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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0
  • 서(序)
  • 《노가암유고》 서문 【갑신년(1944)】(《老可菴遺稿》序 【甲申】)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0 / 서(序)

자료ID HIKS_Z038_01_B00001_001.020.0001.TXT.0017
《노가암유고》 서문 【갑신년(1944)】
옛적에 우리 선사(先師) 간재(艮齋) 전 선생(田先生)께서 속세를 떠나 부풍(扶風 부안(扶安))의 계화도(繼華島)에 은둔하며 학문을 강론하실 때에 같은 군에 거주하는 노가암(老可菴) 김공(金公)주 64)은 사원(詞苑 예문관(藝文館))의 거벽(巨擘)으로서 온 고을의 중망을 받고 있었음에도 깍듯하게 제자의 예를 갖추어 섬겼으니, 당시 나이가 백발의 칠질(七耋 70세)로 선생보다 9살이 적었다. 선생께서는 공이 독실하게 도를 추구하는 것을 가상히 여기고 정부자(程夫子)가 여진백(呂進伯 여대충(呂大忠))을 일컬어 "늙어서도 학문을 좋아하는 자는 더욱 사랑스럽다."라고 했던 말을 취하여 이 호를 지어 주셨으니, 대체로 이는 실제의 기록이다.
무릇 학문을 좋아하는 경지가 여러 가지 있지만, 오직 공자와 안연만이 가장 지극한 경지이다. 그러나 성인의 경지는 높고 커서 배우기 어려우니, 노여움을 남에게 옮기지 않고 잘못을 두 번 다시 저지르지 않는 안자의 경지가 바로 공부를 시작하는 요점이고, 또한 배워서 이를 수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공은 평소 성품이 준엄한데다 만년에는 더욱 단정하여 중도에서 지나친 유소(有所)의 허물주 65)이 보이지 않았고, 엄격하게 담배를 끊는 것도 스승의 훈계를 벽에 건 날로부터 시작하였다. 이것으로 견주어 논하면 안자(顔子)를 잘 배웠다고 이를 만하니, 옛적에 "부지런히 힘써 늙음이 이르는 줄 모른다."는 것이 이런 것이다. 때문에 공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 사문에서 예를 삼가고 의를 지켜 신명과 함께할 것이라고 칭찬하였다. 만약 공에게 십수 년의 수명을 빌려주어 마침내 소원을 이루었다면 덕이 높아지고 명예가 퍼졌을 것이니, 어찌 다만 정자 문하의 여공(呂公)과 함께 일컬어질 뿐이겠는가.
지금 이 유고(遺稿)는 흩어지고 사라진 나머지에서 겨우 한 권을 얻은 것이고, 또한 성병(聲病)주 66)의 작품이 많아 심오하고 미묘한 뜻이 발휘된 것이 없다. 그러나 이것은 성정(性情)의 근본과 말씀 중에 남긴 시문, 만년에 선사에게 나아가 질정한 기록에서 나온 것이니, 효자 자손(孝子慈孫)이 어찌 오래도록 전할 방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오랫동안 집안의 조카로서 공의 꿋꿋한 지조와 심오한 수양이 당시 선비들로서는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닌 것에 진심으로 감복하여 기꺼이 교정을 하고 서문을 지었다. 그러나 이 유고를 읽는 자들이 공의 존성(存省)주 67)의 정밀함과 지행(知行)의 실제를 미루어 궁구하지 않고 종묘와 백관주 68)이 모두 이 책에 있다고 한다면 공을 아는 자가 아닐 것이다. 선사(繕寫)하는 일이 끝났지만 간행하지 않고 기다린 것은 시대의 의리에 편치 못한 점이 있어 공이 평소 의리를 지켰던 뜻을 체득하기 위해서이다.
주석 64)노가암(老可菴) 김공(金公)
근세 유학자 김낙필(金洛弼, 1850~1919)로, 노가암은 그의 호이고, 자는 여량(汝良)이다.
주석 65)유소(有所)의 허물
네 가지 마음의 병통인 유소분치(有所忿懥)ㆍ유소공구(有所恐懼)ㆍ유소호요(有所好樂)ㆍ유소우환(有所憂患)을 말하는 것으로, 《대학장구》 전(傳) 7장의 "이른바 몸을 닦는 것이 그 마음을 바로잡는 데 있다는 것은 마음에 분노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며, 두려워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며, 좋아하고 즐기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며, 근심하고 걱정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한다.〔所謂修身在正其心者, 身有所忿懥, 則不得其正; 有所恐懼, 則不得其正; 有所好樂, 則不得其正; 有所憂患 則不得其正.〕"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석 66)성병(聲病)
시의 성률(聲律)이 맞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으로, 전하여 시를 가리킨다.
주석 67)존성(存省)
존양(存養)ㆍ성찰(省察)의 준말로, 본성을 함양하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기미를 살핀다는 뜻이다.
주석 68)종묘와 백관
학덕의 깊이를 비유하는 말로, 《논어》 〈자장(子張)〉에 "부자의 담은 몇 길이나 높아서 그 문안에 들어가지 않으면 종묘의 아름다움과 백관의 성대함을 볼 수 없다.〔夫子之牆數仞, 不得其門而入, 不見宗廟之美, 百官之富.〕"라는 구절에서 유래하였다.
《老可菴遺稿》序 【甲申】
昔我先師艮齋 田先生, 遯世講道於扶風之繼華島, 同郡老可菴 金公, 以詞苑巨擘, 一鄕重望, 鋭然具弟子禮而事之, 時則七耋皓首而少先生九歲矣. 先生嘉其求道之篤, 取程夫子稱呂進伯老而好學尤可愛之語, 錫是號, 蓋實錄也. 夫好學有多般, 惟孔、顔其至者, 聖人高大難學, 顔子之不遷貳, 乃下手要點, 而亦可學而至. 竊觀公之素性峻厲, 而晩更平正, 未見過中有所之累, 斷烟之嚴, 自師訓揭壁之日. 以是類論, 則可謂善學顔子, 而古所謂俛焉孶孶, 不知老至者是已. 故公之沒也, 師門有謹禮守義神明與伍之贊. 如得假公十數年, 卒以遂願, 則德崇譽廣, 豈但與程門之呂公幷稱也哉? 今此遺稿, 僅得一卷於散逸之餘, 而亦多聲病之作, 無以見發揮奧妙之旨. 然是出於性情之本、咳唾之遺、及夫晩年就正之錄者. 孝子慈孫, 安得不思所以壽傳也? 澤述久爲門子姪, 心服介然之操、黯然之修, 非時儒所及, 樂爲役於校序. 然讀是稿者, 如不推究公存省之密、知行之實, 而謂宗廟百官, 盡在是編, 則非知公者也. 繕寫訖, 不付剞劂而待之者, 以時義有不安, 而體公平日守義之意云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