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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0
  • 서(序)
  • 《무명재유고》 중간 서문 【갑오년(1954)】(《無名齋遺稿》重刊序 【甲午】)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0 / 서(序)

자료ID HIKS_Z038_01_B00001_001.020.0001.TXT.0025
《무명재유고》 중간 서문 【갑오년(1954)】
나는 늘 세상 사람들이 문장으로 사람을 취하면서 그 사람이 이룩한 대체가 어떠한지를 궁구하지 않는 것을 병폐로 여겼으니, 아, 문사(文詞)는 사람에게 있어 지엽적인 것이다. 고금을 두루 살펴보건대, 책을 이룰 정도로 많은 문사가 있다고 해서 정인 군자(正人君子)가 된 사람이 한정할 수 없을 만큼 많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며, 문사가 많고 식견이 넓으면서도 간사한 소인이 되는 것을 면치 못한 사람이 또한 많았으니, 여기에서 취하고 버릴 바를 알 수 있다.
무명재(無名齋) 강공(康公)주 87)은 일찍 문과에 급제하여 청현직(淸顯職)에 두루 올랐으며, 한훤(寒暄 김굉필(金宏弼))ㆍ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ㆍ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ㆍ매계(梅溪 조위(曺偉)) 등 여러 현인들과 함께 지조와 기개가 서로 맞았으며, 도덕이 함께 아름다웠으니, 참으로 문충공(文忠公) 필재(畢齋) 김 선생(金先生 김종직(金宗直))의 택상(宅相 생질(甥姪))이자 고제(高弟)였다. 선생이 준 시에 이르기를, "자신을 낳아준 우리 집안에 참으로 욕됨이 없고, 나라의 빈객이 되어 바로 빛남이 있구나.[吾家自出眞無忝, 王國賓興正有輝.]"라고 하였으니, 이것으로 사문의 기대가 무거웠음을 알 수 있다.
연산군(燕山君) 무오사화 때에 여러 현인들과 함께 귀양을 갔다가 갑자년(1504)의 거듭된 사화에 여러 현인들과 함께 죽었으니, 공이 수립한 것이 어찌 광명정대하여 천고토록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중종(中宗)이 반정(反正)한 첫 해에 대사간에 추증되었으니, 조정에서 기리고 숭상함이 컸고, 시호(諡號)와 철향(腏享 배향(配享))을 청하는 상소가 시대를 달리하며 여러 차례 나왔으니, 후학들이 존경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문장(文章)의 경우에는 공에게 나머지 일에 속한 것이라 있든 없든 본래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하물며 사화로 갇혀 지낸 나머지 겨우 남아 있는 몇 편만으로도 오히려 온 솥의 맛주 88)을 증험할 수 있음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오직 공이 지닌 기개와 절조를 끊임없이 더욱 귀중하게 여겼기에 이미 인릉(仁陵 순조(純祖)) 갑신년(1824)에 간행하였고, 오늘날에 다시 간행하게 된 것이다.
총괄하면 공이 평생 이룩한 대체는 이미 당시에 바른 도를 얻어 완전히 어질고 바른 군자다운 사람이었으니, 비록 명성과 지위에 다름이 있고 세상에 알려지는 것과 알려지지 않는 것이 같지 않더라도 여러 현인들과 일체가 되어 덕이 같다고 이를 수 있음이 분명하니, 어찌 크게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때문에 후손 상원(祥源)과 용주(庸柱)가 나에게 서문을 청할 때에 노쇠하고 병들었다는 것으로 사양하지 않고 드러내 밝혀서 우러러 흠모하는 뜻을 붙이고 거듭 취하고 버리는 것에 어두운 세상 사람에게 고하였다.
주석 87)무명재(無名齋) 강공(康公)
조선전기의 문신 강백진(康伯珍, ?~1504)으로, 무명재는 그의 호이고, 자는 자온(子韞)이며, 본관은 신천(信川)이며, 시호는 효량(孝良)이다.
주석 88)온 솥의 맛
훌륭한 문장은 다 전하지 않고 일부만 전하는 것으로도 그 전체를 알 수 있음을 비유하는 말로, 《회남자(淮南子)》 〈설림훈(說林訓)〉에 "한 점의 고기를 맛보고서 온 솥의 고기 맛을 안다.〔嘗一臠肉, 而知一鑊之味.〕"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無名齋遺稿》重刊序 【甲午】
余嘗病夫世之取人以文, 而不究大致之如何. 噫, 文詞之於人末也. 歷觀今古, 未聞有成書而爲正人君子者何限, 多文博識而未免奸宵者亦多, 則斯可以知所取舍矣. 無名齋 康公, 早捷巍科, 歷敭淸顯, 與寒暄、一蠹、濯纓、梅溪諸賢, 志槩之相須, 道德之幷美, 則實文忠公 畢齋 金先生之宅相高弟也. 先生贈詩有曰: "吾家自出眞無忝, 王國賓興正有輝. " 此可以見師門期待之重矣. 逮夫燕山戊午之禍, 與諸賢同配, 甲子再禍, 與諸賢同死, 則公之樹立, 豈不磊落光明, 足以有辭千古乎? 改玉之初, 特蒙諫長之贈, 則朝家之褒尙大矣, 請諡腏享之疏, 累發於異世, 則後學之尊慕切矣. 至於文章, 屬公餘事, 則元無損益於有無, 而况禍錮餘幾篇之僅存, 猶足以證夫全鼎之味者乎? 惟其有氣節, 尤貴重之不已, 旣刊於仁陵甲申, 而重刊於今日者也. 總之公生平大致, 旣得正乎當日, 而完爲賢正君子人, 則雖名位有殊, 顯晦不同, 未可謂非一體同德於諸賢也審矣, 烏可不大書之乎? 故於後孫祥源、庸柱之請余弁文也, 不以衰病辭而表章之, 以寓景仰之意, 重以告世之昧於取舍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