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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15
  • 잡저(雜著)
  • 김용승의 〈백천재기언〉을 보다 【1935】(觀金容承百千齋記言 【乙亥】)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15 / 잡저(雜著)

자료ID HIKS_Z038_01_B00001_001.015.0001.TXT.0003
김용승의 〈백천재기언〉주 248)을 보다 【1935】
이 글은 "도의가 존재하지 않으면 선생을 바꿀 수 있다."라고 시작하여 "자네주 249) 할아버지가 우암(尤菴)이 되고 난 뒤에야 내가 이윤(尼尹)주 250)이 될 것이네."라고 끝을 맺었다. 그 스승을 배반한 것이 이보다 더할 수는 없다. 너무나 놀랍고 애통하였지만, 이때는 유서가 나오기 전이라 의안(疑案 의심나는 안건)을 변파(辨破)하지 못하여 감정이 격해져 나도 모르게 여기에 이르렀다. 외부 사람으로서 보면 그래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유서가 이미 나와 대의가 밝게 드러나고, 선생도 이미 우암이 되셨다. 그런데도 묘소에 고하는 글에 여전히 '선사'라고 부르지 않고, '문인 소자(門人小子)'라고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학술과 본원마저 극렬하게 배척하였다. 비록 이윤에 귀결되지 않으려 해도 그게 되겠는가? 비록 외부 사람이라도 마땅히 죄를 다스리고 공공연히 배척해야 하거늘, 명색이 간옹(艮翁)의 문인 된 자가 그를 위해 법을 지킨다며 '스승을 배반하지 않았다'고 이르는 자가 있으니 나는 그것이 무슨 의리인지 모르겠다.
"책을 잡고 세 번 뵈었으며 상복(喪服)을 입고 한 번 곡하였다. 정(情)을 말하면 세월이 얼마 안 되고, 이치를 말하면 의혹을 풀지 못하였다. 예컨대 '칠십 명의 제자가 공자에게 심복한 것은 마음을 속인 것이다.'라는 말은 오직 고산(鼓山 임헌회(任憲晦))의 강재(剛齋 송치규(宋穉圭))에게 있어서와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이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에게 있어 서로 비유할 수 있다."주 251)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바로 사우간으로 처우하는 말이다. 선사께서 생전에 듣지 못하였는데 세상을 떠난 뒤에야 비로소 꺼낸 말이다.
정자가 이르기를 "안자(顔子)와 증자(曾子)는 공자에게 비록 참최(斬衰) 3년을 해도 괜찮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자신을 이루어준 스승의 은혜는 자신을 낳아 준 부모와 같음을 말한 것이
다. 김용승이 평소 선사에게 올린 편지에 "소자가 문하에서 망극한 은혜를 입었습니다."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낳아주고 이루어준 은혜 마음 깊은 곳에 깊이 새겼으나 갚을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선사의 은혜가 부모와 같음을 이른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소위 '안자와 증자가 참최를 입은 것'과 어찌 일찍이 다른 점이 있는가? 그런데 지금 갑자기 "칠십 명의 제자가 공자에게 심복한 것은 마음을 속인 것이다."라고 하는가. 그는 이것에 대해 장차 무슨 말로 해명하겠는가.
"문인록에 이름을 넣은 사람이 누구입니까?"라는 말에 대답하여 말하기를 "모든 군자는 겸양하는 자리에 있거늘 어찌 생전에 문인록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는 자기 자신이 일찍이 문인이 된 적이 없다고 말한 것일 뿐만 아니라, 선사의 문인록을 아울러 비방한 것이다. 애통하도다! 선사께서 평소 배우는 자를 가르칠 때 동일한 정성을 보이셨고 차별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스승과 문인의 본분은 대륜(大倫)에 관계되어있다. 그러므로 이미 본분이 정해진 자는 《관선록(觀善錄)》에 이름을 적었다. '문인'이라고 하지 않고 '관선'이라고 한 것이 이미 겸양의 의미니 이것이 어찌 의리(義理)에 해가 되겠는가? 그는 이미 부친의 명(命)을 받들어 집지(執贄)하고 《관선록》에 이름을 올린 지 십 년의 오랜 세월이 지난 것이 명백한데도, 도리어 감히 그런 이이 있었냐고 하며 애초부터 문인록이 있는 줄 몰랐던 것처럼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흑수(黑水 윤휴(尹鑴))가 주자가 영종(寧宗)주 252)을 섬긴 것을 빤히 알면서도 도리어 감히 말하기를 "주자가 어찌 영종을 섬겼을 리가 있겠습니까?"라고 한 것과 똑같은 어법이고 똑같은 심리이다.
아! 김용승은 간옹(艮翁)의 문인이 된 데는 더욱 남다른 점이 있다. 그의 부친 대감(台監) 확재(確齋) 김학수(金鶴洙) 공이 글을 써서 부탁하며 말하기를 "제 자식이 보고 느껴 오랑캐와 금수로 귀결되지 않으면 다행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하늘의 신령함에 힘입어 '난적(亂賊)'이라는 이름을 면할 수 있으면 부자(父子)가 받은 은혜가 크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 얼마나 정중한 말인가. 근래 김용승과 친한 이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예(禮)에 있어 붕우간에도 집지(執贄)의 예를 하는 법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반드시 전해 받은 바와 가리키는 바가 있는 것이니, 더욱 애통하다. 그러므로 나는 "김용승이 스승을 배반한 것은 자기도 모르게 부친의 명을 거역한 것이니, 더욱 애석하다"라고 말한다.
주석 248)백천재기언(百千齋記言)
이 글은 간재의 손자 전일건(田鎰健)이 간재의 죽상(竹床)에 대해 김용승에게 따지러 갔다가 벌어진 언쟁을 사실적으로 기록한 글이다.
주석 249)자네
간재의 손자 전일건(田鎰健)을 말한다.
주석 250)이윤(尼尹)
윤증(尹拯)을 말한다. 윤증은 아버지 윤선거(尹宣擧)의 묘갈명을 생전 친구였던 송시열에게 부탁하였다. 생전의 윤휴를 두둔한 일로 앙금을 갖고 있던 송시열은 병자호란 때 자결한 처를 두고 도망쳐 나온 일을 조문에 적었다. 윤증이 송시열에게 삭제를 요구했으나 들어주지 않자, 윤증은 송시열을 비판하고 사제관계가 끊어졌다. 1669년에 있었던 회니논쟁을 말한다.
주석 251)책을 …… 있다
이 말은 김용승이 〈백천재기언(百千齋記言)〉에서 한 말이다.
주석 252)영종(寧宗)
중국 남송(南宋)의 제4대 황제(1168∼1224)로, 이름은 조확(趙擴)이다. 그의 치세 동안 황후 한(韓)씨의 인척인 한탁주(韓侂胄)가 권력을 잡았고, 금(金)나라에 대한 대규모 북벌을 추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재위 기간은 1194∼1224년이다.
觀金容承百千齋記言 【乙亥】
此文始之以"道義不存, 先生可易. ", 終之以"君祖爲尤翁, 然後吾爲尼尹. " 其爲倍師也, 蔑以加矣. 已極駭痛, 然此時遺書未出, 疑案未破, 氣節所激, 不覺至此. 自外人觀之, 猶有可斟量. 今則遺書已出, 大義昭然, 先生已得爲尤翁矣. 然而告阡之文, 猶不稱"先師", 不稱"門人小子", 甚而至於排斥學術本原而極焉. 雖欲不歸於尼尹, 安可得乎? 雖外人, 猶當執罪公斥, 名爲艮翁門人者, 有爲之護法而謂不倍師者, 吾不知其何義也.
"執書三見, 加麻一哭. 語情日淺, 語理未解. 若曰'七十子之服孔子'是欺心 惟鼓山之於剛齋、梅山之於性潭, 可相喩. " 此正師友間處之之說. 而先師生前所未聞, 而始發於百世後者也. 程子有曰: "顔、曾之於孔子, 雖斬衰三年, 可也. " 此言成身之恩, 與生身同也. 金於平日, 上師門書, 有曰: "小子於門下, 受罔極之恩. ", 又曰: "生成之恩, 刻肺銘肝, 罔知攸報. " 此非謂先師之恩, 同於其父乎? 然則, 與所謂顔、曾斬衰者, 何曾有異? 今忽言"若七十子之服孔子是欺心"? 渠於此, 將何說而解之?
答"託名門人錄者, 誰也"之語, 曰: "有諸君子謙讓之地, 安有生前門人錄乎? " 是則非但言自家不曾爲門人, 幷與先師門人錄, 而譏破之. 痛哉! 先師平日, 敎授學者, 一視其誠, 而無厚薄. 然師生之分, 有關大倫. 故其已定分者, 書名于《觀善錄》. 不云門人, 而云觀善者, 已是謙讓之意, 此何害於義理乎? 渠旣明明奉親命, 執贄入錄, 爲十年之久, 而乃敢曰"有諸? ", 初若不知有門人錄者. 然是猶黑水之明知朱子事寧宗, 而乃敢曰"朱子豈有事寧宗之理"者, 同一語法, 同一心理也.
噫! 金之爲艮翁門人, 尤有異於人者. 其先台監確齋公書以託之曰: "此子能觀感, 而不爲夷獸之歸, 則幸矣. " 又曰: "賴天之靈, 得免亂賊之名, 父子受恩, 顧不大歟? " 此爲何等鄭重語! 近有金所親者, 語人曰: "在禮, 朋友間亦執贄. " 此言必有所受所指, 尤可痛也. 吾故曰: "金之倍師, 不覺至於倍親命, 又可惜也.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