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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0
  • 서(序)
  • 북간도로 돌아가는 장명숙【진우】을 전송하는 서문 【임자년(1912)】(送張明叔【鎭宇】歸北艮序 【壬子】)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20 / 서(序)

자료ID HIKS_Z038_01_B00001_001.020.0001.TXT.0004
북간도로 돌아가는 장명숙【진우】을 전송하는 서문 【임자년(1912)】
옛날 주(周)나라가 점차 쇠약해지는 말기에 난신적자(亂臣賊子)가 뒤를 이어 나타나고 변방의 오랑캐가 중국을 침범하자, 이에 우리 부자(夫子)께서 도가 행해지지 않음을 개탄하고 바다를 건너 오랑캐 나라에 살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으니주 8), 백대가 흘러 내려온 뒤에 그 말씀을 듣고 그 시대를 상상하면 아직도 사람으로 하여금 슬피 탄식하게 하는데, 하물며 혼란스럽고 멸망해 버린 우리나라는 주나라 말기에 비하면 어떠하겠는가. 짐승 같은 오랑캐가 사람을 핍박하고 예의는 땅을 쓴 듯 없어져서 우리 유자(儒者)는 도가 행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몸조차 세상에 용납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만약 부자께서 살아 계셨다면 멀리 떠나갈 것이 틀림없고, 한갓 말 사이에 드러낼 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돌아보건대, 우리나라의 사류(士類)들은 대부분 구차하게 인습을 그대로 따르고 과감하게 결단하여 용감하게 행동하지 못하였기에 노예의 치욕에서 벗어나지도 못하였고, 멸망의 재앙을 또 장차 밟게 되었으니, 이 때문에 늘 동지를 위해 개탄하며 애석하게 여겼고, 또한 마음속으로 부끄러워하며 탄식하였다. 그런데 임자년(1912) 여름에 사문(斯文) 장명숙(張明叔)이 폐사(弊社)로 나를 찾아왔기에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대체로 걸출하여 지조와 절개가 있는 사람이었다. 얼마 뒤에 듣건대, 대대로 부령(富寧)에 살면서 가문의 명망이 매우 성대했는데, 지난해 합방(合邦)의 변고를 만나 원수 왜노의 백성이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마침내 가족을 데리고 북간도(北間島)로 들어가 거주하였고, 관북(關北 함경도)의 여러 공들도 또한 함께 간 사람이 많았다고 하니, 내가 말하였다.
"용감하구나. 이 일이여. 무릇 사람의 보편적인 감정은 멀리 있는 재앙에 대해서는 느긋해 하고 가까이 있는 재앙에 대해서는 급하게 여기니, 본래 피부에 와 닿을 만큼 매우 가까운 재앙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고향을 편안하게 여기고 타향으로 이주하는 것을 어렵게 여기기 마련이다. 지난해의 변고는 참으로 나라를 위해 통곡할 만한 것이었지만, 내 한 몸에 미칠 재앙으로 치자면 눈앞에 바로 닥칠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오직 대의(大義)를 보고 고상한 뜻을 숭상하여 친척이나 벗들과 왕래하는 즐거움을 버리고 좋은 논과 큰 집에서 편안히 지내면서 배불리 먹는 이로움을 포기한 채 머나먼 지역인 궁벽한 땅 밖에서 종적을 감추고 풀뿌리와 나무껍질 사이에 삶을 부치며 죽을 때까지 후회하지 않을 것처럼 하였으니, 실로 의리가 중요하고 이해(利害)가 가볍다는 것을 실제로 터득하여 알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노예의 치욕과 멸망의 재앙에 대처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그가 초연하게 홀로 서서 참으로 공자의 무리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임을 알겠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삼가 권면할 것이 있다. 옛날 부자께서 구이(九夷)에 살고자 하실 때에 어떤 사람이 비루하여 거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의심을 보이자, 부자께서는 '군자가 거주한다면 무슨 비루함이 있겠는가.'라고 답하였다.주 9) 대저 오랑캐의 풍속은 진실로 비루한데, '군자가 거주한다면 비루하지 않다'라고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참으로 덕이 자신에게 닦여지고 교화가 남에게 미쳐 옛 습관을 버리고 마침내 아름다운 풍속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지금 이 간도 한 구역은 북쪽 모퉁이에 치우쳐 있어 역대 성인의 교화가 미치지 못하고, 선대 현인의 유풍이 알려지지 않은 곳이니, 그 풍속이 비루하지 않다고 이를 수 없다. 바라건대 그대와 제공은 단지 뜻을 숭상하고 의리를 지키며 치욕을 멀리하고 재앙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이미 끝마쳤다고 여기지 말고, 또 자기에게 보존된 것을 깊게 하고 남에게 베푸는 것을 넓혀서 덕으로 이끌고 예(禮)로 거느리며 인(仁)으로 적셔 주고 의(義)로 연마하여 백성들의 풍속을 크게 바꾸어 도에 이를 수 있게 함으로써 성학(聖學)의 일파가 북간도에서 창도되고 밝혀지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런 뒤에야 비로소 부자께서 바다를 건너 오랑캐 땅에 거주하려 했던 지극한 뜻을 받들어 좇았다고 이를 수 있으니, 청컨대 그대는 돌아가서 더욱 힘쓰고, 또한 이것으로 제공에게 질정하라."
주석 8)부자(夫子)께서 …… 하셨으니
부자는 공자를 말하는 것으로, 《논어》 〈공야장(公冶長)〉에서 공자(孔子)가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로 나갈까 보다.〔道不行, 乘桴, 浮于海.〕"라고 하였고, 〈자한(子罕)〉에 "공자께서 구이(九夷)에 살고 싶어 하셨다.〔子欲居九夷.〕"라는 구절이 보인다.
주석 9)옛날 …… 답하였다
《논어》 〈자한(子罕)〉에 보인다.
送張明叔【鎭宇】歸北艮序 【壬子】
昔周末之浸衰也, 亂賊接踵, 裔戎猾夏. 於是吾夫子慨道之不行, 而有浮海居夷之語. 百世之下, 聞其語, 想其時, 尙能使人悲歎而涕零, 矧玆我邦之亂亡, 視周末何如也? 夷獸逼人, 禮義掃地, 爲吾儒者, 非惟道之不行, 身且不見容於世, 如使夫子而在者, 其遐擧遠引也必矣, 不徒發於言辭之間而已也. 顧此我邦士類, 類多因循苟且, 不能果決勇行, 奴隷之辱, 旣不能免, 而滅亡之禍, 又將蹈焉. 是以常爲同志慨惜, 而亦自愧歎于中. 壬子夏, 張斯文 明叔訪余於弊社, 與之語, 蓋傑然而有志節者也. 旣而聞其世家富寧, 族望甚盛, 而値往年合邦之變, 恥作讎奴之民, 遂挈家入北艮島居焉, 而關北諸公, 亦多同往者. 余曰: "勇哉此擧也. 夫人之常情, 緩於遠而急於近. 自非有剝膚切近之災, 不免安土而重遷. 往年之變, 誠可爲國家痛哭, 而在一身之禍, 非目下切近者. 而惟大義是睹, 高志是尙, 舍親戚朋友過從之樂, 棄良田厦屋安飽之利, 鏟跡於絶域荒陬之外, 寓生於草根木皮之間, 若將終身而不悔. 苟非實見得理義之重而利害之輕, 烏能辦此奴隷之辱、滅亡之禍? 吾知其超然獨立而誠無愧孔子之徒也. 然因此而竊有奉勉者. 昔夫子之欲居九夷也, 或有以陋不可居見疑者, 則夫子答以'君子居之, 何陋之有?' 夫夷狄之俗固陋矣, 而其曰'君子居之則不陋'者何也? 誠以其德修于己, 而化及於人, 使去其舊習, 遂成美俗也. 今此艮島一區, 僻在北陲, 列聖聲敎之所不曁, 先賢遺風之所未聞, 其俗不可謂不陋. 願明叔與諸公, 毋但以尙志守義, 遠辱免禍, 爲能事已畢, 又能存乎己者深而施諸人者廣, 導之以德, 率之以禮, 漸之以仁, 摩之以義, 丕變民俗, 以至乎道, 使聖學一派, 倡明於北艮. 然後乃可謂奉遵夫子浮海居夷之至意也. 請明叔歸而勉旃, 亦以奉質於諸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