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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14
  • 잡저(雜著)
  • 김세기의 흉악한 글을 보고나서 【1937년】(觀世基凶文 【丁丑】)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14 / 잡저(雜著)

자료ID HIKS_Z038_01_B00001_001.014.0001.TXT.0023
김세기주 69)의 흉악한 글을 보고나서 【1937년】
사람을 보고서 그 큰 것을 논하면 그 나머지 자잘한 행위들은 유추할 수 있으니 비록 논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괜찮다. 나는 글을 보고서 글을 논하는 것도 또한 그렇다고 생각한다.
김세기는 이 글의 벽두에서 나라를 망치게 했다고 낙학(洛學)주 70)을 꾸짖고, 거짓된 학문을 했다고 매옹(梅翁)주 71)을 배척했으며, 선사를 단죄하고 남의 부자(父子) 사이를 어지럽힌 김승지(金承旨)주 72)를 종처럼 섬기며 상전으로 모셨다는 것으로 나의 첫 번째 대죄(大罪)를 삼았다. 그는 또 일찍이 지은 〈우기(偶記)〉에서 말하기를, "선사께서 홍성(洪城)의 김복한(金福漢)과 절교하신 것에 여섯 가지 증거가 있다. 전(田)ㆍ최(崔)ㆍ송(宋)이 이미 편지로 양해하셨다고 말하면서 온갖 수단으로 그를 돕고 보호한 것은 비록 스승을 무함하고 가르침을 배반한 죄명에서 벗어나고자 한 것이지만 그렇게 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의 이 안(案)은 철판과 같은 판정이라 이를 만한 것으로, 오진영이 일찍이 크게 쓰기도 하고 특별하게 쓰기도 하면서 한번만 쓰지 않고 자주 써서 그에게 전해 주었던 것이다. 예컨대 홍성을 갔던 금재(欽齋 최병심(崔秉心))를 단죄하면서 "선사를 배반하고 연원(淵源)을 저버린 전재(全齋 임헌회(任憲晦))의 문인 정윤영(鄭胤永)과 한 쌍이 된다."라고 한 것이 그 하나이다.
그러나 오진영은 훗날 김성장(金聖章)주 73)에게 답한 편지 한 통이 있었는데, "나는 지산 영감과 선대의 정의가 있고, 게다가 시대의 의리에 있어 큰 절개를 지니신 분이기에 일찍이 거센 물결 속의 하나의 지주(砥柱)로 바라보면서 흠모했었네.…… 내가 스스로 헤아려보건대 평소에 절교를 당할 만큼의 죄에 이르지 않은 듯하네. 그래서 지산 영감의 상을 듣고 여러 차례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이 세상에 양류가 없게 된 것이 비통하고, 우리들이 더욱 외롭게 된 것이 가슴 아프네.'라고 하였고, 또 때때로 사람들에게 '김성구(金聖九)주 74)가 가벼이 참소하는 말을 믿고 상을 당했을 때에 부고하지 않았으니, 사람을 부당하게 끊는 것이 이처럼 터무니없네.'……"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즉시 정운한(鄭雲翰)으로 하여금 특별히 김성구에게 전해주도록 하였으니, 자신이 가서 양해를 구한 것과 다름이 없다. 만약 김성구의 양해를 얻어 부고를 보내고 절교하지 않았다면 오진영도 또한 지산의 영전에 가서 절하였음이 틀림없었을 것이다.
지금은 우선 지산과 절교해야 하는지 절교해서는 안 되는지와 선사께서 이미 양해하셨는지 하지 않으셨는지는 논하지 않고, 바로 오진영과 김세기의 말로 도리어 오진영의 죄를 다스리면 나라를 망치게 했다고 낙학을 꾸짖고, 거짓된 학문을 했다고 매옹을 배척했으며, 선사를 단죄하고 남의 부자 사이를 어지럽힌 김승지를 종처럼 섬기며 상전으로 모신 자는 오진영이고, 홍성의 김복한을 돕고 보호함으로써 선사를 무함하고 유훈을 배반한 죄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는 오진영이며, 선사를 배반하고 연원을 저버린 것이 전재의 문인 정윤영과 한 쌍이 되는 자는 오진영이다. 김세기는 이에 대해 어찌하여 오진영을 단죄하고 성토함으로써 온 나라에 널리 알리지 않는 것인가? 연원을 높이고 선사를 지키는 부분에도 또한 친함과 사사로움이 용인될 수 있는 것인가? 만약 "그가 한창 오진영을 스승으로 여겨서 방몽(逄蒙)의 혐의주 75)가 없지 않기 때문에 감히 그렇게 말하지 못할 뿐이다."라고 말한다면 어찌하여 다시는 문하에 이르지 않기를 그의 〈우기) 중에서 논한 "사생(師生)간에는 변례로 대처한다."는 것처럼 하지 않는 것인가? 오진영의 경우에는 감추어서 드러내지 않고 나의 경우에는 죄안(罪案)을 억지로 씌워서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믿어주기를 바란들 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이 글 속의 큰 절박(節拍)주 76)인데 믿을 수가 없으니, 이와 같음이 있다면 그 나머지 허다하게 사람을 무함하는 말은 유추하여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의 부상(父喪)과 모상(母喪)의 선후를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그 사람이 예법이 있는지 예법이 없는지를 알 수 있겠는가. 다른 것들도 모두 이와 유사하다.】 나의 이른바 "글을 보는 것은 사람을 보는 것과 같아서 먼저 그 큰 것을 논하면 나머지는 논하지 않더라도 괜찮다."는 것이 이것이다.
전재 선생의 대비(大碑)는 선사께서 글을 새겨 넣을 때에 여러 문하 사람들과 여러 날 상의하고 교정하여 직접 고친 다음에 열 자 되는 반듯한 빗돌에 크게 써서 큰 길 옆에 우뚝하게 세운 것임을 어느 누가 모르겠으며, 어느 누가 보지 않았겠는가. 그런데도 그는 도리어 "내가 〈진본고변록(晉本考辨錄)〉주 77) 중에서 전재의 비문을 고친 죄를 오진영에게 덮어씌웠다."라고 하면서 눈을 멀게 하고, 입을 도려내며, 팔을 절단해야 한다는 독한 말을 더하였다. 나의 〈진본고변록〉은 내 손으로 완성하여 내 집에 보관해둔 채 아직 인쇄해 배포하지 않았다. 그는 일찍이 본적도 없으면서 이렇게 운운하였으니, 나는 세상의 군자들이 〈진본고변록〉을 고찰하고 이 글을 보지 않은 날에 그가 도리어 눈이 멀고, 입이 도려지며, 팔이 절단되는 형벌을 받게 되더라도 바칠 말이 없을 것임을 알겠다.
〈분언(㤓言)〉주 78) 중의 운운에 대해서 말하면 선사께서는 원래 "친아들이 있음에도 족질(族姪)을 세워 후사로 삼는 것은 벼슬아치 집안에서 마음을 모질게 먹고 도리를 헤치는 관습이다."라고 짓고서, "친자는 서자를 가리킨다.[親子指庶子]"는 다섯 글자의 소주(小註)를 두셨던 것이다. "서자"라 하지 않고 반드시 "친자"라 한 다음에 따로 소주를 달아 놓으신 것은 자신의 아들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아들을 세우는 것이 도리에 해가 됨을 분명히 말하기 위해서이니, 그 의리가 정밀하고, 그 뜻이 깊다 하겠다. 그런데 지금 어찌 감히 다시 다른 설을 받아들여 굳이 오진영이 "친(親)" 자를 "서(庶)" 자로 고치고 소주를 삭제한 것을 옳게 여기고 그의 죄를 숨겨주면서 선사의 정밀한 의리와 깊은 뜻에는 어둡단 말인가? 그의 무리들이 문고를 고치지 않았다고 조목조목 나누어 해명하는 것이 대개 이와 같음에 지나지 않으니, 이것도 또한 그 나머지를 유추할 수 있겠다.
김세기의 글에서 또 "내가 만약 권세를 얻게 된다면 사대부 집안을 반드시 멸하겠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오진영이 이미 진천(鎭川)ㆍ전주(全州)ㆍ진주(晉州)의 경찰서 검사국에서 행하여 선비들을 일망타진하고 선사의 손자까지 묶어 가둔 것이다. 그가 지금 스스로 자신들의 못된 짓을 베끼고 있으니, 어찌 이른바 "자연히 바꿀 수 없는 공론"이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주석 69)김세기(金世基)
오진영의 문인이다.
주석 70)낙학(洛學)
《간재선생문집 후편속(艮齋先生文集後編續)》 권6 〈논인수무분(論人獸無分)〉의 내용에 근거하면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낙론(洛論)을 지지했던 학자들을 가리키는 듯하다. 이 논쟁은 권상하(權尙夏)의 문인 한원진(韓元震)과 이간(李柬) 사이에서 시작되었는데, 이간의 인물성구동론(人物性俱同論)에 동조하는 학자들이 대부분 낙하(落下), 즉 서울 출신이었기 때문에 낙론 또는 낙학이라 부르고, 한원진의 인물성상이론(人物性相異論)에 동조하는 학자들은 대부분 호서(湖西) 출신이었기 때문에 호론(湖論) 또는 호학(湖學)이라 불렀다.
주석 71)매옹(梅翁)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 1776~1852)을 가리키는 듯하다.
주석 72)김승지(金承旨)
김복한(金福漢, 1860~1924)을 가리킨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원오(元五)이며, 호는 지산(志山)이다. 충청남도 홍주 출신이다. 1892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홍문관교리ㆍ사서(司書)를 거쳐 성균관대사성ㆍ형조참의를 역임하였으며 1894년에 승정원승지에 제수되었으나 갑오경장이 시작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리자, 이설(李偰)ㆍ안병찬(安炳瓚) 등과 함께 항일의병을 일으켰고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이듬해에 홍주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영남의 곽종석(郭鍾錫)과 함께 호서 유림을 대표해 전국 유림 137명의 서명을 받아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인 파리장서(巴里長書)를 발송하기도 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주석 73)김성장(金聖章)
김복한의 장자(長子)이다.
주석 74)김성구(金聖九)
김복한의 차자(次子)인 김노동(金魯東)이다.
주석 75)방몽(逄蒙)의 혐의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하(夏)나라 사람인 방몽이 예(羿)에게 활 쏘는 법을 배운 뒤에 천하에 자기보다 나은 자는 오직 스승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스승인 예를 쏘아 죽였다는 고사가 보인다. 이 고사로 인해 제자가 스승을 헤치는 혐의를 비유하는 말로 사용된다.
주석 76)절박(節拍)
음악 내에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절주와 박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문장의 규칙적 진행 과정을 비유한 말이다.
주석 77)진본고변록(晉本考辨錄)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15권에 있다. 간재(艮齋) 전우(田愚)가 계화도에서 직접 편정한 화도본(華島本)과 오진영(吳震泳)이 진주에서 간행한 진주본(晉州本)를 대조하여 진주본의 부당함을 변론한 기록한 것이다.
주석 78)분언(㤓言)
간재가 66세(1906) 되던 해 11월 무성산(武城山)에서 지낼 때 완성한 글로, 심성(心性)ㆍ이기(理氣)ㆍ출처(出處)ㆍ예의(禮義) 등에 대한 단상(斷想)을 여러 해에 걸쳐 기록한 것이다. 《간재선생문집 전편(艮齋先生文集前編)》 권12~권13에 실려 있고, 별편(別編)에도 1조가 수록되어 있다. 《한국문집총간 간재집 해제》
觀世基凶文 【丁丑】
觀人先論其大者, 則其餘細行, 可以類推, 雖不論可也. 余謂觀文論文亦然. 世基此文劈頭, 以奴事爲上典於詬洛學亡國斥梅翁僞學罪先師亂人父子之金承旨, 爲余第一大罪. 渠又嘗於所作〈偶記〉, 謂: "先師絶洪金, 厥有六證, 田崔宋之謂已書解而萬端扶護者, 雖欲免誣師背訓之名得乎?" 渠之此案, 可謂鐵板之定, 而震泳所嘗大書特書不一書而傳授於渠者也. 如罪欽齋之往洪城而曰 "背先師負淵源全門之鄭胤永一對也"者, 其一也. 然而震泳後來有答金聖章書一度, 而曰: "震於志令有先世之誼, 重以時義大節, 嘗視爲洪流一柱而傾向之云云. 若震則自諒平日, 似不至爲見絶之罪, 故聞志令之喪, 屢與人書曰: '痛斯世之無陽, 傷吾輩之益孤.' 時與人語曰: '聖九輕信讒言, 遭喪不赴, 絶人不當, 若是無據.'云云." 卽使鄭雲翰特致於聖九, 無異自達而求其相諒. 若得聖九諒解, 而致赴不絶, 則震也往拜志山之靈必矣. 今姑無論志山之可絶不可絶, 先師之已解與未解, 卽以震世之言, 還治震泳之罪, 則奴事爲上典於詬洛學亡國斥梅翁僞學罪先師亂人父子之金承旨者, 震泳也, 扶護洪金而不得免誣師背訓之名者, 震泳也, 背先師負淵源爲全門鄭胤永之一對者, 震泳也. 世基於此, 何不以罪震而討之, 布告國中也? 尊淵源護先師之地, 亦有親私之可容乎? 若曰: "渠方師震, 不無逄蒙之嫌, 故不敢云爾." 則何不不復踵門, 如渠〈偶記〉中所論"師生處變"者乎? 在震則掩之不彰, 在余則勒加罪案, 而欲人之信渠言, 其可得乎? 此爲此文中大節拍. 而不可信也, 有如此則其餘許多誣人之說, 可類推而知之. 【旣不知其人父喪母喪之先後者, 何以知其人之有禮無禮乎? 他皆類此.】 余所謂"觀文若觀人, 先論其大者, 則餘可不論"者此也. 全齋先生大碑, 先師於入刻時, 與衆門人累日商訂而親改之, 大書十尺之貞珉, 屹立周道之傍, 有誰不知, 有誰不見. 渠乃謂"余〈晉本考辨錄〉中, 勒震以改全碑之罪", 加以目可矐口可抉腕可斷之毒口. 吾之〈考辨〉, 成吾手, 藏吾家, 而不及印布. 渠未嘗見而有此云云. 吾知其世之君子, 考〈考辨〉而無見此書之日, 渠反受矐目抉口斷腕之刑, 而無辭可供也. 至於〈㤓言〉中云云, 先師元作"有親子而立族姪爲嗣者, 是仕官家忍心害理之習." 有小註"親子指庶子"五字. 不曰"庶子", 必曰"親子", 而另懸小註, 所以明言舍己子立他子之爲害理也, 其義精矣, 其意深矣. 今何敢復容他說, 必以震之改"親"爲"庶"刪小註爲是, 而掩蔽其罪, 昧却先師精深之義意乎? 渠輩之分疏不改稿者, 蓋不過如此, 此亦可以類推其餘矣.
世文又謂"余若使得勢, 則衣冠之族必赤矣." 此震泳之已行於鎭川全州晉州之警署檢局, 而網打士類, 縛囚師孫者. 渠今自寫渠輩之凶悖, 豈非所謂"自然不易之公論"歟?