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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0
- 서(序)
- 《서초유고》 서문 【신사년(1941)】(《瑞樵遺稿》序 【辛巳】)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0 / 서(序)
《서초유고》주 50) 서문 【신사년(1941)】
선비들이 빈흥(賓興)주 51)의 법이 폐지되면서부터 모두 과거를 통해 벼슬에 나아갔고, 도를 지켜 자중하는 자는 사람들이 도학(道學)이라 지목하였기 때문에 선비들에게 '도학'과 '과학(科學)'이라는 다른 칭호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도를 행하고자 하는 자는 과거가 아니면 그 지위에 나아갈 수 없기 때문에 주자(朱子)는 심지어 오늘날과 같은 세상에 처한다면 설사 공자께서 다시 태어나시더라도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 여기며 말하기를, "급제 여부를 생각 밖에 둘 수 있다면 또한 허물이 되지 않는다."라고 하였고, 정자(程子)는 또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시간을 나누어 과거 공부를 하도록 하면서 말하기를, "공부에 방해가 되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뜻이 빼앗길까 근심하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선비가 진실로 뜻을 빼앗기지 않고, 바깥 사물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다면 괜찮은 것이니, 인물을 논하는 자들이 굳이 '도학'과 '과학'의 칭호에 구애되어 우열을 가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내가 근고(近故)의 선비를 보건대, '과학'으로 이름이 나면서도 '도학'의 실제가 있는 사람은 서초 선생(瑞樵先生) 이공(李公)이 그런 사람일 것이다. 공은 학문이 이미 뛰어났고, 친족이 또 현달하였으니, 만약 조금만 뜻을 굽히고 세속을 따랐다면 지름길로 벼슬에 나아가 한자리를 차지할 여지가 없는 것도 아니었고, 높은 점수로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도리어 벼슬을 구하는 것을 엄격하게 단절한 채 시종 한결같은 마음으로 절의를 지키며 백발의 노령에 이르도록 얻은 적이 없었다. 사람들이 혹 나이를 올리는 것[加年]으로 도모할 것을 권하면 성난 목소리로 말하기를, "내가 누굴 속이겠는가? 하늘을 속이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허물이 될 만큼 뜻을 빼앗기지 않아서 '도학'을 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직 마음에 보존한 것이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발현한 언사도 또한 이에 걸맞았으니, 일찍이 향시(鄕試)에 장원으로 합격하였을 때에 시험을 주관했던 사람이 "공의 문장은 학문 속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하였고, 전재(全齋) 임문경공(任文敬公 임헌회(任憲晦))은 공이 지은 유소(儒疏)를 보고 말하기를, "의리가 명백하니, 과거를 보는 유생의 말투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 행한 일은 어버이를 섬겨 상사(喪事)와 제사의 예절을 다한 것과 학문을 강론하여 후배의 선비를 성취시킨 것, 중화를 존숭하여 만동묘(萬東廟)를 복원할 것을 상소로 청한 것, 사직을 지키기 위해 병인년에 의병을 일으킬 것을 도모한 것들이 또 모두 도의상의 일 아닌 것이 없었다. 이와 같은데도 공을 '과학'의 선비라고 일컬을 뿐이라면 인물을 평론하는 공이 아닐 것이다.
아, 지금 이 유고는 과거 문장 이외에 공이 평소 저술한 것들을 편찬한 것이니, 나의 고루함으로 어찌 감히 그 글을 알겠는가. 나 또한 "의리가 명백하고 학문 속에서 나왔다."라고 말한 것은 당시 공에 대한 평론과 같을 뿐이고, 교지에 응하여 바친 〈삼정책(三政策)〉은 식자들이 공이 도를 행하는 방법들이 모두 여기에 있다고 여기면서 당시에 사용될 수 없었던 것을 탄식하였다.
아, 공의 덕행과 학문으로 일찍이 당대 유림의 종사에 가탁하여 스스로 일컫지 않았기 때문에 공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이것이 비록 한스럽게 여길 만한 것 같지만 이름과 실상이 서로 부합하지 못한 지 오래되었으니, 이 때문에 군자는 차라리 실상이 있고 이름이 없기를 바랄지언정 실상이 없이 이름만 남아 있는 것을 매우 부끄럽게 여겼다. 그런데 공은 이름 이외의 실상이 있으니, 이는 매우 귀하게 여길 만한 것이다. 무엇을 근심하겠는가. 나는 그래서 공의 손자 서산(瑞山) 어른 이풍호(李灃鎬)와 증손 이한응(李漢膺)이 서문을 청함에 다만 위와 같이 공을 논하여 세상 사람들이 도학을 자처하되 누가 됨을 면치 못하고, 명예와 이익에 그 뜻을 빼앗겨서 하늘과 사람을 속이는 지경에 이르는 것을 경계하고자 한다.
공의 휘는 희석(熙奭)이고, 자는 주보(周輔)이며, 전의(全義) 사람이다. 8세조(八世祖) 문정공(文貞公) 석탄 선생(石灘先生 이신의(李愼儀))은 나라의 저명한 신하였고,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를 지낸 고조 이엽(李爗)은 한 시대에 중망을 받았으니, 공은 이미 위로 계승할 선조가 있고, 지금 이서산과 이한응이 행의(行義)로 가문의 대를 이을 수 있으니, 또한 아래로 전할 후손이 있다. 아! 성대하다.
- 주석 50)서초유고
- 조선후기 학자 이희석(李熙奭, 1820~1883)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시문집. 1941년 이희석의 증손 이한수(李漢秀)ㆍ이한섭(李漢燮) 등이 편집·간행하였다. 권두에 김택술(金澤述)의 서문과 권말에 이한수의 발문이 있다. 2권 1책이고, 석인본이다.
- 주석 51)빈흥(賓興)
- 빈객으로 예우한다는 뜻으로, 훌륭한 인재를 천거하는 제도이다. 주(周)나라 때에 향대부가 소학(小學)에서 어질고 능력 있는 인재를 천거할 때 그들을 향음주례(鄕飮酒禮)에서 빈객으로 예우하며 국학에 올려 보낸 것에서 유래하였다. 《周禮地官 大司徒》
《瑞樵遺稿》序 【辛巳】
士自賓興之法廢, 皆由科擧出身, 其守道自重者, 則人以道學目之. 故士乃有道學科學之異稱. 然欲行道者, 非此無以進乎其位. 故朱子至謂居今之世, 使孔子復生, 不免應擧, 而曰: "得失置之度外, 亦不累也. " 程子則又使學者, 分治擧業, 而曰: "不患妨功, 惟患奪志. " 然則士苟能不奪志, 爲累於外物, 斯可耳. 論人者, 不必拘於道、科之稱, 而有所軒輊也審矣. 以余觀於近故之士, 以科學名而有道學實者, 惟瑞樵先生 李公其人歟. 公學旣優而族又顯, 如使少屈其志以徇俗, 則席藉蹊徑, 非無地也, 高占嵬捷, 非不易也, 乃嚴絶干售, 終始一節, 以至老白首無得. 人或勸以加年以圖, 則厲聲言: "吾誰欺? 欺天乎? " 斯豈非不奪志爲累, 而無愧其爲道學者乎? 惟其存諸心者如此, 故發之爲辭亦稱是. 嘗首選鄕試, 主試者謂: "公文從學問中來. " 全齋 任文敬公見公所製儒疏曰: "義理明白, 非科儒口氣. " 其行之爲事, 則事親而盡喪祭之禮、講學而成後進之士、尊華而疏請復萬東之廟、衛社而謀起丙寅之旅, 又皆罔非道義上事. 如是而稱公爲科學之士已者, 非月朝之公也. 今此遺稿, 編公平日功令外著作者. 以余固陋, 何敢知其文? 亦惟曰"義理明白, 從學問中來"者, 如當日公評已矣. 至於應旨所獻〈三政策〉, 識者謂公行道之具在此, 而歎時不能用焉. 嗚呼, 以公德學未嘗託當世儒宗以自名. 故知之者鮮. 雖若可恨, 然名實之不相副也久矣. 是以君子寧欲有實而無名, 深恥實去而名存. 公乃有名外之實, 則是甚可貴者, 庸何病也? 余故於公之孫瑞山丈 灃鎬、曾孫漢膺之請弁文也, 特論公如右, 欲以警夫世之自居以道學而不免累, 名利奪其志, 以至於欺天、人者. 公諱熙奭, 字周輔, 全義人. 八世祖文貞公 石灘先生爲國朝名臣. 高祖文科承旨爗, 望重一世. 公旣上有所承. 今瑞山、漢膺以行義能世其家. 亦下有所傳. 於虖盛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