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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0
  • 서(序)
  • 문안 서문 【무인년(1938)】(門案序 【戊寅】)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0 / 서(序)

자료ID HIKS_Z038_01_B00001_001.020.0001.TXT.0024
문안 서문 【무인년(1938)】
나라 안의 각 성(姓)의 집안에서 문중(門中)의 종족(宗族) 성명을 나열해 써서 작성한 기록을 '문안(門案)'이라 하는데, 이것이 어느 시대에 시작되었는지 모르고, 또한 그 의의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다가 일찍이 우리 김씨(金氏) 종중(宗中)에서 소장하고 있던 200년 전 문안을 본 뒤에야 본조(本朝) 중엽부터 이미 존재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서식의 예를 보니, 단지 관례(冠禮)를 치른 사람만 기록하되 책의 지면에 하지 않고 별지에 써서 나열해 붙였고, 서족(庶族)은 한 격(格)을 내려 써서 붙였다. 그런 뒤에야 또 별지에 써서 붙인 것은 잘못이 있으면 이름을 쓴 별지를 뜯어 없애고, 잘못을 고치면 다시 붙여 남겨두기 위해서이고, 격을 내려서 쓴 것은 명분을 정하기 위해서임을 알게 되었으니, 그 뜻이 훌륭하고, 그 법이 엄격하였으며, 당시 각 집안마다 모두 그렇게 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런데 그 뒤로 법이 점점 옛날 같지 않게 되면서 책의 지면에 직접 쓰고, 또 격을 내리지도 않았으니, 이미 잘못을 경계하여 바로잡거나 명분을 정하는 뜻을 잃어버렸다. 또 그 뒤로 관례를 치르지 않은 어린 아이까지 써서 숫자를 헤아리고 거주지를 기록하는 장부로 인식하였으니, 그 명칭만 있고 그 실상이 없어졌으며, 온 세상이 휩쓸리다시피 모두 그러하였다.
지금 우리 김씨 일족은 수가 더욱 많아지고 거주지가 더욱 흩어진데다 상전벽해처럼 세상이 크게 변한 나머지 힘이 약해지고 시세에 구속되어 족보를 만드는 것이 쉽지 않으니, 차라리 수를 헤아리고 거주지를 기록하는 예를 따라 분파조(分派祖) 직장공(直長公) 이하의 자손들을 합해 기록해서 하나의 문안을 만들어 문중에 보관하고, 또 여러 종족의 청을 들어 각기 한 부씩 베껴서 이를 살펴보고 기억하거나 생각하고 왕래하여 길 가는 사람이 되는 데에 이르지 않을 수 있게 하는 것만 못한 것도 또한 시세가 그러해서이다.
또한 명칭은 실상의 손님이니, 손님이 있다면 이에 주인이 없을 수 없는 것도 또한 이치이다. 이 때문에 공자(孔子)는 곡삭(告朔)의 양(羊)을 없애지 않았고, 주자(朱子)는 양을 바치는 관습이 남아 있으면 '곡삭'이란 명칭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고, 그 실상이 이름으로 인하여 거행될 수 있다고 하였으니주 85), 이것이 성인과 현인의 마음이다. 시대가 내려올수록 인륜이 없어짐에 따라 기강이 무너지고 명분이 문란해지면서 모든 백성들의 덕은 얇아지고 과실은 쌓여가니 매우 한심스럽다.
이 문안에 들어간 사람은 그 명칭이 아직 존재함으로 인해서 그 실상을 생각하고 서식의 예 밖에서 반드시 종사함이 있다면 한 집안 내에서 인륜이 밝아지고 명분이 정해져서 온 세상으로 미루어 미쳐갈 수 있을 것이다. 전 시대 사람들이 문안을 만든 본래의 뜻이 바로 여기에 있으니, 그 공효가 족보를 만든 것에 뒤지지 않을 것이고, 소씨(蘇氏)의 말처럼 효제(孝悌)의 마음이 생겨날 것이니주 86), 어찌 서로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나의 이러한 마음도 또한 공자와 주자에게서 받은 것이다.
주석 85)공자(孔子)는 …… 않았으니
《논어집주(論語集註)》 〈팔일(八佾)〉》에 의하면 주(周)나라 때에 천자가 제후에게 월삭(月朔 달력)을 반포(頒布)하면 제후는 이것을 조상의 사당에 보관하였다가 매월 초하루에 희생(犧牲)으로 쓰는 양(羊)을 사당에 바쳐서 초하루가 되었음을 고하는 것을 곡삭(告朔)이라고 한다. 노(魯)나라는 문공(文公) 때부터 이 곡삭의 예를 거행하지 않고, 단지 양을 제물로 바치는 관습만 남아있었는데, 자공(子貢)이 실제적인 예를 행하지 않고 관습적으로 양만 죽이는 것을 의미 없다고 판단하여 이러한 관습을 없애려고 하자, 공자(孔子)는 "너는 그 양이 아까우냐? 나는 그 예가 아깝다.〔賜也, 爾愛其羊? 我愛其라禮.〕"라고 하였으며, 이에 대한 주자의 말은 양씨(楊氏)의 말을 인용한 주석에 보인다.
주석 86)소씨(蘇氏)의 …… 것이니
소씨는 북송(北宋)의 문인 소순(蘇洵)으로, 족보를 만드는 것이 그에게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졌으며, 그가 지은 〈족보서(族譜序)〉에 "아, 우리 족보를 보는 자는 효도하고 우애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겨날 것이다.〔嗚呼, 觀吾之族譜者, 孝悌之心, 可以油然而生矣.〕"라는 구절이 보인다. 《古文眞寶 後集 族譜序》
門案序 【戊寅】
國中各姓之家, 列書門中宗族姓名, 以成案者, 曰門案. 此不知昉於何代, 亦不知其義意何在, 及嘗奉閱吾金宗中所藏二百年前門案, 然後知其自本朝中葉已有之矣. 見其書例, 只錄冠者, 不于卷面, 而別書列粘, 庶族則降一格書粘. 然後又以知別粘者, 所以備有過撤名, 改之還存也, 降書者, 所以定名分也. 其意善矣, 其法嚴矣, 當時各家, 莫不皆然. 其後法漸不古, 直書卷面, 又不降格, 則已失規過定分之意矣. 又其後幷書未冠弱稚, 而認作計數記居之簿, 則有其名, 無其實, 而擧世滔滔焉. 今吾金之族, 數益繁而居益散, 滄桑之餘, 力綿時拘, 譜未易就, 無寧從計數記居之例, 合錄分派祖直長公以下之孫, 爲一案, 而藏之門中, 又聽諸族, 各寫一件, 庶得考閱記識, 思念過從, 不至爲路人之歸, 亦時勢然爾. 且也名爲實賓. 旣有賓矣, 則斯不能無主, 亦理也. 是故孔子不去告朔之羊, 而朱子謂羊存, 則告朔之名不泯, 而其實因可擧. 此聖賢之心也. 世降倫喪, 綱頹分紊, 凡厥民生, 德薄而過積, 甚可寒心. 入是案者, 因其名之猶存, 而思其實於書例之外, 而必有事焉, 則將倫明分定於一門之內, 而推及於擧世矣. 前人成案之本意, 卽在乎是. 而其效有不讓於作譜, 而生孝悌心, 如蘇氏言者矣, 盍相與勖之? 噫, 吾之此心, 亦有所收於孔、朱云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