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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1
  • 기(記)
  • 분재기 【임오년(1942)】(粉齋記 【壬午】)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1 / 기(記)

자료ID HIKS_Z038_01_B00001_001.021.0001.TXT.0009
분재기 【임오년(1942)】
부풍(扶風 부안)에서 남쪽으로 7리 되는 곳에 위치한 석동산(席洞山)은 우리 17대조 고려 봉정대부 지고부군수공(奉正大夫 知古阜郡事公)께서 망복(罔僕)주 41)으로 은둔하셨던 고을이다. 이것을 인하여 이곳에 장사지내고, 두 아들 대호군공(大護軍公)과 직장공(直長公)을 부장하였는데, 풍수가 아름답다고 남쪽 지역에서 일컬어졌다. 석동산의 한 지맥이 동쪽으로 5리를 달려 간 곳이 분동산(粉洞山)이다. 직장공의 아들 첨지공과 손자 현감공(縣監公)을 이곳에 장사지냈고, 그 아름다움도 또한 석동산에 버금갔으니, 이곳이 우리 분파조(分派祖)의 선영이다.
두 산에 모두 병사(丙舍)가 있는데, 석동산의 취성재(聚星齋)는 본디 석천(石川) 임문원공(林文元公 임억령(林億齡))의 "김씨 집안의 덕성이 모였네.[金門聚德星]"라는 시의 뜻을 취한 것이다. 그런데 이 분동산의 재실은 단지 지명을 사용하고 아름다운 이름을 지어준 것이 없으니, 무엇 때문인가? 예전의 기록이 없어 상고할 수 없었다.
삼가 일찍이 생각건대, 공자가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비단이 있은 뒤에 하는 것이다."라고 하자, 자하가 "예(禮)는 뒤의 일이군요."라고 하였는데, 주자가 이에 대해 주석하기를, "예는 반드시 충신(忠信)을 바탕으로 삼으니, 이는 그림을 그리는 일은 반드시 흰 비단을 우선으로 삼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주 42) 대체로 충신은 예에서 흰 바탕을 마련하는 것에 해당하고, 절의(節義)는 예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에 해당하니, 당시 재실을 명명한 뜻이 비록 처한 형편과 환경을 따랐고, 일삼음이 없는 바를 행했다 하더라도 또한 성현의 가르침처럼 실제로 바탕을 숭상하고 꾸밈을 뒤로하는 데에서 나오지 않은 줄 어찌 알겠는가.
무릇 '재(齋)'란 것은 '가지런함[齊]'이니,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몸과 마음의 가지런함을 다하는 것이다. 제례(祭禮)로 말하면 슬프고 두려하며 마치 눈앞에 조상이 보이는 듯하고 계시는 듯 여기는 것은 충신의 바탕이고, 준조(尊俎)ㆍ변두(籩豆)와 오르내리고 절하며 무릎을 꿇는 것 등은 의절의 꾸밈이니, 만약 조상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고 계시는 듯 여기는 정성을 다하지 않는다면 비록 의절의 꾸밈이 있다 한들 장차 어디에 베풀겠는가. 때문에 "성실하지 않으면 사물이 없게 된다."주 43)라고 하였고, 또 "예는 헛되이 행해지지 않는다."주 44)라고 하였으니, 이는 힘써야 할 바이다.
더욱 일삼을 것이 있다. 첨지공이 나라에 세운 공훈과 현감공이 백성들의 정사에 드러낸 치적부터 군사공이 붙잡아 세운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의 윤리는 모두 충신(忠信)을 주로 하여 이룩한 것이니, 이 재실에 들어와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봉영을 바라보며 추모하는 우리 모든 종족은 마음을 쓰고 말을 하는 것에서부터 고을에서 처신하고 세상에 응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행동을 제재하고 몸을 세우는 모든 것들이 선조께서 힘쓰신 것을 주로 하여 겉모습과 본바탕 사이에서 먼저하고 나중에 할 바를 알지 않음이 없어야 한다. 이것이 선조에 대한 제향을 잘하는 것이고, 선조를 생각하여 덕을 닦는 일을 잘하는 것이니, 재실의 이름에 아름다움을 주는 것으로 무엇이 이보다 더 좋을 것이 있겠는가.
구구하고 변변찮은 내가 감히 이것을 문미 사이에 기록하여 삼가 스스로 예전에 드러내지 못한 뜻을 드러낸 데에 부치고, 여러 종족들과 함께 힘쓰기를 바란다.
재실을 중수한 일이 기사년에 있었는데, 그것이 원릉(元陵 영조) 때인지 인릉(仁陵 정조) 때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고, 당시 육위문(六偉文 상량문(上樑文))이 있지만 그 창작이 어느 때에 있었는지는 더욱 자세히 알 수 없다.
주석 41)망복(罔僕)
망국의 신하로서 의리를 지켜 새 왕조의 신복이 되지 않는 절조를 말하는 것으로, 은(殷)나라가 망하려 할 무렵 기자(箕子)가 "은나라가 망하더라도 나는 남의 신복이 되지 않으리라.〔商其淪喪, 我罔爲臣僕.〕"라고 말한 데서 유래하였다. 《書經 微子》
주석 42)공자가 …… 하였다
《논어집주》 〈팔일(八佾)〉 제8장에 보인다.
주석 43)성실하지 …… 된다
《중용장구》 제25장에 "성(誠)이라는 것은 물(物)의 처음이자 끝이니 성실하지 않으면 사물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군자는 성을 귀하게 여긴다.〔誠者, 物之終始, 不誠無物, 是故君子誠之爲貴.〕"라는 구절이 보인다.
주석 44)예는 …… 않는다
《논어》 〈팔일(八佾)〉 8장의 주에 "양씨가 말하기를 '단맛은 조미를 받아들이고, 흰 것은 채색을 받아들이며, 충신한 사람이라야 예를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진실로 그 바탕이 없다면 예가 헛되이 행해지지 않으니, 이것이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비단을 마련하는 것보다 뒤에 한다는 말씀이다.' 하였다.〔楊氏曰:甘受和, 白受采, 忠信之人, 可以學禮. 苟無其質, 禮不虛行, 此繪事後素之說也.〕"라는 말이 보인다.
粉齋記 【壬午】
維扶風南七里席洞之山, 我十七世祖高麗 奉正大夫知古阜郡事公罔僕遯鄕, 因葬于此, 而二子大護軍公、直長公祔焉.風水之佳, 稱於南方, 席山一支東走五里爲粉洞之山, 則直長公之子僉知公、孫縣監公藏焉, 其佳亦亞於席山, 而是爲我分派祖塋.二山蓋皆有丙舍, 席之聚星, 固取石川 林文元公"金門聚德星"之詩義, 惟玆粉齋, 但用地名, 而無所嘉錫, 何也? 舊無記, 不可考焉.竊嘗惟孔子曰: "繪事後素." 子夏曰: "禮後乎." 朱子釋之曰: "禮必以忠信爲質, 猶繪事必以粉素爲先." 蓋忠信者, 禮之粉地; 儀節者, 禮之繪事.當日名齋之意, 雖則隨遇因境, 而行所無事, 亦安知不實出於尙質後文, 如先聖賢之敎乎? 夫齋者, 齊也, 行祭而致齊乎此也.今以祭禮言之, 悽愴怵惕, 如見如在, 忠信之質也; 尊俎籩豆, 升降拜跪, 儀節之文也.如不致如見如在之誠, 雖有儀文, 將安所施? 故曰: "不誠無物." 又曰: "禮不虛行." 是所當勉也.更有事在, 僉知公之樹勳國家、縣監公之治著民政, 以至郡事公之扶植綱常, 皆主忠信而成之.凡吾宗族之入是齋而致潔, 瞻封塋而追慕者, 自宅心出言, 至於處鄕酬世, 凡所以制行立身者, 罔不以先祖所務爲主, 知所先後於文質之間, 則是爲能享其祖也, 能念祖修德也.其爲齋名之嘉錫, 孰尙於此? 區區無狀敢以是記之楣間, 竊自附於發前未發之義, 願與僉宗共勖焉.齋之重修在己巳, 其爲元陵、仁陵, 不可詳, 而有當時六偉文, 其創則尤不可詳在何時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