한 부인이 허리에 차고 다니면 아들을 낳는다는 미신이 있었다.
주석 491)서리 밟고 슬퍼하며
앞의 〈사경재상량문(思敬齋上樑文)〉에 보인다.
주석 492)한 집안의 정치
어떤 사람이 공자(孔子)에게 왜 정치를 하지 않느냐고 묻자, 공자가 "《서경》에 효(孝)에 대해 말하면서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여 그것을 정치하는 데에 미루어 행한다.'라고 하였으니, 이것도 정치를 하는 것이다. 어찌 꼭 벼슬을 해야만 정치를 하는 것이겠는가.〔書云孝乎 惟孝 友于兄弟 施於有政 是亦爲政 奚其爲爲政〕"라고 하였다. 《論語 爲政》
주석 493)서자의 고풍
우암은 주자는 항상 서유자(徐孺子)의 고풍을 칭송하였다고 하였는데, 유자(孺子)는 서치(徐穉, 97~168) 자이다. 후한 예장(豫章)의 학자로 진번(陳蕃)의 우대를 받아 천거되었으나 조정에 나가지 않고, 직접 농사지으며 공손 검약하여 고사(高士)로 불렸다.
주석 494)삼재
수재(水災), 화재(火災), 풍재(風災)를 가리킨다.
주석 495)높은……수레
한나라 우공(于公)이 옥사(獄事)를 공정하게 처리하여 억울한 사람들을 많이 구제하였으므로 사람들에 의해 생사(生祠)가 세워지기까지 하였는데, 그가 일찍이 집을 수리하면서 "내가 음덕을 많이 쌓은 만큼 우리 자손 중에 고관이 많이 나올 테니 좁은 문을 개조해서 사마(駟馬)의 수레가 드나들 수 있도록 크게 만들어야 하겠다."라고 하고는 대문을 높이 세웠다. 그런데 과연 그의 아들 우정국(于定國)이 승상이 되고 나서 그 뒤를 이어서 대대로 자손들이 봉후(封侯)된 '우공고문(于公高門)'의 고사가 전한다. 《漢書 卷71 于定國傳》
次子烔泰居室上樑文【癸酉】
棟宇制自先王, 豈可巢居而穴處.等威定於人事, 有異蝸廬與龍樓.知衛子之淸心, 善居乎室.見夏后之儉德, 卑作其宮.在貴富而猶然, 處貧賤而奚道.後滄居士金澤述, 布衣寒士, 藿食窶夫.蓬戶蓽門, 難堪憂於陋巷.枝孫葉子, 猥多口於諸房.旣乏現財, 計無公藝之共産.各食其力, 勢將秦人之出分.乃爲次子烔泰, 築室于滄東之里, 非曰能之, 不得已也.得村中隙地爲址, 氣像開朗, 有待如焉.借門內巧手作工, 情意歡洽, 無間然矣.材多出於先麓, 不費夥金.役相助於四隣, 更覺省力.以隆熙二十七年癸酉, 十月二十七日甲寅未時上樑.冬暖而若和煦, 莫是天地之眷扶.事遽而趁定期, 如或神明之助佑.是所謂成之不日.亦可曰事非偶然, 誰言三架之陋卑.所居不過容膝, 已聞張生之箴語.豈獨巨寢之輪奐, 乃得可以聚族, 必如晉老之頌辭.顧窮途餘生, 度身分而苟合.况亡國遺庶, 揆義理而未安.爰處焉耕織, 但得喫著之不空.是居而孝慈, 惟望倫常之勿墜.吉日玆筮, 微願庸書.
抛樑東, 珍重淵源有晦翁.擇不處仁焉得智, 滄東里號意無窮.
抛樑南, 遙想〈周南〉咏〈葛覃〉.借問家中何所有, 滿庭芳草總宜男.
抛樑西, 席洞山光望裏迷.歲歲西歸瞻掃路, 履霜感愴不堪題.
抛樑北, 四面群星拱北極.爲政一家當若斯, 要知樞紐用吾德.
抛樑上, 上帝明臨孰不仰.夙夜孜孜毋貳心, 爲仁亶在求其放.
抛樑下, 窮而在下宜耕野.苟能力穡無他求, 徐子高風豈別者.
伏願上樑之後, 三災不入, 百祥漸臻.子孫服詩禮而不渝, 無歸新風化獸之類.家道與世運而俱泰, 庶見高門容駟之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