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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17
- 잡저(雜著)
- 면암 최 찬정을 배알한 날의 기록(拜勉菴崔贊政日錄)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17 / 잡저(雜著)
면암 최 찬정주 18)을 배알한 날의 기록
임인년(1902) 가을에 내가 강회(講會)의 일로 신전(莘田)에 갔던 날에 사문(師門)에 여쭙기를,
"면암 최 대감의 명절(名節)과 덕망은 지금 세상에서 태산북두(泰山北斗)주 19)와 같으니, 소자가 그 문하에 한 번 방문하여 용모와 태도를 뵙고자 합니다."
라고 하였더니, 사문이,
"좋다."
라고 하였다.
이에 벗 방미경 환창(房美卿煥暢)과 동반하여 정산(定山)으로 향하려 하였다. 정산을 10리 못 미쳐서 면암 대감이 어제 포천(抱川)으로 가는 길을 떠나 오늘밤 공주(公州) 율정(栗亭)의 심 진사(沈進士)의 집에서 유숙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정산으로 가는 길을 버리고 곧장 율정에 이르렀으나 이미 출발한 뒤였다. 마침내 저물녘에 높은 고개를 넘어 밤에 황연동(黃蓮洞)에서 유숙하고, 새벽에 20리를 가서 사기점(沙器店)에 이르러 대감을 만났다. 종자(從者)를 통해서 명함을 전하고 배알한 뒤에 전의(全義) 방이동(芳彛洞)의 임 진사(任進士)의 집에 따라갔는데, 임 진사는 면암 대감의 사위이다. 이날이 9월 19일이었다. 종일토록 모시고 앉았는데 질문한 것이 있으면 모두 싫증을 내지 않고 응대하였다. 이처럼 존귀한 지위로 사람을 사랑하고 선비에게 자신을 낮추는 것이 이와 같이 부지런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감복하게 하였다.
대개 이 어른의 절의(節義)는 평소에 앙모하던 것이라 이렇게 위태한주 20) 날을 당하여 절의의 가르침을 듣고자 하여 방미경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청하기를,
"지금 우리나라 삼천리가 섬 오랑캐의 손아귀에 들어간 데다가 단발의 변고까지 있으니 어떻게 처신하면 그 의리를 온전히 하여 치욕을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면암 대감이 답하기를,
"죽음으로 지켜 도를 잘 실천해야 한다[守死善道]주 21)는 것과 죽어도 변치 않는다[至死不變]주 22)는 가르침이 책에 구비되어 있으니, 다만 이 말씀에 종사하여 이해하고 강론하여 밝힌다면 어려움을 당하여 구차해지는 근심이 없을 것이네."
라고 하였다.
내가 가르침을 받고 물러나와 그의 문인 곽윤도 한소(郭允道漢紹)와 다소 이야기를 나눴는데, 곽윤도는 문식(文識)이 있고 좋은 사람이었다. 애초에 며칠 머무르며 면암 어른을 따르려 하였으나 여정이 급하고 도로 가운데서 뒤따르기가 편치 않아 다음날에 방미경과 함께 하직하고 신전으로 돌아왔다.
- 주석 18)면암 최 찬정(勉菴崔贊政)
- 최익현(崔益鉉, 1833~1906)으로, 면암은 그의 호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찬겸(贊謙)이다. 경기도 포천 출신으로, 이항로(李恒老) 문하에서 《격몽요결》ㆍ《대학장구》ㆍ《논어집주》 등을 통해 성리학의 기본을 습득하였다. 1855년(철종6) 명경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ㆍ사간원 정언ㆍ신창 현감(新昌縣監) 등을 역임하였으며, 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과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876년 〈병자지부복궐소(丙子持斧伏闕疏)〉를 올려 일본과 맺은 병자수호조약을 결사반대하였으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곧바로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疏)〉를 올려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하고 망국조약에 참여한 박제순(朴齊純) 등 오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다. 1906년 74세의 고령으로 의병을 일으켜 마지막으로 진충보국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대마도에서 순국하였다.
- 주석 19)태산북두(泰山北斗)
- 태산처럼 높이 숭앙하고 북두칠성처럼 우러러 존모한다는 뜻이다. 《당서(唐書)》 〈한유열전 찬(韓愈列傳贊)〉에 "한유가 작고한 뒤로 그의 말이 널리 행해져서, 학자들이 그를 태산북두처럼 우러러 받들었다.〔自愈沒, 其言大行, 學者仰之如泰山北斗云.〕"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주석 20)위태한
- 원문은 '판탕(板蕩)'으로, 나라가 위태롭고 사회가 혼란함을 뜻하는 말이다. 본디 주 여왕(周厲王)이 무도하여 나라가 무너지고 사회가 동란(動亂)을 겪은 일을 읊은 《시경》의 작품명 〈판(板)〉과 〈탕(蕩)〉에서 유래하였다.
- 주석 21)죽음으로……한다
- 《논어》 〈태백(泰伯)〉에 보인다.
- 주석 22)죽어도 변치 않는다
- 강함을 숭상하는 자로(子路)에게 공자가 나라에 도가 없을 때의 진정한 용기에 대해서 일러 주면서 찬미한 말로, 《중용장구》 제10장에 나온다.
拜勉菴崔贊政日錄
壬寅秋, 余以講會事至莘田日, 禀師門曰: "勉菴崔台名節德望, 今世山斗, 小子欲一拜其門, 瞻承容儀. " 師門曰: "善!" 於是與房友美卿【煥暢】同伴, 將向定山. 未及定山十里, 聞勉菴台昨啓抱川行, 今夜宿公州栗亭沈進士家. 乃舍定山路, 直至栗亭, 已發駕矣. 遂迫昏踰峻嶺, 夜宿黃蓮洞, 曉行二十里, 至沙器店遇之. 因從者刺謁, 隨至全義芳彛洞任進士家, 任勉台壻也. 是日九月十九日也. 侍坐竟日, 有所質問, 皆酬應不倦. 以若尊貴之位, 愛人下士, 如是其勤, 令人感服. 蓋此丈節義, 素所慕仰, 當此板蕩之日, 欲聞節義之敎, 與美卿同起身請曰: "見今東土三千里, 入於島夷之手, 而又有剃髮之變, 何以處身, 則可以全其義而不受辱乎?" 答曰: "守死善道、至死不變之訓, 具在方冊, 但當從事斯語, 理會講明, 則庶無臨難苟且之患矣. " 余拜受訖退, 與其門人郭允道【漢紹】, 有多少談話, 郭有文識可人也. 初欲數日留從勉丈, 行李悤遽, 道路之中, 追隨未便, 翼日, 與美卿辭歸莘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