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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16
- 잡저·사문록(雜著·思問錄)
- 노화동이고 무오년(1918)(蘆華同異攷【戊午】)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16 / 잡저·사문록(雜著·思問錄)
노화동이고 무오년(1918)
노사(蘆沙)주 99)가 말하기를 "명덕(明德)과 도심(道心)은 모두 마음의 측면에서 말한 것인데, 이제 명덕이 이(理)이고 도심 또한 이라고 말하여 마음을 곧바로 이라고 여기니, 타당하지 않은 듯하다." 하였다. -경도(景道)에게 답한 편지에서-
또 말하기를 "명덕은 본심(本心)의 다른 이름이다. 《대학장구》의 '허령하여 어둡지 않다.〔虛靈不昧〕' 넉 자는 분명히 기(氣)로 말한 것이다." 하였다. -민겸오(閔謙吾)에게 답한 편지에서-
또 말하기를 "'명덕은 오직 기를 가리킨다.〔明德單氣〕'고 운운하는데 '기(氣)'자는 본래 유행(流行)하고 운화(運化)하여 이름을 얻은 것이니, 사람의 몸으로 말하면 호흡(呼吸)의 나가고 들어옴, 영위(榮衛)의 오르고 내림이 모두 이 기(氣)이다. 반드시 '기(氣)'자 아래에다 '정상(精爽)'이란 글자를 붙여야 '심(心)'자의 경계로 들어가게 되나, '정상'이란 글자도 피상적인 설명에 불과하다. 마땅히 성정(性情)과 체용(體用)을 합쳐서 설명해야 비로소 골자(骨子)가 되고 '심(心)'자의 본지를 갖추게 되지만, 그래도 대뜸 '명덕(明德)'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 그럴까? 기질(氣質)에 가려진 마음은 마음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땅히 하늘에서 얻은 본심(本心)이라고 해야 비로소 명덕이 된다. 돌아보건대 '단기(單氣)'자는 몇 겹의 관문을 지나야 비로소 명덕에 이르게 될까. 이제 한 가지 비근한 일로 비유해 보겠다. 감로(甘露)는 술에서 생기지 않는가. 술은 누룩에서 생기지 않는가. 누룩은 보리에서 생기지 않는가. 이제 어떤 사람이 '감로가 보리이다.'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반드시 말이 되지 않는다고 여길 것이다. '명덕이 기이다.〔明德是氣〕'라는 설이 어찌 이것과 다르겠는가." 하였다. -박영수(朴瑩壽)에게 답한 편지에서-
또 말하기를 "명덕(明德)은 마땅히 '심(心)'자로 보아야 하니, 바로 기(氣)의 정상(精爽)이다. 그러나 '심'이라고 말하지 않고 '명덕'이라고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심(心)'자는 진(眞)과 망(妄)을 포함하는데 명덕은 망(妄)이 없는 본체를 곧바로 가리킨 것이다. 이러한 뒤에 '어둡지 않다', '갖추었다', '응한다'는 말이 모두 맞아떨어지는 곳이 있게 된다. 그렇다면 명덕은 마땅히 기의 영역에 속하는가? 기물(器物)로 비유하면 '기(氣)'자는 그릇〔盤盂〕만을 가리키고 명덕은 물을 담은 그릇을 가리키니, 스스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조직교(趙直敎)에게 답한 편지에서-
또 말하기를 "하나의 둥근 발우에 옥식(玉食)을 가득 담은 것이 바로 명덕(明德)이다. 발우가 본래 놋쇠 구리에서 나온 것을 보고서 옥식을 가득 담은 것을 '놋쇠 구리'라고 부르면 되겠는가? 혹자가 단순히 기(氣)라고 한 것은 대체로 놋쇠 구리의 의론이요, 그대가 이(理)라고 주장한 것도 지반의 기준틀을 빼버린 것을 면치 못했다." 하였다. -우만범(禹萬範)에게 답한 편지에서-
화서(華西)주 100)가 말하기를 "명덕(明德)이란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것이다. 이 '천(天)'자는 유래가 있으니, 《중용》의 이른바 '하늘이 명한 것을 성이라고 한다.'는 성(性)이고, 《시경》의 이른바 '하늘이 모든 백성을 내었다.'는 천(天)이며, 《서경》의 이른바 '상제가 아래 백성에게 본성을 내려주셨다.'는 상제(上帝)이다. 곧 정자의 이른바 '하늘을 통틀어 말한다면 도(道)이다.'주 101)라는 것이니, 이(理)와 기(氣)를 겸하여 말해서는 안 될 듯하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주자가 명덕(明德)을 풀이하여 하늘〔天〕ㆍ마음〔心〕ㆍ성(性)ㆍ정(情)에 불과하다고 하였고, 또 마음은 성과 정을 통합한 것이라고 하였으니, 마음이 성과 정의 주인이 되는데 그 근원은 하늘에서 나온 것이다. 그 아래에 곧바로 '연(然)'자와 '단(但)'자를 붙여 겨우 기질에 얽매이고 욕심에 가려지는 한 갈래를 말했으니, 위쪽에서 말한 것이 기(氣)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 아래에 이(理)와 기(氣)가 서로 섞이는 것을 꺼리고 구별이 없는 것을 의심하여 또 '본체(本體)'자와 '초(初)'자를 붙여서 말하였다. '본체'자는 바로 태극이 움직여 양이 되고 고요하여 음이 된다는 본체이다. 그리고 '초'자는 바로 〈소학제사(小學題辭)〉의 '무릇 그 처음에〔凡此厥初〕', 〈학이(學而)〉 첫 장 주의 '그 처음의 상태를 회복한다.〔復其初〕'는 초이니, 과연 기(氣)로 말하여도 의심이 없겠는가?" 하였다. -김치장(金穉章)에게 답한 편지에서. 아래도 같다.-
또 말하기를 "주자는 명덕(明德)에 대해 풀이하기를 '허령하여 어둡지 않아 모든 이치를 갖추고서 온갖 일에 응하는 것이다.'주 102) 하였고, 《맹자》〈진심(盡心)〉장에서 풀이하기를 '사람의 신명(神明)함이니 모든 이치를 갖추고서 온갖 일에 응하는 것이다.' 하였다. '허령하다〔虛靈〕'ㆍ'신명하다〔神明〕'ㆍ'갖추다〔以具〕'ㆍ'응하다〔應〕'는 모두 마음을 풀이한 것이지 성(性)을 풀이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김치장(金穉章)에게 답한 편지에서-
또 말하기를 "명덕(明德)은 본래 천하의 사람들이 똑같이 얻은 것이어서 애초에 피차의 간격이 없는 것인데, 어찌 배워서 행하고 밝혀서 베풀겠는가. 같은 것은 이(理)이고, 같지 않은 것은 기(氣)이다. 이 하나의 '기(氣)'자가 실로 한 편(篇)의 송척(訟隻 소송하는 상대방)을 대변하기 때문에 '기품(氣稟)에 얽매이고 물욕(物欲)에 가린 바가 되어 때때로 어두워지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대개 이(理)와 기(氣)가 비록 서로 떨어져 있지 않으나, 이는 순수하고 지선한 것이고 기는 서로 뒤섞이고 가지런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명덕의 체(體)가 온전하지 않은 것은 기가 얽매이게 한 것이고, 명덕의 용(用)이 통달하지 않은 것은 기가 가려지게 한 것이다." 하였다. -《대학》 '명덕장구'의 말이다.-
살펴보건대 노사(蘆沙)가 명덕(明德)을 논하면서 마음의 측면에 나아가 말하여 기(氣)의 영역에 소속시켜, 곧바로 이(理)라고 하는 것을 온당치 못하게 여긴 것은 반복해서 생각해 보아도 명백할 뿐만이 아니다. 감로(甘露)ㆍ수반(水盤)ㆍ식발(食鉢)의 비유에 이르러서는 비록 이(理)를 주장한 것 같지만 이것은 어느 한편의 기(氣)만 내세우는 설을 배척한 것이고, 이것이 이(理)를 갖춘 마음이고 이(理)를 실은 기라고 말했으니, 그 어조에 손님과 주인의 구분이 참으로 절로 존재한다.
화서(華西)가 명덕을 논하면서 《대학장구》의 '하늘에서 얻은 것'이라는 하늘을 통틀어서 말하면 도(道)라고 하였고, 본체의 밝은 것을 태극(太極)이라고 하였으며, '그 처음을 회복한다'는 처음을 본래 선한 성(性)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분명히 명덕을 이(理)로 본 것이다. 또 이 덕은 본래 사람마다 똑같이 얻은 것인데 같은 것은 이(理)이고 같지 않은 것은 기(氣)라고 말하여, '이기(理氣)' 두 글자를 양쪽으로 대설(對說)하여 구절마다 변론하여 설파한 것은 대개 명덕이 기의 분수라는 설을 배척하여 기질을 명덕으로 인식하는 데로 몰아간 것이다. 그렇다면 위에서 열거한 화서의 말 중에 세 번째 조목에서 운운한 것을 문장을 따라 평이하게 살펴보면 노사와 다른 견해가 없는 것 같다. 다만 주장하는 바가 이미 다르니, 참으로 그 의향이 있는 곳을 모르겠다.
노사가 말하기를 "피의 신령함을 '정(精)'이라 하고 기(氣)의 신령함을 '신(神)'이라 하는데 이것이 바로 마음의 지반이다. 그 속에 모든 이치를 담아 싣고 있어야 바야흐로 '마음〔心〕'이라고 한다." 하였다. -경도(景道)에게 답한 편지에서-
또 말하기를 "마음은 곧 기(氣)의 신령한 곳인데 많은 이(理)를 갖추고 만 가지 일에 대응하는 체용(體用)이 있다." 하였다. -시랑(侍郞) 이응진(李應辰)에게 답한 편지에서-
또 말하기를 "마음이 태극이 되는 까닭은 참으로 성(性)이 그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니, 어찌 기(氣)의 정상(精爽)주 103)을 태극이라 하겠는가." 하였다. -민극중(閔克中)에게 답한 편지에서-
또 말하기를 "주자가 '성(性)은 태극과 같고, 심(心)은 음양과 같다.'라고 운운하였으니, 모름지기 두 개의 '유(猶)'자는 절반만 말한 것이고 그 실지를 말하면 성이 곧 태극이고 심이 곧 음양임을 알아야 한다. 어째서 그렇게 말하는가? 태극은 동정(動靜)의 묘(妙)요, 음양은 동정의 체(體)이니, 이 묘가 없으면 음양이 나오지 않고 이 체가 없으면 태극도 걸려 있을 곳이 없다. 하늘에 있으면 태극과 음양이라 말하고 사람에게 있으면 심과 성이라 말하니, 이 사물 밖에 다시 다른 사물이 없기 때문에 이 경우에는 '곧 태극이요, 곧 음양이다'라고 한다. 만일 그 가운데에 나아가 하늘과 사람을 분별해서 말한다면, 사람에게 있는 심과 성이 하늘에 있는 태극이나 음양과 같기 때문에 이 경우에는 '태극과 같고, 음양과 같다'라고 한다. 이는 하늘과 사람을 혼동해서 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절반만 말한 것이다'라고 한다. '태극이 양의(兩儀)를 생한다.'는 구절은 뒤섞어서 말한 것인데, 뒤섞어서 말하면 조화의 본원이 이(理)에 있기 때문에 이(理)에 중점을 두어 '태극이 양의를 생한다.'고 한 것이다. '마음이 성과 정을 통합한다〔心統性情〕'는 것은 사람의 몸에서 말한 것인데, 사람의 몸으로 말하면 동작과 운용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마음에 중점을 두어 '마음이 성과 정을 통합한다'고 한 것이다." 하였다. -나치문(羅致文)에게 답한 편지에서-
또 말하기를 "기(氣)의 정상(精爽)이기 때문에 온갖 이(理)를 갖출 수 있으니, 이(理)로써 이(理)를 갖추는 것은 눈으로써 눈을 보는 것과 같다." 하였다. -최원칙(崔元則)에게 답한 편지에서-
화서(華西)가 말하기를 "'무극이면서 태극이다.'라는 구절이 사람에게는 본심(本心)을 말한다." 하였다. -잡지(雜識)에서-
또 말하기를 "태극(太極)은 만 가지 조화와 사물의 근본적인 주재가 되기 때문에 이에 심(心)이라는 이름이 있게 되었다. 만약 인극(人極)을 논한다면 주자의 이른바 '마음이 태극이다.'라는 구절이 바로 이것을 말한다." 하였다. -원형이정(元亨利貞)의 구절을 풀이한 후설(後說)에서-
또 말하기를 "이 단락은 -《주자어류(朱子語類)》제5권 제5판의 심(心)은 화(火)에 속한다는 내용을 논한 조항- 이 심(心)과 이 이(理)가 간(肝)ㆍ콩팥〔腎〕ㆍ폐(肺)ㆍ비장〔脾〕에 거하지 않고 유독 화장(火臟 심장)에 저장된 연유를 밝혔으니, 그 까닭이 무엇인가. 불은 천지간에 명장(明章)ㆍ광휘(光輝)ㆍ조촉(照燭)ㆍ발양(發揚)하는 물건이기 때문에 허다한 도리가 찬연히 다 여기에 갖추어져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대개 불의 광명이 발동하는 것 또한 이(理)이기 때문에 허다하게 갖추고 있는 것 또한 이(理)이다. 어째서인가. 이와 기는 간격이 없기 때문이다." 하였다. -김치장(金穉章)에게 답한 편지에서. 아래도 동일하다.-
또 말하기를 "-《주자어류》제5권 제5판의 인심상하(人心上下)를 논한 조항- 이미 폐간(肺肝)과 오장(五臟)의 심(心)이 있고 또 잡으면 보존되고 놓으면 잃어버리는 심(心)이 있는데, 이 두 가지 모양이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전자는 기(氣)로써 말하고 후자는 이(理)로써 말하기 때문이다. 신명(神明)이 이(理)에 속한다는 설은 비일비재하니, 예컨대 《맹자》〈진심(盡心)〉장의 집주에서 이미 사람의 신명함으로 '심(心)'자를 풀이하였고 장구 아래의 단안(斷案)에서는 심(心)ㆍ성(性)ㆍ천(天)을 하나의 이(理)로 매조지하였다. 《통서(通書)》에서는 물(物)은 통하지 못하지만 신(神)은 만물에 오묘하게 작동한다고 풀이하여 '신은 형이상(形而上)에 속한다.'고 하였으니, -소주(小註)에 보인다.- 이와 같은 종류가 매우 많다. 묻건대 '이와 같다면 심(心)의 이(理)는 곧 형이상(形而上)인가?' 하면, 답하기를 '심(心)은 성(性)에 비하여 조금 형적(形迹)이 있고 기(氣)에 비하면 저절로 또 신령하다.'고 하니, 이 27자는 글자마다 귀결이 있다.
대개 '이와 같다〔如此〕'의 차(此)는 윗글의 '신명하여 헤아릴 수 없다.〔神明不測〕'를 가리키고, '심(心)의 이(理)'라는 심(心)은 윗글의 '오장의 심(心)'을 가리킨다. 가령 선생이 말한 '신명하여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은 바로 마음이 갖춘 바의 이(理)이고 이것이 곧 형이상(形而上)이니, 과연 이와 같은가, 아닌가? 이 질문의 의도를 살펴보면 신명(神明)을 형이상으로 인식한 것이니 이것은 그럴 법하지만, '성(性)'자와 똑같이 볼 줄만 알고 결코 다시는 분별하지 않으니, 이것은 선생이 깊이 병통으로 여기는 바이다. 그래서 답하기를 '이른바 신명하여 헤아릴 수 없다는 심(心)은 성(性)이란 글자에 비하면 조금 형적이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성(性)의 본체가 텅 비고 고요하여 아무 조짐이 없다고 말한 것과는 같지 않다.' 하였고, 또 저들이 신명을 기(氣)라고 잘못 인식할까 걱정하였기 때문에 '기(氣)에 비하면 자연히 또 신령하다.'라고 하였다. 이른바 '기(氣)'는 인심이 타는 바의 기틀을 가리키니 이것으로 적감동정(寂感動靜)주 104)하게 된다. 이것에 견주어 보면 신명(神命)은 절로 그러한 것이고 기(氣)는 꿈틀대는 것이며, 또 신명은 신령한 지각이 있고 기는 신령한 지각이 없으니, 이것이 신명과 기의 구분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심(心)은 기(氣)이고 물(物)이다. 오로지 이 물과 이 기의 측면에서 그 덕을 가리키면 '이(理)'라고 한다. 성현들이 말한 '심'이란 대개 이것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공자는 '형이상인 것을 도(道)라고 하고, 형이하인 것을 기(器)라고 한다.'주 105) 하였으니 상하를 분명히 끊을 수 있다. 순(舜) 임금과 우(禹) 임금이 말한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주 106) 공자가 말한 극기복례(克己復禮),주 107) 맹자가 말한 대체(大體)와 소체(小體)주 108)는 모두 이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주자는 '심이 성과 정을 통합한다〔心統性情〕'는 말을 가장 좋아하였는데, 통(統)에는 두 가지 뜻이 있으니 통섭(統攝)과 겸통(兼統)이다. 만약 심(心)을 기(氣)라고 인식할 뿐이라면 기(氣)는 도리어 이(理)를 통섭하니, 앞에서 말한 상하(上下)의 구분을 과연 어디에 쓰겠는가." 하였다.
또 말하기를 "심(心)ㆍ성(性)ㆍ정(情) 세 가지는, 그 주장하는 바를 말하면 심은 성과 정의 주인이 되고 성과 정은 심의 체(體)와 용(用)이 되니, 이는 모두 이(理)로써 말한 것이다. 형기(形氣)로써 말하면 마음이 거하는 곳으로 화장(火臟 심장)이요 형(形)이니 음(陰)의 넋이고, 마음이 타는 바로 정상(精爽)이요 기(氣)이니 양(陽)의 혼이다. 화장과 정상은 곧 음양의 그릇인데 또 마음이라고 이르는 것은 그 신명(神明)이 거하고 타는 바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명은 곧 마음의 당체(當體)를 가리키니 어떻게 음양(陰陽)으로 바꿀 수 있겠는가."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인심(人心)에 지각이 있는 것은 천리(天理)가 나에게 간직되어 있음을 지칭한 것이니 내 한 몸이 살아가는 근본이며, 도체(道體)에 작용이 없다는 것은 천리가 만물에 소통함을 지칭한 것이니 만고에 공적인 물건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성(性)은 비유하면 천하의 억조 백성이요, 심(心)은 비유하면 성인이 임금과 스승의 자리에 있는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마음 밖에 성(性)이 없고 성 밖에 마음이 없으니 마음과 성은 곧 하나일 뿐이다. 그 가운데에서 마음과 성의 구분을 알고자 한다면 성의 주재를 마음이라 하고 마음의 조리를 성이라 이르니, 이것은 주재를 상제(上帝)라고 이르고 유행을 도(道)라고 이르는 부류와 같다. 마음과 성은 이미 두 가지 물건이 아니어서, 마음의 지각이 곧 성의 지각이고 성의 지각이 곧 마음의 지각이니, 어찌 각각 두 가지 물건이 되겠는가." 하였다. -마음의 지각과 성의 지각을 말한 곳에서-
살펴보건대 노사(蘆沙)가 마음을 논할 때에 기혈(氣血)의 정신(精神)이 모든 이치를 담아 싣고 있어야 바야흐로 마음이라고 했다. 또 마음이 태극이 되는 것은 성(性)이 그 속에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고, 또 성이 곧 태극이요 마음이 곧 음양이며, 태극이 양의(兩儀)를 생하고 마음이 성과 정을 통합한다는 구절들을 양쪽으로 나누어 말하여 각각 귀결이 있게 하였다. 결국 이(理)로써 이(理)를 갖추는 것은 눈으로써 눈을 보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마음을 가리켜 이(理)라고 한 것을 비판하였는데 이는 본래 성은 이(理)에 속하고 마음은 기(氣)에 속한다는 설이며, 성은 마음의 근원이 되고 마음은 마땅히 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뜻이 또한 그 속에 들어있다.
화서(華西)가 마음을 논할 때에 태극을 사람에게 있는 마음으로 여겼는데, 주자의 "마음이 태극이 된다."는 설로 증명해보면 노사의 "성(性)이 그 속에 있다."는 말과 다르다. 기(氣)의 측면에 나아가 그 이(理)를 가리켜 마음이라고 한다면 노사의 "기(氣)가 이(理)를 싣고 있는 것을 마음이라고 한다."는 말과 다르다. 마음을 불에 소속시키고 불의 광명이 발동하는 것 또한 이(理)이기 때문에 허다한 도리를 갖출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노사가 비판한 이(理)로써 이(理)를 갖춘다는 말이다. 그 밖에 "도심(道心)은 형이상(形而上)에 속한다.", "마음이 성과 정을 통합한다는 것은 이(理)로써 말한 것이다." 따위의 설도 합당하지 않은 점이 많다. 그리고 "인심(人心)에 지각이 있는 것은 천리(天理)가 나에게 간직되어 있음을 지칭한 것이다.", "마음 밖에 성(性)이 없고 성 밖에 마음이 없다.", "마음의 지각이 곧 성의 지각이고 성의 지각이 곧 마음의 지각이다.", "성은 비유하면 천하의 억조 백성이고, 마음은 비유하면 성인이 임금과 스승의 자리에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 곳은 곧바로 마음을 이(理)라고 하여 마음과 성을 구분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 뚜렷이 마음을 높이고 성을 낮추려는 뜻이 있었으니, 여기에서 두 어른의 심설(心說)이 얼음과 숯불처럼 함께 할 수 없게 되었다.
노사(蘆沙)가 말하기를 "이(理)는 물과 같아서 한 웅덩이에 말〔斗〕․섬〔斛〕․되〔升〕․홉〔合〕의 분량이 각각 적당하게 들어 있다. 이것을 나누어 말ㆍ섬ㆍ되ㆍ홉에 담으면 그릇의 틀에 국한되어 서로 통하지는 못하지만, 그 본체를 논한다면 한 웅덩이의 물과 조금도 더 하거나 덜 하는 것이 없다. 성인(聖人)은 한 웅덩이의 물을 논한 적이 없지만 말ㆍ섬ㆍ되ㆍ홉에 나아가 사람들에게 안목을 밝히도록 하였으니, 안목이 이미 밝아지면 한 웅덩이의 물이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지금 사람들은 말ㆍ섬ㆍ되ㆍ홉에 본래 안목이 없어서 그 틀의 거친 것만 보고 본체의 묘(妙)를 보지 않는다. 그래서 대뜸 한 웅덩이의 물을 논하여 모두 '상면 한 가지의 일이 도무지 표준이 없다.'고 말하고 마침내 창졸간에 안배하여 이룬다. 그렇다면 성명(性命)은 물을 긷는 사람의 수단에 달려 있지, 하늘이 명한 바가 아니다." 하였다. -조직교(趙直敎)에게 답한 편지에서-
화서(華西)가 말하기를 "여기에 한 항아리의 물이 있는데 물은 동일할 뿐이다. 혹 나누어 소금에 부으면 소금물이 되고 꿀에 부으면 단물이 되며, 부자(附子)주 109)를 넣고 달이면 뜨거운 물이 되고 망초(芒硝)주 110)를 넣고 달이면 차가운 물이 되니, 물은 동일한데 이렇게 짜고 달고 뜨겁고 차가움이 같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타는 바의 그릇이 같지 않기 때문에 짠물과 단물은 쓰임이 각각 다르고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도 베풂이 각각 다르니, 이것이 이른바 '성을 따르는 도〔率性之道〕'이다. 짜고 달고 뜨겁고 차가운 것이 비록 그 타는 바의 기질에 따라서 다르지 않을 수 없지만 그 물은 동일하다. 그래서 짠물과 단물을 막론하고 촉촉이 젖어든 것은 똑같고,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을 묻지 않아도 아래로 흐르는 것은 똑같으니, 이것은 본연(本然)의 물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본연은 비록 같으나 만나는 바의 기(氣)가 다르지 않을 수 없어 만 가지로 구별이 있으며, 타는 바의 기(氣)가 비록 다르지만 그 본연은 같음에 방해되지 않으니, 이것이 이른바 '다름 속에서 그 같음을 알고, 같음 속에서 그 다름을 안다.'는 것이다." 하였다. -인물성동이변(人物性同異辨)주 111)에서-
살펴보건대 노사의 설은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의 동이(同異) 문제가 이미 본연(本然)에 갖추어졌다는 의론이고, 화서의 설은 인성과 물성의 동이 문제가 비로소 기질(氣質)에서 나뉜다는 의론이니, 이것 또한 서로 어긋났다.
노사(蘆沙)가 말하기를 "'이에 동과 정이 있다.〔理有動靜〕'는 설은 주자(周子 주돈이(周敦頤))의 〈태극도설(太極圖說)〉 첫 번째 구절에서 이미 이 내용을 다 설명했는데, 태극(太極)은 본래 동과 정이 있지만 '무극(無極)'이라고 하면 원래 동과 정이 있는 적이 없기 때문에 '동하면 정이 없고 정하면 동이 없는 것은 물(物)이요, 동하되 동이 없고 정하되 정이 없는 것은 신(神)이다.'라고 했다." 하였다. -이용수(李容壽)에게 답한 편지에서-
또 말하기를 "이(理)의 묘용을 신(神)이라고 하니 이(理)가 신묘하지 않으면 이것은 뻣뻣한 나무 한 덩어리일 뿐이다. 《주역대전(周易大傳)》에서 '음과 양을 헤아릴 수 없는 것을 신(神)이라고 한다.'라고 했는데, 횡거(橫渠 장재(張載))가 말하기를 '양쪽에 혼재해 있으므로 측량할 수 없다.'주 112)라고 하였다. '양쪽에 혼재해 있다'는 것은 이미 양에도 있고 음에도 있다는 것이니, 이른바 '있다'는 것은 이(理)가 아니겠는가." 하였다. -김경범(金景範)에게 답한 편지에서-
또 말하기를 "동(動)하되 동이 없고 정(靜)하되 정이 없는 것이 '이(理)'이고, 동하면 동에 치우치고 정하면 정에 치우는 것이 기(氣)이다." 하였다. -송성택(宋聖澤)에게 답한 편지에서-
또 말하기를 "근세에 이(理)나 기(氣)를 말하는 것이 어찌 그리도 막힌 것인가. 대개 혼륜한 한 덩어리로서 가부도 없고 주장도 없는 것을 이(理)라고 여긴다. 처음부터 이미 그렇게 시키는 묘(妙)가 없고 끝에도 조종하는 힘이 없으니, 의지하고 붙어서 탈 뿐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외필(猥筆)에서-
화서(華西)가 말하기를 "이(理)는 비록 작용이 없지만 실로 온갖 작용의 본체가 되기 때문에 주자(周子)가 말한 '태극이 동하여 양을 낳고 정하여 음을 낳는다.'는 것이요, 주자(朱子)가 말한 '태극은 곧 동하거나 정할 수 있다.'는 것이니, 곧바로 본체(本體)를 가리킬 뿐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태극이 스스로 동하고 정하지 못하는데 음양의 기(氣)가 스스로 동하고 정할 수 있다면, 이른바 '태극(太極)'이란 실상도 없고 작용도 없는 자리일 뿐이다." 하였다. -태극설(太極說)에서-
또 말하기를 "주자는 태극의 성정(性情)과 공효(功效)는 그 요점이 '묘(妙)'자에 있음을 명확하게 알았기 때문에 '태극이란 본연(本然)의 묘용(妙用)이다.'라고 해석했다." 하였다. -묘자설(妙字說)에서-
또 말하기를 "'신(神)'자가 기(氣)를 가리켜 말한다면 형이하(形而下)이니 귀신의 부류가 이것이다. 이(理)를 가리켜 말한다면 형이상(形而上)이니 묘용(妙用)의 부류가 이것이다. 바로 이와 기는 서로 섞여 간격이 없기 때문에 분별하여 말해서 상(上)이라 하고 하(下)라고 한 것이지, 어찌 간격이 없기 때문에 형이상이라고 부르고 형이하를 만든 것이겠는가." 하였다. -김치장(金穉章)에게 답한 편지에서-
생각건대 이 태극(太極)이 스스로 동(動)하고 정(靜)할 수 있다는 의론은 노사와 화서 두 어른이 같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묻기를,
"노사(蘆沙)와 화서(華西) 두 어른의 의론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데, 그대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지금 그대는 조목조목 기록한 것을 참고하여 그 같고 다름을 드러내는가? 그 의도는 어디에 있는가?"
하니, 내가 답하기를,
"노사와 화서 두 어른은 남과 북에서 우뚝 일어나 근대 유학의 거장이 되었고 두 학파의 문하생들은 그 의론이 약속하지 않아도 완전히 일치하였으니, 사문(斯文)에 큰 다행이다. 근래에 두 학파의 문자를 얻어서 대략 한 번 읽었는데 그 심설(心說)ㆍ명덕론(明德論)ㆍ인물성변(人物性辨)을 보면 서로 부합하지 않을 뿐 아니라 혹은 서로 반대가 되어 서로 용납하지 못하는 것도 있다. 오직 태극(太極)은 능히 신묘하고 형이상(形而上)에 속한다는 설만 대략 서로 비슷하고 그 나머지 자잘한 의론은 상세히 고찰할 겨를이 없을 뿐만이 아니다. 큰 의론이 이미 다 똑같지 않다면 작은 의론이 모두 서로 부합한다 하더라도 참으로 각각 문호를 세우는 것을 구할 수 없건만, 어찌하여 두 학파의 문하생들은 여러 해 직접 배웠으면서 그 스승이 주장하는 종지(宗旨)가 어디에 있는지를 살피지 않고 억지로 끌어다 붙여 일치시키려 하는 것인가. 무릇 이기(理氣)와 심성(心性)은 유학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며 학문의 밑바탕이 되는 곳으로, 하늘에 있는 이기와 사람에게 있는 심성은 일맥상통하여 두 가지 일이 아니다. 심성에 관한 설이 이미 서로 어긋남을 면치 못했다면 이른바 이기설(理氣說)이 서로 같다는 것 또한 참으로 같음을 보장할 수 없다는 염려가 없겠는가. 그래서 내가 이것을 의심하고 드러내어 두 문하의 제공(諸公)에게 질정하려고 한다."
하였다. 묻기를,
"두 어른의 견해가 이미 서로 어긋나 있다면 반드시 잘잘못이 그 사이에 있을 것인데, 그대는 그 같고 다름을 기록했을 뿐 그 잘잘못을 논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답하기를,
"학문이 얕고 견해가 낮아 누가 잘하고 누가 잘못했는지에 대해 아득히 분별하기 어렵고, 비록 논하려고 하지만 참으로 할 수 없는 바가 있다. 혹 선현의 말에 근거하여 나의 견해와 일치하면 그 중 한두 가지는 대략 분별할 수 있었으나, 하찮은 후학으로서 탁월한 선배를 논하는 것이 매우 본분을 벗어나는 일이기에 또한 감히 할 수 없는 바가 있다."
하였다. 묻기를,
"아니다. 그렇지 않다. 의심스런 것을 마땅히 묻는 것은 군자가 생각하는 바이고, 배운 것을 마땅히 강론하는 것은 성인이 걱정하는 바이다. 나의 의론이 만약 자기의 소견만 옳다고 여기는 데서 나와 선배의 의도를 핍박하는 것이라면 참으로 죄를 줄 만하지만, 만약 조금도 이러한 뜻이 없고 오로지 질의하고 강학하는 데에 있다면 이것이 바로 이른바 '선현을 존중하고 경외하며 도리를 강구하여 밝힌다〔尊畏先賢 講明道理〕'는 것이니, 그 방도를 둘 다 얻었는데 어찌하여 해서는 안 된단 말인가?"
하니, 내가 답하기를,
"그대의 말이 이미 이와 같고 내가 보잘 것은 없으나 또 참으로 현인을 업신여기는 사람이 아니니, 내 견해로 대략 두 어른의 의론이 선현의 가르침에 대해 누가 맞고 누가 어긋나는지를 논하여 같은 시대의 명철한 사람에게 질정해도 괜찮겠는가?
무릇 노사가 마음을 기(氣)의 영역에 소속시키고 명덕(明德)을 이(理)를 실은 마음으로 삼고 도심(道心)을 곧바로 이(理)라고 여기지 않은 것은 성탕(成湯)의 '예법으로 마음을 제어한다.'는 것주 113)과 공자의 '마음대로 해도 법도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주 114)과 안자(顔子)의 '마음이 인(仁)을 어기지 않는다.'는 것주 115)과 《대학장구》의 '명덕(明德)은 사람이 하늘에서 얻어 허령하여 어둡지 않아 모든 이치를 갖추고서 온갖 일에 응한다.'는 것과 《중용》 서문의 '도심은 성명(性命)의 바름에 근원한다.'는 것을 표준으로 삼아 보면, 실로 모두 부절(符節)을 맞춘 듯 어긋난 바가 없다. 그런데 도리어 화서(華西)에 이르면, 마음과 명덕과 도심을 함께 곧바로 이(理)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만약 진리이고 정견(正見)이라면 마음과 예(禮)․법도․인(仁)의 관계는 곧 호칭은 다르지만 내용이 같게 되는데, 어찌 제어하고 제어하지 않고, 벗어나고 벗어나지 않고, 어기고 어기지 않고를 논할 필요가 있겠는가. 《대학장구》에서는 마땅히 명덕이란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것으로 순수하고 흠결이 없어 오상(五常)을 갖추고 온갖 선을 포괄한다고 말해야 하고, 《중용》 서문에서는 마땅히 도심이란 성명의 바름이라고만 말하고 마땅히 '원어(原於)' 두 글자를 쓰지 않아야할 것이니, 이것으로 미루어 궁구해 보면 두 설의 잘잘못을 대개 알 수 있다.
성(性)을 논한 경우에는 두 어른의 의론이 모두 인성과 물성이 같다〔人物性同〕는 뜻을 주장하였다. 다만 노사는 말〔斗〕․섬〔斛〕․되〔升〕․홉〔合〕이 각각 한 웅덩이의 물에 해당한다고 비유하였으니, 바로 그가 평소에 주장한 '편전(偏全)의 성(性)이 이미 본연(本然)에 갖추어져 있다.'는 설이다. 이것을 《대학혹문》의 '사람과 사물은 반드시 이 이(理)를 얻어 건(健)ㆍ순(順)ㆍ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의 성(性)이 되는데 사물은 형기(形氣)의 치우치고 막힘에 구속되어 그 본체의 온전함을 확충할 수 없다.'는 것과 《중용혹문》의 '사람에 있어서나 사물에 있어서나 비록 기품(氣稟)의 차이는 있지만 그 이(理)는 같지 않은 적이 없는데 조수(鳥獸)와 초목은 겨우 형기의 치우침을 얻어 전체를 관통하지 못한다.'는 것과 22장의 장구(章句)에서 '사람과 사물의 성이 또한 나의 성이지만, 다만 부여받은 형기가 그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표준으로 삼아 보면, 여기에서 기질(氣質)의 호칭이 있게 되므로 《중용장구》에서 '성(性)과 도(道)는 같다 하더라도 기품은 혹 다르다.'라고 하였다. 지금 사람과 사물이 성(性)을 따르는 자연스런 경지에 대해서 대뜸 기질(氣質)에 중점을 두어 주장한다면 그 따르는 바의 성은 곧 기질이 같지 않은 성이 되니, 행하는 바의 도리가 어찌 일상에서 마땅히 행해야 할 길이 될 수 있겠는가. 나는 그래서 말하기를 '소금은 짜고 꿀은 달고 부자(附子)는 뜨겁고 망초(芒硝)는 차가운 쓰임이 각각 다른 것으로 부모는 자애롭고 자식은 효도하고 소는 밭을 갈고 말은 달리는 것이 각각 그 길을 따르는 비유로 삼는다면 비유할 수 있겠으나, 맑고 흐리며 순수하고 잡박하여 만 가지로 가지런하지 않은 기질의 경우는 거리가 먼 듯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두 어른의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은 이미 그 견해가 바름을 얻은 것에 심복하였으나 또한 각각 하나의 잘못이 있다는 점에 의심이 없을 수 없다."
하였다. 묻기를,
"두 어른의 견해는 서로 어긋나는 부분이 많은데 그 이(理)에 능력(能力)이 있다는 설이 서로 부합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또 의론의 잘잘못은 과연 어디에 있으며, 그 이른바 '같다〔同〕'는 것에 혹 참으로 같은지〔眞同〕를 보장할 수 없다는 염려가 있는 것은 또 어째서인가?"
하니, 답하기를,
"태극이 스스로 동(動)하고 이(理)에 운용이 있다는 것은 화서가 평생 힘써 주장한 것이기 때문에 그 운용하는 바는 참으로 위에서 나열한 여러 조항과 같다. 다만 사람의 명덕과 도심, 사물의 거울이 밝고 종이 울리는 것을 곧바로 이(理)라고 한 것으로 보면, 그가 인식하여 말한 이(理)와 태극이라는 것은 실제로는 마음이요 기(氣)이니, 그가 이와 같이 말하는 것도 당연하다.
노사와 같은 경우는 마음을 기의 영역에 소속시켜 명덕과 도심이 이(理)가 된다는 설을 배척했으니 그 이와 기의 경계에 대해 나누어 끊는 것이 매우 명확한데, 이(理)에 조종하는 힘이 있다는 의론이 어찌해 이 어른에게서 나온 것인가. 매우 괴이하다. 그러나 나는 일찍이 생각하여 그 설을 알게 되었다. 《역전(易傳)》과 사서(四書)부터 주자(周子)ㆍ정자(程子)ㆍ장자(張子)ㆍ주자(朱子)까지 모두 태극이 양의(兩儀)를 낳는다거나 이발(理發)이나 성발(性發) 등의 말을 간곡히 반복했을 뿐만이 아니다. 이것은 모두 본원(本源)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니 만약 도기(道器)의 당체(當體)와 본색(本色)을 가리켜 말했다면 천지의 조화와 사람의 지각ㆍ운용이 비록 지극히 신묘하여 헤아릴 수 없을지라도 결국 기(氣)가 같지 않아 다름이 있게 되므로 《맹자집주》의 '인의예지의 순수한 것을 어찌 사물이 온전히 할 수 있겠는가.'라는 글이 참으로 맞는지 틀린지 모른다. 이와 같이 논한다면 《중용혹문》과 《대학혹문》에 마땅히 '그 본체의 온전함을 얻지 못하면 그 전체(全體)를 품부 받을 수 없다.'고 했을 것이고, 《맹자집주》에서도 마땅히 '어찌 사물이 온전히 품부 받을 수 있겠는가. 무이충(無以充)이나 불능통관(不能通貫)이란 말을 써서는 안 되니 어찌 온전히 한다〔全〕는 등의 글자를 쓸 수 있겠는가.'라고 했을 것이고, 《중용장구》에서도 마땅히 '다만 그 나뉨이 같지 않지만 이미 본연에 갖추어져 있다.'고 말해야 하고, '형기(形氣) 때문에 다름이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대개 이 《중용혹문》ㆍ《대학혹문》ㆍ《맹자집주》는 동일한 어의(語意)를 지니고 있어 조금도 다른 점을 볼 수가 없다. 그런데 노사 어른은 '사물이 어찌 온전히 할 수 있겠는가.'를 사람과 사물이 동일하게 오상(五常)을 지녔다는 증거로 삼았고, '확충할 수 없다〔無以充〕'와 '관통할 수 없다〔不能通貫〕'는 것을 오상에 치우치거나 온전함이 있다는 안건으로 삼았으니, 어째서인가? 이것은 이해할 수 없다.
화서가 물의 짜고 달고 뜨겁고 차가운 것을 솔성의 도〔率性之道〕로 삼고, 촉촉이 젖어들고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을 천명의 성〔天命之性〕으로 삼은 것은 이치에 가까운 듯하다. 다만 《중용혹문》에서 논한 것처럼 사람에게 부자(父子)ㆍ군신(君臣)의 구분, 만물의 지각(知覺)․운동(運動), 무성하고 시들고 꽃이 피고 지는 것으로 살펴보면, 그 솔성(率性)의 같지 않음이 형기(形氣)의 치우침과 바름에 달려있어서 지위가 각각 다르지만 그 따르는 바의 성(性)은 다른 적이 없다. 화서 어른이 주장한 바는 논자가 곧 타는 바 기질의 같지 않음에 있다고 여긴 것이다. 무릇 기질(氣質)은 만 가지로 같지 않아서 마땅히 바로잡아 다스려야할 것이므로 변화시켜 도(道)를 따르도록 힘써야 하고, 형기(形氣)의 지위는 각각 정해진 분수가 있어 바꿀 수가 없으므로 다만 그 속에서 자연의 이치를 따르면 도(道)가 여기에 있게 된다. 대개 도가 형(形)과 기(氣)를 따라 다른 것은 각각 자연과 당연의 법칙이 있기 때문이니, 발용(發用)하는 곳에서 기(氣)가 비록 작용하더라도 그 이치를 잘 따라 법칙을 어기지 않는다면, 천명의 본체가 여기에서 떠나지 않아 사람과 사물에 차이가 없게 된다. 기(氣)가 이(理)를 가릴 때에 의거하는 길은 이기(二氣 음양(陰陽))와 일심(一心)의 작용이어서 여러 성현들의 가르침에서 이것을 형이상(形而上)에 소속시킨 적이 없다. 오직 《통서(通書)》의 '사물은 통하지 않지만 만물 속에 신묘하게 작동한다.'는 구절의 주(註)에서 주자는 '신(神)'자를 형이상의 이(理)로 삼았는데, 이것은 본래 화서가 인용하여 근거로 삼은 것이다.
그런데 노사는 이미 '움직이되 움직임과 고요함이 없는 것이 신(神)이다.'는 것을 '이(理)에 움직임과 고요함이 있다.'는 구절의 증거로 삼았고, 또 스스로 글을 지어서 '신야(神也)' 두 자를 바꾸어서 '왈리(曰理)' 두 자로 썼으니, '이(理)에 능력이 있다.'는 의론 또한 주자의 이 주에 근거를 둔 듯하다. 그러나 주자가 신(神)을 이(理)라고 한 것은 생각건대 조화의 헤아릴 수 없는 곳에서 이 이(理)의 오묘한 작용을 본 것이니, 이는 귀신(鬼神)ㆍ연어(鳶魚)에서 비은(費隱)주 116)을 본다고 한 것과 같을 뿐이요, 곧바로 '신(神)'자를 텅 비고 고요하여 아무 조짐이 없는 본체로 본 것은 아니다. 만일 혹 그렇게 본다면 그 평생의 정론(定論)인 '도체(道體)는 작용이 없으니 작용이 있자마자 곧 형이하가 된다.'는 부류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대저 노사의 논의가 이와 같은데 《노사집》을 참고해 보면 '이(理)에는 조작이 있지 않다.'라고 한 것이 있고, '태극에 기(氣)의 힘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라고 한 것이 있고, '이(理)는 작용이 없고 기(氣)는 작용이 있다.'라고 한 것이 있으니, 이것이 어찌 도체(道體)에는 작용이 없다는 뜻에 완전히 어두워서 그런 것이겠는가. 다만 어떤 사람의 의론이 '기(氣)'자를 주장함이 너무 지나치고 상면에 한 가지 일이 있음을 알지 못하여 참으로 노사가 염려하는 바와 같은 점이 있었기에, 그 구부러진 것을 바로잡아 바른 데로 되돌리려다가 자신도 모르게 너무 지나쳐 중도를 잃는 잘못이 있게 되었다. 게다가 율곡(栗谷)의 '기틀이 저절로 그러할 뿐이다.〔機自爾〕'주 117)의 '자(自)'를 '독자(獨自)'의 '자(自)'로 잘못 인식하여 〈외필(猥筆)〉을 저술함으로서 극에 달하였다.
대개 신(神)을 이(理)라고 인식한 것은 노사와 화서 두 어른이 동일하다. 그러나 두 어른이 평생 이기심성(理氣心性)을 논한 큰 뜻이 본집에 실려 있는 것을 총괄하여 서로 참고해 보면, 화서는 형기와 기질의 조잡한 자취의 기(氣)를 알았을 뿐, 상면에 절로 한 층의 정밀한 기(氣)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조화의 신묘하여 헤아릴 수 없는 것과 인심의 신령하고 밝고 살아 움직이는 것을 아울러 곧바로 이(理)라고 하였다. 노사는 그렇지 않아 이미 형기 밖에 허령하고 신명한 마음이 있는데 또한 기의 영역에 속한 것임을 알았고, 또 그 상면에 절로 이른바 '이(理)'가 있는 줄 알았으니, 그가 인식한 이(理)는 도리어 면목을 잃지 않았다. 다만 이(理)가 기(氣)의 주인이 된다고 본 것이 매우 심하고, 《통서》에 나오는 주자의 주(註)에 근거하여 자연스러우면서도 완성된 곳으로 삼으니, 옳지 않은 듯하다. 다만 이(理)에 능력이 있고 신(神)을 형이상에 소속시킴으로서 논한 바와 근거한 바가 서로 부합하고 아울러 그 가리키는 바와 인식하는 바가 같았으니, 앞에서 내가 말한 '혹 참으로 같은지〔眞同〕를 보장할 수 없다는 점이 있다.'는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하였다. 질문한 사람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에 또한 일리가 있는 듯하니 내가 물러가 생각해보려 한다."
하였다.
- 주석 99)노사(蘆沙)
-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호이다.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대중(大中),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서경덕(徐敬德)ㆍ이황(李滉)ㆍ이이(李珥)ㆍ이진상(李震相)ㆍ임성주(任聖周)와 함께 성리학의 6대가(六大家)로 일컬어진다. 저서로는 《노사집》이 있다.
- 주석 100)화서(華西)
- 이항로(李恒老, 1792~1868)의 호이다.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이술(而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호남의 기정진(奇正鎭), 영남의 이진상(李震相)과 함께 조선 말기 주리철학의 3대가로 꼽힌다. 존왕양이(尊王壤夷)의 춘추대의(春秋大義)를 강조함으로써, 위정척사론의 사상적 기초를 제공하였으며, 한말 위정척사론을 주도했던 최익현(崔益鉉)․김평묵(金平默)․유중교(柳重敎) 등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저서로는 《화서집》ㆍ《주자대전차의집보(朱子大全箚疑輯補)》 등이 있다.
- 주석 101)하늘을……도(道)이다
- 정이(程頤)의 《역전(易傳)》에 나온다.
- 주석 102)허령하여……것이다
- 주자가 《대학장구(大學章句)》의 삼강령(三綱領) 중 첫 번째인 명명덕(明明德)의 명덕(明德)을 풀이한 것이다.
- 주석 103)정상(精爽)
- 정(精)은 귀신, 상(爽)은 밝음을 뜻한다. 곧 신령(神靈)이 밝거나 순수한 모양 또는 그러한 신령이나 혼백(魂魄)을 뜻하기도 한다.
- 주석 104)적감동정(寂感動靜)
- 마음이 평온하고 느끼고 움직이고 고요한 것을 말한다. 적감(寂感)은 적연부동(寂然不動)과 감이수통(感而遂通)을 줄인 말로, 각각 정(靜)과 동(動)에 대응한다.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역은 생각도 없고 하는 것도 없다. 고요히 움직이지 않고 있다가, 느끼게 되면 마침내 천하의 일을 통하니, 천하의 지극히 신령스러운 자가 아니면 그 누가 여기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易, 无思也, 无爲也. 寂然不動, 感而遂通天下之故, 非天下之至神, 其孰能與於此?〕"라고 하였다.
- 주석 105)형이상인……한다
- 《주역》〈계사전(繫辭傳)〉에 나온다.
- 주석 106)인심(人心)과 도심(道心)
- 《서경》〈대우모(大禹謨)〉에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하니 정밀하고 전일하게 하여 참으로 그 중도를 잡아야 한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라는 말이 나온다.
- 주석 107)극기복례(克己復禮)
- 자신의 사욕을 이겨 예(禮)로 돌아오게 하는 것을 말한다. 안연(顔淵)이 인(仁)에 대해서 묻자, 공자가 "극기복례가 바로 인이다. 하루라도 극기복례를 하면, 천하 사람들이 그 인에 귀의할 것이다.〔克己復禮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라고 대답하면서, 구체적인 조목으로 시(視)ㆍ청(聽)ㆍ언(言)ㆍ동(動)의 사물(四勿)을 제시한 대목이 《논어》〈안연(顏淵)〉에 나온다.
- 주석 108)대체(大體)와 소체(小體)
- 《맹자》〈고자 상(告子上)〉의 제15장에서 "대체(大體)를 따르면 대인이 되고, 소체(小體)를 따르면 소인이 된다."라고 하였는데, 주희는 "대체는 마음을 가리키고 소체는 이목(耳目) 등의 기관을 가리킨다."라고 해설하였다.
- 주석 109)부자(附子)
- 바곳의 구근(球根)으로, 성질이 열(熱)하고 양기(陽氣)를 돋우므로 체온이 부족하여 생기는 모든 병에 쓴다.
- 주석 110)망초(芒硝)
- 적열(積熱)을 내리게 하고 소변을 잘 보게 하며 오림(五淋 다섯 가지의 임질)을 치료한다.
- 주석 111)인물성동이변(人物性同異辨)
- 《화서집(華西集)》에는 '변(辨)'이 아니라 '설(說)'로 되어 있는데,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설명한 글이다.
- 주석 112)음과……없다
-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음하고 양하여 측량할 수 없음을 신이라 한다.〔陰陽不測之謂神.〕"라고 하였는데, 본의(本義)에 "장자가 말하였다. '두 가지가 있으므로 측량할 수 없는 것이다.'〔張子曰兩在, 故不測.〕"라고 하였다.
- 주석 113)성탕(成湯)의……것
- 《서경》 〈중훼지고(仲虺之誥)〉에서 중훼가 탕왕(湯王)에게 건의한 말이다.
- 주석 114)공자의……것
- 《논어》 〈위정(爲政)〉에 "나는 15세에 배움에 뜻을 두었고, 30세에 뜻이 섰으며, 40세에 미혹되지 않았고, 50세에 천명을 알았으며, 60세에 이순하였고, 70세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하여도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라는 말이 나온다.
- 주석 115)안자(顔子)의……것
- 공자가 안회(顔回)에 대해서 "그는 마음속으로 석 달 동안이나 인을 어기지 않았다.〔其心, 三月不違仁.〕"라고 칭찬한 말이 《논어》 〈옹야(雍也)〉에 나온다.
- 주석 116)비은(費隱)
- 도의 작용은 크고 넓으나 도의 본체는 지극히 은미함을 이르는 말이다. 《중용장구》 제12장에 "군자의 도는 넓고 은미하다.〔君子之道, 費而隱.〕"라고 하였다. 집주에 "비는 용이 넓음이요, 은은 체가 은미함이다.〔費, 用之廣也;隱, 體之微也.〕"라고 하였다.
- 주석 117)기틀이……뿐이다
- 기자이(機自爾)는 서경덕(徐敬德)이 《화담집(花潭集)》 〈원리기(原理氣)〉에서 기(氣)의 모이고 흩어짐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한 말이다. 《장자》 〈천운(天運)〉에 기(機)라는 말이 보이는데, 곽상(郭象)은 주석에서 "저절로 그럴 뿐〔自爾〕이므로 그 까닭은 알 수 없다."라고 설명하였다. 따라서 그 어원은 장자의 기(機)와 곽상의 자이(自爾)가 합해져 이루어진 것이다. 기라는 것은 동기(動機)ㆍ활기(活氣)의 뜻으로 정지한 상태가 운동으로 전환하는 필연적인 추세를 가리키고, 물질 운동의 한 계기로서 스스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자능이(自能爾)라고도 할 수 있으며, 또한 운동의 필연적인 내적 요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서경덕은 기(氣)의 동정(動靜)과 합벽(闔闢)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 말을 썼는데, 그에 의하면 기의 속성은 시간적으로 시종(始終)이 없고 공간적으로도 무한(無限)하며 연속적으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이이(李珥)도 기(氣)의 동정을 설명할 때 이 용어를 차용하고 있다.
蘆華同異攷【戊午】
蘆沙曰: "明德、道心, 皆心上說話, 今曰明德理也, 道心亦理也, 以心直謂之理, 恐未安."【答景道書】
又曰: "明德是本心之異名.《章句》'虛靈不昧'四字, 分明是以氣言."【答閔謙吾書】
又曰: "'明德單氣'云云, '氣'字本以流行運化而得名, 就人身而言, 噓吸之出入、榮衛之升降, 皆是物也.必'氣'字下, 著'精爽'字, 方說入'心'字境界, 然주 6)'精爽'亦是皮殼說話.須合性情體用而說, 方是骨子, 方是'心'字주 7)本旨, 然猶不可遽言'明德'.何哉? 氣質有蔽之心, 亦不可謂之心.須是得於天之本心, 方是明德.回顧'單氣'字, 經幾重關, 方到明德耶? 今請以一淺事喩之.甘露不生於酒耶? 酒不生於麴蘖耶? 麴蘖不生於來牟耶? 今有言者曰'甘露來牟也', 則人必以爲不成說話.'明德是氣'之說, 何以異此?"【答朴瑩壽書】
又曰: "明德當以'心'字看, 卽氣之精爽也.然不曰心而曰明德, 何耶? '心'字該眞妄, 明德直指無妄之本體也.如是而後, 曰不昧、曰以具、曰應, 皆有下落.然則明德當屬氣分乎? 曰以器物譬之, 則'氣'字單指盤盂, 明德指儲水之盤盂, 自可會意."【答趙直敎書】
又曰: "一圓鉢盂, 滿載玉食者, 是明德也.見鉢盂之本出鍮銅也, 而呼滿載玉食者曰'鍮銅', 可乎? 或者之單氣爲說, 蓋鍮銅之論, 足下之主理, 亦未免遺却地盤匡郭也."【答禹萬範書】
華西曰: "明德者, 人之所得乎天.此'天'字有來歷, 《中庸》所謂'天命之謂性'之性, 《詩》所謂'天生烝民'之天, 《書》所謂'上帝降衷'之上帝.卽程子所謂'天專言之則道也', 恐不當兼理氣言."
又曰: "朱子訓明德, 不過曰天、曰心、曰性、曰情, 而又曰心統性情, 則心之爲性情之主, 而其原則出於天也.其下卽著'然'字、'但'字, 纔說氣拘欲蔽一脚, 則可見上面所云非氣也.其下嫌理氣相混, 疑於無別, 則又著'本體'字'初'字而言之.'本體'字卽太極動而陽, 靜而陰之本體也.'初'字卽《小學題辭》'凡此厥初', 《學而》首章註'復其初'之初也, 果以氣言無疑乎?"【答金穉章書, 下同.】
又曰: "朱子於明德釋之曰'虛靈不昧, 以具衆理, 而應萬事者也', 於《孟子․盡心》章釋之曰'人之神明, 所以具衆理而應萬事者也'.曰虛靈、曰神明、曰以具、曰應, 皆所以釋心也, 非所以釋性也."
又曰: "明德固天下人人之所同得, 而初無彼此之間者也, 何學之爲而明之施也哉? 所同者理也, 所不同者氣也.此一'氣'字, 實一篇之對卞訟隻也, 故曰'爲氣稟所拘, 物欲所蔽, 有時而昏.' 蓋理氣雖不相離, 此則純粹至善者也, 彼則주 8)雜糅不齊者也.是以明德之體, 所以不全, 氣使之拘也; 明德之用, 所以不達, 氣使之蔽也."【《大學》明德章句說】
按蘆沙之論明德, 就心上說而屬之氣分, 以直謂之理爲未安者, 不啻反覆明白矣.至於甘露、水盤、食鉢之喩, 雖若主理者然, 此則斥一邊單氣之說, 而此是具理之心, 載理之氣云爾, 則其語勢賓主之分, 固自在矣.華西之論明德, 以《大學章句》所得乎天之天爲專言之道, 本體之明爲太極, 復주 9)其初之初爲本善之性, 是則明明以明德爲理矣.又謂是德固人人之所同得, 而所同者理也, 所不同者氣也, 以"理氣"二字, 兩下對說, 句句辨破者, 此蓋斥明德氣分之說, 驅之於認氣質爲明德也.然則右列華西說中, 第三條云云, 隨文平看, 似無與蘆沙異見者.但所主旣異, 則誠不知其歸趣之所在也.
蘆沙曰: "血之靈曰精, 氣之靈曰神, 卽心之地盤也.其中有該載衆理, 方謂之心."【答景道書】
又曰: "心乃氣之靈處, 有具衆理應萬事之體用."【答李侍郞應辰書】
又曰: "心之所以爲太極者, 實以性之在中, 豈以氣之精爽爲太極耶?"【答閔克中書】
又曰: "朱子曰'性猶太極, 心猶陰陽'云云, 須知兩箇'猶'字只說得一半, 言其實, 則주 10)性卽太極, 心卽陰陽.何以言之? 太極是動靜之妙, 陰陽是動靜之體, 無是妙, 則陰陽不出, 無是體, 則太極亦無掛搭處.在天曰太極陰陽, 在人曰心性, 此物事주 11)之外, 更無他物事주 12)也, 故曰'卽太極、卽陰陽'者此也.若就其中, 分別天人而言之, 則在人之心性, 猶在天之太極陰陽 故曰'猶太極、猶陰陽'者此也.此非混同天人而言之, 故曰'只說得一半也'.'太極生兩儀', 是混同說, 混同說, 則造化本源在理, 故歸重於理, 而曰'太極生兩儀'.'心統性情', 是人身上說, 自人身而言, 則動作運用爲主, 故歸重於心, 而曰'心統性情'."【答羅致文書】
又曰: "氣之精爽, 故能具衆理, 以理具理, 如以目視目."【答崔元則書】
華西曰: "'無極而太極', 在人謂之本心"【雜識】
又曰: "太極爲萬化萬物之根本主宰, 故斯有心之名矣.若論人極, 則朱子所謂'心爲太極', 政謂此也."【元亨利貞句解後說】
又曰: "此段【論《語類》第五卷第五板心屬火條】明此心此理不舍於肝腎肺脾, 而獨藏於火臟之由, 其故何也? 火是天地間明章、光輝、照燭、發揚之物也, 故許多道理燦然畢具於此云爾.蓋火之光明發動, 亦理也, 以此之故, 具得許多者亦理也.何也? 理與氣無間故也."【答金穉章書, 下同.】
又曰: "【論《語類》第五卷第五板人心上下】旣有肺肝주 13)五臟之心, 又有操舍存亡之心, 有此兩樣, 何也? 彼以氣言, 此以理言故也.神明屬理之說, 非一非再, 如《孟子․盡心》章集註, 旣以人之神明釋'心'字, 章下斷案以心也、性也、天也一理結之.《通書》釋物則不通, 神妙萬物之義, 曰'神屬形而上', 【見小註】 如此類甚多.問'如此則心之理, 乃是形而上否?' 曰'心比性微有迹, 比氣自然又靈', 此二十七字, 字字주 14)有落下.蓋如此之此, 指上文神明不測也, 心之理之心, 指上文五臟之心也.謂如先生所云則神明不測者, 卽方寸所具之理也, 乃是形而上也, 果然如此否乎? 觀此問意, 則認神明爲形而上, 此則然矣, 但和주 15)'性'字一般看了, 無復分別, 此則先生之所深病也.故答之曰'所謂神明不測之心, 比諸性字, 則微有形迹之可言, 不似性體冲漠無朕之云也', 又怕他誤認神明爲氣, 故曰'比氣則自然又靈'.所謂'氣'者, 指人心所乘之機也, 所以寂感動靜者也.比之於此, 則神明者自然, 氣者蠢然也, 又神明者有靈覺, 氣者無靈覺, 此則神與氣之分也."
又曰: "心氣也物也.亶此物此氣上面, 指其德, 則曰'理'也.聖賢所謂'心', 蓋多指此也."
又曰: "孔子曰'形而上者謂之道, 形而下者謂之器', 截斷得上下分明.舜、禹所謂人心道心, 孔子所謂克己復禮, 孟子所謂大體小體, 皆指此而言也.朱子最喜心統性情之語, 統有二義, 統攝與兼統也.若認心爲氣而已, 則氣反統攝乎理矣, 向所謂上下之分, 果安施哉?"
又曰: "心、性、情三者, 語其所主, 則心爲性情之主, 性情爲心之體用, 此皆以理言者也.以形氣言, 則心之所舍火臟也形也, 陰之魄也; 心之所乘精爽也氣也, 陽之魂也.火臟與精爽卽陰陽之器也, 而亦謂之心者, 以其神明所舍所乘也.故亦謂之心,주 16) 若夫神明, 卽指心之當體也, 何可換做陰陽耶?"
又曰: "人心有覺, 指天理之存乎我而言, 一己之活本也; 道體無爲, 指天理之通乎萬物而言, 萬古之公物也."
又曰: "性譬則天下億兆之衆也, 心譬則聖人在君師之位也."
又曰: "心外無性, 性外無心, 心性卽一而已矣.就其中, 欲知心性之分, 則性之主宰謂之心, 心之條理謂之性, 是猶主宰謂之上帝, 流行謂之道之類也.心性旣非二物, 則心之知覺, 卽性之知覺, 性之知覺, 卽心之知覺, 安有各爲二物也?"【心之知覺、性之知覺說.】
按蘆沙之論心, 謂氣血之精神, 該載衆理, 方謂之心.又謂心爲太極者, 以性在其中, 又以性卽太極, 心卽陰陽, 太極生兩儀, 心統性情, 兩下分說, 各有歸宿.終以以理具理, 如以目視目.譏指心爲理者, 此固性屬理、心屬氣之說, 而性爲心源、心當尊性之意, 亦在其中矣.華西之論心, 以太極爲在人之心, 而以朱子之"心爲太極"實之, 則與蘆沙"性在其中"之說異矣.就氣上指其理而曰心, 則與蘆沙"氣載理謂心"之說異矣.以心屬火, 而謂火之光明發動, 亦理也, 故具得許多道理, 此蘆沙所譏以理具理之說也.其餘"道心屬之形上", "心統性情以理言"等說, 亦多有不合.而至於"人心有覺, 指天理之存乎我者", "心外無性, 性外無心", "心之知覺, 卽性之知覺, 性之知覺, 卽心之知覺", "性譬則天下億兆之衆, 心譬則聖人在君師之位"之云, 非惟直指心爲理, 而心性無分, 且顯有尊心卑性之意, 於是乎二丈心說, 不啻一氷一炭也.
蘆沙曰: "理猶水焉, 一泓之內, 斗斛升合之分量, 各各停當.及其分爲斗斛升合, 雖局於匡郭, 不能相通, 若論其本體, 則與一泓之水少無增減.聖人未嘗論一泓之水, 但就斗斛升合中, 使人明著眼力, 著眼旣明, 則一泓之水, 不外此矣.今人斗斛升合, 本無眼力, 但見匡郭之粗, 不見本體之妙.而徑주 17)論一泓之水, 皆謂'上面一段事, 都無準的', 末乃倉卒排成.然則性命係於汲水者之手段, 而非天之所命也."【答趙直敎書】
華西曰: "有一甕水於此, 水一而已矣.或分而注之於鹽, 則爲醎水; 注之於蜜, 則爲甘水, 煎過附子, 則爲熱水; 煎過芒硝, 則爲冷水, 水則一也, 有此醎甘熱冷之不同, 何也? 所乘之器不同也, 故醎水甘水用各不同, 熱水冷水施各不同, 此所謂'率性之道'也.醎甘熱冷, 雖隨其所乘之氣質而不能不異, 而其水則一也.故無論醎水甘水而潤濕則同, 無問熱水冷水而就下則同, 此則本然之水一也.是以本然者雖同, 而所値之氣, 不能不異, 而有萬殊之別, 所乘之氣雖異, 而其本然者則不害爲同, 此所謂異中識其同, 同中識其異也."【人物性同異辨】
按蘆沙之說, 人物性同異, 已具於本然之論也; 華西之說, 人物性同異, 始分於氣質之論也, 此亦相戾矣.
蘆沙曰: "理有動靜之說, 周子《圖說》第一句, 已說盡此事, 而太極則固有動靜, 而曰'無極'則原未嘗有動靜, 故曰'動而無靜, 靜而無動者, 物也; 動而無動, 靜而無靜者, 神也.'"【答李容壽書】
又曰: "理之妙處謂之神, 理而未神, 則是木强一塊矣.《易大傳》'陰陽不測之謂神', 橫渠曰'兩在故不測.' '兩在'者, 旣在陽, 又在陰也, 所謂'在'者, 非理者乎?"【答金景範書】
又曰: "動而無動, 靜而無靜, 曰理, 動則偏於動, 靜則偏於靜者, 氣也."【答宋聖澤書】
又曰: "近世說理說氣, 何其滯也? 大槩以混淪一塊, 無適莫沒主張者爲理.初旣無使之然之妙, 末又非有操縱之方, 寄寓來乘, 做得甚事?"【猥筆】
華西曰: "理雖無爲, 而實爲萬爲之本體, 故周子所謂'太極動而生陽靜而生陰', 朱子所謂'太極便會動靜'之說, 直指本體而已."
又曰: "太極若不能自會動靜, 而陰陽之氣自會動靜, 則所謂太極者, 無實無用之位而已."【太極說】
又曰: "朱子的見太極之性情功效要在'妙'字, 故釋之曰'太極者, 本然之妙'."【妙字說】
又曰: "'神'字指氣而言, 則形而下也, 鬼神之類是也.指理而言, 則形而上也, 妙用之類是也.正以其理氣混融無間之故, 分別言之而曰上曰下, 何可以無間之故, 喚形而上, 作形而下乎?"【答金穉章書】
按此太極自能動靜之論, 則蘆、華二丈同矣.
或問於余曰: "蘆沙、華西二丈之論, 或同或異, 於子何與, 而今子參攷條錄, 以著其同異? 其意奚居?" 余曰: "蘆、華二丈崛起南北, 爲近代儒匠, 兩家門徒, 以其議論之不約而符, 深爲斯文之幸.近得兩家文字, 略綽一覽, 見其心說、明德論、人物性辨, 非惟不相符而已, 乃或相反而不相容.惟太極有能神屬形上之說, 略相似, 其餘小小議論, 非惟不暇細攷.大者旣不盡同, 則小者雖皆相合, 誠無救於各立門戶也, 如之何兩家門徒, 親炙多年, 不察其師立論宗旨之攸在, 强欲牽合而同之也? 夫理氣心性斯道之大主腦, 學問之築底處, 在天之理氣, 在人之心性, 同條共貫, 不是兩事.心性之說, 旣不免相戾矣, 則所謂'理氣說之相同'者, 亦無未保眞同之慮乎? 余故疑而著之, 欲以質諸兩門諸公." 曰: "二丈之見, 旣有相戾, 則必有得失者存乎其間, 而子只錄其同異, 不論其得失者, 何也? " 曰: "學淺見下, 其於孰得孰失, 茫乎難辨, 雖欲論之, 固有所不能爲也.其或據之前言, 契諸管見, 有能略辨其一二者, 以眇然後學, 論巍然先輩, 極涉僭踰, 故又有所不敢爲也." 曰: "否, 不然.疑之當問, 君子之所思也; 學之當講, 聖人之所憂也.吾之立論, 若出於自是己見, 拶逼先輩之意, 誠爲可罪, 如無一毫此意, 而專在於質疑而講學, 則此正所謂'尊畏先賢, 講明道理', 兩得其道者, 奚爲而不可乎?" 余曰: "子之言, 旣如此, 而吾雖無狀, 又實非侮賢者, 則請以瞽見, 略論二丈之於前訓, 孰合孰違, 擧而質諸幷世明者, 可乎? 夫蘆沙之以心屬之氣分, 以明德爲載理之心, 以道心爲非直是理者, 準諸成湯之'以禮制心', 孔子之'心不踰矩', 顔子之'心不違仁', 《大學章句》'明德者, 人之所得乎天, 而虛靈不昧, 以具衆理而應萬事', 《中庸》序文 '道心, 原於性命之正', 實皆符契無所違.反至華西, 則心與明德道心, 俱直謂之理, 此若爲眞諦正見, 則心之於禮矩與仁, 卽殊號而同實, 何須論制與不制, 踰與不踰, 違與不違? 《大學章句》當云明德者, 人之所得乎天而純粹無疵, 以具五常而該萬善也, 《中庸》序文當只云道心者, 性命之正, 而不當下'原於'二字也, 用此推究, 則二說之得失, 槪可見也.若其論性者, 則二丈之論, 俱主人物性同之旨也.但蘆沙斗斛升合, 各當於一泓水之喩, 卽其平生所主偏全之性, 已具於本然之說也.以此準諸《大學或問》'人物必得是理, 以爲健順仁義禮智之性, 物則梏於形氣之偏塞, 而無以充其本體之全', 《中庸或問》'在人在物, 雖有氣禀之異, 而其理則未嘗不同, 鳥獸草木僅得形氣之偏, 而不能有以通貫乎全體', 及二十二章章句'人物之性, 亦我之性, 但以所賦形氣, 不循其則', 則於是有氣質之稱焉, 故《中庸章句》曰'性道雖同, 氣稟或異也.' 今於人物循性自然之地, 遽主氣質而立論, 則其所率之性, 乃氣質不同之性也, 所行之道, 豈得爲日用當行之路乎? 吾故曰'以鹽醎蜜甘附熱硝冷之用各不同, 爲父慈子孝牛耕馬馳各循其路之喩, 則可以喩, 淸濁粹駁有萬不齊之氣質, 則恐遠矣.' 然則二丈人物性同之論, 已服其見之得正, 而又不能無疑於各有一失也." 曰: "二丈之見, 多所相戾, 而其理有能力之說相符者, 何也? 且其論之得失, 果何居? 而其所謂'同'者, 或有未保眞同之慮者, 又何也? " 曰: "太極自動, 理有運用, 華西平生之所力主也, 故其所運用, 固有如右列諸條者矣.但以其人之明德道心, 物之鑑明鍾鳴, 直謂之理者觀之, 其所認以爲理與太極者, 實心也氣也, 宜乎其言之如此也.若蘆沙則屬心於氣分, 而斥明德道心爲理之說, 其於理氣界至, 分截甚明矣, 理有操縱之論, 胡爲而出於斯丈也? 絶可怪也.然吾嘗思之, 而得其說矣.自《易傳》、四子以至周、程、張、朱, 凡太極生儀、理發、性發等語, 不啻諄複.此皆從本源上說, 若指道器當體本色而言, 則天地之造化, 人之知覺運用, 雖極神妙不測, 畢竟氣不同而有異, 《孟子集註》'仁義禮智之粹然者, 豈物之所得以全'之文, 誠不知是合是違也.苟如此論, 則《庸學或問》當云'無以得其本體之全, 不得禀受其全體', 《孟子集註》當云'豈物之所得全禀? 不當下無以充、不能通貫, 豈得以全等字也? 《中庸章句》亦當云'但其分之不同, 已具於本然', 不當云'以形氣而有異'也.蓋此《庸學或問》、《孟子集註》, 同一語意, 不容差殊看.蘆丈之以物豈得全爲人物同五常之證, 以無以充、不能通貫爲五常有偏全之案者, 何也? 是不可曉也.華西之以水之醎甘熱冷爲率性之道, 潤濕就下爲天命之性者, 似乎近矣.但以《中庸或問》所論'在人父子君臣之分, 萬物之知覺運動榮瘁開落'者觀之, 其率性之不同, 在於形氣之偏正, 地位之各殊, 而其所率之性, 未嘗有異也.華丈之所主, 以爲論者乃在所乘氣質之不同.夫氣質者, 萬般不齊, 而當加矯治者也, 故務要變化而從道, 形氣地位, 各有定分, 而不可遷變者也, 故但於其中, 循其自然之理, 而道在是焉.蓋道之隨形與氣而異者, 莫不各有自然當然之則, 發用處, 氣雖用事, 能循其理, 而不違其則, 則天命本體, 不離乎此, 而無間於人物.氣之掩理, 率由之道, 是二氣一心之所爲, 而諸聖賢之訓, 未嘗有以此屬之形上者.惟《通書》'物則不通, 神妙萬物'註, 朱子以'神'字爲形而上之理, 此固華西之所引而爲據者.而蘆沙旣以動而無動靜者神也爲理有動靜之證, 又其自爲立文, 改'神也'二字, 作'曰理'二字, 則其理有能力之論, 恐亦本於朱子此註也.然朱子之以神爲理者, 竊恐謂造化不測上, 見此理之妙用, 若鬼神鳶魚上, 見費隱之云爾, 非直以'神'字, 做冲漠無朕之本體也.苟或然者, 其平生定論道體無爲, 纔有作用, 便是形而下之類, 置之何地耶? 大抵蘆沙之論如此, 而考其本集, 有曰'理非有造作', 有曰'不可言太極有氣力', 有曰'理無爲而氣有爲', 此何嘗全昧於道體無爲之旨而然耶? 但或有一邊議論, 主張'氣'字太過, 不知有上面一段事, 則誠有如蘆沙之所慮者, 故欲矯其枉而反之正, 不覺有過直失中之差.且誤認栗谷'機自爾'之自, 爲獨自之自, 以至《猥筆》之作而極焉.蓋認神爲理者, 蘆、華二丈之所同.然總括二丈平生理氣心性議論, 大旨之見載本集者而參互之, 則華西但知形氣氣質粗迹之氣, 而不知上自有一層精細之氣, 故幷以造化之神妙不測, 人心之靈昭活化, 直謂之理.蘆沙則不然, 旣知形氣之外, 有虛靈神明之心주 18), 亦屬氣分, 又知其上自有所謂'理'者, 則其所認以爲理者, 却不失面目.但看得理爲氣主忒重, 而據《通書》朱註, 爲安且成之地, 恐不可.但以理有能力、神屬形上, 所論所據之相符, 而幷與其所指所認者而同之也, 向吾所謂'或有未保其眞同'者, 正謂此也." 問者曰: "子之言, 似亦有理, 吾將退而思之."
- 주석 6)然
- 底本에는 "就". 《노사집》에 근거하여 수정.
- 주석 7)心字
- 底本에는 없음. 《노사집》에 근거하여 보충.
- 주석 8)則
- 底本에는 없음. 《華西集》에 근거하여 보충.
- 주석 9)復
- 底本에는 없음. 문맥을 살펴 보충.
- 주석 10)言其實則
- 底本에는 "其實". 《蘆沙集》에 근거하여 보충.
- 주석 11)事
- 底本에는 없음. 《蘆沙集》에 근거하여 보충.
- 주석 12)事
- 底本에는 없음. 《蘆沙集》에 근거하여 보충.
- 주석 13)肝
- 底本에는 "肺". 문맥을 살펴 수정.
- 주석 14)字
- 底本에는 없음. 《華西集》에 근거하여 보충.
- 주석 15)和
- 底本에는 "知". 《華西集》에 근거하여 수정.
- 주석 16)故亦謂之心
- 연문(衍文)으로 보여 번역하지 않았다.
- 주석 17)徑
- 底本은 "經". 문맥을 살펴 수정.
- 주석 18)心
- 底本에는 없음. 문맥을 살펴 보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