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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0
- 서(序)
- 《중당유고》 서문 【갑신년(1944)】(《中堂遺稿》序 【甲申】)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0 / 서(序)
《중당유고》 서문 【갑신년(1944)】
글은 공령(功令 과문(科文))과 문장(文章), 도학(道學)의 구분이 있는데, 반드시 도학(道學)의 글이라야 비로소 자신을 완성하고 세상을 맑게 할 수 있다. 다만 선비들이 명예와 이익에 빠져 바른 학문으로 돌아오지 못할 뿐이다. 오직 호걸스러운 선비인 뒤에야 한 번 변하고 재차 변하여 세속의 습관에서 초탈한 다음에 도학으로 돌아올 수 있으니, 고(故) 중당 처사(中堂處士) 박공(朴公)주 69)이 그러한 분이다.
공은 어린 시절에 학문할 기회를 잃고 늦은 나이에야 비로소 공부를 시작했지만, 부모의 상사에 흉년까지 겹쳐 학업에 전념할 수 없었다. 그러나 타고난 재주가 이미 뛰어나 약관 남짓한 나이에 용을 잡고 여의주를 얻는 글 솜씨는 과거 시험장에서 적수가 없었다. 그런데 얼마 뒤에 후회하며 말하기를,
"한 사람의 안목에 득실이 결정되는 것을 나는 부끄럽게 여기니, 고문(古文)을 지어 후세의 공정한 안목을 기다리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바로 문장 공부에 힘을 쏟아 몇 년 동안 서한(西漢)ㆍ동한(東漢)ㆍ당(唐)ㆍ송(宋)의 문장을 두루 섭렵하였다. 얼마 뒤에 또 후회하며 말하기를,
"문장가가 되는 것이 어찌 성현을 따르는 사람이 되는 것만 하겠는가."
하고, 마침내 문장을 통해 도를 밝히고, 결국에는 실제적인 학문으로 돌아와 의지하였다. 이렇게 오랜 세월을 보낸 뒤에 간재(艮齋) 전 선생(田先生 전우(田愚))에게 나아가 질정하였으니, 이 때 나이가 불혹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이에 이치를 보는 것이 밝아지고, 글을 짓는 것이 합당하여 스승의 문하에서 크게 인정을 받아 성대하게 두각을 나타냈다. 만년에는 식견이 더욱 정밀해지고 의론이 더욱 적절한 것이 실로 뭇 사람들이 추켜세우는 세속의 유학자와는 다름이 있었으니, 지금 이 유고에 실려 있는 글로 논해보겠다.
스승 간재에게 올린 여러 편지들과 이씨(李氏)의 심리설(心理說)에 대해 논한 것과 영주(瀛州 고부(古阜)) 아래에서 문답한 것을 살펴보면 그 근본이 되는 종지(宗旨)가 스승의 전수로부터 터득함이 있었으니, 스스로 자기의 견해를 믿고 따로 한 학파를 세운 자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교사(孔敎社)주 70)에 대해 논한 것과 홍(洪)ㆍ오(吳)의 논설에 대해 논변한 것을 살펴보면 일은 가능함을 구하지 않고, 공은 이룸을 구하지 않은 채 한결같이 바른 길만을 따랐고, 게다가 마치 불을 보듯 당시의 형세와 사물의 실정을 밝게 비추어 볼 수 있었으니, 일과 공적만을 중시하고 도의(道義)를 헤아리지 않다가 끝내 또한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 자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분을 한 번 변하고 재차 변한 호걸의 선비이며, 도학의 글로 자신을 완성하고 세상을 맑게 한 분이라고 이르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대체로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훌륭한 말이 있으니, 말이 이미 훌륭하다면 덕 또한 알 수 있다. 공이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말할 만한 것이 없지만, 마음 씀이 깨끗하고 정직한 것만큼은 스스로 부끄럽게 여길 것이 없다."
라고 하였다.
아, 사람의 삶은 정직해야 하니, 정직하지 않는 삶은 요행히 죽음을 면한 것일 뿐이다.주 71) 천지가 만물을 생성하고 성인이 만사에 대응하는 것은 모두 정직일 뿐이니, 이것이 공의 본원이 되는 이유이다. 본원이 이미 섰으니, 어찌 도가 생겨나지 않겠는가. 어떤 사람들은 공이 처음에 공령과 문장을 위했다는 이유로 끝내 외면에 치우쳤다고 의심하는데, 공을 아는 자가 아니다.
공이 원고를 수습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기에 보존된 원고가 겨우 8책뿐이었는데, 공이 세상을 떠난 뒤에 또 3책을 잃어버리고, 지금 공의 아들 승구(承九)와 조카 승희(承禧), 사위 김형륜(金炯倫)이 보여주며 교정과 서문을 청한 것이 5책이었다. 내가 비록 질병과 자질구레한 일로 겨를이 없다 하더라도 평소 우러러 사모했던 마음을 생각하고, 또 지금 같은 세상에 이런 일에 참여하여 도와줄 사람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그들의 청에 힘써 부응하였는데, 그 가운데 삭제하고 남은 것이 또 3책에 불과하였다.
- 주석 69)중당 처사(中堂處士) 박공(朴公)
-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인 박수(朴銖, 1864~1918)로, 중당은 그의 호이다.
- 주석 70)공교사(孔敎社)
- 공자의 전통 유교를 국교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단체로, 청나라 말 강유위(康有爲, 1858~1927)가 설립한 공교회(孔敎會)에 의해 시작되었다.
- 주석 71)사람의 …… 뿐이다
- 《논어》 〈옹야(雍也)〉의 "사람의 삶은 정직해야 하니, 정직하지 않는 삶은 죽음을 요행히 면한 것일 뿐이다.〔人之生也直, 罔之生也, 幸而免.〕"라는 공자의 말을 인용한 구절이다.
《中堂遺稿》序 【甲申】
文有功令、文章、道學之分, 而必道學之文, 乃可以成身而淑世. 顧士溺於名利, 不反之正焉. 夫惟豪傑之士然後, 能一變再變, 超脫俗習, 而歸于道學. 故中堂處士 朴公, 其人也. 公幼而失學, 晩始上塾, 重以喪歉, 業不能專. 然天才旣高, 弱冠餘, 屠龍探驪之手, 無敵乎場屋. 旣而悔曰: "決得失於一夫眼, 吾恥之, 當爲古文, 俟後世公眼. " 乃肆力功文章, 汎濫乎兩漢、唐、宋者幾年. 旣而又悔曰. 與其爲文章之徒, 曷若爲聖賢之徒. 遂因文而明道, 竟歸實學. 久之就正于艮齋 田先生, 則年將不惑. 於是見理之明, 修辭之當, 大爲師門所與, 而蔚爲翹楚矣. 晩而識益精論益切, 實有異乎衆所推之世儒. 今以載是稿者論之. 觀於上師門諸書、論李氏心理說、瀛下問答, 則知其源頭宗旨, 有得乎師傳, 而與自信己見, 別立一派者異矣. 觀於論孔敎社、辨洪ㆍ吳說, 則知其不事求可、功求成, 而一循乎正經, 復能明時勢、燭物情, 若觀火然, 與事功爲重, 不計道義, 而卒亦無所成者異矣. 夫是之謂一變再變豪傑士, 道學文成身淑世者, 不其然乎? 蓋有德者, 必有言, 言之旣得, 德亦可知已. 公常自言: "吾無可道者, 用心白直, 庶無自愧. " 嗚呼, 人生也直, 罔生幸免. 天生萬物, 聖應萬事, 皆直而已. 斯其所以爲公本源, 本之旣立, 何道之不生也? 人或以公始爲功令文章, 疑其終涉文勝, 非知公者也. 公不屑收稿, 所存僅八冊, 而復失三冊於歿後. 今其子承九、從子承禧、壻金炯倫, 所示而請校序者爲五冊. 余雖病冗無暇, 念平日景仰之意, 且憫今之世無與相是役者, 爲之勉副其請. 其中刪餘之存, 又不過三冊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