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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2
  • 고축문(告祝文)
  • 선고와 선비의 묘에 고하는 글(告先考先妣墓文)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2 / 고축문(告祝文)

자료ID HIKS_Z038_01_B00001_001.022.0002.TXT.0005
선고와 선비의 묘에 고하는 글
유세차 을축년(1925) 7월 을해삭(乙亥朔) 27일 신축일(辛丑日)에 불초자(不肖子) 택술은 망극한 재앙을 만나 성명을 보전하지 못한 채 매우 애통해하며 삼가 머리를 조아리고 현고(顯考) 벽봉거사(碧峰居士) 부군(府君)과 현비(顯妣) 유인(孺人) 최씨(崔氏)의 묘소에 다음과 같이 곡하며 아룁니다.
오호라! 우리 현고께서는 비범한 재주를 지니고 입신양명(立身揚名)의 뜻을 품어서 일찌감치 과장(科場)에서 영명(英名)을 드날리고 지푸라기를 줍듯이 공업을 쉽게 이루었습니다. 이른 나이에 고자(孤子)로서 집안 살림을 맡은주 206) 뒤에는 조부모님과 어머니에 대해 변변찮은 음식주 207)으로도 봉양하기가 어렵게 되자, 거업(擧業 과거 공부)을 그만두고 몸소 밭을 갈면서도 담박하여 외적인 것을 사모하지 않았습니다. 불초한 제가 조금 장성하여 글을 읽을 줄을 알게 되자, 평생 완수하지 못한 지업(志業)을 저에게 이루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엄하게 독책하고 권면하여 깨우쳐주며 격려하고 점차적으로 연마시키며 성취시키는 모든 방법을 매우 지극하게 하지 않음이 없으셨습니다. 글을 지으면 점찬(點竄)주 208)을 직접 해 주시어 완본을 이루도록 하고, 글을 외우면 살피고 점검하기를 부지런히 하시어 거질(巨帙)을 이어 다 외울 수 있도록 하셨으니, 대개 불초한 제가 오늘날 대강이나마 문자를 이해하게 된 것은 털끝만큼도 모두 부군께서 잘 인도해 주신 가르침주 209) 덕분입니다.
이윽고 세도(世道)가 크게 변하여 다시는 가망이 없게 되자, 불초한 저를 불러다 고하시기를 "옛말에, '학문을 하고서 넉넉함이 있으면 벼슬을 한다.'주 210)라고 하였는데, 학문을 하고서 넉넉함이 있기란 진실로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이다지도 변하였으니, 학문을 함에 비록 여력이 있다고 한들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또 사학(斯學 유학(儒學))의 요점은 오로지 도를 밝히고 몸을 성실히 하여 하늘이 부여해 준 것을 온전히 하고 성인이 전수하신 것을 이어서 명성과 녹리(祿利)의 사이에 참여하지 않는 데에 있다. 지금 세상 학문의 종주(宗主)로는 간재(艮齋) 전 선생(田先生 전우(田愚))이 계시니, 너는 찾아가 뵙도록 하라." 하시고는, 마침내 짐을 꾸리고서 봉산(蓬山) 월명암(月明菴)의 여차(旅次)에서 절하고 모셔오도록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간옹(艮翁 간재)께서 곽임종(郭林宗)이 모용(茅容)의 집에 방문했던 옛 일주 211)을 인용하시는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수레가 임하여 하룻밤을 묵음에 수레를 탄 장자(長子)주 212)와 금패(襟珮)주 213)를 착용한 후영(後英)들이 구름처럼 많이들 모여드니, 부군의 얼굴에 기쁜 빛이 돌았습니다. 불초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현인(賢人)이 지나는 곳마다 산과 시내에는 생기가 돌고, 쑥대와 싸리에는 광채가 더해지는 법이다. 비록 가령 네가 과거에 급제한다 하더라도 어찌 오늘의 즐거움만 하겠는가."라고 하셨습니다. 인하여 폐백을 갖추어 천안(天安)의 금화산(金華山) 안에서 사제간(師弟間)의 분수를 정하게 하고는, 장원을 팔아서 여비(旅費)를 마련하여주 214) 해마다 반드시 두 차례씩 찾아오셨습니다.
오호라! 불초한 제가 귀의할 바를 얻고 대강이나마 도리를 아는 것은 털끝만큼도 모두 부군의 가르침주 215) 덕분입니다. 온 마음이 성(性)을 높이고 우러르며 일마다 성에서 법을 취하며 어진 이를 구하는 정성주 216)과 장창(臧倉)에 대한 변론주 217)에 이르러서는 종신토록 변치 않았고, 옛것을 좋아하라는 교훈과 본성을 높이라는 지결(旨訣)은 백발이 되어서도 더욱 돈독하였으니, 이는 또한 부군이 간옹에 대해 순수하게 스승으로 섬기지는 않은 스승으로 삼은 것입니다.
오호라! 불초한 제가 간옹을 스승으로 삼고 부군을 아비로 삼았습니다. 대개 선사(先師)의 운위(云爲)는 어떤 것인들 오묘한 도리와 정밀한 뜻이 아닌 것이 없었으나, 오직 외딴 섬에서 자정(自靖)하여주 218) 군신(君臣)과 화이(華夷)의 경계를 엄하게 하고 본성을 높이며 옳은 것을 구하고 죽어도 변치 않은주 219) 지결, 이것만을 제일의(第一義)주 220)로 삼았습니다. 부군의 언행(言行)도 어떤 것인들 아름다운 가르침과 훌륭한 행적이 아닌 것이 없었으나, 그중 최고는 사정(邪正)의 구분과 의리(義利)의 분별을 분명히 판단하여 동난(東亂)주 221)을 만나 이웃에서 사귄 비적(匪賊)의 괴수(魁首)를 끊어버리고, 단발령이 내려지자주 222) 부자간에 똑같이 죽기로 맹세한 것이니, 이는 평생 지절의 일부분주 223)이니, 불초한 제가 감화되고 가슴에 새긴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공사(公私)와 시비(是非)의 길에서 전전긍긍하여 감히 대충 지나치지 않아서주 224) 비록 이해(利害)와 화복(禍福)과 사생(死生)이 앞에 닥쳐와도 맹세코 아비와 스승의 가르침을 저버려서 아비와 스승의 덕에 누를 끼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호라! 사문(斯文)이 곤액을 당하여 간옹의 문하에 오진영(吳震泳)주 225)이라는 자가 나와 간사하고 패악하며 거짓되고 기만하는 짓을 함이 끝이 없습니다. 일제에게 인허를 구하지 말라는 뜻을 저버리고서 경부(京府)에 원고를 보내어 스승의 덕을 더럽히고, '스스로 헤아려서 하라.'거나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고 하셨다는 등의 말주 226)을 지어내서 스승을 '인가하신 뜻이 있으셨다.'거나 '인가하신 가르침이 있으셨다.'고 무함하며, '청원하여 자신을 욕되게 하지 말라.'는 내용의 남기신 편지주 227)를 버리고서 그 무리인 강태걸(姜泰杰)에게 인허를 받아 간행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에 선사의 해처럼 빛나고 옥처럼 깨끗한 의리와 서릿발처럼 엄하고 절벽처럼 우뚝한 절조가 흐릿해지고 너덜너덜해져서 차마 듣지 못할 기롱과 비난이 하늘과 땅에 가득 차 넘치게 되었습니다. 불초한 저는 망극한 스승의 무함을 애통해하고 크게 손상된 세도(世道)를 근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삼가 스스로를 헤아리지 못하고 공론을 거두어 취해서 남기신 편지를 배포하여 선사의 뜻을 밝히고, 성토하는 글을 보내 오진영의 죄를 바로잡아 스스로 스승을 높이고 도를 호위하는 뜻을 붙였으니, 이는 시비(是非)를 구별하는 없어지지 않는 천성에서 나온 것이요, 아비와 스승의 가르침을 받들고 높이는 것을 자신(自信)한 것입니다.
아, 저 오진영은 마침내 인허를 받아 간행하는 일을 성사시키기 어렵고 판매가 잘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성토하는 글이 방해했기 때문이라고 하여 강태걸을 시켜 진천 경찰서(鎭川警察署)에 고소한 다음, 재차 전주 검사국(全州檢事局)주 228)에 고소하도록 하고서 '명예손해(名譽損害)'와 '업무방해(業務妨害)'에 대한 두 가지 법률을 변무인(辨誣人)에게 추가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제가 이 때문에 통문을 지었는데, 이 때문에 더욱 저 사람이 복수하고자 하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지난 달 초 2일에 이미 검사국의 조사를 받았는데 힘써 항변하여 굽히지 않았고, 이번 달 25일에 또 재차 부름을 받았는데 나아가지 않았으니, 앞으로 닥쳐올 재앙을 어찌 끝낼 수 있겠습니까. 끝낼 수 없다면 의리상 부모가 남겨주신 당당한 칠 척(尺)의 몸이 오랑캐에게 치욕을 받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겠으니, 다만 마땅히 기러기 털보다 가볍게 여기고주 229) 웅장(熊掌)을 취하여주 230) 스스로 한결같이 섬기며주 231) 목숨을 바치는 의리를 다하면 될 뿐입니다.
오호라! 불초한 제가 어려서부터 완악하고 몽매하여 자식으로서의 직분을 닦지 못하였는지라 죄역(罪逆)이 누적되어 스물여섯 살에 현고(顯考)께 화가 뻗쳤고, 그 8년 뒤에 또 현비(顯妣)를 잃었으니, 원통해하고 통곡하며 뒤늦게 뉘우쳐봐야 다시 뵐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선조를 잇고 후손을 넉넉히 하여 집안의 명성을 실추시키지 않은 것이 진실로 불초한 저의 계술(繼述)주 232)하는 책임입니다. 그러나 다만 부조(父祖) 두 대와 고비(考妣) 네 위(位)를 선영(先塋)에 임시로 매장한 것이 길이 평안하시기에 부족함이 있기에, 앞으로 경영하여 모두 받들어 면례(緬禮 이장(移葬))해서 불초한 저의 효도하지 못한 데 대한 한을 조금이나마 풀고 부군의 다하지 못한 정성을 뒤늦게나마 이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갑자기 큰 재앙을 당하였으니, 모두 불초한 저의 지식이 힘을 헤아리지 못하고 저의 학문이 몸을 보전하지 못하여 불러온 결과인지라, 불효 중에서도 더욱 심한 불효를 저질렀습니다.
비록 그러나 부군께서 평소 불초한 저에게 바라시던 것은 다만 성현의 가르침을 받들고 춘추의 의리를 지켜 낳아주신 부모를 욕되게 하지 않고서 죽도록 하고자 한 것뿐이었으니, 오늘날의 의체(義諦)는 혹 훼손시키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어버이를 욕되게 하는 불효를 행하였습니다. 미처 실행하지 못한 선대의 일은 계제인 억술이 있으니, 거의 의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군의 효학(孝學)ㆍ 절의(節義)와 선비의 효경(孝敬)ㆍ 덕범(德範)에 이르러서는 모두 간재 선사께서 천표(阡表)와 행장발(行狀跋)에 밝혀 찬미해주셨으니, 대명(大名)의 신필(信筆)인지라 충분히 백세토록 썩지 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불초한 저의 불효 가운데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이 이미 여기에 있습니다. 선사께서는 또 불초한 저의 뜻과 학문에 대해 표문에서는 선고에 근본을 미루어주시고, 어버이의 이름을 드러내고 조상의 업적을 잇는 것주 233)으로 행장의 발에서 불초한 저를 기약해 주셨으니, 그렇다면 불초한 저의 평생 동안의 한 번 말하고 한 번 움직이는 동안의 선악이 부모의 영욕(榮辱)이 아님이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이 내몰리고 엎어지고 삶과 죽음이라는 큰일을 만남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옛날에 주자(朱子 주희(朱熹)는 정자(程子)를 공격하여 참(斬)하기를 청한 때를 당하여 스스로 영광으로 여겼고, 우암(尤菴) 송 선생(宋先生 宋時烈)은 황고(皇考)의 묘에 고한 글234)주 1)에서 이를 인용하여 율곡(栗谷 이이(李珥))과 우계(牛溪 성혼(成渾)) 두 현인과 더불어 한가지로 파패(破敗)당한 것이 영광스러운 일임을 증명하였습니다. 불초한 저 또한 감히 스스로 선사께서 무함을 받은 날 선사를 무함한 적의 손에 죽는 것을 비록 감히 주자와 송 선생이 당한 일에 참람되게 비의할 수는 없겠지만, 거의 천년 뒤에는 불초한 저의 한 번의 죽음이 어버이에게 영광을 드린 것인지, 치욕을 끼친 것인지에 논하는 자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호라! 말은 이쯤에서 마치지만 마음은 다함이 없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존경께서는 이 심정을 밝게 살펴 주십시오. 삼가 고합니다.
주석 206)집안 살림을 맡은
원문은 '당실(當室)'이다. 이는 부친이나 형 대신 집안일을 주관하는 것을 말한다. 고대에는 대부분 적자(嫡子)가 당실을 했으므로 적자의 별칭으로도 쓰인다.
주석 207)변변찮은 음식
원문의 '숙수(菽水)'는 콩과 물로 변변치 못한 음식을 뜻하는데, 곧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부모를 극진히 봉양하는 것을 의미한다. 공자(孔子)의 제자 자로(子路)가 집안이 가난해서 효도를 제대로 못한다고 탄식하자, 공자가 "콩죽을 끓여 먹고 물을 마시더라도 부모를 극진히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을 바로 효라 이른다.[啜菽飮水盡其歡, 斯之謂孝]"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禮記 檀弓下》
주석 208)점찬(點竄)
시문(詩文)의 자구(字句)를 고치고 다듬는 일을 말한다. 당(唐)나라 왕발(王勃)이 비송(碑頌)을 지을 때마다 미리 몇 되의 먹을 갈아 놓고 한번 붓을 잡고서 써 내려가면 한 번도 점찬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에 복고(腹稿)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酉陽雜俎 語資》
주석 209)잘……가르침
00쪽 주 00) 참조.
주석 210)학문을……한다
《논어》 〈자장(子張)〉에 보인다.
주석 211)곽임종(郭林宗)이……일
무슨 일을 가리킨 것인지는 상세하지 않으나, 현자를 알아보고 그를 정성스레 모셔가려고 했던 노력에 대한 내용을 말한 듯하다. 참고로, 《명현씨족언행유고(明賢氏族言行類稿)》 권24에 "옛날 모용은 농가의 아들이었다. 닭을 잡아서는 요리하여 그의 어머니께 대접해 드리고, 자신의 집을 찾아온 곽임종(郭林宗)에게는 채소반찬으로 접대하니, 곽임종이 일어나 그에게 절을 하고 나서 학문할 것을 권고한 끝에 그가 사해의 명사(名士)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주석 212)수레를 탄 장자(長子)
《사기(史記)》 권56 〈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에 "다 떨어진 거적으로 문을 매달아 놓은 집에 장자의 수레가 많이도 찾아왔다.[以弊席爲門, 然門外多有長者車轍.]"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석 213)금패(襟珮)
푸른 옷깃을 두르고 푸른 패옥(佩玉)을 찬 유생을 의미한다. 《시경(詩經)》 〈정풍(鄭風) 자금(子衿)〉에 "푸르고 푸른 그대의 옷깃, 길이 생각하는 내 마음이다. 내가 가지는 못하지만 그대는 왜 소식을 계속 전하지 않는가. 푸르고 푸른 그대의 패옥, 길이 생각하는 내 마음이다. 내가 비록 가지는 못하지만 그대는 어이하여 오지 않는고.[靑靑子衿, 悠悠我心. 縱我不往, 子寧不嗣音. 靑靑子佩, 悠悠我思. 縱我不往, 子寧不來.]"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석 214)여비(旅費) 마련하여
원문의 '판부(辦斧)'는 도끼를 마련한다는 말로, 도끼란 재화(財貨)와 기용(器用)을 이르는 말이다. 여기서는 여비를 의미한다. 이는 《주역(周易)》 손(巽)괘 상구(上九) 효사(爻辭)에 "물자와 도끼를 잃는다.[喪其資斧] "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석 215)가르침
원문은 '義方'이다. 자세한 내용은 00쪽 주 00) 참조.
주석 216)어진……정성
원문의 '치의(緇衣)'는 《시경(詩經)》 〈정풍(鄭風) 치의〉에 "검은 옷이 잘도 어울리는 분, 해지면 내가 다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緇衣之宜兮, 敝予又改爲兮.]"라고 하였고, 또 《예기》 〈치의〉에 "어진 이를 좋아하기를 〈치의〉 편처럼 한다.[好賢如緇衣.]"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이는 어진 이를 좋아하여 구하려는 정성을 의미한다.
주석 217)장창(臧倉)에 대한 변론
미상(未詳)이다.
주석 218)외딴 섬에서 자정(自靖)하여
간재는 1910년 한일합병 이후에 제자들과 상의하여 "마침내 도(道)가 행해지지 않으면 뗏목을 타고 바다로 들어간다"는 공자의 뜻을 취해 해도로 들어간 바 있다. 지금의 부안 · 군산 등의 앞바다에 있는 작은 섬을 옮겨 다니면서 강학(講學)하여, 도학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하고자 노력하였다. 1912년 계화도(界火島)에 정착하여 섬 이름을 중화를 잇는다는 의미인 계화도(繼華島)라 부르면서 죽을 때까지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원문의 '헌정(獻靖)'은 《서경》 〈상서(商書) 미자(微子)〉에, 은(殷)나라 태사(太師)인 기자(箕子)가 주(紂)의 서형(庶兄)인 미자에게 "스스로 분의에 편안하여 각자 스스로 그 뜻이 선왕에게 전달되면 됩니다. 저는 떠나가 은둔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겠다.[自靖, 人自獻于先王, 我不顧行遯.]"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처한 상황에 알맞게 자신의 도리를 다하는 것을 이른다.
주석 219)죽어도 변치 않은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0장에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는 곤궁했을 때의 뜻을 변하지 않으니, 강하도다, 꿋꿋함이여!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는 죽음에 이르러도 지조를 변하지 않으니, 강하도다, 꿋꿋함이여![君子國有道, 不變塞焉, 强哉矯. 國無道, 至死不變, 强哉矯.]"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中庸章句 第10章》
주석 220)제일의(第一義)
가장 중요한 일이나 급선무로 해야 할 것을 말한다. 또는 최상의 방법을 뜻하기도 한다.
주석 221)동난(東亂)
1894년(고종31)에 있었던 갑오개혁(甲午改革)을 말한다.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하여 들어왔던 일본 군대가 왕궁을 포위하고는 청일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원군을 앞세워 민씨 일파를 축출하였으며, 김홍집(金弘集)을 중심으로 하는 온건개화파의 친일 정부를 수립하여 국정 개혁을 단행하였다.
주석 222)단발령이 내려지자
주석 223)일부분
원문읜 '일반(一斑)'은 진(晉)나라 왕헌지(王獻之)가 소년 시절에 도박 놀음을 옆에서 지켜보다가 훈수를 하자,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이 아이도 역시 대롱으로 표범을 엿보면서 그 반점 하나만을 보는 식이다.[此郞亦管中窺豹, 時見一斑.]"라고 비웃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이는 대롱 구멍을 통해 표범의 얼룩무늬를 엿본다는 것으로, 전체의 모습을 조관하지 못하고 겨우 사물의 일부분만을 보는데 그치는 아주 협소한 안목이나 소견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世說新語 方正》
주석 224)대충 지나치지 않아서
《주자대전(朱子大全)》 권49 〈답진부중(答陳膚仲) 4〉에 "근래에 벗들의 독서가 대부분 구차하고 간략하여 명확하게 이해하지도 못했는데도 곧장 이와 같이 대충대충 지나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近覺朋友讀書多是苟簡, 未曾曉會得, 便只如此打過.]"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의 '타과(打過)'에서 "그냥 지나치다는 말과 같다.[猶言放過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참고로, 주희(朱熹)가 진공석(陳孔碩)에게 답한 편지 가운데 "집안일이 산적하여 학문에 방해가 되는 것을 근심하고 있다는 편지를 받았으니, 이는 그야말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바로 공부를 하는 현장일 따름이니, 매사에 도리를 꿰뚫어 데면데면 지나치지 않게 하여야 한다.[承以家務叢委妨于學問爲憂, 此固無可奈何者. 然亦只此便是用功實地, 但每事看得道理, 不令容易放過.]"라고 한 데서도 보인다. 《朱子大全 卷49 答陳膚仲》
주석 225)오진영(吳震泳)
1868~1944.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인이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석농(石農)이다. 안성(安城) 경앙사(景仰祠)에 배향되었다. 문집으로 《석농집(石農集)》이 있다. 1925년에 오진영이 스승인 간재의 유지(遺旨)를 무시하고 총독의 허가를 얻어 문집을 발간할 때, 여러 동문의 선봉이 되어 그의 선생의 뜻을 저버린 죄를 성토한 바 있다. 이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김택술은 배일당(排日黨)으로 지목되어 전주 검사국에 여러 번 호출을 당했고, 일차 피랍되어 무수한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주석 226)스스로…말
오진영이 김낙두(金洛斗)에게 답한 편지에 "금년 봄 3월에 선사께서 홀로 은행나무 아래 대나무 평상에 앉아 계실 때에 나에게 명하시기를, '세상은 알 수 없으니, 문고(文稿)는 그대가 스스로 헤아려서 하라.' 하셨다."라고 하였고, 이병은(李炳殷)에게 보낸 편지에 "인쇄를 업으로 하는 자가 스스로 인허를 받았으면 글을 저술한 사람은 무관하다고 들었다. 이와 같다면 깊이 구애받을 필요가 없을 듯하다.' 하셨다."라고 한 내용을 가리킨다.
주석 227)청원하여……편지
《간재선생문집 후편속(艮齋先生文集後編續)》 권5 〈고제자손겸시제군(告諸子孫兼示諸君)〉에 "훗날 사변이 조금 안정되기 전에 만약 저들에게 청원하여 간행·반포할 계획을 한다면 결단코 이는 자신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여러 사람이 혹 강권하더라도 너희들은 맹세코 부조의 마지막 명을 지켜 부디 마지못해 따르지 말라. 이 종이를 따로 보관하여 훗날 증빙할 때를 기다려라.[異時時變稍定之前, 若請願於彼, 以爲刊布之計, 決是自辱. 諸人雖或强之, 汝等誓守父祖末命, 愼勿勉從也. 此紙別藏, 以俟後憑.]"라고 한 내용을 가리킨다.
주석 228)검사국(檢事局)
일제 강점기에 검사(檢事)가 일을 보던 곳을 가리킨다.
주석 229)기러기…여기고
태산과 같이 더없이 귀중한 목숨을 사물 가운데 가장 가볍다는 기러기 털처럼 여겨 미련 없이 버렸다는 말이다. 사마천(司馬遷)의 〈보임안서(報任安書)〉에 "사람이라면 모두 한 번은 죽게 마련인데, 어떤 사람의 죽음은 태산보다도 무거운 반면에, 어떤 사람의 죽음은 기러기 털보다도 가볍다.[人固有一死 或重于泰山 或輕于鴻毛]"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석 230)웅장(熊掌)을 취하여
목숨보다 의리가 중요하다는 비유적 표현이다. 《맹자(孟子)》 〈고자 상(告子上)〉에 "물고기도 내가 좋아하고 웅장도 내가 좋아한다. 하지만 두 가지를 모두 가질 수 없을 경우에는 물고기를 버리고 웅장을 취하겠다. 사는 것도 내가 좋아하고 의리도 내가 좋아한다. 그러나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질 수 없을 경우에는 삶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겠다.[魚我所欲也, 熊掌亦我所欲也. 二者, 不可得兼, 舍魚而取熊掌者也. 生亦我所欲也, 義亦我所欲也. 二者, 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석 231)한결같이 섬기며
원문의 '사일(事一)'은 생삼사일(生三事一)의 준말로,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의 의리와도 통한다. 이는 자신을 낳아 준 아버지와 글을 가르쳐 준 스승과 밥을 먹게 하여 준 임금을 한결같이 섬겨야 한다는 뜻이다. 진(晉)나라 대부 난공자(欒共子)가 말하기를 "백성은 부모, 스승, 임금의 셋에서 사는지라. 섬기기를 한결같이 한다.[民生於三, 事之如一.]"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國語 晉語》 《小學集註 明倫》
주석 232)계술(繼述)
효자가 선세(先世)의 업적을 잘 계승하는 것을 말한다. 《중용장구(中庸章句)》 19장에 "무릇 효란 선인의 뜻을 잘 계승하며, 선인의 일을 잘 전술하는 것이다.[夫孝者, 善繼人之志, 善述人之事者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석 233)조상의……것
원문의 '래허(來許)'은 《시경》 〈하무(下武)〉에 "앞으로 올 날 밝히어, 조상의 발자취를 이으면, 아, 만년이 되도록 하늘의 복 받으시리라.[昭茲來許, 繩其祖武, 於萬斯年, 受天之祜.]"라고 한 데서 온 말로, 후손이 조상의 업적을 잇는 것을 의미한다.
주석 1)우암(尤庵)……글
《송자대전( 宋子大全)》 권151의 〈고황고수옹선생황비정경부인곽씨묘문(告皇考睡翁先生皇妣貞敬夫人郭氏墓文)〉을 가리킨다.
告先考先妣墓文
維歲次乙丑七月乙亥朔二十七日辛丑, 不肖子澤述, 遭禍罔極, 性命不保.銜痛致哀, 謹稽首, 哭告于顯考碧峰居士府君顯妣孺人崔氏之墓.嗚呼! 惟我顯考.負超羣之材, 抱立揚之志, 早飛英於場屋, 擬功業之芥拾.夙孤當室之餘, 層堂篤老, 菽水爲難, 則廢擧躬耕, 泊然而不慕外也.及乎不肖稍長, 能知讀書, 則欲以生平未遂之志業, 責成於不肖.凡所以嚴督獎喩激厲漸磨成就之道, 靡極不至, 製課而點竄之是親, 完本成焉 ; 誦程而考飭之是勤, 巨帙聯焉.蓋不肖今日粗解文字者, 秋毫皆府君之式穀也.已而世道大變, 無復可望, 則召不肖而告之曰 : "古有云, '學而優則仕.' 學之優, 誠難矣.然世變如許, 學雖優, 將安用諸.且斯學之要, 亶在明道誠身, 全天賦紹聖傳, 無與乎名祿之間.今世學問宗主, 艮齋田先生在, 汝往謁之."遂治裝, 令拜于蓬山之月明菴旅次.得艮翁之引郭林宗訪茅容故事.駕臨一宿, 長者車轍, 後英襟珮, 林林如雲, 則府君喜形于色.謂不肖曰 : "賢人所過, 山川生色, 蓬蓽增彩.雖使汝占巍科, 豈如今日之樂." 因具贄, 使定分于天安金華山中, 鬻庄辦斧, 歲必再度.嗚呼! 不肖得所依歸, 粗識道理者, 秋毫皆府君之義方也.至於心心尊仰, 事事取法, 緇衣之誠, 臧倉之辨, 終身而不渝 ; 好古之規, 尊性之訣, 白首而彌篤, 此又府君之於艮翁, 不純師之師也.嗚呼! 不肖以艮翁爲師, 府君爲父, 蓋先師之云爲, 何莫非妙道精義, 惟是絶島獻靖, 嚴君臣華夷之防, 尊性求是至死不變之訣, 爲第一義也 ; 府君之言行, 亦莫非嘉訓懿蹟, 而最是判邪正之分義利之辨, 遭東亂而絶匪魁於隣交, 當薙變而誓父子之同死者, 爲平生志節之一斑也.不肖之所擩染服膺者如此.故凡於公私是非之塗, 兢兢然不敢放過, 雖利害禍福死生之當前, 誓不欲負父師敎而累父師德矣.嗚呼! 斯文窮厄, 艮翁之門.不幸有吳震泳者出, 奸悖誣罔, 罔有紀極.舍無認而投稿京府, 以累師德, 造料量不拘等說, 誣師以認意認敎, 棄請願自辱之遺書, 令其徒姜泰杰出認而印稿.於是先師日光玉潔之義, 霜嚴壁立之節, 昧昧破破, 而不忍聞之譏罵, 漲天溢地矣.不肖痛師誣之罔極, 憂世道之大害, 竊不自量.收取公論, 布遺書而明先師之義, 行討文而正震泳之罪, 自附於尊師衛道之義.蓋出於是非不泯之天, 而自信其奉遵父師之敎也.噫! 彼震泳.乃以認印之難成, 販賣之未售, 爲討文之沮害.使泰杰旣訴鎭川警察署, 再訴全州檢事局, 請加名譽損害業務妨害二律于辨誣人.而不肖則以製通也.故尢爲彼之所甘心.去月初二日, 已被檢局調訊, 力抗不屈.今月廾五日, 又被再呼不往.前頭之禍, 安得以已乎.無己則義不容以父母所遺之堂堂七尺, 受辱於閭夷, 只合輕鴻毛而取熊掌, 以自盡事一致死之義而已.嗚呼! 不肖幼少頑昧, 不修子職.罪逆積重, 弱冠有六, 禍延顯考.厥後八年, 又喪顯妣, 寃酷痛號, 追訟靡逮.承先裕後, 不墜家聲, 固不肖繼述之責.而惟是父祖兩世考妣四位, 權厝先塋有欠永安.方且經紀, 幷奉緬襄, 少洩不肖不孝之恨, 追繼府君未盡之誠.此事未遂, 遽當大禍, 莫非不肖知不能量力, 學不能保身而致之, 則不孝中尢不孝也.雖然, 府君平日所望於不肖者, 惟欲奉聖賢之敎, 守春秋之義, 無忝所生而死, 則今日義諦, 或得免虧, 行辱親之不孝.而先事之未遑, 有季弟億述在, 庶可以有恃也.至於府君之孝學節義, 先妣之孝敬德範, 俱蒙艮翁先師闡美於阡表狀跋, 大名信筆, 足以不朽於百世, 則不肖不孝中一幸, 旣在乎此.而先師又以不肖之志學, 推本先考於表文, 以顯親來許, 期不肖於狀跋.然則不肖生平一言一動之善惡, 莫非父母之榮辱.矧此顚沛之際死生之大者乎.昔朱子遭請斬於攻程之時, 自以爲光華.尢菴宋先生, 引此於告皇考墓文, 以證與栗、牛兩賢同其破敗之爲榮.不肖亦敢自以爲以先師被誣之日見死於誣師賊者, 雖不敢僣擬於朱宋之所遭.庶千載之下, 有論不肖一死之貽其親者, 是榮是辱矣.嗚呼! 言止此而意無窮.伏惟尊靈, 昭鑑此衷.謹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