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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17
- 잡저(雜著)
- 화도산양록(華島山樑錄)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17 / 잡저(雜著)
화도산양록
임술년(1922) 7월 3일 을축.
4일 병인
5일 정묘.
6일 무진.
7일 기사.
8일 경오.
9일 신미.
11일 계유.
12일 갑술.
19일 신사.
20일 임오.
21일 계미.
22일 갑신.주 59)
24일 병술.
25일 정해.
27일 기축.
8월 1일 임진.
3일 갑오.
4일 을미.
7일 무술.
9일 경자.
13일 갑진.
26일 정사.
28일 기미.
9월 7일 정묘.
10일 경오.
11일 신미.
12일 임신.
13일 계유.
14일 갑술.
15일 을해.
16일 병자.
17일 정축.
18일 무인.
오전에 화도(華島)에서 급한 전보가 왔는데 선생이 병들었다는 소식이었다. 이 소식을 듣고 매우 놀랍고 염려되어 아우 김억술(金億述) 및 조제원(趙濟元)과 길을 떠났다. 이기환(李起煥)도 소식을 듣고 현암(玄巖)에서 여기로 와서 동행하여 급히 창북점(滄北店)에 도착하였다. 김종호(金鍾昊)ㆍ김종섬(金鍾暹)ㆍ김귀락(金龜洛) 등과 선생의 손자인 전일순(田鎰純)도 모두 소식을 듣고 도착하였다. 해가 이미 저물고 조수가 아직 물러나지 않았기에 저녁밥을 먹은 뒤에 바다를 건너 강사(講舍)에 당도하였다. 선생은 병세가 대단히 위중하여 말소리를 못 내고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였는데 그제 병을 얻었을 때부터 이미 그러하였다고 한다.
김영익(金永益)이 나에게 말하기를,
"선생께서 10여 일 전부터 노형(老兄)이 오기를 바라지 않은 날이 없어서 제생(諸生)으로 하여금 편지를 보내어 오기를 재촉하게 하였으나, 그 편지가 제때 도착하지 않아 이렇게 늦게 도착하게 되었으니 한탄스럽습니다."
라고 하였다. 내가 그 말을 듣고 몹시 안타까웠다. 선생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려고 했던 것이 어떤 일인지는 모르지만 보고 싶은 생각에 이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에 큰소리로 "김택술이가 왔습니다."라고 말했으나 전연 알아보지 못했다. 증세가 더욱 위중해져 바야흐로 변고를 기다리던 때에는 병구완을 하는 자가 몇 사람도 없다가 나의 일행이 들어오게 되자 겨우 고단(孤單)함을 면하였다. 의원이 와서 청서육화탕(淸暑六和湯)과 귀용탕(歸茸湯) 각 1첩을 썼으나 모두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4일 병인
유시에 선생이 갑자기 세상을 하직하니 애통하고 애통하다. 임종을 모신 사람은 자손 이외에 문인(門人)이 모두 49명이었다. 선생이 만년에 항상 자손과 문인에게 말하기를,
"무릇 내가 말한 것은 모두 죽음을 앞둔 사람의 선한 말이니,주 23) 너희들이 이를 잘 지킨다면 다시 유언을 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였는데, 아 결국 이와 같았다.
이에 초종(初終)주 24)의 유사(有司)를 정했으니, 호상(護喪)은 최병심(崔秉心), 상례(相禮)는 김익용(金益容), 축(祝)은 이희진(李喜璡), 사서(司書)는 황찬규(黃瓚奎)ㆍ김택술(金澤述)ㆍ조제원(趙濟元) 등이며, 사화(司貨)는 서진영(徐鎭英)ㆍ김종희(金鍾熙)ㆍ유영선(柳永善), 습(襲)은 김낙두(金洛斗)ㆍ고재붕(高在鵬) 등, 서명정(書銘旌)은 김종호(金鍾昊)이며, 문인은 세 때를 먹지 않는다[三時不食]는 것을 의정(議定)하였다.
이날 저녁에 염습(斂襲) 도구를 올렸다. 수의(壽衣)를 일찍이 만들어 두었기 때문에 때를 당해서 늦어지지 않았다. 관(冠)은 위모(委貌)주 25)-흰색 바탕에 흑색으로 선을 두른 것이다.-를 사용하고 복건(幅巾)주 26)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망건(網巾)주 27)은 검은 비단[黑繒]을 사용하였으며, 상의(上衣)는 북포(北布)주 28)를 사용하였으며, 심의(深衣)주 29)는 북포로 만든 행의(行衣)주 30)를 잇대었으며, 과두(裹肚)주 31)는 사용하지 않았으며, 웃옷[襖]과 바지[袴]는 솜을 둔 명주-설면자(雪綿子)주 32)이다.-를 사용하였으며, 한삼(汗衫)ㆍ홑바지[單袴] 또한 흰 명주를 사용하였으며, 요대(腰帶)는 검은 비단을 사용하였으며, 멱목(幎目)주 33)은 검정색 비단[緇帛]에 붉은색 안감을 사용하였으며, 악수(握手)주 34)는 주머니처럼 만들었고 양쪽 끝에 끈이 있으며, 버선[襪]은 솜을 둔 흰 명주-설면자이다.-를 사용하였으며, 행전(行纏)주 35)은 흰 명주를 사용하였고 네 끝에 끈이 있으며, 싸개[冒]는 사용하지 않았으며, 반함(飯含)주 36)에 진주를 사용하였고, 뿔비녀[角笄]를 사용하라는 것은 선생이 명한 것이었으나-뿔비녀는 선생의 선비(先妣) 양씨(梁氏)가 남겨준 물건이기 때문이다.-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소나무비녀[松笄]주 37)를 사용하였으니, 이 비녀는 태조 황제가 손수 심은 소나무로 만들었는데 또한 선생이 평소에 사용하던 것이다. 혼백(魂帛)은 속백(束帛)의 제도를 사용하였으며,주 38) 명정(銘旌)에 '간재전처사지구(艮齋田處士之柩)'라고 쓴 것은 또한 선생이 평소에 명한 것이지만, '구산(臼山)'으로 쓰지 않고 '간재(艮齋)'라고 하여 조금 어긋나게 된 것은 대개 갑작스러워 살피지 못해 그러한 것이다.
5일 정묘.
부고(訃告)하였다. 문인에게는 '간재 선생이 몇 월 며칠에 병을 얻어서[艮齋先生以某月某日得疾] …….'라고 하고, 지구(知舊)들에게는 '전일효의 왕대인 간재 처사가[田鎰孝王大人艮齋處士] …….'라고 한 것도 유명(遺命)에 따른 것이었다.
소렴 유사(小斂有司)를 정했으니, 김진기(金鎭基)ㆍ김태희(金泰熙) 등이다. 오전에 소렴 도구를 올렸다. 상의는 도포를 사용하였는데 선생이 평소에 입은 것이며, 이불은 검정 명주를 사용하였는데 붉게 염색한 북포로 안감을 만들었으며, 효(絞)주 39)는 명주를 사용하였다.
6일 무진.
각항(各項)의 유사를 의정(議定)하였으니, 대렴(大斂)은 김방술(金邦述)ㆍ정만진(鄭滿鎭) 등이며, 제최복(製衰服)은 서병갑(徐柄甲)ㆍ정인현(鄭寅鉉) 등이며, 사빈(司賓)은 이병은(李炳殷)ㆍ김홍재(金弘梓) 등이며, 도빈(塗殯)은 신홍균(申洪均)ㆍ변복원(邊復源)이다. 무릇 이 여러 직임 중에서 습렴(襲斂) 이하부터는 그 이름만 헛되이 남아 있는 경우가 많고 실제로 그 일을 행하는 경우가 적은 것 또한 오늘날 유자(儒者)의 유명무실한 한 단면이니 개탄스럽다.
오전에 대렴 도구를 올렸다. 이불은 검정 명주를 사용하였고 붉게 염색한 삼베로 안감을 만들었다. 그런 다음 바로 입관(入棺)하였는데, 관은 찰방(察訪) 박만환(朴晩煥)이 만들어 바친 것으로 판자의 품질이 우수하고 옻칠한 것이 두껍고 번들번들하였다. 그 중에 옻칠값 반금(半金)은 고부의 강계(講契) 중에서 마련해 준 것이다. 관의(棺衣)주 40)는 검은 천을 위로 하고 붉은 천을 아래로 하는 제도[上玄下纁]를 사용하였다. 오후에 강당의 북쪽 협실(夾室 곁방)에 빈소를 만들고 영좌(靈座)주 41)를 강당의 북쪽 벽 아래에 남향으로 봉안하였다.
7일 기사.
조곡(朝哭)주 42) 때를 이용하여 성복(成服)주 43)하였다. 내외복인(內外服人)이 도합 수십 인이고, 문인으로서 동시에 성복한 자가 백여 인이었다. 가마(加麻)주 44)는 단고환질(單股環絰)주 45)을 사용하였으며, 건대(巾帶 두건과 허리띠)는 희고 가는 삼베로 만드는 제도를 사용하여 복인의 건대와 같게 하였다.
위차(位次)는, 오복인(五服人)은 동쪽 섬돌 아래에서 서향하고, 문인은 북향하되 동쪽을 윗자리로 하여 두 줄이었으니, 이는 선생이 생존했을 때에 조석으로 참알(參謁)하던 위차를 사용한 것이다.
석곡(夕哭)을 한 뒤에 산지(山地)주 46)를 의정(議定)하였다. 이병은(李炳殷)이 말하기를,
"풍수(風水)의 이치는 사람마다 소견이 각자 다른 법이니, 반드시 자손과 문인들의 의견이 일일이 서로 들어맞기를 기다린 뒤에 정한다면 끝내 정할 수 있는 날이 없을 것입니다. 이런 일은 단독으로 주관해야 하니, 주상(主喪)주 47) 한 사람이 스스로 지사(地師)주 48)를 택하여 정하거나 혹은 문인 중에서 한 사람을 택하여 위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주상이 오로지 오진영(吳震泳)에 의지하여 주관하였다.
오진영과 최병심(崔秉心)이 "영좌의 앞이 비좁아 전배(奠拜)가 불편하다."라고 하여 이미 동쪽 벽 아래 서향으로 옮겨 봉안하니, 여러 사람의 의론이 "살아있는 사람이 전배하기에 불편함으로 인해 신위 정면(正面)의 처소를 바꾸는 것은 크게 온당하지 않다. 게다가 내외의 자리와 빈주(賓主)의 자리가 곳곳마다 막히게 되니 다시 북쪽 벽 아래에 봉안해야 합니다." 하였다. 내가 "영좌가 바른 위치를 잃는 것은 이미 예가 아니고 전배가 불편한 것도 생각해야 할 바이니, 앞 벽을 터서 넓히고 창문을 다시 만들어 영좌를 환안(還安)주 49)한다면 이미 예에 알맞고 또 전배에 편리할 것입니다." 하니, 여러 사람의 의론이 모두 그렇겠다고 여겼다.
8일 경오.
문인들이 벌여 앉아 가마록(加麻錄)을 쓰고 각 사람이 심상(心喪)주 50)할 연월수(年月數)를 정하였다. 선생이 평소에는 '스승의 상에 일체 3년의 복을 입는다.'는 것으로 정론(定論)을 삼았으나 만년에는 다시 선현(先賢)이 주장한 '정(情)의 정도에 따른다.[隨情淺深]'는 설을 좇았으니, 대개 문하에 들어온 젊은 사람들이 겉으로는 심상삼년(心喪三年)을 지낸다고 하면서 주육(酒肉)과 복암(服闇)주 51)을 대부분 평소처럼 하여 도리어 예교(禮敎)를 상할까 염려해서였다.
오진영이 여러 사람에게 말하기를,
"스승의 상에 3년의 복을 입는다는 것이 본디 정례(正禮)입니다. 지금 비록 정에 따라 복을 입을지라도 1년을 밑돌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라고 하자, 내가 말하기를,
"이는 옳지 않을 듯합니다. 만약에 3년으로 정하여 가감(加減)할 수 없다면 그만이거니와 지금 이미 똑같은 법을 따르지 않는데, 또 '1년을 밑돌지 않아야 한다.'고 한다면 위로는 정례(正禮)가 될 수 없고 아래로는 정에 따르는[隨情] 것도 될 수 없습니다."
라고 하니, 여러 사람의 의론도 옳다고 여겨 각자 3년 이하의 연월수를 성명의 아래에 기록하였다. 나는 3년으로 기록하였고 다른 사람들도 3년으로 기록한 자가 대부분이었으며 종유하여 가마(加麻)한 사람도 수십 인이었다.
9일 신미.
뜰에 벌여 앉아 충분히 의논하여 스승의 상에 상복을 입는 절목(節目)을 정하였다. 졸곡(卒哭)주 52)을 마친 뒤에 가마(加麻)를 벗고 흰색 두건과 흰색 허리띠로써 월수(月數)를 마친다. 출입할 때에는 종전의 칠립(漆笠 옻칠을 한 갓)을 쓰고 편지에서는 '심제인(心制人)'주 53)이라 일컫는다. 졸곡 이전에는 자녀의 혼인을 행할 수 없으며, 복을 벗기 전에는 남의 관빈(冠賓)주 54)이 될 수 없다. 부재모상(父在母喪)주 55)과 본생부모(本生父母)에 심상(心喪)을 입은 사람 및 담복(禫服)주 56)을 입은 사람은 참립(黲笠)과 참대(黲帶)를 착용하며, 스승의 상에 일이 있을 때에는 가마(加麻)ㆍ흰색 두건ㆍ흰색 허리띠를 착용한다.
11일 계유.
선생이 세상을 하직하기 전 십여 일간에 지은 문자를 초고(草藁) 가운데서 수습하여 문고(文稿)에 실었다. 〈답김택술서(答金澤述書)〉로 미처 베껴 보내지 못한 것 1통도 그 가운데에 있었는데, 대체로 모두 연원(淵源)에 관련하여 대본(大本)을 밝히며 세도(世道)를 근심하고 문인들을 염려해서 지은 것이었다. 급급하게 지어서 한나절 만에 시 10여 수를 짓기도 하였으니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다.
12일 갑술.
조문을 받을 때에 중주인(衆主人)주 57)이 절하는지 절하지 않는지에 대하여 여러 사람의 의론이 분분하였다. 중주인이 절하지 않는다는 것은 주인과 함께 절하지 않음을 말한 것이지 빈객과 예를 행하는 것을 아울러 금하는 것이 아니다. 평일에도 절하는데 더구나 상을 당한 날임에랴. 그러니 주인이 조문을 받는 때를 당하여 선후로 빈객에게 절해야 한다는 것이 하나의 설이다. 또 중주인이 이미 조문을 받을 수 없다면 마땅히 빈객과 나이의 많고 적음을 따져서 먼저 절하거나 나중에 절해야 한다. 만약에 일체 먼저 절한다면 조문을 받았다는 혐의가 있게 된다는 것이 하나의 설이다. 또 중주인이 절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미 예문(禮文)에 나타나 있으니 그저 예법을 따라야 할 뿐 다시 다른 설이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 하나의 설이었다. 서로 변론(辨論)하여 처음의 설로 정하였다.
19일 신사.
선생의 영정을 혼백의 왼쪽에 모셨다. 내가 사화실(司貨室)에 가서 부의록(賻儀錄)을 보니, 문인 가운데 정성을 다하지 않은 자가 많고 심지어는 도조(賭租)주 58) 2, 300섬을 거두면서도 돈 2, 3원을 낸 자도 있었다. 세상의 기풍이 이러하니 얼마나 한탄스러운 일인가.
석곡(夕哭)을 마친 뒤에 산지(山地)를 익산(益山) 현동(玄洞)의 선영 아래로 의정(議定)하였으니, 사방으로 구해도 합당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9월 13일 계유를 장례식 기일로 정하였다.
20일 임오.
여러 사람의 의론이 "아침저녁으로 곡할 때에 지금 살아 계실 때 혼정신성(昏定晨省)하던 대로 으레 읍례(揖禮)를 행하고 있는데, 혼백이 영상(靈牀)에 있는 것은 곧 사람이 아직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을 때입니다. 아직 잠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읍례를 행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니, 아침에 곡할 때에는 자리에 나아가서 곡하고 혼백이 영좌에 나아가기를 기다린 뒤에 읍례를 행하며 저녁에 곡할 때에는 곡과 읍례를 행한 뒤에 혼백을 받들고 영상에 나아가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라고 하여, 이에 의거하여 행하였다.
21일 계미.
조문객 중에 미처 선생의 얼굴을 뵙지 못한 사람이 있었는데, 여러 사람의 의론이 "비록 선생의 얼굴을 뵙지 못했더라도 그가 조문을 온 것이 현인(賢人)을 사모하는 마음에서 나왔으니, 그 사람으로 하여금 궤연(几筵)에 들어가 절하게 해야 합니다."라고 하여, 나중에는 모두 이에 의거하여 행하였다.
22일 갑신.주 59)
이날부터 비로소 장례 도구를 준비하고 여러 사람이 서로 예서(禮書)의 장례와 우제(虞祭)주 60) 의절(儀節)을 상세히 살펴보았다. 선생에게 전배(前配)와 후배(後配)가 있었는데 세 분[三位]을 합장하라는 것은 선생의 유훈(遺訓)이었다. 그래서 장사를 지내는 날에 연기(燕岐)에 있는 두 분의 묘소를 천봉(遷奉)주 61)하여 합봉(合封)하는 일을 의논하였다. 그러나 문득 이번 장례 때문에 오히려 저들[일제]이 따져 물을 우려가 없지 않기에 적합하지 않고, 또 저들의 법에 저촉되면 하나의 일이 생겨나기에 추후에 합봉(合封)하는 것이 온당하였다. 다만 광중(壙中)을 팔 때에 회격(灰隔)주 62)을 넓게 만들어 세 분을 수용할 수 있게 하여 뒷일을 대비하기로 하였다.
24일 병술.
장사를 지내기 전 조문을 받을 때에 영좌 앞에서 상장(喪杖)을 짚느냐 짚지 않느냐에 대해 의논하였다. 김택술은 "《예기》의 '우제에는 상장을 짚고 방 안에 들어가지 않는다.[虞杖不入室]'라는 문구로 보건대 상장을 내려놓지 않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라고 하였고, 남진영(南軫永)은 본암(本菴)주 63)의 설에 의거하여 "장례의 전후를 막론하고 모두 감히 상장을 짚지 못한다고 하니 어떤 것이 옳은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요사이에 문인으로서 제물과 제문을 바치는 자가 많았으나 대부분 찬물(饌物)이 매우 약소하여 의모(儀貌)를 이루지 못했으며 종이는 질이 나쁘고 글자는 거칠어 성경(誠敬)이 크게 부족하였다. 유자(儒者)는 비록 가난하다고 하고 제문은 비록 마음을 전달하는 것을 위주로 한다고 해도 가장 존귀한 스승의 상에 어찌 정성을 다하지 않음이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말인가. 이에 오늘날 유자의 거칠고 구차한 일면을 볼 수 있겠다. 내가 사우(士友)들과 건의하여 이때부터는 제문에 글자가 조잡한 것은 고쳐 써서 고하고 찬물 또한 서로 일깨워 주어 너무 박하게 하는 일이 없게 하였다.
25일 정해.
김노동(金魯東)이 편지를 보내와 가마(加麻)를 3개월 행하겠다고 하고, 먼 곳에 사는 사우들이 편지를 보내와 혹은 이미 백립(白笠)을 썼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때부터 답서에 이전의 근거가 없으니 금하라고 하였다.
27일 기축.
각처의 선생의 문자를 받아간 집에 통부(通訃 부고)하였다.
8월 1일 임진.
방상(方相)주 64)을 쓸지 안 쓸지에 대해 논의하였다. 김종희(金鍾熙)와 유영선(柳永善)은 "선생의 유명(遺命)입니다."라고 하면서 쓰지 말자고 주장하였으며, 최병심(崔秉心)은 "비록 유명이 있었다고 해도 예문에 나타나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쓰자고 주장하였으며, 김택술은 "선생의 뜻은, 자정(自靖)주 65)하는 의리로써 검약함으로 처신하는 것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차이가 없기 때문에 이러한 명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자가 스승을 존숭하는 도리에서는 예문에 나타난 것을 쓰는 것도 이치에 해롭지 않을 것입니다." 하여, 우선 결정하지 못했다. -나중에 결국 방상을 썼다.-
3일 갑오.
상관(喪冠)을 개조해야 할지 여부를 논의하였다. 이번에 상관을 만들 때에 김익용(金益容)은 관의 바깥을 싸는[外裹] 설을 주장하고 오진영(吳震泳)은 관의 안팎을 싸는[內外裹] 설을 주장했는데, 오진영의 설에 따라 만들었다. 김익용이 나중에 편지를 보내와 개조해야 한다고 하면서 "《의례문해(疑禮問解)》에 상고할 만한 곳이 있습니다."라고 하였으나, 강사(講舍)에 《의례문해》가 없어서 결정하지 못했다.
또 동자에게 수질(首絰)주 66)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번 상사(喪事)에 동자도 이미 수질을 사용하였으나, 여러 사람이 《비요(備要)》ㆍ《편람(便覽)》ㆍ《예의속집(禮疑續輯)》 등의 책에 모두 수질을 사용한다는 문구가 없다는 이유로 제거해야 한다고 하였다. 유영선이 "선생의 〈국영환에게 답하는 편지[答鞠瑛煥書]〉에 동자가 수질을 사용한다는 정론(定論)이 있습니다."라고 하여, 논의를 결국 중지하였다.
4일 을미.
조충현(趙忠顯)이 편지를 보내와 선생께 사시(私諡)주 67)를 올리자는 의론이 있었으나 호상소(護喪所)에서 불가하다는 뜻으로 답하여 보냈다.
7일 무술.
장례 기일을 문인과 지구(知舊)의 각처에 알렸다.
9일 경자.
여러 사람이 함께 상의하여 양례 유사(襄禮有司)를 차정(差定)하였다.
도유사(都有司) : 오진영(吳震泳)
부유사(副有司) : 서병갑(徐柄甲), 송의섭(宋毅燮)
호상(護喪)주 68) : 이희진(李喜璡), 최병심(崔秉心), 이병은(李炳殷)
집례(執禮) : 성기운(成璣運), 김택술(金澤述)
축(祝) : 김종호(金鍾昊), 권순명(權純命) 등
사서(司書) : 황찬규(黃瓚奎), 정대수(丁大秀) 등
사빈(司賓) : 소학규(蘇學奎), 고제규(高濟奎) 등
사화(司貨) : 허만헌(許萬憲), 조한규(趙瀚奎) 등
수제문만사(受祭文輓詞) : 이상규(李相珪), 임철규(林哲圭) 등
계빈(啓殯)주 69) : 이기환(李起煥), 최완철(崔完澈) 등
조조(朝祖)주 70) : 김병구(金秉九), 김주용(金周鏞) 등
조전(祖奠)주 71) : 박기양(朴覬陽), 김현술(金賢述) 등
견전(遣奠)주 72) : 조제원(趙濟元), 권재기(權載璣) 등
설악(設幄) : 문제중(文濟衆), 김억술(金億述) 등
산역(山役) : 국영환(鞠瑛煥), 임학수(林學洙) 등
봉현훈(奉玄纁) : 김달(金達), 이면하(李勉夏)
사토헌관(祠土獻官) : 임병룡(林秉龍), 정돈영(鄭敦永)
사토축(祠土祝) : 한덕련(韓德鍊)
제주(題主)주 73) : 송기면(宋基冕)
초우축(初虞祝) : 임감재(任坎宰)
재우축(再虞祝) : 이유흥(李裕興)
삼우축(三虞祝) : 김병현(金炳玹)
나머지는 다 기록할 수 없다.
13일 갑진.
이날은 선생의 생일이다. 조전(朝奠)을 할 때에 어육(魚肉)ㆍ떡ㆍ과일을 더 진설하여 다른 날과 차이를 나타내었다.
26일 정사.
집례소(執禮所)에서 장례ㆍ우제ㆍ졸곡제ㆍ부제(祔祭)의 홀기(笏記)주 74)를 정한 다음 전옹(全翁)주 75)의 장례 때에 선생이 정한 홀기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28일 기미.
김 직각(金直閣) 상덕(商悳)이 지은 제문이 왔는데 그 문장이 간결하여 매우 좋았다. 제문에 이른 "큰 선비에게 명하더니 하늘이 사문을 망하게 하네.[大儒是命 天喪斯文]" 등의 구절은 더할 나위가 없었으나, 다만 "정현(鄭玄)주 76)을 곁마로 삼고 가규(賈逵)주 77)를 멍에 하니 호서와 호남의 인사들이 괵(虢)나라가 편작(扁鵲)을 얻은 것처럼주 78) 하였네.[驂鄭駕賈 兩湖人士 如虢得扁]" 등의 구절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9월 7일 정묘.
내가 아우 김억술(金億述) 및 조제원(趙濟元)과 각기 전물(奠物)과 제문을 갖추어 궤연에 곡하며 고하였다. 그때는 장례 기일이 점차 다가와 모인 사람이 많고 제문도 많았지만, 신체를 훼손한 사람주 79)의 부조(賻弔)는 선생의 평소 가르침에 따라 물리쳤다.
10일 경오.
아침 상식(上食)주 80)을 마친 뒤에 따로 전(奠)을 차리고 계빈(啓殯)을 고하였으며, 계빈한 뒤에 조조(朝祖)를 행하고 영구(靈柩)를 청사(廳事)로 옮겼다. 제문이 더욱 많아 이루 다 읽을 수 없기에 다만 향안(香案) 앞에 펼쳐 놓았다.
저녁 상식을 마친 뒤에 조전(祖奠)을 행하고 예법대로 기물(器物)을 진설하였다. 방상(方相) 2인, 시자(侍者) 2인, 명정(銘旌)주 81) 1, 영거(靈車) 1, 공포(功布)주 82) 1, 대여(大轝) 1, 운삽(雲翣)주 83) 1쌍, 집불(執紼)주 84) 80인-문인(門人)-, 상제(喪制)의 가마 2좌(座), 복인(服人)의 가마 2좌, 복인의 말[馬] 12필(疋), 문인의 말 50필, 빈객의 가마 3좌, 담여군(擔轝軍)주 85) 26인, 교군(轎軍) 14인, 역부(役夫) 20인.
11일 신미.
새벽에 영구(靈柩)를 대여(大轝 상여)에 싣고 견전(遣奠)주 86)을 행했으며, 견건을 행한 뒤에 상식(上食)하였다. 날이 밝기 전에 발인(發引)주 87)하여 바다를 건넜다. 날이 밝아질 무렵에 당북리(堂北里)에 이르니 주민 최 아무개가 술과 안주를 내와서 담여군과 교군에게 먹였다. 삼산점(三山店)에 이르자 흥양(興陽)에 사는 문인들이 노제[路奠]를 합설(合設)하였는데 매우 성대하였다. 저번에 비록 노제는 정례(正禮)가 아니니 일절 중지하기로 의논하였으나 전(奠)을 차려놓고 미리 기다리는 경우에는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군포(君浦)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김제 구산(龜山)의 나갑순(羅甲淳)의 집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영구를 강당에 안치하고 상인(喪人)ㆍ복인(服人)ㆍ유사 중의 수임(首任) 수십 인 외에는 마을 사람의 집에 나뉘어 유숙하였다. 나갑순이 문인이 아닌데도 이처럼 정성을 다하니 감동되었다. 김제의 늙은 아전 조(趙) 아무개 등이 연명(聯名)으로 치전(致奠)하였으니, 모두 선생의 도덕이 사람들을 감동시킨 덕분이었다.
12일 임신.
일찍 출발하여 김제읍 황산리(黃山里)를 지나 신정촌(新井村)에 당도하였다. 마을에서 치전하였는데, 이를 주관한 사람은 정치상(鄭致祥)이었다. 아, 들에 살면서 농사에 힘쓰는 백성이 어떻게 선생을 사모하여 이렇게 성대한 전(奠)을 올리는가? 참으로 깊은 사랑과 큰 덕이 민심을 감화시킨 것이 아니면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목천포(木川浦)에서 점심을 먹고 이리역(裏里驛)에 이르자 문인 왕병원(王秉瑗)과 지구(知舊)인 송용재(宋龍在)가 함께 치전하였다. 이곳은 큰 지방이라 문인과 빈객이 도중에 달려와 모인 사람이 많았는데 화도에서 영구를 따라온 사람들과 통합해 보니 합계가 1,500여 인이고 국내외 구경하러 온 남녀노소가 10,000여 인이었다.
저물녘에 현동(玄洞)에 당도하여 영구를 산 위의 영악(靈幄)주 88) 안에 안치하였다. 장례에 모인 사람들이 이리(裏里)에서 계산한 것에 비해 갑절이나 더하고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세 배나 되어 음식점과 가가(假家)주 89)가 240여 곳이었다. 이날 밤에 비가 갑자기 내렸으니 군색한 상황을 형언할 수 없다.
13일 계유.
비가 그쳐 일기가 청랑(淸朗)하였다. 진시에 하관(下棺)하였다. 제주(題主)할 때에 앞면에는 '현조고처사부군신주효손일효봉사(顯祖考處士府君神主孝孫鎰孝奉祀)'라고 쓰고, 함중(陷中)주 90)에는 '고처사전공휘모자모신주(故處士田公諱某字某神主)'라고 썼다. 김택술이 "명정에 이미 별호(別號)를 썼으니 함중에도 쓰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라고 하였으나 여러 사람의 의론과 맞지 않아 그렇게 하지 못했다.
산 아래의 재각(齋閣)에서 초우제(初虞祭)를 행하였다. 여론을 들어보건대 기미년(1919)의 인산(因山)주 91) 때에 온 나라의 사민(士民)들이 달려가 통곡한 것은 500년 종묘사직이 영원히 망했기 때문이고 이번에 장례식에 모인 사람이 많은 것은 4,000년 도학이 영원히 끊어졌기 때문이라고 하니, 이 말이 매우 비통하였다. 오후에 반혼(返魂)주 92)하고, 간신히 이리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14일 갑술.
일찍 출발하여 오시에 김제읍에 이르렀다. 김제읍 사람 조면섭(趙冕燮)이 일행에게 밥을 대접하였으니, 이 또한 지금 세상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달빛을 받으며 계화도에 이르니 달빛이 스산하고 텅 빈 산이 적막하여 위아래로 살펴보고 좌우로 돌아봄에 한없이 눈물만 흐를 뿐이었다.
15일 을해.
새벽에 재우제(再虞祭)를 행하였다. 문을 닫은[闔門] 뒤에 문인들이 주인과 함께 서향하지 않고 그대로 북향한 것은 초우제 때부터 이미 그러한 것으로 예의(禮意)에 매우 합당하였으나, 지금 오진영(吳震泳)과 성기운(成璣運)이 "주인과 함께 서향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김택술이 "문인은 빈객입니다. 빈객은 다른 줄에 자리한다는 것이 예서에 이미 나타나 있고, 더구나 부인의 자리와 동쪽과 서쪽에서 서로 마주 보는 것은 크게 온당하지 못하니 이전대로 북향해야 하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하니, 최병심(崔秉心)과 김종호(金鍾昊) 등 여러 사람도 그렇게 여겼다. 이에 서향하는 사람이 절반이고 북향하는 사람이 절반이어서, 한 장소의 예의(禮意)가 모양새를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16일 병자.
새벽에 삼우제를 행하였다. 문을 닫은 뒤에 오진영과 성기운 두 사람이 문인은 서향해야 한다고 강경하게 주장하여 사람들이 모두 따랐으나 나만 홀로 이전대로 북향하였다.
17일 정축.
새벽에 졸곡제(卒哭祭)주 93)를 행하였다. 문을 닫은 뒤에 여러 사람이 또 모두 서향하였으나, 김택술이 김익용(金益容)과 함께 이전대로 바르게 서서 북향하자 여러 사람 중에 따른 자가 절반을 넘었다.
사화소(司貨所)에서 들어온 부의물(賻儀物)을 계산해 보니 베ㆍ종이ㆍ초[燭]ㆍ제기 등의 품목을 제외하고 돈이 4,000여 원이었다. 상장(喪葬)의 비용도 이와 같았으나 오히려 100여 원이 남았기에 내년 봄 합장할 때의 비용[合窆條]으로 획정하고 나머지는 상주(喪主) 두 집에 나누어 주었다.
18일 무인.
부제(祔祭)주 94)를 행하였는데 문인들은 참여하지 않았다.
예전 선생이 군산(群山)에 있을 때에 수명이 군산과 같다는 꿈을 꾸었다. 해몽하는 자 중에 어떤 사람은 "군산에 90굽이[曲]가 있으니 마땅히 90세에 이를 것입니다." 하고, 어떤 사람은 "군(群) 자의 양(羊)은 팔(八)ㆍ십(十)ㆍ이(二)로 이루어졌으니 마땅히 수명이 82세에 이를 것입니다." 하니, 선생이 82세 설을 취했는데 오늘날에 이르러 정말로 들어맞음을 면치 못하니 애통하다.
듣건대 작년 겨울에 영남에서 목가(木稼)주 95)의 재변이 있자 설명하는 자가 "철인(哲人)의 액운이 있을 것이다." 하였고, 금년에 계화도 강당 앞의 살구나무에 꽃이 피지 않고 열매도 달리지 않아 이를 본 사람들이 모두 이상한 일이라 여겼는데, 이제 선생이 갑자기 후학들을 버리니 군자의 죽음을 하늘이 먼저 경고하여 보여주는 것이 이와 같았다.
〇 선생은 이미 헌정(獻靖)의 의리주 96)를 다하고 아울러 이조(夷啁)의 치욕을 당하지 않아 세도(世道)를 부지하고 천수(天壽)를 누렸으니, 근래의 유림(儒林)에서 찾아봄에 선생 한 사람뿐이다. 장자(張子 장재(張載))가 "살아서는 내가 하늘에 순응하고 죽어서는 내가 편안하리라.[存吾順事 沒吾寧也]"주 97)라고 한 것을 선생이 소유하였다.
- 주석 23)죽음을……말이니
- 거짓 없는 진실한 말이라는 뜻이다. 증자(曾子)가 병이 위독해졌을 때에 "새가 죽을 때에는 그 울음이 슬프고, 사람이 죽을 때에는 그 말이 착한 법이다.〔鳥之將死, 其鳴也哀; 人之將死, 其言也善.〕"라고 하였다. 《論語 泰伯》
- 주석 24)초종(初終)
- 상례의 시작과 장례 준비 과정을 이르는 말로, 흔히 초상(初喪)을 의미한다. 즉 사람의 임종(臨終) 직전부터 임종의 확인, 혼을 부르는 초혼(招魂), 상주와 호상(護喪)을 세우고, 자손들은 머리를 풀고 곡을 하며, 부고(訃告)를 통해 임종을 알리는 것 등으로 장례를 준비하는 과정이다.
- 주석 25)위모(委貌)
- 원래는 검은 비단으로 만든 관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소렴 때까지 머리에 쓰는 흰 비단으로 만든 소위모(素委貌)를 말한다.
- 주석 26)복건(幅巾)
- 한 폭의 베를 사용하여 머리를 감싸는 모자의 일종이다.
- 주석 27)망건(網巾)
- 조선 시대 때 성인 남자가 상투를 틀 때 머리털을 위로 걷어 올리기 위해 이마에 쓰는 건(巾)을 말한다. 말총을 직사각형으로 엮어서 만드는데, 윗부분을 당, 아랫부분을 편자라 하며, 망건에 달아 상투에 동여매는 줄을 당줄이라고 한다.
- 주석 28)북포(北布)
- 관북(關北)의 마포(麻布)라는 뜻으로, 함경도에서 생산되는 올이 가늘고 고운 삼베를 말한다. 그중에서도 육진(六鎭)에서 나는 삼베가 가장 세밀해서, 한 필의 베를 발우(鉢盂) 안에 담을 수 있었으므로, 속칭 발내포(鉢內布)라고 했다 한다.
- 주석 29)심의(深衣)
- 예전에 신분이 높은 선비들이 입던 웃옷으로, 대개 흰 베를 써서 두루마기 모양으로 만들었으며 소매를 넓게 하고 검은 비단으로 가를 둘렀다.
- 주석 30)행의(行衣)
- 소매가 넓고 검은 천으로 가장자리를 꾸민 두루마기를 말한다.
- 주석 31)과두(裹肚)
- 염할 때 시신의 배를 감싸는 베를 말한다.
- 주석 32)설면자(雪綿子)
- 누에고치를 삶아서 늘여 만든 솜으로 '풀솜'이라고도 한다.
- 주석 33)멱목(幎目)
- 멱건(幎巾)이라고도 하며, 시신의 얼굴을 가리는 수건을 말한다.
- 주석 34)악수(握手)
- 초상에서 소렴(小殮) 때 시신(屍身)의 손을 싸는 헝겊을 말한다.
- 주석 35)행전(行纏)
- 바지나 고의를 입을 때 정강이에 꿰어서 무릎 아래에 매는 물건이다.
- 주석 36)반함(飯含)
- 죽은 사람을 염습할 때에 입에다 구슬과 쌀을 물리는 일을 말한다.
- 주석 37)소나무비녀
- 이 비녀와 관련된 〈송개명(松笄銘)〉이 《艮齋集前編》 권16에 실려 있다.
- 주석 38)혼백(魂帛)은……사용하였으며
- 흰색의 명주를 묶어서 혼백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혼백은 흰 명주로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왼쪽에 죽은 사람의 생년월일시(生年月日時)를, 오른쪽에는 졸년월일시(卒年月日時)를 써놓은 것으로, 신주를 만들기 이전에 신주를 대신하기 위해 만드는 것이다.
- 주석 39)효(絞)
- 염포(殮布), 즉 염습할 때 시신을 단속하여 묶는 베로 만든 띠를 말한다.
- 주석 40)관의(棺衣)
- 시체를 넣은 관을 싸는 천을 이른다.
- 주석 41)영좌(靈座)
- 죽은 사람의 혼백을 모시는 자리를 말한다.
- 주석 42)조곡(朝哭)
- 거상 중에 있는 사람이 소상(小祥) 때까지 이른 아침마다 궤연(几筵) 앞에서 곡(哭)하는 일을 이른다.
- 주석 43)성복(成服)
- 상을 당한 뒤 초종(初終)ㆍ습(襲)ㆍ소렴(小斂)ㆍ대렴(大斂) 등을 마친 뒤 상복으로 갈아입는 절차를 가리킨다.
- 주석 44)가마(加麻)
- 제자가 스승의 상(喪), 혹은 후배가 존경하는 선배의 상에서 심상(心喪)을 입는 표시로 겉옷에 삼베 헝겊을 붙이는 것을 말한다.
- 주석 45)단고환질(單股環絰)
- 두건 위에 두르는 한 가닥 삼으로 꼰 둥근 테를 말한다.
- 주석 46)산지(山地)
- 묏자리로 적당한 땅을 말한다.
- 주석 47)주상(主喪)
- 상가(喪家)에서 제전(祭奠)을 주관하는 사람으로, 상주(喪主)를 말한다.
- 주석 48)지사(地師)
- 지술(地術)을 알아서 집터나 묏자리 등을 잡는 사람을 말한다.
- 주석 49)환안(還安)
- 다른 데로 옮겼던 신주를 제자리로 도로 모시는 것을 말한다.
- 주석 50)심상(心喪)
- 상복(喪服)을 입지는 않으나, 마음속으로 슬퍼하면서 상인(喪人)처럼 근신하는 것을 말한다.
- 주석 51)복암(服闇)
- 어두운 데에서 일한다는 뜻으로, 남이 보지 못하여 자기만 알 수 있는 일을 함을 이른다.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효자가 어두운 데에서 일하지 않으며 위태로운 곳에 오르지 않음은 어버이를 욕되게 할까 두려워해서이다.〔孝子不服闇, 不登危, 懼辱親也.〕"라고 하였는데, 그 소(疏)에 "어두운 데에서 일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두운 가운데에서 일을 행하지 않는 것이니, 첫째는 갑자기 비상한 일이 있을까 해서이고, 둘째는 남의 혐의를 받을까 염려해서이다. 그러므로 효자가 경계하는 것이다.〔不服闇者, 不行事於暗中, 一則爲卒有非常, 二則主物嫌. 故孝子戒之.〕"라고 하였다. '남의 혐의를 받을까 염려한다.'라는 것은 주로 부부간의 교접을 지칭한 것인바, 옛날 상주는 부부 관계를 가장 죄악으로 여겼으므로 후세에는 '복암'을 주로 부부 관계를 가리키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 주석 52)졸곡(卒哭)
- 삼우제(三虞祭)가 지난 뒤에 지내는 제사이다. 죽은 지 석 달 만에 오는 첫 정일(丁日)이나 해일(亥日)을 받아서 지낸다.
- 주석 53)심제인(心制人)
- 예법상 상복은 벗었으나 슬픔이 가시지 않아 대상(大祥)이 지난 뒤 담제(禫祭)까지 입는 복이 심제(心制)이며, 그에 해당하는 사람이 심제인이다.
- 주석 54)관빈(冠賓)
- 관례(冠禮)를 주관하는 빈(賓)으로 초청받고 가서 경계하는 말을 해 주는 사람인데, 보통 학덕이 높은 이성(異姓)의 사람 중에서 선택한다.
- 주석 55)부재모상(父在母喪)
-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데,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신 경우의 상을 이른다. 본래 어머니의 상은 삼년복이나, 이 경우 자식들은 아버지가 상주(喪主)가 되므로 아버지에게 압존(壓尊)되어 기년복을 입는다.
- 주석 56)담복(禫服)
- 상중에 있는 사람이 담제(禫祭) 이후부터 길제(吉祭)를 지낼 때까지 입는 옷을 말한다.
- 주석 57)중주인(衆主人)
- 상주를 제외하고 상사를 주관하는 자손을 통틀어 말한다.
- 주석 58)도조(賭租)
- 도지(賭地)라고도 하며, 남의 논밭을 빌려서 부치고 그 대가로 해마다 내는 벼를 말한다.
- 주석 59)갑신(甲申)
- 저본(底本)에는 '병신(丙申)'으로 되어 있으나, 앞뒤 일진(日辰)을 고려하여 바로 잡았다.
- 주석 60)우제(虞祭)
- 장사를 지낸 뒤 망자의 혼백을 평안케 하기 위하여 지내는 제사를 말하는데, 장사 당일 지내는 초우(初虞), 다음 날 지내는 재우(再虞), 그다음 날 지내는 삼우(三虞)가 있다.
- 주석 61)천봉(遷奉)
- 옮겨 모신다는 의미로, 묘소 또는 신주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다.
- 주석 62)회격(灰隔)
- 관(棺)의 주위에 석회(石灰)를 채워 넣어서 단단한 벽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 주석 63)본암(本庵)
- 김종후(金鍾厚, 1721~1780)의 호이다.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백고(伯高), 다른 호는 진재(眞齋)이며, 섬촌(蟾村) 민우수(閔遇洙)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시부(詩賦)로 문명(文名)이 있었고, 생원이 된 뒤에 성리학자로 이름이 났으며, 학행으로 천거되어 장령과 경연관 등을 지냈다. 저서에 《본암집》이 있고, 편서에 《가례집고(家禮集考)》와 《청풍세고(淸風世稿)》가 있다.
- 주석 64)방상(方相)
- 역귀(疫鬼)와 산천(山川)의 요괴(妖怪)를 몰아낼 때 신으로 분장한 사람인데, 네 눈을 황금빛으로 그린 탈을 쓰고 검은 저고리에 붉은 치마를 입고서 창을 들고 역귀를 찾아 몰아낸다. 장사(葬事)할 때는 앞에서 상여(喪輿)를 인도하고, 하관(下棺)할 때는 창으로 광중(壙中)의 네 모퉁이를 찔러 목석(木石)의 요괴를 몰아낸다.
- 주석 65)자정(自靖)
- 스스로 분의(分義)에 맞게 처신하여 지조를 지킴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으로, 《서경》 〈미자(微子)〉에 "스스로 의리에 편안하게 하여 사람마다 스스로 자신의 뜻을 선왕에게 바친다.〔自靖, 人自獻于先王.〕"라고 보인다.
- 주석 66)수질(首絰)
- 상복을 입을 때 머리에 두르는 둥근 테를 말한다. 삼과 짚을 꼬아서 테를 만들어 남자는 두건, 굴건과 함께 쓰고 여자는 수질만을 쓴다.
- 주석 67)사시(私諡)
- 지위가 낮아서 역명지전(易名之典)이 없는 학덕(學德)이 높은 선비에게 일가나 고향 사람 또는 제자들이 올리는 시호(諡號)를 말한다.
- 주석 68)호상(護喪)
- 상주를 도와 상사(喪事)를 주선하는 사람이며 배상(陪喪)이라고도 한다.
- 주석 69)계빈(啓殯)
- 장례 절차에서 발인을 하기 위해 빈소(殯所)를 열어 영구(靈柩)를 꺼내는 의식이다.
- 주석 70)조조(朝祖)
- 발인하기 하루 전 조전(朝奠)을 마친 뒤에 영구(靈柩)를 모시고 사당에 가서 마지막으로 조상을 뵙게 하는 의식으로, 조묘(朝廟)와 같은 뜻이다.
- 주석 71)조전(祖奠)
- 발인(發靷)하기 하루 전의 저녁에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 주석 72)견전(遣奠)
- 조전(祖奠)을 행한 다음 날에 영구(靈柩)가 빈소를 떠날 때 지내는 제사이다. 제수를 진설한 뒤 술을 올리고 분향하며 고사를 읽고 곡한다. 《禮記 雜記上》
- 주석 73)제주(題主)
- 신주를 쓴다는 뜻으로, 장례를 마치고 나면 주로 밤나무를 깎아 만든 신주에 죽은 사람의 이름을 써서 궤연(几筵)에 모셨다가 삼년상을 마친 뒤 사당에 봉안한다.
- 주석 74)홀기(笏記)
- 의식의 진행 순서를 적은 글을 말한다.
- 주석 75)전옹(全翁)
- 임헌회(任憲晦, 1811~1876)를 말한다.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명로(明老), 호는 고산(鼓山)ㆍ전재(全齋)ㆍ희양재(希陽齋),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송치규(宋穉圭)ㆍ홍직필의 문인이다. 1858년(철종9) 효릉 참봉에 제수된 이래 여러 벼슬이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다가, 노년에 대사헌과 성균관 좨주를 역임하였다. 경학과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홍직필의 낙론(洛論)을 계승하여 간재(艮齋) 전우(田愚)에게 전수하였다.
- 주석 76)정현(鄭玄)
- 127~200. 후한(後漢) 강성인(康成人)으로, 경학(經學)에 정통하여 한대(漢代) 경학을 집대성하였고, 《모시(毛詩)》ㆍ《주례(周禮)》ㆍ《의례(儀禮)》ㆍ《예기》ㆍ《효경(孝經)》 등의 주석이 있다.
- 주석 77)가규(賈逵)
- 30~101. 후한 때의 유학자로, 자는 경백(景伯)이고, 섬서성(陝西省) 평릉(平陵) 출생이다. 《좌씨전해고(左氏傳解詁)》ㆍ《국어해고(國語解詁)》를 저술하였고, 구양생(歐陽生)ㆍ대소하후(大小夏侯)의 《고문상서(古文尙書)》의 이동(異同)이라든지 제(齊)ㆍ노(魯)ㆍ한(韓) 삼시(三詩)와 《모시(毛詩)》의 이동을 밝히고, 《경전의고(經傳義詁)》ㆍ《논란(論難)》을 저술함으로써 뒷날 마융(馬融)ㆍ정현(鄭玄) 등이 고문경서(古文經書)의 학문을 대성할 수 있는 길을 닦아 놓았다.
- 주석 78)괵(虢)나라가……것처럼
- 구세주를 얻은 것처럼 하였다는 말이다. 편작(扁鵲)은 주(周)나라 때의 의원으로, 대표적인 명의(名醫)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일찍이 이미 죽어서 장사 지내기 직전인 괵나라의 태자를 삼양(三陽)과 오회(五會)의 혈에 침을 놓아 살려 낸 적이 있었다. 《史記 卷105 扁鵲倉公列傳》
- 주석 79)신체를 훼손한 사람
- 상투를 자르고 머리를 짧게 깎은 사람을 가리킨다.
- 주석 80)상식(上食)
- 상가에서 아침저녁으로 혼백이나 신위를 모신 데에 올리는 음식을 말한다.
- 주석 81)명정(銘旌)
- 죽은 사람의 관직과 성씨 따위를 적은 기이다. 일정한 크기의 긴 천에 보통 다홍 바탕에 흰 글씨로 쓰며, 장사 지낼 때 상여 앞에서 들고 간 뒤에 널 위에 펴 묻는다.
- 주석 82)공포(功布)
- 관(棺)을 묻기에 앞서서 관 위의 먼지를 털고 닦는 데 쓰는 삼베 헝겊이다. 이때 쓰이는 베는 대공(大功)이라는 굵은 베를 쓰기도 하지만 약간 고운 베를 쓰기도 한다. 발인하는 날에 잿물로 빤 베 3자[尺]를 준비하였다가 발인할 때 명정(銘旌)과 함께 영여(靈輿) 뒤, 상여 앞에 세우고 가면서 상여의 길잡이 역할을 한다.
- 주석 83)운삽(雲翣)
- 발인 때 영구(靈柩) 앞뒤에 세우는 구름무늬를 그린 부채 모양의 물건을 말한다.
- 주석 84)집불(執紼)
- 장례를 지낼 때 절친한 조객(弔客)들이 손수 상여 끈을 잡아끌며 돕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장례에 참여하여 장송(葬送)하는 것을 뜻한다.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장례를 도울 때에는 반드시 상여 끈을 잡는다.〔助葬, 必執紼.〕"라고 하였다.
- 주석 85)담여군(擔轝軍)
- 상여를 메는 사람을 말한다.
- 주석 86)견전(遣奠)
- 조전(祖奠)을 행한 다음 날에 영구(靈柩)가 빈소를 떠날 때 지내는 제사이다. 제수를 진설한 뒤 술을 올리고 분향하며 고사를 읽고 곡한다. 《禮記 雜記上》
- 주석 87)발인(發引)
- 장사 지내러 가기 위하여 상여가 집에서 떠나는 것을 말한다.
- 주석 88)영악(靈幄)
- 영침(靈寢)이나 영좌(靈座)에 둘러치는 휘장이다.
- 주석 89)가가(假家)
- 임시로 지은 건물을 말한다.
- 주석 90)함중(陷中)
- 신주 뒷면의 오목하게 파낸 홈으로, 여기에 죽은 이의 성명, 별호, 관직 등을 적는다.
- 주석 91)기미년의 인산(因山)
- 고종황제(高宗皇帝, 1852~1919)의 인산을 말한다. 인산은 임금이나 왕비, 또는 왕세자(王世子) 등의 국장(國葬)을 말한다.
- 주석 92)반혼(返魂)
- 장사를 지낸 뒤에 죽은 이의 혼백을 다시 집으로 모셔 오는 일을 말한다.
- 주석 93)졸곡제(卒哭祭)
- 삼우제(三虞祭)를 지낸 뒤에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사람이 죽은 지 석 달, 또는 다섯 달, 일곱 달 만에 정일(丁日)이나 해일(亥日)을 택해 지내는 제사이다.
- 주석 94)부제(祔祭)
- 졸곡 이튿날 망자의 신주를 받들어 조상의 사당에 잠시 함께 모셔 두고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제사가 끝나면 신주를 다시 방 안에 모시고 있다가 죽은 지 2주년이 되는 대상(大祥)이 지난 뒤에 비로소 사당으로 옮긴다.
- 주석 95)목가(木稼)
- 목개(木介)의 별칭으로, 추위가 심하여 나무에 얼음이 얼어붙어 갑옷의 형상을 이룬 것인데 현인(賢人)이 죽을 조짐이라 한다. 우리말로는 상고대라고도 한다. 송나라 왕안석(王安石)이 지은 〈한기의 만사[挽韓琦]〉에 이르기를, "목가가 생기자 고관이 두려워 떨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산이 무너진 오늘 철인이 죽었도다.〔木稼曾聞達官怕, 山頹今見哲人萎.〕"라고 하였다. 《石林詩話》
- 주석 96)헌정(獻靖)의 의리
- 은(殷)나라 미자(微子)가 은나라가 장차 망하려 할 때 기자(箕子)와 비간(比干)과 문답한 중에 '각자의 의리를 다하여 사람마다 선왕에게 자신의 뜻을 바칠 것이니, 나는 떠나 운둔할 생각은 없다.〔自靖, 人自獻于先王, 我不顧行遯.〕'라고 한 데서 나온 말로,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신하의 도리를 다함을 말한다. 《尙書 微子》
- 주석 97)살아서는……편안해지리라
- 살아서 천명에 순응해 도리를 지키는 것이 죽어서 편안해지는 방법이라는 말로, 장재(張載)의 〈서명(西銘)〉에 보인다.
華島山樑錄
壬戌七月初三日乙丑.
初四日丙寅.
初五日丁卯.
初六日戊辰.
初七日己巳.
初八日庚午.
初九日辛未.
十一日癸酉.
十二日甲戌.
十九日辛巳.
二十日壬午.
二十一日癸未.
二十二日丙申.
二十四日丙戌.
二十五日丁亥.
二十七日己丑.
八月初一日壬辰.
初三日甲午.
初四日乙未.
初七日戊戌.
初九日庚子.
十三日甲辰.
二十六日丁巳.
二十八日己未.
九月初七日丁卯.
初十日庚午.
十一日辛未.
十二日壬申.
十三日癸酉.
十四日甲戌.
十五日乙亥.
十六日丙子.
十七日丁丑.
十八日戊寅.
午前, 自華島有急電, 乃先生病報也. 聞甚驚慮, 與弟億述及趙濟元發程. 李起煥亦聞報, 自玄巖到此同行, 急到滄北店. 金鍾昊ㆍ鍾暹、金龜洛等、先生孫鎰純亦皆聞報而到. 日已夕而潮未退矣, 夕飯後, 涉海抵講舍. 先生病勢, 萬分危重, 失語音不省人, 自再昨日得疾時已然云. 金永益謂澤述曰: "先生自十數日來, 無日不望老兄之來至, 使諸生專書促來, 而書未及達, 致此晩到可歎. " 澤述聞甚大恨. 未知先生所欲敎者何事, 而思見至此. 因大聲告曰"金澤述來矣", 全不省. 證益重, 方在待變中時, 侍疾者無幾人, 至是澤述一行入來, 乃免孤單. 醫來用淸暑六和湯、歸茸湯各一貼, 幷未奏效.
初四日丙寅.
酉時, 先生奄至下世, 痛矣痛矣! 侍臨終者, 子孫以外, 門人凡四十九人. 先生晩年, 常謂子孫門人曰: "凡我所言, 無非將死善言, 汝曹其善守之, 不必更求遺言. " 嗚呼! 其竟如斯也. 乃定初終有司, 護喪崔秉心, 相禮金益容, 祝李喜璡, 司書黃瓚奎、金澤述、趙濟元等, 司貨徐鎭英、金鍾熙、柳永善, 襲金洛斗、高在鵬等, 書銘旌金鍾昊, 議定門人三時不食. 是夕, 進襲. 以壽衣曾已製置, 故不臨時遲緩也. 冠用委貌【素質黑緣】, 不用幅巾, 網巾用黑繒, 上衣用北布, 深衣承以北布行衣, 裹肚不用, 襖、袴用紬有絮【雪綿子】, 汗衫、單袴亦用白紬, 腰帶用黑繒, 幎目用緇帛赬裏, 握手如囊制, 兩端有繫, 襪用白紬有絮【雪綿子】, 行纏用白紬, 四端有繫, 冒不用, 飯含用眞珠, 用角笄, 乃先生所命,【角笄, 先生先妣梁氏遺物故也. 】 不知所在, 用松笄, 此笄以太祖皇帝手植松作成, 而亦平日所用也. 魂帛用束帛制, 銘旌書之曰"艮齋田處士之柩", 亦平日所命, 而但不書臼山而曰艮齋, 此爲少違, 蓋悤遽未審而然也.
初五日丁卯.
訃告. 門人處云"艮齋先生以某月某日得疾. 云云", 知舊處云"田鎰孝王大人艮齋處士. 云云", 亦遵遺命也. 定小斂有司, 金鎭基、金泰熙等. 午前, 進小斂. 上衣用道袍, 平日所著者, 衾用黑紬, 而北布染絳爲裏, 絞用紬.
初六日戊辰.
議定各項有司, 大斂金邦述、鄭滿鎭等, 製衰服徐柄甲、鄭寅鉉等, 司賓李炳殷、金弘梓等, 塗殯申洪均、邊復源. 凡此諸任, 自襲斂以下, 多虛存其名, 而少實行其事者, 是亦今世儒者無實之一端也, 可歎. 午前, 進大斂. 衾用黑紬, 麻布染絳爲裏. 因入棺, 棺則朴察訪晩煥所造呈, 板品優美, 塗漆厚澤. 其中漆價半金, 古阜講契中備給者也. 棺衣用上玄下纁. 午後, 成殯于講堂北夾室, 靈座奉安于講堂北壁下南向.
初七日己巳.
因朝哭成服. 內外服人合數十人, 門人同時成服者百餘人. 加麻用單股環絰, 巾帶用白細麻布制, 同服人巾帶. 位次則五服人阼階下西向, 門人北向東上重行, 用先生生時朝夕參謁位也. 夕哭後, 議定山地. 李炳殷曰: "風水之理, 人人所見, 各自不同, 必待子孫門人一一相合而後定, 則終無其日. 此事單主, 主喪一人, 自擇地師定之, 或擇門人中一人, 委任可也. " 於是主喪, 專仗吳震泳爲主. 吳震泳、崔秉心以"靈座前狹窄, 不便奠拜", 已移奉於東壁下西向矣, 衆議以爲"因生人奠拜之不便, 易神位正面之處所, 大是未安. 且內外之次, 賓主之位, 在在窒礙, 當還奉於北壁下". 金澤述以爲"靈座之失正位, 旣是非禮, 奠拜之不便, 亦所當念, 當坼闊前壁, 改修牕戶, 還安靈座, 則旣得於禮, 又便奠拜", 諸議皆以爲然.
初八日庚午.
門人列坐, 書加麻錄, 定各人心喪年月之數. 先生平日, 以師喪一切三年爲定論, 晩年改從先賢隨情淺深之說, 蓋慮及門年少輩之名持心喪三年, 而酒肉服闇, 多如平日, 反以傷禮敎也. 吳震泳言於衆曰: "師喪三年, 本是正禮. 今雖隨情服之, 當不下朞年. " 金澤述曰: "此恐不然. 若以三年爲定, 不得加減則已矣, 今旣未遵一切法, 而又曰'不下朞年', 則是上之不得爲正禮, 下之不得爲隨情也. " 諸議亦以爲然, 各書三年以下年月數於姓名下. 澤述書以三年, 而他亦擧多三年者, 從遊加麻者亦數十人.
初九日辛未.
列坐庭中, 爛漫商確, 定師喪持服節目. 自卒哭後, 除加麻, 以白巾帶終月數. 出入時, 舊漆笠, 書詞中, 稱心制人. 卒哭前, 不得行子女嫁娶, 除服前, 不得爲人冠賓. 父在母喪、本生父母心喪人及禫服人, 持黲笠帶, 有事師喪時, 持加麻白巾帶.
十一日癸酉.
收拾先生下世前十餘日間所作文字於草藁中, 載諸文稿. 《答金澤述書》未及寫送者一度亦在其中, 蓋皆關淵源明大本、憂世道慮門人而作也. 汲汲著成, 至半日作詩十餘首, 有若前知者矣.
十二日甲戌.
以"受弔時, 衆主人拜不拜", 諸議紛紜. 衆主人不拜, 謂不與主人同拜, 非幷禁與賓爲禮也. 平日猶拜, 況此日乎? 當於主人受弔, 後先拜賓, 此一說也. 衆主人旣不敢受弔, 則當與賓計年高下, 或先拜或後拜. 若一切先拜, 則有受弔之嫌, 此一說也. 衆主人不拜, 旣著禮文, 只當遵禮, 不必更有他說, 此一說也. 互相辨論, 以初說爲定.
十九日辛巳.
奉先生影幀于魂帛之左. 澤述至司貨室, 見賻儀錄, 門人多不用誠, 至有收賭二三百石而出金二三圓者. 世風若此, 可勝歎哉? 夕哭後, 議定山地於益山玄洞先塋下, 以四求無可合處故也. 以九月十三日癸酉定葬期.
二十日壬午.
衆議以爲"朝夕哭, 今依生時定省, 例行揖禮, 則魂帛在靈牀, 卽人未起寢時也. 未起寢而行揖未安, 朝哭時, 就位哭, 俟魂帛就座後行揖, 夕哭時, 行哭揖後, 奉帛就床似穩", 依此行之.
二十一日癸未.
弔客中有未及承顔者, 諸議以爲"雖未承顔, 其來也, 出於慕賢, 宜令人入拜几筵", 後皆依此行之.
二十二日丙申.
自是日始治葬具, 諸人相與看詳禮書葬虞儀節. 先生有前後二配, 三位合窆, 遺訓也. 議於襄窆日, 遷奉燕岐所在二位墓合封, 而旋以今此襄奉, 尙不無彼詰之慮不宜, 又抵彼法, 生出一事, 追後合封爲穩. 但於穿壙時, 闊作灰隔, 可容三位, 以備後事.
二十四日丙戌.
議葬前受弔, 靈座前杖不杖. 金澤述以爲"以《禮記》'虞杖不入室'之文觀之, 不去杖爲得", 南軫永據本菴說以爲"勿論葬之前後, 皆不敢杖, 未知何者爲是". 近日, 多門人致奠告文者, 而率皆饌物薄略, 不成儀貌, 紙劣字蕪, 大欠誠敬. 儒者雖云貧窶, 祭文雖主達情, 莫尊師喪, 何不致虔之至此? 此可見今日儒者鹵莽苟且之一端也. 澤述與士友建議, 從此祭文紙本草率者, 改書以告, 饌物亦相告喩, 無至太薄.
二十五日丁亥.
金魯東書來, 行加麻三月云, 遠地士友書來, 或有已著白笠云者. 故自此答書 以無前據禁之.
二十七日己丑.
通訃于各處文字受去人家.
八月初一日壬辰.
論方相用不用. 金鍾熙、柳永善以"先生遺命", 主不用, 崔秉心以"雖有遺命 旣著禮文", 主用, 金澤述以爲"先生之意, 蓋以自靖之義, 儉約奉身, 無間於生死, 故有是命也. 然在弟子尊師之道, 以禮文所著而用之, 亦不害理", 姑未決定. 【後竟用之】
初三日甲午.
論喪冠當改與否. 今番造喪冠時, 金益容主外裹之說, 吳震泳主內外裹之說, 從震泳說造之. 益容後有書來, 謂當改造而曰"《疑禮問解》有可考處", 講舍中見無《疑禮問解》, 未得決定. 又論童子首絰有無. 今番喪事, 童子亦已用絰, 諸人以"《備要》、《便覽》、《禮疑續輯》等書, 幷無用絰之文", 謂當除去. 柳永善謂"先生《答鞠瑛煥書》, 有童子用絰之定論", 議遂止.
初四日乙未.
趙忠顯書來, 有私諡先生之議, 護喪所以不可之意答去.
初七日戊戌.
告葬期于門人知舊各處.
初九日庚子.
衆共商議, 差定襄禮有司. 都有司吳震泳, 副有司徐柄甲、宋毅燮, 護喪李喜璡、崔秉心、李炳殷, 執禮成璣運、金澤述, 祝金鍾昊、權純命等, 司書黃瓚奎、丁大秀等, 司賓蘇學奎、高濟奎等, 司貨許萬憲、趙瀚奎等, 受祭文輓詞李相珪、林哲圭等, 啓殯李起煥、崔完澈等, 朝祖金秉九、金周鏞等, 祖奠朴覬陽、金賢述等, 遣奠趙濟元、權載璣等, 設幄文濟衆、金億述等, 山役鞠瑛煥、林學洙等, 奉玄纁金達、李勉夏, 祠土獻官林秉龍、鄭敦永, 祠土祝韓德鍊, 題主宋基冕, 初虞祝任坎宰, 再虞祝李裕興, 三虞祝金炳玹, 餘不能盡錄.
十三日甲辰.
是日先生生朝. 於朝奠, 添設魚肉餅果, 以示異於他日.
二十六日丁巳.
自執禮所, 定葬虞卒祔笏記, 因全翁葬時先生所定笏而修潤之.
二十八日己未.
金直閣【商悳】祭文來, 其文簡潔甚好. 而其云"大儒是命, 天喪斯文"等句, 蔑以加焉, 但"驂鄭駕賈, 兩湖人士, 如虢得扁"等句, 不滿意也.
九月初七日丁卯.
澤述與弟億述及趙濟元, 各具奠物祭文, 哭告几筵. 時葬期漸近, 會者衆, 祭文多, 而毁形人賻弔, 以先生平日之訓却之.
初十日庚午.
朝上食後, 別設奠, 告啓殯, 啓殯後, 行朝祖, 遷柩廳事. 祭文益多, 不可勝讀, 只展於香案前. 夕上食後, 行祖奠, 陳器如禮. 方相二人, 侍者二人, 銘旌一, 靈車一, 功布一, 大轝一, 雲翣一雙, 執紼八十人,【門人】 喪制轎二座, 服人轎二座, 服人馬十二疋, 門人馬五十疋, 賓客轎三座, 擔轝軍二十六人, 轎軍十四人, 役夫二十人.
十一日辛未.
曉頭, 載柩大轝, 行遣奠, 奠後上食. 未明, 發引涉海. 平明, 至堂北里, 居人崔某出酒肴, 饋轝轎軍. 至三山店, 興陽門人合設路奠, 甚盛. 向雖議路奠非正禮, 一切停罷, 然其於設奠預待者, 不得不受也. 午飯于君浦, 夕至金堤龜山羅甲淳家留宿. 停柩講堂, 喪人、服人、有司首任十數人外, 分宿於村人家. 羅非門人, 而用誠如此, 可感. 金堤老吏趙某等聯名致奠, 無非先生道德感人之致也.
十二日壬申.
早發, 過金堤邑黃山里, 到新井村. 自村中致奠, 其主者鄭致祥. 噫! 野居務農之民, 何以慕先生而致此盛奠也? 苟非深仁大德有以感動輿情, 烏能致此? 午飯于木川浦, 至裏里驛, 門人王秉瑗、知舊宋龍在幷致奠. 此地大處也, 門人賓客中途赴會者甚衆, 統合自華島隨柩者, 計一千五百餘人, 內外國人老少男女觀光者萬餘人. 迫昏, 抵玄洞, 停柩于山上靈幄內. 會葬者, 視裏里所計, 加一倍, 觀光者三倍, 食店假家二百四十餘所. 是夕, 雨忽下, 窘束之狀, 難以形言.
十三日癸酉.
雨晴, 日氣淸朗. 辰時, 下棺. 題主, 前面書曰"顯祖考處士府君神主孝孫鎰孝奉祀", 陷中書曰"故處士田公諱某字某神主". 金澤述謂"銘旌旣書別號, 陷中亦書恐宜", 諸議不諧, 未果. 行初虞祭於山下齋閣. 聞之輿論, 己未春因山時, 擧國士民之奔赴痛哭者, 爲五百年宗社之永覆也, 今番會葬者之衆多, 爲四千年道學之永絶也, 此言絶可悲也. 午後, 返魂, 僅至裏里而宿.
十四日甲戌.
早發, 午至金堤邑. 邑人趙冕燮饋飯一行, 此亦今世罕見事. 乘月至華島, 月色蒼凉, 空山寂寞, 俯仰顧眄, 只有無窮之淚而已.
十五日乙亥.
曉頭, 行再虞祭. 闔門後, 門人不與主人西向, 仍爲北向, 自初虞時已然者, 甚合禮意, 而今吳震泳、成璣運以爲"當與主人共作西向". 金澤述以爲"門人賓客也. 賓客位別行, 已著禮書, 而況與婦人位, 東西相向, 大是未安, 當仍舊北向爲是", 崔秉心、金鍾昊諸人亦以爲然. 於是西向者半, 北向者半, 一場禮意不成貌樣.
十六日丙子.
曉行三虞. 闔門後, 吳、成二人硬主門人西向, 人皆從之, 澤述獨仍舊北向.
十七日丁丑.
曉行卒哭祭. 闔門後, 諸人又皆作西向, 金澤述與金益容仍舊正立北向, 諸人從之者又强半. 自司貨所打數所入賻物, 除布紙燭祭器等目外, 金四千餘圓. 喪葬之用亦稱是, 而尙有餘剩百餘圓, 以明春合窆條劃定, 餘分給于喪主二家.
十八日戊寅.
行祔祭, 門人不參.
昔年先生在群山時, 有壽如群山之夢. 解之者, 或以爲"群山有九十曲, 當壽至九十", 或以爲"群字之羊, 從八從十從二, 當壽至八十二", 先生取八十二之說, 至今日不免果驗, 痛哉! 聞客冬嶠南有木稼之災, 說者以爲"有哲人之厄", 今年華島講堂前杏樹不花不實, 見者咸以爲異, 今先生奄棄後學, 君子云亡, 天先警示, 有如此矣. 〇先生旣盡獻靖之義, 幷不見夷啁之辱, 以扶世道, 天年考終, 求之近時儒林, 惟先生一人. 張子曰"存吾順事, 沒吾寧也", 先生有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