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역/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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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17
  • 잡저(雜著)
  • 두류산유록(頭流山遊錄)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17 / 잡저(雜著)

자료ID HIKS_Z038_01_B00001_001.017.0001.TXT.0007
두류산유록
두류산(頭流山)은 지리산(智異山)의 다른 명칭이니, 백두산(白頭山)에서 흘러온 맥이 여기에 이르러 더욱 높고 크게 되었으므로 이런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 산은 남방의 호남과 영남 사이에 웅거(雄據)하여 우뚝이 높고 휑하게 깊어 전국에 있는 여러 산 중에 견줄 만한 것이 드무니, 중국의 형산(衡山)이 멀리 남쪽에 있지만 오악(五嶽)주 192) 중에서 가장 큰 경우와 비슷하다.
삼신산(三神山)에 대한 전설을 모두 믿을 수는 없지만 예로부터 동해(東海) 가운데에 있다고 전해지는데, 설명하는 자들이 우리나라의 금강산(金剛山)은 봉래산(蓬萊山), 한라산(漢挐山)은 영주산(瀛洲山), 두류산은 방장산(方丈山)에 해당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방외(方外)주 193)의 도가(道家)와 불가(佛家)의 무리는 참으로 말할 것도 없고 유가(儒家)의 청아한 선비나 달통한 사람들까지도 한 번 지리산을 보는 것을 통쾌하게 여기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지난 갑진년(1904)에 선사(先師)주 194)를 모시고 남원에 도착하여 열흘 동안 머물렀는데 이 산의 입구와의 거리는 100리여서 가까웠다. 병암(炳菴) 김준영(金駿榮)주 195) 어른이 산행(山行)을 가면서 나에게 따라가기를 요구하였는데 선사가 만류하며 말하기를,
"이번 산행은 나 역시 가고 싶은 마음이 있네. 다만 국상(國喪)을 당하여 상복을 입은 몸으로 산을 유람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으니 훗날에 도모하세. 그대는 그때에 나와 동행하는 것이 좋겠으니 지금 객지 여관에서 그대를 놓치면 좌우 손을 잃는 것과 같기에 이렇게 만류하는 것이네."
라고 하였다.
대저 누가 알았겠는가, 세상일은 예측하기 어려워 이듬해에 오적(五賊)주 196)이 나라를 팔아먹은 변고가 있었고 경술년(1910)에 나라가 망하게 되었으며 선사가 이미 섬에 들어가 자정(自靖)주 197)하여 임술년(1922)에 세상을 떠날 줄을. 지난 세월을 돌아보매 서글픈 마음이 끝이 없는데 이 산에 가자고 약속했던 말씀이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다.
갑술년(1934) 봄에 궁하게 살며 무료하게 지내다가 갑자기 옛사람이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쐬고 읊조리며 돌아오겠다주 198)던 생각이 떠올랐으며 지리산을 한 번 유람하는 것은 참으로 바라던 것이었다. 마침 아우 조자정(趙子貞 조제원(趙濟元))이 나에게 함께 가자고 청하여 3월 19일 그와 함께 출발하였다.

20일. 저녁에 순창(淳昌) 적곡(赤谷)에 도착하여 방조(傍祖)인 농암(礱巖)주 199)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고, 바위에 새겨진 우옹(尤翁 송시열(宋時烈))의 글씨 '마롱암관수당(磨礱巖觀水堂)' 여섯 글자를 보았다.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취봉은 우뚝하고 백산은 푸른데鷲峯矗矗柏山蒼
사척 높이에 만고토록 감추었네四尺之高萬古藏
감나무 밤나무는 당시에 손수 심었고柿栗當年皆手種
숲 속의 고택에는 끼친 향기가 있네林泉故宅有遺芳
선생의 도학이 이렇게 높지 않았다면不因道學高如許
어찌 선비들이 오래도록 잊지 않겠나那得衿紳久未忘
농암의 바위에 새긴 글자 진중하나니珍重礱巖巖刻字
연원이 화양에서 왔음을 증명하도다淵源足證自華陽

밤에 산 아래의 친척의 집에서 잤다.

21일. 남산대(南山臺)를 지나 귀래정(歸來亭)에 올랐는데, 귀래정은 신말주(申末舟)주 200) 공이 지은 것이다. 신공(申公)은 광묘(光廟 세조)의 훈신(勳臣)인 신숙주(申叔舟)의 아우인데, 그의 형이 중대한 권력을 잡던 때를 당하여 무엇인들 구하면 얻지 못했을까마는 마침내 부귀를 뜬구름처럼 여기고 오직 의리만을 보고서 이곳으로 돌아와 은둔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고상하게 된 까닭이다. 광세지감(曠世之感)주 201)을 견디지 못하고 현판에 있는 송운(松雲) 강희맹(姜希孟) 공의 시에 차운하여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정자를 짓고 돌아가 늙으려는 뜻은作亭歸老意
전원이 거칠어졌기 때문은 아니었네不爲田園荒
누추한 시골은 참으로 편안한 땅이요陋巷眞安土
고관대작은 분수에 지나친 것이었네萬鍾是濫觴
옥천의 물고기는 낚시질할 만하고玉川魚可釣
아곡의 고사리는 얼마나 향기롭던가峨谷蕨何香
광세지감이 오늘날에 많으니曠感多今日
올라가 보며 옷매무새를 가다듬네登臨整我裳

밤에 신씨(申氏)의 집에서 잤다.

22일. 남원 유천(楡川)의 방진(房珍)의 집에 이르렀으니, 작고한 방복지 환영(房福之煥永)의 조카이다. 방복지가 죽었을 때 만사(輓詞)만 보내고 직접 찾아가서 곡(哭)하지는 못하였기에 지금 비록 3년이나 지났지만 지나던 길에 방문한 것인데, 방복지의 열 살 남짓한 아들도 죽어 후사가 끊어졌으니 차마 말을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23일. 방씨 집안의 노소(老少)가 나를 위하여 술을 사와 사계정사(沙溪精舍)주 202)에 놀러 가자고 청하였다. 정사는 방씨의 선조가 지은 것인데 지금까지400년 동안 대대로 지켜오고 있다. 판상(板上)의 제영(題詠)은 일재(一齋 이항(李恒))ㆍ남명(南冥 조식(曺植))ㆍ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ㆍ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ㆍ상촌(象村 신흠(申欽)) 이하 명현들의 문장으로, 무려 100여 명의 작품이었다. 내가 남의 집안의 정자와 정사를 본 것이 많지만 대개 이처럼 성대한 경우는 없었으니, 또한 자손들이 그 집안을 대대로 이어왔음을 알 수 있다. 드디어 차운하여 다음과 같이 시를 한 수 지었다.

오백년간 세업 이은 건 동방에 드문데半千世業罕吾東
문헌을 정사 안에서 징험할 수 있겠네文獻足徵精舍中
현판에는 선배들의 필적이 많이 있고板上曾多先輩筆
창문 앞에는 열 아름 소나무가 늙었네牕前已老十圍松
공명일랑 당시에 뜬구름처럼 경시하였고鼎鍾當日浮雲薄
강학은 서로 전해 다듬은 옥처럼 영롱했네講學相傳琢玉瓏
시험삼아 끝없이 흘러가는 사계를 보게나試看沙溪流不盡
덕 있는 집안에 남긴 음덕도 무궁하다네德門遺蔭也無窮

오후에 여러 벗과 용두정(龍頭亭)에 나가 놀았다. 용두정은 지당(池堂) 좌측 일대의 산등성이로, 모습이 용의 머리와 같아서 이름을 이렇게 지었는데, 옛날에는 정자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나의 방계 9대조인 좌망공(坐忘公) 김현(金灦)과 당촌(堂村) 황위(黃暐)주 203) 공이 이 마을에서 함께 살면서 모두 문과 장원이 되었으며 동시대에 남원 부사를 지낸 민광훈(閔光勳)주 204) 공도 일찍이 장원급제를 하여, 세 분이 함께 이 정자에 모여 성대한 놀이를 하였다. 그 뒤에 민공의 손자인 단암(丹巖) 민진원(閔鎭遠)도 대과에 급제하여 남원 부사가 되었는데, 인근 고을의 수령으로서 일찍이 대과에 급제한 사람 2명과 잇달아 이 정자에 모여 그 선조의 성대한 자취를 추모하였으니, 지금까지도 고을 사람들이 아름다운 일이었다고 전한다. 단암이 이른바 "용두정 위에 용머리가 모였으니, 육십 년 사이에 두 번의 멋진 놀이였네.[龍頭亭上會龍頭 六十年間再勝遊]"라고 한 곳이 이곳이다. 땅이 이미 용머리의 모양과 비슷하고 사람이 또 용머리를 차지한 사람이 모여 사람과 땅이 서로 부합하였으니 일이 매우 기이하다. 마침내 단암의 시에 차운하여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포의들이 영락한 채로 용두정에 모여布衣零落會龍頭
용두의 예전 놀이를 추억하며 말하네追說龍頭昔日遊
안개 낀 경치는 저무는 삼월에 어여쁜데煙景堪憐三月暮
세상 바뀌어 온갖 인연 끝난 걸 어찌할까滄桑其柰萬緣休
쌓인 회포는 정히 교산과 함께 우뚝하고積懷定與蛟山屹
깊은 한은 요수에 흘려보내기도 어렵네深恨難將蓼水流
만년에 한 말 술 따라주는 친구 있으니晩有故人斟斗酒
세속먼지 씻기에는 옥경루보다 나으리라滌塵勝似玉京樓

돌아오는 길에 마음에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생각건대 예전에 좌망공의 조부인 서계공(西溪公) 김협(金鋏)이 처음으로 이 마을에서 살게 된 것은 진씨(晉氏) 집안의 사위가 되었기 때문이다. 서계공은 진사(進士)에 합격하였고, 좌망공은 장원급제를 하여 청현직(淸顯職)을 두루 거쳤으며, 그분의 아우인 김호(金灝)도 진사가 되었으니, 그 또한 성대한 일이었다. 서계공의 아들인 김이길(金履吉)이 또 이언촌(伊彦村)의 동대(東臺)에 살았으므로 호를 동대라 하였다. 대개 이언과 지당 두 마을은 세상에서 일컫는 남원의 으뜸가는 터로서 각 성씨들이 함께 발원하였으며 명성이 다른 고을에까지 알려졌으니, 만약 서계공과 좌망공의 자손들이 대대로 머물러 살았다면 그 복이 지금까지도 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일이 여기에 나오지 않아 중엽에 쇠퇴하여 뿔뿔이 흩어져 살기에 다시 찾을 길이 없고 다만 노인들이 아무개 집안[某家]의 옛터라는 말만 서로 전하고 있으니, 방계 후손으로서의 마음이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서계공은 할아버지요 좌망공은 손자인데西溪之祖坐忘孫
이곳에서 살던 당시엔 또한 번성하였네宅此當年亦盛繁
진씨의 집안에서는 사위주 205)가 되었고晉氏舘中爲玉潤
용두 뽑는 과거에서 장원을 차지하였네龍頭科第占魁元
이름난 터전은 이미 남의 물건 되었고名基已作他人物
남긴 자취는 노인들의 말에서 전해지네遺蹟相傳故老言
해질녘에 배회하며 세 번 탄식하는 것은薄暮徊徨三歎息
같은 뿌리인 선대에 감회가 일어서라네有懷先世棣同根

이날 밤에 유천에서 잤다.

24일. 벗 방관(房琯)이 산에 들어가는 노정(路程)을 기록하였는데 매우 상세하였다. 운봉(雲峯)으로 나가는 길을 잡은 것은 내가 가장 높은 천왕봉(天王峯)에 먼저 오르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여원치(女院峙) 아래에 이르러 우리 종족(宗族)이 사는 목동(木洞)과 내기(內基) 두 마을을 지나게 되었기에 먼저 내기에 사는 친척인 김성헌 영우(金惺軒榮禹)를 찾아가서 묵었다. 다음날 목동에 이르러 친척 어른인 김회산 양식(金晦山亮植)을 찾아가 뵈었는데 비 때문에 이틀을 묵었다.

27일. 하늘이 비로소 갰다. 풍곡(風谷)에 들어가 충경공(忠景公 김익복(金益福))ㆍ재간당(在澗堂 김화(金澕))ㆍ도촌(陶村 김연(金沇))의 묘소에 참배하였는데 친척인 김영회(金榮會)가 앞에서 인도하였다. 묘소의 국세(局勢)는 빙 둘러싸고, 중건한 재실(齋室)은 굉장(宏壯)하여 사대부 집안의 선산(先山)이라고 할 만하였다. 대개 내가 30년 전에 잠시 이곳을 지났었는데 지금 다시 지나니 거의 새로운 모습 같았다.
석양녘에 내기로 돌아와 묵었다. 내기라는 마을은 비록 규모는 작지만 맺힌 형국[結局]은 또한 이름난 터전이니, 김성헌의 선조 중에 대과(大科)와 소과(小科)에 급제한 분이 이 마을에서 많이 나왔다고 한다.

28일. 떠나려고 할 때에 김성헌이 매우 간절하게 만류하였다. 그러나 이번 여행은 오로지 산을 구경하기 위한 것인데 집을 떠난 지 열흘이 되었으나 아직 산 아래에도 도착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오래 머물 수 있겠는가. 애써 사양하고 나오자 김성헌과 그의 아우 및 김영회가 5리쯤까지 전송하고 작별한 뒤에 10리쯤 가서 여원치(女院峙) 위에 도착하였으니, 이곳이 두류산으로 들어가는 주맥(主脈)이다. 그 서쪽에 봉우리 하나가 빼어나게 솟았고 위에 주지암(住智菴)이 있는데 초절(超絶)하여 구경할 만했으나 미처 보지는 못했다. 고개 이름을 '여원'이라 한 것은, 태조[이성계]가 황산(荒山)에서 왜적을 정벌할 때 이 고개를 지나갔는데 어떤 여자 도사가 대승을 거둘 날짜를 알려주었으므로 태조가 그 기이함에 감동하여 석벽에 여자 도사의 모습을 새기라고 명하고 그 위에 원옥(院屋)을 지어 수호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운봉 현감이 돌에 새긴 기실문(紀實文)이 있다.
운봉의 옛 읍을 지나 화수산(花水山) 아래에 이르러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주 206)를 보았다. 비석은 태조가 아지발도(阿只拔都)를 활로 쏘아 죽여서 왜구를 소탕한 사실을 기록한 것인데 대제학 김귀영(金貴榮)이 지었다. 비석은 높고 크며 비각은 굉장하였으니, 지금 비록 나라가 망했지만 오히려 새로 단장하였다. 비각의 서쪽 석벽에는 태조가 당시에 써 놓은 이름이 아직도 남아 있으며 또한 비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옛일에 감동하고 오늘날의 일을 슬퍼하여 장편 고시(古詩) 한 수를 지었는데 글자 수가 많아 기록하지 않는다.
비각에서 시내를 따라 내려가서 황산의 왜적을 평정했던 곳에 이르니, 아지발도의 핏자국이 바위에 스며들어 아직도 붉고 돌 위에는 말발굽이 밟은 흔적이 뚜렷하다고 거주하는 사람들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하였다. 인월(引月) 시장을 거쳐 산내방(山內坊)에 들어갔다가 함양(咸陽)의 마천(馬川)에 이르러서 묵었다.
여원치부터 이후로는 물길 따라 서쪽의 산이 모두 두류산인데, 비록 차례대로 올라가지는 못하였지만 산이 높고 물이 맑음을 알겠다. 하루 내내 푸른 절벽과 하얀 폭포 사이를 뚫고 가니 심신이 갑절이나 상쾌하였다.

29일. 이른 아침에 곧장 천왕봉에 오르려고 할 때 도촌(島村)의 강주원(姜周元)을 찾아가 산으로 올라가는 노정을 물으니 천왕봉과의 거리가 40리라고 하였다. 안내자 1명을 사고 점심을 마련하여 싸서 몸을 떨쳐 일어나 힘을 내어 바쁜 걸음으로 올라갔으니, 산 위에는 묵을 만한 집이 없다고 하기에 당일에 돌아올 계획이었다.
10리를 가니 '하동암(河東巖)' 세 글자가 새겨진 큰 바위가 있는데, 옛적에 하동 군수가 가마를 타고 산에 오르다가 떨어져 상처를 입고는 이 바위에 이르러 죽었으므로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이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으니 두려워서 수당(垂堂)의 경계주 207)를 더욱 조심하게 되었다.
제석당(帝釋堂)에서 점심을 먹은 뒤에 통천문(通天門)의 잔도(棧道)를 지나 미시(未時) 초에 비로소 천왕봉 꼭대기에 이르렀다. 참으로 천왕봉의 높이가 높다는 것을 알았지만 봄과 여름이 교차하는 시기인데도 나뭇잎이 펴지지 않고 철쭉도 피지 않은 것은 아마도 높고 추워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호남과 영남에는 대개 큰 산이 많지만 굽어보니 마치 어른이 어린아이를 대하는 것처럼 자그만하였다. 날씨가 맑을 때는 서쪽ㆍ남쪽ㆍ동쪽 삼면의 바다가 멀리 하나의 띠처럼 보이고, 일본의 대마도를 어렴풋이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이날은 구름이 하늘과 잇닿아 혼연히 끝이 없어 안타까웠다.
그런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산은 선산(仙山)이라 신선과 인연이 없는 사람은 정상까지 오르기도 전에 비와 안개 때문에 고생하는 경우가 많다."라고 하였다. 나의 오늘 산행은 마침 그믐이어서 어둡고 비가 많은 것이 상례인데도 다행히 비는 맞지 않았으니, 아마도 하늘의 도움을 얻어 인연이 있었던 것인가. 또한 우습기만 하다.
예전에 내가 금강산의 비로봉(毘盧峯)에 올랐고 오늘은 또 이 봉우리에 올라 보니, 이 봉우리가 비로봉보다 높음을 알겠다. 그런데 사람들이 비로봉을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높은 곳이라고 하지만 천왕봉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듣지를 못하였으니, 아마도 비로봉은 동북쪽의 위에 있고 천왕봉은 서남쪽의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바위 위에는 '일월대(日月臺)' 세 글자가 새겨져 있고 전후에 유람한 사람들의 제명(題名)주 208)이 많이 있다. 혹은 부자(父子)가 함께 제명하고 4대(代)가 나란히 이름을 써서 족보와 똑같은 경우도 있으니, 이것은 일벌이기를 좋아함이 지나친 것이다.
아, 높은 곳에 오른 사람이 반드시 느끼는 바가 있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다. 공자(孔子)는 태산(泰山)에서 천하를 작게 여겼으며,주 209) 주자(朱子)는 축융봉(祝融峯)에서 호탕한 기상을 드러내었으나,주 210) 지금 나는 뜻은 있어도 주견(主見)이 없으므로 얻은 것을 말할 수 없다. 주의(周顗)는 신정(新亭)에서 산하에 느낌이 있었고,주 211) 〈위시(衛詩)〉에 "서방에 있는 미인을 바라본다.[望美人於西方]"주 212)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내가 오늘날 당한 처지이다. 공자와 주자가 얻은 것은 바름[正]이고, 〈위시〉에서와 주의가 느낀 것은 변화[變]이다. 그 바름을 얻으면 변화를 만나더라도 그 중도(中道)를 잃지 않지만, 그렇지 않으면 시대의 변화를 슬퍼하여 혹 상심하는 데 이를 것이니, 이 또한 내가 힘써야 할 부분이다. 그로 인해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높구나 이 산의 꼭대기여高哉此絶頂
한 번 올라서 무엇을 하려는가一陟欲何爲
말하면 하늘 놀래킬까 걱정되고語恐驚天上
눈은 응당 땅 끝까지 다 보리라眼應極地涯
공자가 태산에 오른 날과 같고宣尼泰嶽日
주자가 축융봉에 오른 때와 같네晦老祝峯時
하지만 천추에 대한 나의 생각을而我千秋想
곁에 있는 사람이 어찌 알겠는가傍人那得知

조자정이 말하기를,
"옛적에 병암(炳菴) 어른이 이 산의 반야봉(般若峯)에 올라 지팡이로 땅을 두드리며 기분이 좋다고 외치면서 말하기를 '오늘은 나 또한 성인이 되었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옛사람이 산꼭대기에 오른 것으로써 도(道)에 대한 조예가 지극한 데에 비유하였는데, 병암 어른은 도에 대한 조예가 지극한 것으로써 산꼭대기에 오른 것에 비유하여 자신이 높은 곳에 오르는 일을 마쳤음을 말한 것이니, 피차 바꾸어 말하는 사이에 자신이 힘쓰면서 타인을 권면하는 뜻을 볼 수 있네."
라고 하였다.
아, 북쪽을 바라보면 함양(咸陽)의 개평(介坪)이요, 동쪽을 바라보면 진주의 덕산(德山)이 모두 지척간에 있어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와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고상한 풍모를 움켜쥘 수 있으니, 아마도 이 산이 신령한 기운을 모아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남쪽을 바라보면 남강(南江) 일대가 흰 비단을 펼쳐 놓은 듯한데, 김 문열공(金文烈公 김천일(金千鎰))ㆍ황 무민공(黃武愍公 황진(黃進))ㆍ최 충의공(崔忠毅公 최경회(崔慶會)) 삼장사(三壯士)가 강물에 몸을 던져 순절한 곳에는 충성스럽고 굳센 혼백이 천고에 길이 남아 있으니, 명현(名賢)이 이곳에서 태어난 것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죽은 것은 또한 산의 신령함이 시킨 것이리라. 여러 현인이 모두 재주와 뜻을 품고서 덕업을 닦고 쌓아 크게 등용되어 세상을 바로잡으려 하였으나 일이 어그러져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남명은 은둔하여 화를 면하였으나 일두는 사화(士禍)에 죽고 삼장사는 병난(兵難)에 죽었으니, 요컨대 모두 시변(時變)의 불행이다. 고금 천하에 변고가 이렇게 많았으니 나는 변고에 어떻게 할 것인가? 다만 뜻을 편안히 하여 대처할 뿐이다.
배회하면서 두루 보느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날이 이미 저물었는데 이날은 또 삼춘(三春)이 다하는 날이었다. 봄을 보내는 사람은 으레 반드시 높은 곳에 오르는데 마침 이날에 이렇게 아주 높은 곳에 올랐으니 이번에는 매우 아름다운 곳에서 봄을 보냈다고 할 만하다.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천왕봉 위에서 청황주 213)을 전송하는데天王峯上餞靑皇
일월대 앞에는 또 석양이 지는구나日月臺前又夕陽
오는 길에서는 봄바람과 짝이 되었으나來路東風同作伴
봄은 가고 나만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네春歸我獨未歸鄕

돌아가는 길이 금방 어두워질까 걱정되어 급히 하산하였으니, 침구와 음식을 가지고 와서 하룻밤을 여기에서 묵어보지 못하는 것이 매우 아쉬웠다. 여기에는 집 모양 같은 돌담장과 시우(柴宇)주 214)가 있다. 그래서 이곳에 오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밤을 지낼 계획을 세워 밤에는 노인성(老人星)을 보고 새벽에는 일출(日出)을 보는데 날씨가 쾌청하고 따뜻한 추분(秋分)을 택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미처 그것을 몰라 이런 실책을 저질렀다. 서둘러 내려와 백무촌점(白武村店)에 이르니 저녁밥을 내왔다. 식사를 마치고 쓰러져 누웠는데 너무 피곤하여 온몸이 매를 맞은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내었다. 마침내 스스로 웃으며 말하기를,
"심하구나, 너의 산수를 좋아함이여! 누가 너에게 이렇게 하도록 하였는가? 번거로운 일을 자신이 만들었으니 다시 누구를 원망하고 탓하랴."
라고 하였다. 그로 인해 다음과 같이 시 한 수를 지었다.

누가 장엄한 경관 좋다고 했던가誰言壯觀好
몸 고생이야 다시 비할 곳 없네身苦更無比
우습구나 영대의 주인주 215)이여堪笑靈臺主
스스로 한때의 상쾌함 구했구나自求快一時

이 시는 몸이 마음을 책망한 것이다. 또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한때의 상쾌함을 구한 것이 아니라非求快一時
지자와 인자의 마음을 보려 하였네주 216)要見智仁術
내 진실로 사욕과 먼지 씻어냈으니我苟淨私塵
이에 너 또한 없어진 것을 알겠네從知你亦逸

이 시는 마음이 몸에 대답한 것이다.

4월 1일. 백무(白武)를 떠나 직치(直峙)를 넘어가려고 덕평(德坪)을 찾아갔다. 지나는 곳을 보건대 조금 넓고 평평한 곳에는 비록 지대가 매우 높거나 골짜기가 아주 깊숙하더라도 더러 인가가 있었다. 대개 지금은 오랑캐가 정권을 장악하여 백성들이 제대로 살아가지 못한다. 그래서 이리저리 떠돌다가 이곳에 들어와 산을 개간하고 감자를 먹고 살며 짐승과 같은 모습으로 구차하게 생명을 연장하고 있다. 그런데 저들의 법령은 깊은 골짜기에도 들어가지 못함이 없으니, 산은 국유(國有)라고 하며 숲을 양성함이 매우 엄하여 숲을 태워 밭은 만드는 것도 금지하여 할 수가 없다. 깊은 산에서 얻는 것이 이것뿐인데도 오히려 구금(拘禁)을 당하니 또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간혹 잡은 터가 온난(穩暖)하고 개간한 땅이 비옥한 경우도 있으니, 감자와 보리가 모두 풍성하고 약초밭도 좋으며 시장이 3, 40리에 불과하여 교역할 수 있기에 한 해를 마치도록 굶주림과 추위에 대한 근심이 없고, 아울러 저들의 사역(使役)과 조사를 당하지 않는다. 이것을 어찌 평지와 들판에서 저들의 농지를 소작하고 저들이 시키는 일을 하여 노예가 되고서도 오히려 죽음을 구제하기도 부족한 경우와 같은 선상에서 말할 수 있겠는가.
가령 내가 만난 밀양에서 온 민씨(閔氏) 4형제는 늙은 어버이를 봉양하고 자식들을 가르치면서 스스로 낙토(樂土)로 여기니, 아마도 산이 지극히 넓고 골짜기가 지극히 깊기 때문에 혹 이러한 곳이 있는가 보다. 나처럼 세상과 맞지 않은 사람은 정히 이곳에 들어와 요행으로 안온한 곳을 얻어 여생을 마칠 수 있겠으나, 다만 근력이 이미 노쇠하여 농사짓는 수고로움을 견딜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직치 아래에 이르러 갑자기 길을 잃어 진퇴유곡(進退維谷)이었다. 반나절 동안 암석과 가시덤불 사이를 헤치고 나가서야 겨우 화를 면하니 머리와 수염이 하얗게 되었다. 정오가 지나서 이른바 덕평(德坪)에 당도하였다. 이곳은 하동(河東) 땅인데 지대가 너무 높고 바람이 너무 차가워서 처음 오는 사람은 오래 머물지 못한다. 거주하는 사람에게 물으니, 이곳에서는 오곡(五穀)이 나지 않고 다만 청저(靑藷)만 생산되는데, 처음에는 청저가 매우 풍족하여 먹는 데에 여유가 있었으나 근년에는 바람이 많고 추위가 심하여 청저의 수확량이 줄어 양식 대기가 어렵게 되자 대부분 이사를 가서 20호나 되던 마을에 지금은 6, 7호만 남았으며, 남아 있는 사람들도 진퇴양난이지만 형편상 어찌할 수가 없는 자들이라고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물건을 먹을 수 있는 뒤에야 외딴 지역에서 살 수 있는데 이 지역은 이미 먹을 것이 없으니 살 만한 땅이 아니다.
이밖에 또 이른바 상세석평(上細石坪)과 하세석평(下細石坪)이 있는데 난리를 피할 수 있는 길지(吉地)로, 여기에서 30리 거리이다. 상세석평은 어제 천왕봉 정상에서 이미 바라보았는데, 산 위에 열린 국면이 덕평보다 지대가 높다. 그러나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향하였으며 좌우로 안온하게 감싸고 있어 바람을 가두는 것 같으며 국면의 안쪽은 매우 넓고 크며 순대(脣臺)를 이루고 있어 형세가 매우 오묘하였다. 하세석평 또한 그렇다고 한다. 예전에는 수많은 노송나무가 빽빽하게 서 있었으나 근래에 모두 말라죽어 풀이 자라나는 곳이 되었다. 이런 까닭에 운수가 돌아왔다고 여겨 사람들이 간혹 들어와 살았지만 끝내 다시 되돌아간 것은 지대가 높고 추워서 먹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지형이 이미 오묘한데다가 최고운(崔孤雲)의 유적이 있으니 한번 구경하는 것은 괜찮으나 길이 험하고 피로가 심하여 그만두었다. 이날 밤에 삼정리점(三井里店)에서 묵었다.

2일. 당현(堂峴)을 넘어 칠불암(七佛菴)에 당도하였다. 암자는 매우 그윽하고 외진 곳에 있는데 가락국(駕洛國) 수로왕(首露王)의 왕자 7명이 이곳에서 성불(成佛)하였으므로 암자에 이런 이름을 붙였다. 수로왕은 중국 연대로 따진다면 서한(西漢) 시대에 해당되는데, 그의 아들들이 성불했으니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이 동한(東漢) 명제(明帝) 때보다 앞섰음을 또한 알 수 있다. 내가 금강산을 유람할 때에 유점사(楡岾寺)를 기록하면서 이에 대해 이미 상세하게 논하였다.
암자에는 아자방(亞字房)이 있으니, 하나의 큰 방 안에 높고 낮게 구획을 하고 아(亞) 자 모양과 같게 하였는데 하나의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높은 곳과 낮은 곳이 모두 따뜻하며 수백 년이 지났는데도 변함이 없다고 한다. 이것은 담공선사(曇空禪師)가 만든 것인데, 이것이 비록 선가(禪家)의 작은 기술이지만 또한 매우 특이하다.
도중에 삼신동(三神洞)의 서숙(書塾)을 지나게 되었는데, 숙사(塾師 훈장)인 박정규(朴貞圭) 씨는 정민화(鄭閩華) 아내의 아우로서 초면인데도 옛 친구와 같아 은근히 만류하였다. 백주(白酒)ㆍ황반(黃飯)ㆍ산나물ㆍ민물고기 등은 향긋하고 정갈하여 입맛에 맞아 며칠 계속된 피로가 감소하였으며, 나그네의 고달픔이 가지가지였으나 우연히 좋은 주인을 만나 하룻밤을 묵으니 그 안온하고 편안함은 문득 집으로 돌아간 것과 같았다.

3일. 시내를 따라 내려와 세이암(洗耳巖)에 이르렀다. 이곳은 고운(孤雲)이 유람하던 곳으로 수석(水石)이 매우 기이하고 제명(題名)이 많았다.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고인은 귀뿌리를 씻고도 남겠지만高人洗得耳根餘
속인의 공명심은 씻어낼 수가 없네俗子名心洗未除
고운이 노닐던 곳이라 하는 곳에는云是孤雲遊賞地
돌에 새긴 이름들 어지럽기만 하네刻題石面紛紛如

여기에서 20리를 가서 쌍계사(雙磎寺)에 들어갔다. 절이 두 계곡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의 안쪽에 있기 때문에 이러한 명칭을 얻었을 것이다. 동구(洞口)의 좌우에 있는 석벽에는 '쌍계석문(雙磎石門)' 네 글자가 나누어 새겨져 있는데, 전하는 말로는 고운이 쇠지팡이[鐵杖]로 돌에 쓴 것이라고 하지만 정말 그러했을까? 절은 겨우 중간 규모의 사찰인데 전각은 매우 화려하다. 문루(門樓)에 '청학루(靑鶴樓)' 세 글자가 걸려 있는데, 전하는 말로는 고운이 이곳에서 거문고를 연주하고 생황을 불자 청학이 날아 왔기에 후세 사람들이 이 때문에 누각의 이름으로 삼았다고 한다. 마침내 판상(板上)의 시에 차운하여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청학을 맞이하려고 누대를 세웠나니爲迎靑鶴起樓臺
세속 밖 신선이 몇 번이나 찾아왔나物外仙人幾度來
신선 떠나고 학도 돌아간 천 년 뒤에仙去鶴歸千年後
내가 여기서 배회할 줄 어찌 알았으리豈知滄老此徘徊

세상에서는 지리산 속에 청학동이 있는데 십승(十勝)의 하나로서 만 명이 살 수 있고 삼재(三災)주 217)가 들지 않는다고 한다. 산꼭대기나 깊은 계곡을 샅샅이 찾아보고서 어떤 사람은 세석평전이나 덕평 등지가 여기에 해당된다고 한다. 그러나 천여 년 전에 청학이 일찍이 이곳에 와서 청학루가 만들어지게 된 줄은 전혀 모르니, 청학루가 있는 곳이 바로 청학동이다.
대개 화개(花開) 시장 위로부터 벽소령(碧霄嶺) 아래까지 상하로 4, 50리는 산이 높고 계곡이 깊으며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향하고 있어 바람이 온화하며 토질이 비옥하고 수량이 풍부하여 곡식과 과일이 모두 구비되었고 담배가 많이 생산되기에 온 산 가운데 가장 낙지(樂地)로서 만 명이 생활할 수 있고 삼재가 들지 않는다고 할 수 있으니, 이곳이 아마도 청학동이 아닐까? 율곡(栗谷 이이(李珥))이 두류산으로 가는 사람을 전송하면서 지은 시주 218)에서 '그대는 이제 청학동 사람이네.[君今靑鶴洞中人]'라고 한 것도 이 골짜기를 가리키니, 당시에 어찌 세석평전이나 덕평 등지와 같이 궁벽지고 매우 험하여 인적이 닿지 않는 곳을 가리켜 운운하였겠는가.
절 마당에는 옛 비석이 하나 있는데 고운이 지은 〈진감선사비명(眞鑑禪師碑銘)〉이다. 그 내용 중에,
"여산(廬山)의 혜원(惠遠)은 논(論)을 지어 '석가여래와 주공(周公)ㆍ공자(孔子)는 출발점은 비록 다르지만 귀착점은 동일한데, 두 종교의 정수를 함께 아우르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이 그 둘을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고, 심약(沈約)주 219)은 '공자는 그 단초를 열었고 석가는 그 극치를 다했다.'라고 하였으니, 참으로 그 대체(大體)를 알았다고 이를 만한 자라야 비로소 함께 도(道)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내가 이 부분을 읽고 다음과 같이 시를 지어 논평하였다.

유학에는 대본과 달도주 220)가 있으며儒有大本與達道
허무적멸은 불가에서 보배로 여기네虛無寂滅佛所寶
동정과 체용은 본디 절로 다르기에動靜體用本自殊
섞어서 구분하지 않으면 모호해지네混而無分已糊塗
공자가 단초 열고 석가가 극치 다했다니 무슨 말인가孔發釋窮是何言
유학을 인용해 불교에 들여 불교가 도리어 높아졌네援儒入佛佛反尊
고운이 아마도 유가의 자식이 아니어서孤雲豈非儒家子
이름과 실상이 같지 않은 것은 아닐까無乃名實不相似
퇴계 이후로 연재와 간재에 이르기까지退溪而後逮淵艮
참으로 전해오는 천추의 의론이 있다네良有以來千秋論

여기에서 화개 시장을 거쳐 섬진강가에 이르렀다. 푸른 물결이 넘실거리고 배들이 오르내려 가슴이 확 트이니, 산속의 유람과 비교해봄에 또 별다른 취미(趣味)였다. 그래서 일두(一蠹) 시의 "바람결에 부들은 가벼이 흔들거리고 사월의 화개에는 보리가 벌써 익어가네. 두류산 천만 겹을 다 구경하고 조각배 타고 또 큰 강물로 내려가네.[風蒲獵獵弄輕柔 四月花開麥已秋 看盡頭流千萬疊 孤舟又下大江流]"라는 구절을 읊고서 조자정에게 웃으며 말하기를,
"우리들은 겨우 산 하나만을 다 보았지 배를 타고 큰 강으로 내려가지는 못했으니 일두 노인의 풍류에는 미치지 못하였음을 알겠네."
라고 하였다. 일두의 시운에 따라 다음과 같이 시 한 수를 지었다.

안개 빛이 흥취를 도와 붓에 들어왔나니煙光助興入毫柔
푸른 나무 그늘 짙고 보리는 익지 않았네綠樹陰濃麥未秋
섬진강 물이 넘실넘실 만 장이나 솟으니蟾水滔滔萬丈屹
일두 옹의 높은 노래에 풍류를 상상하네蠹翁高詠想風流

강을 거슬러 올라 20리를 가서 송정점(松汀店)에서 묵었다.

4일. 구례(求禮) 토지면(土旨面)을 지나며 이른바 금환락지형(金環落地形)이라는 새로운 명당을 살펴보았다. 각처 사람들이 다투어 와서 집터를 잡았으나 대부분 실패하여 떠났고 오는 사람들이 또 이어져 마을과 집들이 별처럼 널려 있고 바둑알처럼 놓여있는데 어느 곳이 진짜인지 모른다고 하니 도리어 허명무실(虛名無實)한 것이다. 그렇지만 요컨대 산과 물이 둘러 감싸고 사방의 들판이 광활하여 천 명이 살 만한 곳이 되기에는 충분하였다.
여기에서 북쪽으로 향하여 20리를 가서 화엄사(華嚴寺)에 들어갔다. 화엄사는 큰 사찰이며 2층 각황전(覺皇殿)은 매우 높다. 이는 수(隋)나라 양제(煬帝)가 자식을 위하여 복을 구하려고 사람을 시켜 짓게 하였다고 하는데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여래사리탑(如來舍利塔)은 매우 정묘(精妙)하였으며 경치가 좋은 곳에 자리하였다. 마당에 있는 〈벽암선사비명(碧巖禪師碑銘)〉은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주 221)이 지었다. 비문 안에 임진왜란 때 나라에 공로가 있음을 매우 상세하게 기술하였는데, 그가 비록 승려이지만 임금을 위한 충성을 알았으니 가상한 일이다.
또 북쪽으로 20리를 가서 수월치(水越峙)를 넘어 미국인의 피서실(避暑室)에 당도하였다. 집이 50여 곳이나 되고 돌로 지어서 외부는 견고하고 내부는 화려한데, 높고 크며 매우 험한 곳에 이처럼 집을 지었으니 많은 돈이 들었음을 상상할 수 있다. 사람들의 말로는 미국은 돈이 많다고 하는데 정말로 그런 듯하다. 산 위의 형국은 산봉우리가 수려하고 시야가 확 트였으며 돌 사이에서 샘물이 나오는데 저울로 달아보면 그 무게가 다른 물과 비교할 바가 아니며 그 물을 마시면 모든 병이 낫는다고 한다. 대저 누가 이곳에 이렇게 좋은 터가 있는 줄을 알았겠는가. 또한 미국인들에게도 감여술(堪輿術 풍수지리술)이 있음을 알 수 있겠다. 매우 더울 때에 왔다가 더위가 물러가면 떠나는데, 여름철에는 문득 번화한 곳이 되며 골짜기에 사는 곤궁한 사람들이 그들의 고용이 되어 작은 돈이라도 받게 됨을 기뻐한다고 하니, 우리 망국 백성들의 가련함이 슬프다. 이곳은 반야봉과의 거리가 이미 중반이 되는데, 바라보면 한 번 뛰어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으나 오히려 20리나 된다. 사람들은 흔히 반야봉과 천왕봉이 지리산의 최고봉이지만 반야봉이 조금 낮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미 그 높은 곳에 올라보았으니 낮은 곳을 포기한들 무엇이 해롭겠는가.

5일. 여기에서 하산하여 구산령(九山嶺)을 넘어 구례 당곡(堂谷)을 거쳐 원우점(院右店)에서 점심을 먹었다. 또 둔산령(屯山嶺)을 넘어 남원 포암(包巖)의 정자경(鄭子敬 정영식(鄭泳寔))의 집에 이르러서 묵었다. 비록 두루 찾아보고 세세하게 보지는 못했지만 이에 안팎의 전체 산을 대략 보았다.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백두산에서 흘러온 맥이 남도를 진압하니白頭流脉鎭南州
중국에 있는 형산과 더불어 짝할 만하네中國衡山可與儔
일만 골짝에는 은하수 같은 폭포가 걸렸고萬壑皆懸銀漢瀑
일천 봉우리는 높이 옥경루에 닿을 듯하네千峯高逼玉京樓
신의 정령은 현인들을 얼마나 길러 내었나精靈幾毓群賢出
골짝은 깊고 넓어 오곡을 지을 논밭이 많네深廣多治五穀疇
등람할 때는 인자 지자의 마음 알아야 하니登覽要知仁智術
보고도 안 본 것과 같으면 부끄러운 일이네看如不看也堪羞

대개 내가 전에 보았던 금강산을 이 산과 비교해 보면, 금강산은 맑고 뾰족하며 우뚝 솟아 있고 지리산은 웅장하고 높으며 깊어서 광대한 점이 금강산보다 낫다. 금강산은 청명(淸明)한 군자가 세속의 번거로움을 벗어나 사람으로 하여금 속된 생각을 저절로 없애게 하는 것 같고 지리산은 장중(莊重)한 군자가 덕이 두텁고 학식이 넓어 사람으로 하여금 깊은 속마음을 추측하기 어렵게 하는 것 같으니, 요컨대 학자들이 모두 취하여 스승으로 삼을 만하다. 다만 세상에서 말하는 삼신산(三神山)이라는 설을 가지고 논하자면, 기이한 형상과 빼어난 모습은 당연히 금강산이 제일 앞을 차지하고 두류산이 그 아래에 해당된다.
또 듣건대 영남과 호남 사람들이 서로 이 산을 자기의 도에 소속시키려고 하여 아직도 논의가 정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대개 차지하는 면적의 넓이와 앞뒤의 방향으로 본다면 마땅히 영남에 속해야 하고, 국가의 전례(典禮)인 남악묘제(南嶽廟祭)를 호남에서 지내는 것으로 본다면 마땅히 호남에 속해야 하니, 아마도 이 산의 주맥(主脈)이 이미 호남에서 반야봉으로 들어가 먼저 주봉(主峯)을 일으키고 또한 호남 땅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태조가 천명(天命)에 응하여 날마다 명산(名山)에 기도하였는데 여러 산의 신령은 모두 응답하였으나 유독 이 산의 신령만 응답하지 않았기에 호남에 폄적(貶謫)되었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근거 없는 말에 해당된다.
그렇지만 나는 또 한 가지 말할 것이 있다. 이 산은 한결같이 모두 중후하여 어긋난 기운이 없다. 그 가운데서 비교해서 논한다면 반야봉은 흙이 많고 돌이 적어 한결같이 수려하며, 천왕봉은 돌이 많고 흙이 적어 조금 가파른 바위가 많으니, 이 때문에 호남 사람의 마음은 유순하고 영남 사람의 마음은 굳세고 사나울 것이다. 알 만한 사람에게 물어보고 싶다.

6일. 포암을 떠났다.

7일. 해질 무렵에 비로소 귀가하였다. 총 19일이 걸렸다.
주석 192)오악(五嶽)
중국 사람들이 신성시했던 다섯 개의 산으로, 동악 태산(泰山)ㆍ서악(西嶽) 화산(華山)ㆍ남악(南嶽) 형산(衡山)ㆍ북악(北嶽) 항산(恒山)ㆍ중악(中嶽) 숭산(嵩山)을 말한다.
주석 193)방외(方外)
속세의 예의와 도덕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자유분방하게 생활하는 세상으로, 주로 유가에서 불가나 도가를 이른다.
주석 194)선사(先師)
돌아가신 스승으로, 여기서는 저자의 스승인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를 지칭한다.
주석 195)병암(炳菴) 김준영(金駿榮)
1842~1907.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덕경(德卿)이다. 임헌회(任憲晦)ㆍ신응조(申應朝)ㆍ송병선(宋秉璿)ㆍ박운창(朴芸牕)ㆍ김계운(金溪雲) 등 당시 학자들에게 모두 허통(許通) 받았으며, 성리학을 더욱 공부하기 위하여 한 살 연상인 전우에게 세 번 찾아가 사제(師弟) 관계를 맺었다.
주석 196)오적(五賊)
이른바 을사오적(乙巳五賊)으로, 1905년 을사늑약에 찬성하여 서명한 이지용(李址鎔)ㆍ이근택(李根澤)ㆍ박제순(朴齊純)ㆍ이완용(李完用)ㆍ권중현(權重顯)을 가리킨다.
주석 197)자정(自靖)
스스로 의리와 지조를 지키며 편안히 처신하는 것으로, 《서경》 〈미자(微子)〉에 "스스로 의리에 편안하여 사람마다 스스로 선왕(先王)에게 뜻을 바칠 것이니, 나는 떠나가 은둔함을 돌아보지 않겠다.〔自靖, 人自獻于先王, 我不顧行遯.〕"라고 보인다.
주석 198)기수(沂水)에서……돌아오겠다
도(道)를 즐기며 유유자적하는 것으로, 《논어》 〈선진(先進)〉에 보인다. 기수는 노(魯)나라 도성 남쪽에 있는 물 이름이며, 무우는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다.
주석 199)농암(礱巖)
김택삼(金宅三, 1619~1703)의 호이다. 본관은 부령(扶寧), 자는 계용(季用)이다. 우암 송시열의 문인으로, 성리학에 능하였으며 우암의 〈주자차의(朱子箚疑)〉를 교정하였다.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과도 절친하였다. 저서에 《농암유고》가 있다. 부안군 보안면 영전리 유천서원(柳川書院)에 제향 되었다.
주석 200)신말주(申末舟)
1429~1503.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자집(子楫), 호는 귀래정(歸來亭)이며, 신숙주(申叔舟)의 동생이다. 대사간ㆍ형조 참의ㆍ전주 부윤ㆍ진주 목사ㆍ창원 부사ㆍ경상우도 병마절도사ㆍ첨지중추부사ㆍ전라 수군절도사 등을 지냈으며, 세조(世祖) 즉위 이후에 순창에 낙향하여 귀래정(歸來亭)을 짓고 은거하였다.
주석 201)광세지감(曠世之感)
동시대에 태어나지 못해 서로 만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감회를 이르는 말이다.
주석 202)사계정사(沙溪精舍)
남원시 주생면 영천리에 있는 정자로, 사계(沙溪) 방응현(房應賢, 1524~1589)이 조선 중기에 처음 세웠으며, 임진왜란 때 병화로 소실된 것을 후손들이 여러 번 다시 지었다.
주석 203)황위(黃暐)
1605~1654.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자휘(子輝), 호는 당촌(塘村)이다. 1638년(인조16) 정시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정언이 되었고, 함경도 도사ㆍ평양 서윤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역대 충절들의 사실을 모은 《정충록(旌忠錄)》이 있다.
주석 204)민광훈(閔光勳)
1595~1659.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중집(仲集)이다. 1616년(광해군8) 진사시에 급제하고, 1628년(인조6) 알성 문과에 장원하였으며, 정언과 지평 등을 거쳐 남원 부사ㆍ안변 부사ㆍ강원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병자호란 때는 원손을 호위한 공으로 통정으로 승진하여 호조 참의가 되었다.
주석 205)사위
원문의 '옥윤(玉潤)'은 남의 사위에 대한 미칭이다. 진(晉)나라 위개(衛玠)가 악광(樂廣)의 딸에게 장가들자, 배숙도(裴叔道)가 "장인은 얼음처럼 맑고, 사위는 옥돌처럼 윤기가 난다.〔婦公氷淸, 女婿玉潤.〕"라고 찬탄한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晉書 卷36 衛瓘列傳 衛玠》
주석 206)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
1380년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왜장(倭將) 아기발도(阿只拔都)를 물리치고 거둔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비석은 전북 남원 운봉현(雲峯縣) 동쪽 16리 황산에 있었으며, 비문은 김귀영(金貴榮)이 지었다. 《東園集 卷3 荒山大捷之碑》
주석 207)수당(垂堂)의 경계
안전에 유의하여 위험한 곳은 가까이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한 문제(漢文帝)가 패릉(覇陵)에 올라갔다가 험한 비탈길을 말을 타고서 질주해 내려오려 하자, 원앙(爰盎)이 "천금을 가진 집안의 자식은 마루 끝에 앉지 않는다.〔千金之子坐不垂堂.〕"라는 말을 인용하며 만류하였다. 《史記 袁盎列傳》
주석 208)제명(題名)
명승지에 온 것을 기념하여 자기 이름을 새기는 것을 말한다.
주석 209)공자(孔子)는……여겼으며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보인다.
주석 210)주자(朱子)는……드러내었으나
주희(朱熹)가 남헌(南軒) 장식(張栻)과 남악 형산(衡山)에 올라 지은 〈취하여 축융봉에서 내려오며 짓다[醉下祝融峯作]〉에 "내가 만 리 먼 곳에 와서 큰 바람을 타니 깊은 계곡과 층층 구름이 가슴을 씻어 주네. 석 잔 술에 호기가 일어 낭랑히 시 읊조리며 날듯이 축융봉에서 내려오네.〔我來萬里駕長風, 絶壑層雲許盪胸. 濁酒三杯豪氣發, 朗吟飛下祝融峯.〕"라고 한 것을 말한다.
주석 211)주의(周顗)는……있었고
망한 나라의 풍경을 대하고 눈물을 흘린 것을 말한다. 동진(東晉)의 여러 명사(名士)들이 신정(新亭)에 모여 술을 마시는데, 주의(周顗)가 탄식하기를 "풍경은 다르지 않는데 눈을 들어 바라보니, 산하(山河)가 다르다.〔風景不殊, 擧目有江河之異.〕"라고 하니, 왕도(王導)가 얼굴빛을 변하며 "함께 나랏일에 힘을 바쳐 신주(神州)를 회복해야 하는데, 어찌하여 초수(楚囚)처럼 맞대고 울기만 하는가?〔當共戮力王室, 克復神州, 何至作楚囚相對?〕"라고 한 고사가 있다. 《晉書 卷65 王導列傳》
주석 212)서방에……바라본다
쇠퇴한 세상의 현자(賢者)가 흥성했을 때의 훌륭한 왕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이른다. 《시경》 〈간혜(簡兮)〉에 "산에는 개암나무, 진펄에는 감초로다. 누구를 그리 생각하시는가, 서방의 고운 님이로다. 저 고운 우리 님은, 서방의 사람이시로다.〔山有榛, 隰有苓. 云誰之思? 西方美人. 彼美人兮, 西方之人兮.〕"라고 하였다.
주석 213)청황(靑皇)
봄을 주재하는 신(神)이라는 뜻의 시적인 표현이다. 봄은 동방(東方)과 청색(靑色)으로 대표되기 때문에 동제(東帝)ㆍ동황(東皇)ㆍ청제(靑帝) 등으로 불렸다.
주석 214)시우(柴宇)
땔나무로 얽어서 지은 집을 말한다.
주석 215)영대(靈臺)의 주인
마음을 이른다. 《장자(莊子)》 〈경상초(庚桑楚)〉 곽상(郭象)의 주에 "영대는 마음이다.〔靈臺者, 心也.〕"라는 내용이 보인다.
주석 216)지자(智者)와……하였네
지혜로운 사람과 어진 사람이 산수(山水)를 즐기는 마음을 알아보고 싶었다는 말이다. 《논어》 〈옹야(雍也)〉에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智者樂水, 仁者樂山.〕"라고 하였다.
주석 217)삼재(三災)
불교 용어로, 겁말(劫末)에 일어난다는 세 가지의 재난을 말한다. 도병재(刀兵災)ㆍ역병재(疫病災)ㆍ기근재(饑饉災)의 소삼재(小三災)가 있고, 화재(火災)ㆍ수재(水災)ㆍ풍재(風災)의 대삼재(大三災)가 있다고 한다.
주석 218)율곡(栗谷)이……시
《율곡전서(栗谷全書)》 권1의 〈송이가겸유두류산(送李可謙遊頭流山)〉 시를 말한다.
주석 219)심약(沈約)
441~513. 남북조 시대 양(梁)나라의 학자로, 자는 휴문(休文)이다. 무제(武帝) 때 상서령(尙書令)을 지냈으며, 학문에 널리 통하고 시문(詩文)을 잘하였다. 《梁書 卷13 沈約列傳》
주석 220)대본(大本)과 달도(達道)
'대본'은 큰 근본이라는 뜻으로 성(性)을 가리키고, '달도'는 누구나 공통적으로 행하는 도로, 《중용장구》 제1장에 "희로애락의 감정이 아직 발하지 않은 것을 중이라 하고, 발하여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라고 하니, 중이라는 것은 천하의 큰 근본이요, 화라는 것은 천하의 공통된 도이다.〔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 發而皆中節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라고 보인다.
주석 221)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
1595~1671.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상보(尙輔)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이괄의 난 때 인조를 호종하였다. 청요직을 두루 거쳤고, 병자호란 때 예문관 제학으로 〈삼전도비문(三田渡碑文)〉을 지었다. 인조 후반 영의정에 올랐으나 효종 즉위 후 청나라의 견제로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위리안치되기도 하였다. 저서에 《백헌집》 등이 있다.
頭流山遊錄
頭流山卽智異山別名, 白頭之流脈, 至此而益高大, 故其得名以是焉. 此山雄據南服湖、嶺間, 巍然而高, 洞然而深, 在全國諸山, 罕與比倫者, 有似乎中州之衡山, 遠在南土, 爲五嶽中最鉅焉. 且三神山之說, 雖不可盡信, 古傳在東海中, 而說者以我國之金剛當蓬萊, 漢挐當瀛洲, 頭流當方丈. 故方外仙子道禪之流固無倫, 以至儒家之淸士達人, 未嘗不以一見爲快焉. 往在甲辰陪先師, 到南原地, 留止旬日, 距此山初頭百里而近. 炳菴金丈【駿榮】作此山行, 要余隨之, 先師止之曰: "此行, 吾亦有意. 但以國恤受衰之身, 遊山未安, 待後圖之. 君可於其時同余, 今於旅次舍君, 則如失左右手, 以此止之. " 夫孰知世事難測, 翌年有五賊賣國之變, 至於庚戌宗社永覆, 先師則早已入島自靖而考終於壬戌之歲乎? 俯仰今昔, 感愴罔涯, 而此山之約, 言猶在耳. 甲戌之春, 窮居無聊, 忽然動得古人沂、雩之想, 而頭流一遊, 固嘗所願者. 適趙弟子貞請余伴行, 乃以三月十九日, 與之登程. 二十日. 暮至淳昌赤谷, 拜傍祖礱巖先生墓, 觀巖刻尤翁筆"磨礱巖觀水堂"六字. 有詩曰: "鷲峯矗矗柏山蒼, 四尺之高萬古藏. 柿栗當年皆手種, 林泉故宅有遺芳. 不因道學高如許, 那得衿紳久未忘? 珍重礱巖巖刻字, 淵源足證自華陽. " 夜宿山下族人家. 二十一日. 過南山臺, 登歸來亭, 亭是申公末舟築. 申公是光廟勳臣叔舟弟, 當其兄手握重權之日, 何求不得? 而乃浮雲富貴, 惟義是視, 歸遯于此, 此其所以爲高也. 不勝曠世之感, 次板上松雲姜公【希孟】詩曰: "作亭歸老意, 不爲田園荒. 陋巷眞安土, 萬鍾是濫觴. 玉川魚可釣, 峨谷蕨何香? 曠感多今日, 登臨整我裳. " 夜宿申氏家. 二十二日. 至南原楡川房珍家, 故人福之【煥永】之姪. 福之沒, 但致緘辭, 未得親哭, 故今雖三年過久, 而歷路爲訪, 則福之子十餘歲者亦死, 後事落莫, 不忍言. 二十三日. 房氏老少, 爲余沽酒, 請遊沙溪精舍. 精舍, 房氏先祖所築, 而至今四百年世守. 板上題詠, 自一齋、南冥、蘇齋、月沙、象村以下名賢文章, 無慮百餘家. 余見人家亭舍多矣, 蓋未有若此之盛者, 亦足以見子孫之世其家矣. 遂次韻題一詩曰: "半千世業罕吾東, 文獻足徵精舍中. 板上曾多先輩筆, 牕前已老十圍松. 鼎鍾當日浮雲薄, 講學相傳琢玉瓏. 試看沙溪流不盡, 德門遺蔭也無窮. " 午後, 與諸友出遊龍頭亭. 龍頭亭卽池堂左一岡, 形如龍頭故名, 而舊有亭, 今廢. 余之傍九世祖坐忘公諱灦、堂村黃公暐同居此里, 俱登文科壯元, 同時南原府使閔公光勳亦嘗魁科者, 三人共會此亭, 作盛遊. 其後閔公之孫丹巖鎭遠亦登魁科而爲本府使, 與近邑守寄之曾爲魁科者二人, 繼會此亭, 追其祖盛蹟, 至今鄕人傳以爲美事. 丹巖所謂"龍頭亭上會龍頭, 六十年間再勝遊"者此也. 地旣似龍頭之形, 人又會龍頭之占, 人地相符, 事甚奇哉. 乃次丹巖韻, 題詩曰: "布衣零落會龍頭, 追說龍頭昔日遊. 煙景堪憐三月暮, 滄桑其柰萬緣休? 積懷定與蛟山屹, 深恨難將蓼水流. 晩有故人斟斗酒, 滌塵勝似玉京樓. " 歸路, 有所感于心者. 念昔坐忘公之祖西溪公諱鋏始居此里, 爲晉氏館甥故也. 西溪公登進士, 坐忘占魁科, 歷敭淸顯, 其弟諱灝亦爲進士, 其亦盛矣. 西溪公子諱履吉又居伊彦村東臺, 故號以東臺. 蓋伊彦、池堂兩村, 世所稱南原首基, 各姓俱發, 名聞他郡, 如得西、坐子孫世世奠居, 則其福, 至于今未艾也. 而事不出此, 中葉衰替, 蕩析離居, 無復可尋, 只有故老相傳某家舊址之言, 其在傍裔之感, 寧不悲哉? 有詩云: "西溪之祖坐忘孫, 宅此當年亦盛繁. 晉氏館中爲玉潤, 龍頭科第占魁元. 名基已作他人物, 遺蹟相傳故老言. 薄暮徊徨三歎息, 有懷先世棣同根. " 是夜宿楡川. 二十四日. 房友琯爲錄入山路程甚詳. 當路出雲峯, 以余欲先上最高天王峯也. 至女院峙下, 吾宗族所居木洞、內基兩村爲歷路, 先訪內基族人惺軒【榮禹】而宿. 翌日, 至木洞, 訪見族丈晦山【亮植】, 因雨信宿. 二十七日. 天始晴. 入風谷, 拜忠景公、在澗堂、陶村墓, 族人榮會前導. 墓所局勢之環抱, 重建齋舍之宏壯, 可稱士夫先山. 蓋余三十年前, 暫經此地, 至今再過, 殆若新面目矣. 夕陽, 還內基而宿. 內基爲里雖小, 結局亦名基, 惺軒之先, 大小科甲, 多出此里云. 二十八日. 將發, 惺軒挽止甚勤. 然今行耑爲觀山, 而離家一旬, 尙未到山下, 豈容久留? 苦辭而出, 惺軒與其弟及榮會送至五里許, 作別後, 行十里許, 到女院峙上, 此是頭流山入去主脈. 其西一峯秀出, 上有一菴名住智, 超絶可觀, 而未及見. 峙云女院者, 太祖征倭荒山時, 過此峙, 有一道姑告以大捷日時, 故太祖感其異, 命刻道姑像貌于石壁, 作院屋其上而守護之. 有雲峯縣監石刻紀實文. 歷雲峯舊邑, 至花水山下, 見荒山大捷碑. 碑是太祖射殺阿只拔都蕩平倭寇紀實, 而大提學金貴榮撰也. 碑高大, 閣宇宏壯, 今雖屋社, 尙爾一新. 碑閣西石壁太祖當日題名尙在, 亦閣而庇之. 感古悲今, 賦長篇古詩一首, 字多不錄. 自碑閣沿溪而下, 至荒山平賊處, 拔都血痕入石尙赤, 石上馬蹄踏痕宛然, 居人指示云然. 經引月市, 入山內坊, 至咸陽馬川而宿. 自女院峙以後, 隨水以西之山, 皆是頭流, 雖不能次第登臨, 已覺山高而水淸. 終日行穿蒼壁素瀑之間, 心神一倍爽快. 二十九日. 早朝, 將直上天王峯, 訪島村姜周元, 問山上路程, 距峯上四十里云. 買得案內者一人, 備裏午料, 奮身出力, 忙步以上, 山上無屋可宿云, 故當日回來計也. 行十餘里, 有巨巖刻"河東巖"三字, 昔河東郡守乘轎上山, 墮落見傷, 至此巖而死, 故名云. 聞此瞿然, 益謹垂堂之戒矣. 點心于帝釋堂, 經通天門棧道, 未時初, 始至絶頂. 儘覺高則高矣, 當此春夏之交, 木葉不敷, 躑躅未放, 豈非高寒所致乎? 湖、嶺兩省, 蓋多鉅山, 而俯視之, 藐然若丈人之於兒少矣. 天氣淸明時, 西南東三面之海, 遠見若一帶, 日本之對馬島, 隱隱可見云, 而是日雲靄接天, 渾無際涯可恨. 然而人言"此山仙山, 無仙緣者, 未到絶頂, 多爲雨霧所困". 余之今行, 適値晦日, 晦而多雨例也, 而幸不値焉, 豈其得於天而有緣者耶? 亦可笑也. 昔余上金剛之毘盧峯, 今又陟此峯, 覺得此峯之高於毘盧矣. 然而人稱毘盧爲我國第二高處, 天王則未聞焉, 豈以毘盧在東北上游, 天王在西南低下處故耶? 巖上刻"日月臺"三字, 多有前後遊覽人題名. 或父子同題, 至有四世聯書, 便同世譜者, 此好事之過也. 嗚呼! 登高者, 必有所懷, 古今所同. 尼聖小天下於泰山, 晦父發豪氣於祝融, 今余則有其志而無其見, 不足以道所得者. 周顗感山河於新亭, 《衛詩》望美人於西方, 此正余今日之所遭也. 尼、晦之所得者正也, 《衛》、周之所感者變也. 得其正, 則遭變而不失其中, 不然, 則哀於時變而或至於傷, 此又吾之所當勉者. 因有詩曰: "高哉此絶頂, 一陟欲何爲? 語恐驚天上, 眼應極地涯. 宣尼泰嶽日, 晦老祝峯時. 而我千秋想, 傍人那得知?" 子貞曰: "昔炳菴登此山般若峯上, 以杖拍地, 叫快曰'今日, 吾亦爲聖人', 此言何謂也?" 余曰: "古人以登山絶巓, 譬造道之極, 炳菴則以造道之極, 譬登山絶巓而言己登高之畢功也, 彼此交言之間, 足以見自勉勉人之意也. " 噫! 北望則咸陽之介坪, 東望則晉州之德山, 皆在咫尺, 一蠹、南冥之高風可挹, 豈非此山之鍾靈? 南望則南江一帶, 若鋪白練, 金文烈、黃武愍、崔忠毅주 4)三壯士投水殉節處, 忠魂毅魄, 千古長在, 非惟名賢之生乎此, 其死乎此者, 亦山靈之使歟! 諸賢皆抱負才志, 修蓄德業, 將大用而匡世, 而事謬不然. 南冥以隱遯得免, 一蠹死於士禍, 三壯沒於兵難, 要皆時變之不幸也. 古今天下, 變若是多, 吾於變, 何哉? 只得安意而處之而已. 徘徊周覽, 不覺日已晡矣, 而此日又三春終盡也. 餞春之人, 例必登高, 而適以是日, 登此極高, 今番可謂絶勝餞春. 有詩曰: "天王峯上餞靑皇, 日月臺前又夕陽. 來路東風同作伴, 春歸我獨未歸鄕. " 恐歸路迫昏, 速速下山, 甚恨不持寢具食物而來宿一宵於此也. 此有石墻柴宇如屋樣者. 故登此者, 例多爲經夜計, 夜見老人星, 曉見日出, 而要取秋分節天淸候暖云, 而余不及知, 致此遺算也. 催趲下來, 至白武村店, 夕飯進矣. 飯畢頹臥, 憊困殊甚, 渾身如經亂打, 不覺有痛聲. 乃自笑曰: "甚哉! 儞之癖於山水也. 孰使儞如此? 累自己作, 復誰怨尤?" 因題一詩曰: "誰言壯觀好? 身苦更無比. 堪笑靈臺主, 自求快一時. " 此身責心也. 又題曰: "非求快一時, 要見智仁術. 我苟淨私塵, 從知儞亦逸. " 此心答身也. 四月初一日. 離白武, 將越直峙, 訪德坪. 見所經, 稍寬平處, 則雖絶高極深, 往往有人家. 蓋今夷人執命, 民不聊生. 故流轉入此, 墾山食藷, 形若鳥獸, 苟延性命, 而彼之法令, 無深不入, 山稱國有, 養林至嚴, 禁不得焚林作田. 所取乎深山, 徒以此也, 猶見拘禁, 亦何能爲? 雖然, 間亦有占基穩暖墾土肥沃者, 藷麥幷豐, 藥圃亦佳, 市不過三四十里, 可以交易, 終歲無飢寒之憂, 幷不見彼之使役調査. 此豈可與平地通野, 佃彼田, 服彼役, 爲奴隸, 而猶救死不贍者, 同日語也? 若余所遇自密陽來者閔氏四兄弟養老敎子, 自以爲樂土, 蓋山至廣, 谷至深, 故容亦有如此處. 如余之與世氷炭者, 正可入此幸得穩處而終餘年, 但恨筋力已衰, 難堪鎌鍬之勞也. 至直峙下, 忽然失路, 進退維谷. 半日披穿乎巖石荊棘間, 幾殆僅免, 頭須爲白. 日過午, 抵所謂德坪. 此河東地, 地太高, 風太寒, 初來人不可久留. 問於居人, 則此地不生五穀, 只産靑藷, 其始藷甚豐, 食有餘, 比年風多寒甚, 藷少食艱, 率皆移去, 二十戶里, 今存六七, 所餘進退兩難, 勢無柰何者. 余惟食其地所産物, 然後可居乎絶地, 此地旣無其食, 則非可居之地. 此外又有所稱上下細石坪, 爲避亂吉地, 此去三十里. 上細石, 昨於天王峯頭, 已望見之, 山上開局, 地高於德坪, 然背北向南, 左右穩抱, 似得藏風, 局內甚廣大, 成脣臺, 形勢甚妙. 下細石亦然云. 舊有萬檜簇立, 近皆枯死, 爲草生地. 以故意其回運, 人或入居, 終復還去, 以高寒無食也. 但地形旣妙, 且有崔孤雲遺蹟, 一觀則可矣, 而路險憊甚已之. 是夜, 宿于三井里店. 初二日. 踰堂峴, 抵七佛菴. 菴甚幽僻, 駕洛國首露王子七人成佛於此, 故菴以是名. 首露王在中國年代, 爲西漢時, 而其子成佛, 則佛法之入東國, 先於東漢明帝時, 亦可知也. 余於金剛遊, 記楡岾寺, 論此已詳矣. 菴有亞字房, 一巨房內, 用高低作畫如亞字形, 一竈燃火, 高低幷溫, 歷數百年不變云. 是曇空禪師所造, 此雖禪家小術, 亦甚異也. 路過三神洞書塾, 塾師朴氏貞圭是鄭閩華妻弟, 初面如舊, 挽止殷勤. 白酒、黃飯、山菜、川魚, 香潔可口, 連日憊損, 旅瑣百端, 偶得賢主, 經宿一宵, 其爲穩便, 便同還家. 初三日. 沿溪而下, 至洗耳巖. 云是孤雲遊地, 水石甚奇, 多有題名. 有詩曰: "高人洗得耳根餘, 俗子名心洗未除. 云是孤雲遊賞地, 刻題石面紛紛如. " 自此行二十里, 入雙磎寺. 寺在雙磎合流之內, 故得是名歟. 洞口左右石壁, 分刻"雙磎石門"四字, 傳謂孤雲以鐵杖書石, 是果然否? 寺僅爲中刹, 而殿閣則甚華麗. 門樓揭"靑鶴樓"三字, 傳謂孤雲彈琴吹笙於此, 靑鶴飛來, 故後人因以名樓. 乃次板上韻, 題詩曰: "爲迎靑鶴起樓臺, 物外仙人幾度來? 仙去鶴歸千年後, 豈知滄老此徘徊?" 世稱智異山中, 有靑鶴洞, 爲十勝之一, 萬人可活, 三災不入. 窮搜深覓於絶頂邃谷, 或以細石、德坪等地當之. 然殊不知千餘年前, 靑鶴早已來此, 至作靑鶴之樓, 樓之所在, 卽爲靑鶴洞也. 蓋自花開市以上, 至碧霄嶺底, 上下四五十里, 山高谷深, 背北向南, 風氣溫和, 土沃水豐, 穀果俱備, 煙草多産, 可謂一山中最樂地, 萬人可活, 三災不入, 豈非此耶? 栗谷送人頭流山中詩云"君今靑鶴洞中人", 亦指此洞也, 當時豈指窮荒絶險人跡不到若細石、德坪等處而云云乎? 寺庭有古碑一座, 孤雲所撰《眞鑑禪師碑銘》也. 其中有曰: "廬峯惠주 5)遠著論, 以爲'如來之於周、孔, 發端주 6)雖殊, 所歸一揆, 體極不兼應者, 物不能兼受故也', 沈約有云, '孔發其端주 7), 釋窮其致', 眞可謂識주 8)其大者, 始可與語道주 9)矣. " 余讀此, 作詩論之曰: "儒有大本與達道, 虛無寂滅佛所寶. 動靜體用本自殊, 混而無分已糊塗. 孔發釋窮是何言? 援儒入佛佛反尊. 孤雲豈非儒家子, 無乃名實不相似? 退溪而後逮淵、艮, 良有以來千秋論. " 自此歷花開市, 至蟾津江上. 碧波洋洋, 舟楫下上, 胸次豁然, 視諸山中之遊, 又是別樣趣味. 因詠一蠹詩"風蒲獵獵弄輕柔, 四月花開麥已秋. 看盡頭流千萬疊, 孤舟又下大江流"之句, 笑謂子貞曰: "吾輩僅得看盡一山, 未能舟下大江, 覺不及蠹老風流矣. " 用其韻, 題一詩曰: "煙光助興入毫柔, 綠樹陰濃麥未秋. 蟾水滔滔萬丈屹, 蠹翁高詠想風流. " 溯江而上, 行二十里, 宿松汀店. 初四日. 過求禮土旨面, 觀所謂金環落地形新名基. 各處人爭來占宅, 多見敗而去, 來者又續, 村村家家, 星布碁置, 未知何處眞的, 還是虛名無實. 然要之山水回抱, 四野廣闊, 爲千人可居地則足. 自此北向, 行二十里, 入華嚴寺. 寺是巨刹, 二層覺皇殿甚高, 云是隋煬帝爲子求福, 使人建築, 未知信然. 如來舍利塔甚精妙, 位置絶勝. 庭有《碧巖禪師碑銘》, 李白軒景奭撰. 碑中記壬亂有功國家甚詳, 彼雖緇徒, 知爲君之忠可尙也. 又北行二十里, 踰水越峙, 抵美國人避暑室. 室爲五十餘所, 築之用石, 外固內麗, 而高大絶險處, 築室如此, 可想費得許多金. 人道美國多金, 信然矣. 山上開局, 岡巒秀麗, 眼界通豁, 泉出石間, 權之以稱, 其重非比他水, 服之消百病云. 夫孰知此地有此好基址? 亦可見美人之有堪輿術也. 來以極暑, 暑退則去, 夏節便作繁華地, 峽中窮民, 爲其雇傭, 喜得些金, 哀我亡國遺黎之可憐也. 此去般若峯, 已到中半, 望之若一躍可到, 而尙爲二十里. 人多謂般若、天王爲智異最高, 而般若差低. 然則旣登其高, 何害舍低? 初五日. 自此下山, 踰九山嶺, 經求禮堂谷, 點心于院右店. 又踰屯山嶺, 至南原包巖鄭子敬【泳寔】家宿. 雖不能旁搜細探, 於是乎內外全山, 槪覽矣. 有詩曰: "白頭流脉鎭南州, 中國衡山可與儔. 萬壑皆懸銀漢瀑, 千峯高逼玉京樓. 精靈幾毓群賢出? 深廣多治五穀疇. 登覽要知仁智術, 看如不看也堪羞. " 蓋以余所曾見之金剛, 較量於此山, 金剛淸峭聳拔, 此山雄高深邃而廣大過之. 金剛有似乎淸明君子脫出俗累, 使人塵想自消; 此山有似乎莊重君子德厚識博, 使人難測底蘊, 要之學者皆可取而作師也. 但以世所稱三神之說論之, 奇形勝狀, 當首擅金剛, 而頭流居其下. 抑又聞兩南人互以此山, 屬之本省, 迄未論定. 蓋觀以據盤之廣狹、向背之方面, 則當屬之嶺, 觀以國典南嶽廟祭自湖致之, 當屬之湖, 豈以此山主脈, 旣自湖入般若, 爲先起主峯, 而亦在湖地故耶? 人言"太祖應天, 日祈禱名山, 諸山靈皆應, 獨此山靈不應, 故貶謫湖南", 此則當屬之齊東也. 抑余又有一說. 此山一皆厚重, 無乖戾氣. 就其中較論, 則般若峯多土少石, 一味秀麗, 天王峯多石少土, 稍巉巖磅礡, 此所以湖南人心柔順, 嶺南人心剛厲也歟. 欲以問于知者. 初六日. 離包巖. 初七日. 迫昏始歸. 首尾凡旬九日.
주석 4)忠毅
底本에는 "□□". 《朝鮮王朝實錄》 英祖 29年 4月 23日에 근거하여 보충.
주석 5)
《孤雲集》 卷2 〈眞監和尙碑銘〉에는 "慧".
주석 6)
《孤雲集》 卷2 〈眞監和尙碑銘〉에는 "致".
주석 7)
底本에는 없음. 《孤雲集》 卷2 〈眞監和尙碑銘〉에 근거하여 보충.
주석 8)
上同.
주석 9)
《孤雲集》 卷2 〈眞監和尙碑銘〉에는 "至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